[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대학 시절 ‘민족문화연구회 일과놀이’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왼쪽 첫 번째 줄 안경 쓴 사람이 김정하 활동가. 사진 제공 김정하
대학 시절 ‘민족문화연구회 일과놀이’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왼쪽 첫 번째 줄 안경 쓴 사람이 김정하 활동가. 사진 제공 김정하

- 가장 앞, 가장 밑, 가장 끝

한신대는 운동권 학교로 유명한 곳이었어요. ‘민족문화연구회 일과놀이’라는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마당극, 풍물, 탈춤 같은 걸 하는 곳이었는데 사실은 데모하는 동아리였어요. 열심히 데모하고 동아리 활동하느라 대학을 5년 다녔어요. 쌀 수입이 막 개방된 때여서 식량자주권이 중요한 이슈였고 5.18에 대해 전두환, 노태우의 공소시효가 끝나던 해여서 그 문제로도 싸웠어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아래 한총련)이 아주 큰 대오를 형성해서 싸우던 때였고 정부의 탄압도 극에 달했을 때였어요. 1997년 한총련이 국가보안법에 의한 이적단체로 규정되면서 한총련 소속의 학생회장들은 당선되자마자 자동으로 수배가 됐어요. 국가가 그런 식으로 학생운동을 탄압했던 게 그 1~2년의 일이었는데 운이 나쁘게 내가 그때 딱 걸린 거죠.

1997년에 동아리연합회 회장을 했고 1998년엔 총학생회 부총학생회장을 하느라 1년 넘게 수배 생활을 했어요. 집에도 못 가고 학생회실에서 먹고 자고 싸고 씻고 회의하고 데모하는 생활이 아주 힘들었죠. 총학생회장은 이미 그해 여름에 구속되어서 내가 권한대행을 했어요. 경찰은 몰래 덫을 놔서 호시탐탐 우리를 잡으려고 했어요. 어느 날 수원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학생회장들이 모여 회의를 했어요. 모두 수배자들이었죠. 정보가 새서 경찰들이 급습했고 우리는 급히 차를 타고 도망쳤어요.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까 어느 순간 막다른 길이었고 뒤엔 경찰차가 바짝 뒤따라오고 있었죠. 아, 잡혔구나, 싶었던 순간 운전하던 학생이 부앙- 하면서 후진을 했어요. 영화에 나오는 추격전처럼 경찰차를 긁으면서 그사이를 통과해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어요.

1996년 6월 여름, 동아리 후배들과 학생회실 복도 앞에서. 뒷줄 가운데가 김정하 활동가. 사진 제공 김정하
1996년 6월 여름, 동아리 후배들과 학생회실 복도 앞에서. 뒷줄 가운데가 김정하 활동가. 사진 제공 김정하

총학생회 시절은 너무 고단했어요. 동아리연합회 활동은 그래도 동료들과 어울려 으쌰으쌰 동아리 운영 잘해보자 하는 분위기여서 힘들어도 재밌었는데 총학생회는 달랐어요. 학교 안의 모든 운동세력들이 모인 곳이라 다른 진영들끼리 충돌하고 부딪치며 밤새 논쟁을 하는데, 내가 보기엔 반대를 위한 반대 같은 면도 많아서 그걸 보는 게 너무 괴롭더라고요. 한총련 대표자회의에 가면 전국에서 말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 모인 것 같았어요. 후회를 많이 했어요. 죽도록 하기 싫었는데 선배들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서 한 거라 계속 원망할 대상을 찾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렇다고 잠수를 타는 성격도 못되니까 최선을 다했어요. 어떤 친구가 나를 보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느냐고 물었어요. 그렇게 살다 간 완전히 너 자신이 갈리고 이겨져서 사라져버릴 것 같다고요.

힘들었던 시절 나를 붙들어준 책이 있었어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아래 유가협)에서 낸 『산자여 따르라』는 책이었어요. 민족민주 열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인데, 한 페이지에 열사 한 분씩 사진과 약력이 나오고 그분이 어떻게 돌아가시게 되었는지 배경이 쓰여 있었어요. 누런 종이에 타자를 친 것 같은 글씨체로 적힌 아주 오래된 인쇄본 책이었어요. 힘들 때마다 그 책에서 본 열사들을 생각했어요. 어떤 사람은 목숨을 바쳐서까지도 싸우는데…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죠.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싶었는데 동아리 공용 책이라 그러지 못한 게 지금까지도 아쉬울 정도로 나에겐 큰 힘이 됐어요. 나중에 사회에 나와 운동할 때 인권운동사랑방(아래 사랑방)의 박래군 선배와 친해지게 됐는데 알고 봤더니 그 책이 박래군 선배가 유가협 간사 시절에 만든 책이라고 하더라고요.

1999년 2월, 100일 만에 출소한 날은 졸업식 날 밤이었다. 출소와 졸업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김정하 활동가가 검은색 졸업가운을 입고서 사람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뒤에 걸린 현수막에는 직접 쓴 손글씨로 ‘너무나 당당한 정하 형,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졸업을 축하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사진 제공 김정하
1999년 2월, 100일 만에 출소한 날은 졸업식 날 밤이었다. 출소와 졸업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김정하 활동가가 검은색 졸업가운을 입고서 사람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뒤에 걸린 현수막에는 직접 쓴 손글씨로 ‘너무나 당당한 정하 형,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졸업을 축하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사진 제공 김정하

1998년 12월 무사히 임기를 끝냈어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수배자였죠. 세 가지 길이 있었어요. 조계사에서 한총련 출신 수배자들이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는 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합류하거나, 아니면 학교에 남아 저항하거나,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살거나. 나는 당분간 알바 하면서 숨어 지내다가 봄이 되면 기자회견 하고 스스로 잡혀 들어갈 생각이었어요. 학교를 떠나기로 하고 학교 근처 술집에서 환송회를 했어요. 그런데 그날 우리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경기도 보안수사대 형사들이었더라고요. 그렇게 체포되어서 보안수사대 취조실에 끌려갔어요.

취조실엔 박종철 열사가 죽었던 그 방처럼 정말로 욕조가 있었어요. 넓은 방에 덩그러니 철제 책상과 욕조가 있었고 조명도 일부러 어둡게 해서 공포감을 조성했어요. 다른 조직원을 불라고 하는데 모른다고 하면 형사가 책상을 쾅 내리치면서 때릴 것처럼 위협하다가 나가요. 잠시 후 다른 형사가 들어와서 커피를 내밀어요. 어차피 다른 사람이 다 불었다면서 버텨봤자 의미 없다고 회유를 하죠. 그 사람 나가면 또 센 사람이 들어와서 협박해요. 스물세 살이었으니 안 무서웠다면 거짓말인데 그래도 안 무서워하려고 노력했어요. 무서우면 지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경찰이 신체적 고문을 하던 시대도 아니었고요. 한편으론 아, 이제 끝났구나, 홀가분한 마음도 있었어요. 1년이 넘는 수배 생활도 너무 고단했고 이어질 도피 생활도 막막했으니까요.

100일을 감옥에서 살았어요. 출소했을 때는 1999년 2월 대학 졸업식 날 밤이었어요. 친구들이 현수막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친구들이 가져온 학사모와 졸업가운을 입고 호프집에서 사진을 찍었어요. 저의 대학 생활이 그렇게 끝났죠. 구속까지 되어서 살고 나오니까 ‘이제 나 책임 다 했지?’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학생운동 하면서 갈 수 있는 끝까지 가봤고 가장 밑바닥까지 가봤다는 마음, 할 만큼은 했다는 마음, 이제 정말 마침표를 찍는 기분이었어요. 운동단체에 들어오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는데 “저 운동권 싫어해요” 하고는 안 갔어요. 총학생회 활동을 했던 1년이 저에겐 좀 악몽 같았거든요. 하지만 그 시절마저도 내공이 쌓이는 시간이었겠죠. 그 시절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살고 있을까요?

출소와 졸업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김정하 활동가가 졸업가운을 입고 활짝 웃고 있다. 사진 제공 김정하
출소와 졸업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김정하 활동가가 졸업가운을 입고 활짝 웃고 있다. 사진 제공 김정하

- 지옥문을 열다

1999년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아래 연구소) 가족지원센터에 들어가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어요. 청소년기 중증발달장애인들을 지원하는 기관이었어요. 근처에 특수학교가 있어서 학교를 마친 분들을 센터로 모셔와 낮 동안 보호했어요. 프로그램하고 간식 먹고 쉬었다가 집집마다 모셔다드렸죠. 발달장애인과 관계 맺는 법을 그때 배웠어요. 어떤 분이 자신의 귀를 막 때리고 있다면 어디가 불편한지 알아차려 줘야 하고 화가 났을 땐 다른 사람을 때릴 수 있다는 걸 알고 방지하기 위한 대비도 해야 해요. 재미는 있었는데 내 성격엔 잘 안 맞았어요.

나는 내 감정도 못 알아차리는 둔한 사람이라서 자폐성 장애인의 감정을 민감하게 알아채는 그런 능력이 없더라고요. 어떤 일이 터지면 저 사람 슬프겠다, 위로해야겠다는 마음은 조금이고 저 사람이 위기에 처해있다, 문제가 무엇인가,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자원을 끌어와야 하는가, 그런 게 빠르게 작동하는 사람이었어요. 3년 일하고 인권팀으로 옮겼어요. 차별 상담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의 팔할이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 전화였어요. 그거 못해서 거기에 간 건데(웃음).

2003년 미신고시설 조사 때 찾아간 기도원의 모습. 사진 제공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2003년 미신고시설 조사 때 찾아간 기도원의 모습. 사진 제공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2001년 어떤 특수교사로부터 강원도 정선에 있는 믿음의집에 대한 제보가 들어왔어요. 자기가 가르쳤던 학생이 거기에 보내져서 만나러 갔더니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면서 그 학생만 내보내 밖에서 만나게 했대요. 그런데 그 학생의 몰골이 너무 초췌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것이 알고 싶다’팀이 미리 잠복해서 인권침해 정황을 확인한 뒤 날을 잡고 그 시설로 쳐들어갔어요. 문을 안 열어주니까 힘으로 밀면서 들어갔는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내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참했어요. 한 여성이 마당 기둥에 손이 묶인 채로 앉아 있었어요. 한여름이었는데 청치마 속에 솜바지를 입고 있었고요.

방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쓰러져 있다시피 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방 안에서 누운 채로 오줌을 누니까 옆에 있던 입소자가 방 한 켠에 있던 대걸레로 스윽 닦더니 다시 그 자리에 세워놓았어요. 방바닥엔 커다란 구멍이 있어서 쥐가 왔다 갔다 했어요. 우리는 입소자 한 분 한 분을 만나 그곳 생활에 대해 물었어요. 발달장애 여성이 있었는데 딱 봐도 성적 학대가 의심됐어요. 농사일을 하며 사는 알콜의존증 남성의 수발을 들더라고요. 조사를 끝낸 뒤 서울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현관에 내 신발이 없어져서 한참을 찾았어요. 그 여성분이 자기가 감췄다면서 갖다주시더라고요. 가지 말라는 뜻이었어요. 우리가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니까 자신들을 도와줄 사람이란 걸 아셨던 거예요. 하지만 나는 가야 했어요. 후속처리를 해야 했고 거기에 남을 자신도 없었어요. 그분들을 남겨두고 돌아오는 그 심정이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같은 해에 장애인이 모여 살던 비닐하우스에 불이 나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러자 정부는 ‘미신고시설 종합관리대책’이란 걸 발표했죠. ‘선량한 목사’가 가족들이 버린 장애인들을 데리고 살다가 사고가 났으니 이들에게 돈을 줘서 조건을 갖추게 한 뒤 2005년에 신고시설로 전환시키겠다는 양성화 정책이었어요. 아주 문제적인 정책이었어요. 시설마다 건축비를 최대 4억까지 주었어요. 정부예산이 아니라 복권 기금, 한화그룹 같은 데에서 1,100억을 만들어서 준 거였어요. 장애인 5명만 데리고 있으면 정부가 4억을 준다는 소문이 나니까 처음엔 300개였던 시설이 나중에는 1,200개까지 늘어났어요. ‘비닐하우스에서 사람이 죽으면 안 된다. 정부의 무능함이 드러나니까’ 딱 그런 수준이었죠.

인천의 조건부신고시설의 모습. 방 안에 변기가 있다. 사진 제공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인천의 조건부신고시설의 모습. 방 안에 변기가 있다. 사진 제공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미신고시설에 대한 제보는 계속 이어졌어요. 2003년엔 경기도 양평의 성실정양원에 대한 제보가 들어왔어요. 원장은 안수기도를 한다고 장애인을 묶어 놓고 눈을 누르다가 죽인 적이 있는 사람이었고 다른 가족이 대리 운영을 하고 있었어요. 오빠가 알코올의존증이라면서 상담하러 온 척 답사를 갔어요. 외형적으로 보면 기도원이었는데 입구는 삼중 철문에다 곳곳에 떡대들이 지키고 있었죠.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얼마 후 국회의원과 언론사를 끼고 쳐들어갔어요. 입구에서 떡대들이 나를 확인하자마자 “너 상담하러 왔을 때부터 수상했다”면서 막더라고요. 문 안쪽으로 발부터 딱 집어넣고는 힘으로 밀고 들어갔어요. 200여 명이 갇혀 있었어요. 가족들 간의 재산 분쟁으로 강제로 들어온 사람도 있었고 정신장애인인데 기도의 힘으로 극복해 보겠다고 가족이 넣은 사람도 있었어요.

행정처분이 이루어진 뒤 다시 그곳에 가봤어요. 70명이 남아있었어요. 그들을 감금했던 철문이 열리고 몽둥이 들고 지키는 사람들도 사라졌지만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예요. 가족들이 연락을 끊어버렸거나 연락할 능력조차 없는 사람들이요. 그중에는 그 시설 주방에서 조리사로 일하는 분도 계셨어요. 원래 요식업계에서 일하다 알콜의존증으로 입소했던 분이었어요. 200명의 식사를 만들었으니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지만 나가면 다시 술을 마실까 두려우셨던 것 같아요. 그분이 나한테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만 던지면 끝이냐, 문 열어주면서 이제 너희는 자유다! 나가라! 하면 끝이냐” 하면서 항의를 하셨어요. 나가도 살아갈 방법이 없는 사람은 어쩌냐는 것이었죠. 제 마음이 아주 비참해서 “저희가 잘못 온 걸까요?” 했더니 그분이 가만히 생각하시다가 “그래도 그 호수에 누군가 최초로 돌을 던져주어서 고맙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돌아왔어요. 그분은 거기에 남아 자기처럼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밥을 해주면서 살기로 했다고 하셨어요.

감금에서 풀려나더라도 바깥에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그 자유가 얼마나 허망한지 깨달았어요. 우리는 사랑방,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의 인권단체를 모아서 시설인권연대를 만들고, 시설의 비닐하우스를 벽돌로 바꾸는 데 예산을 주는 게 아니라 당사자들의 전세자금 같은 것으로 직접 지급해야 한다고 요구했어요. 정부는 코웃음을 쳤죠. 그러면서 이 정책은 옥석을 가리는 일이라고, 2005년 이후에 문제가 확인되면 그때 시설을 폐쇄하면 된다고 했어요. 하지만 1,000개 이상의 시설에 이미 수억씩 줬는데 그중 몇 개의 조건이 미흡하다고 폐쇄하겠어요? 결국 정부의 과오가 되는 거니까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죠. 너무나 안타까웠던 건 당시 한창이던 장애인이동권 투쟁은 장애대중의 힘으로 법과 제도를 만들고 있었는데 당사자가 없는 인권단체였던 우리는 그런 힘이 없어서 우리의 요구가 주장에만 머물렀다는 거예요.

강원도 원주 소쩍새마을. 미신고시설 조사를 위해 찾아갔을 당시 사람들은 복도에 쭈그려 앉아 식사하고 있었다. 사진 제공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강원도 원주 소쩍새마을. 미신고시설 조사를 위해 찾아갔을 당시 사람들은 복도에 쭈그려 앉아 식사하고 있었다. 사진 제공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 처분되는 사람들

2005년엔 경기도 안양의 바울선교원에 쳐들어갔어요. 40여 명의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일상적으로 폭력과 성폭행이 자행되었고 원장은 수용인들의 수급비를 갈취했어요. 우리를 보자마자 원장은 곧바로 시설을 빠져나갔고 행동대장인 수용인을 시켜 상황을 보고하게 했어요. 우리는 수용인들을 만나면서 원장이 나타날 때까지 사무실을 지키며 버텼어요. 우리가 떠나는 순간 원장이 돌아와 증거자료를 인멸하려 들 테니까요. 그렇게 밤이 깊었어요.

새벽 4시쯤 ‘불이야’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깜짝 놀라 마당으로 튀어나왔더니 금세 불길이 하늘로 솟구치면서 이글이글 타고 있었어요. 천만다행으로 그날 현장에 의경 네 명이 함께 있었어요. 저를 포함해 활동가들도 4명이 있었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으로 뛰어 들어가 아무나 들쳐 엎고 나왔어요. 마지막 노인을 이불 채로 끌어냈을 때 선교원 건물이 폭삭 주저앉았어요. 불과 15분 만에 모든 것이 전소됐어요. 그제야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울음이 터져 나왔어요. 떨리는 손으로 소방서, 경찰, 언론사 기자들에게 전화를 돌렸어요. 수용인들이 한 남자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불을 냈다고 울부짖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어요.

2005년 경기도 안양의 바울선교원 사건. 모든 것이 전소된 후 남은 것은 금고 하나였다. 소방대원들이 전기톱으로 금고를 열고 있다. 그 안에는 거주인들의 신분증과 도장, 통장이 모아져 있었다. 사진 제공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2005년 경기도 안양의 바울선교원 사건. 모든 것이 전소된 후 남은 것은 금고 하나였다. 소방대원들이 전기톱으로 금고를 열고 있다. 그 안에는 거주인들의 신분증과 도장, 통장이 모아져 있었다. 사진 제공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안양시에서 나와 수용인들을 근처 복지관으로 옮겼어요. 사람들은 복지관 강당에 난민처럼 부려졌어요.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아픈 곳은 없는지,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지, 다른 시설로 가길 원하는지, 수용인 중 누구와 함께 가고 싶은지, 자립을 원하는지,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를 조사해서 안양시에 제출했어요. 하지만 공무원들은 빠르게 이분들을 가족에게 돌려보내거나 다른 시설로 보내는 데에만 급급했어요. 당사자들의 의견은 묵살되었죠. 원장은 구속되고 선교원은 폐쇄됐지만 흩어진 사람들의 삶은 썩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나마 익숙했던 이들과도 떨어져서 외롭디외로운 곳으로 보내지는 거예요. 아마 처분되는 기분일 거예요.

심각한 사건이 터진 곳이면 공무원들에게 행정명령으로 당장 시설을 폐쇄할 것을 요구해요. 우리가 현장에서 빠지면 공무원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현장에서 끝까지 지켜보고 있어야 돼요. 공무원들은 낮 동안 장애인들을 보낼 다른 시설을 알아본 뒤 저녁쯤 되어서 이 시설은 폐쇄됐음을 공식적으로 통보하고 수용인들에게 짐을 챙겨서 나오라고 해요. 수용인분들이 추레한 옷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죄지은 사람들처럼 고개를 숙이고 나오는데 짐이라고 들고 있는 게 검은 봉다리 하나이거나 그것마저 없어요. 공무원들이 장애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OO씨는 △△시설로 갑니다, 이 차 타세요” 하고 뿔뿔이 흩어서 보내요.

그렇게 버스에 타서 어딘지도 모르는 데로 이동해서 낯선 곳에 도착했을 땐 깜깜한 밤이에요. 난민처럼 떠밀려 가는 분들을 따라가서 배웅할 때 죄책감이 너무 커요. 제도가 이거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에 분노감과 자괴감이 들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나 자신을 막 설득해요. 적어도 법인이 운영하는 시설은 계절에 맞는 옷은 입을 수는 있겠지, 적어도 영양사가 짠 식사는 할 수 있겠지, 적어도 수도 시설은 되어 있겠지, 적어도 성폭력 하는 사람은 없겠지, 하면서요. 처음엔 시설장들이 악마처럼 보여서 이글이글 타는 분노로 이리 뛰고 저리 뛰지만 결국 나중엔 이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될 거냐의 문제가 남아요. 빈곤 문제, 장애 문제, 질환 문제가 남는 거죠.

2005년 강원도 인제의 미신고시설 심신수양원에 수용된 할머니. 방은 밖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빨간 통은 변기이며 방 안 가득 악취가 났다. 이후 심신수양원은 폐쇄됐다. 사진 전진호
2005년 강원도 인제의 미신고시설 심신수양원에 수용된 할머니. 방은 밖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빨간 통은 변기이며 방 안 가득 악취가 났다. 이후 심신수양원은 폐쇄됐다. 사진 제공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 현장에 발을 딱 딛고 발바닥에 땀나도록

어떤 세상의 문을 열었는데 너무 막막했어요. 내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해야 내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이게 끝이 있긴 한 건지, 내적 갈등이 깊었어요. 그런데 그즈음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활동가들이 미신고 시설 양성화 정책을 반대하고 있을 때 우리 단체의 대표는 그 정책의 심사위원을 하고 계셨더라고요. 왜 말을 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그걸 왜 말해야 하느냐고 했어요. 너무 화가 나서 책상을 쾅 내려치고 나와 버렸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2005년 연구소를 그만뒀어요. 그 후에도 시설인권연대 간사는 계속했고, 다른 인권단체에 들어가서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당에 묶인 개처럼 인간이 묶여서 살 수도 있구나,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일도 하는구나, 시설에서 본 것들이 너무나 강렬하고 처참해서 벗어날 수가 없더라고요.

그즈음 시설인권연대에서 실무를 함께 나누던 사랑방이 이 일을 더 이상 못하겠다고 통보해왔어요. 사랑방은 국가보안법, 장기수, 감옥 인권 문제 같은 자유권 운동을 해왔는데 이제는 사회권을 강조해야 할 시대가 왔다면서 사회권 운동을 개척하는 데 집중하겠다고 했어요. 지금까지 해오던 일들은 그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조직에 넘기기로 했다며 시설문제는 장애인단체들이 집중해주길 바란다고 했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어요. 할 일도 많고 고민도 태산 같은데 실무의 주축이던 사랑방이, 한국에서 제일 믿을 만한 인권운동조직이 이제 그만하겠다고 하잖아요. 너무 상처를 받아서 사랑방 활동가들 찾아가서 어떻게 우리를 배신할 수 있느냐고 술 먹고 울고불고 깽판을 쳤어요. 지금 생각하면 사과를 해야 할 정도로 심통을 부렸죠. 내가 사랑방 구성원이었으면 나도 그렇게 결정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해했어도 상처는 받았어요.

8월 25일,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촉구하는 지하철 선전전에 참가한 김정하 활동가. ‘중증·발달장애인도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감옥 같은 거주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 살자’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현다혜
8월 25일,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촉구하는 지하철 선전전에 참가한 김정하 활동가. ‘중증·발달장애인도 이동하고 교육받고 노동하며 감옥 같은 거주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 살자’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현다혜

어느 날 연구소의 선배였던 박옥순이 나를 불렀어요. 그 자리엔 다섯 명이 모였는데 다들 연구소에서 활동하다 각자의 이유로 그만두려던 사람들이었어요. 옥순이 너희들 이제 뭘 할 거냐고 물었어요. 누구는 환경운동을 하고 싶다고 했고 누구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고, 누구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막걸리나 한 잔 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옥순에겐 다른 속셈이 있었어요. 옥순은 별명이 ‘태평양’이었어요. 힘들어하는 후배들의 투정을 다 들어주는 사람이었죠. 그날도 옥순은 후배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말했어요. 너희들이 무얼 하자고 해도 내가 다 같이 할 테니 오직 장애인운동판만 떠나지 말아줘.

어느샌가 우리는 술에 취해서 장애인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열변을 토하고 있었어요. 그날 조직 하나가 탄생했죠. 그 봄에 우리는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국 탈시설운동을 중심에 두기로 뜻을 모았어요. 탈시설운동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할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우리가 만난 사람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어요. 이름은 그다음 해에 지었어요.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 우리의 활동은 전문가의 테이블 위에서만 있어서도 안 되고, 허망하게 떠 있는 구호가 되어서도 안 되며, 현장에 발바닥을 딱 딛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죠.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인용하면서 동료가 그 이름을 제안했을 때 그 친구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어요.

지난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행진 도중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들이 발바닥행동을 의미하는 한 발을 크게 내딛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에서부터 박옥순, 이정하, 미소, 김정하 활동가. 사진 강혜민
지난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행진 도중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들이 발바닥행동을 의미하는 한 발을 크게 내딛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에서부터 박옥순, 이정하, 미소, 김정하 활동가. 사진 강혜민

- 나는 왜 여기에 보내졌나요

우리의 첫 활동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사업비를 받은 ‘장애인생활시설 생활인 인권상황 실태조사’였어요. 5천만 원 규모의 아주 큰 프로젝트였어요. 225명의 조사원이 참여했고 22개 시설에 살고 있는 744명의 장애인들을 만났어요. 의욕이 넘쳤고 엄청난 강행군이었죠. 일주일에 전국의 두세 군데 시설을 조사했는데 새벽에 출발해 하루 종일 거주인들을 만나 설문조사를 했어요. 조사원들은 모두 탈시설운동의 소중한 동지가 될 것이었기 때문에 조사를 마치면 아무리 피곤해도 둘러앉아 평가회를 했어요. 그러고 서울로 돌아오면 한밤중이었어요.

우리 조사의 핵심은 거주인 일대일 인터뷰였어요. 사고가 터질 때마다 거주인은 배제하고 운영자와 직원들만 만나는 공무원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싶었어요. 시설장들은 ‘쟤네들이 뭘 안다고 만나요?’ ‘쟤네들은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거짓말을 잘해요’ 하면서 우리를 비웃었어요. 하지만 그 인터뷰가 이 사업의 꽃이었어요. 그분들이 쓰는 표현 하나하나, 눈빛과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 절절하고 거침없고 주옥같았어요. 의사표현이 힘든 분도 많았지만 그런 분들에게도 모두 조사원을 배치하고 대화를 시도했어요.

지난 6월 14일 영등포구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정하 활동가. 사진 현다혜
지난 6월 14일 영등포구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정하 활동가. 사진 현다혜

“낮엔 뭘 하나요?”라는 질문에 “이 벽보고 누워 있다가 저 벽보고 누워 있다가 앉아 있다가 합니다”라고 했고 “호칭 사용은 어떻게 합니까?”하고 물으니 “선생님이 아예 나를 부르지 않아 모릅니다” 했어요. “퇴소하기를 희망합니까?”라는 질문엔 “엄마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때까지 참을 거다”라고 했어요. 모든 말에 가슴이 아팠지만 가장 슬픈 건 자신이 왜 거기에 보내졌는지도 모르고 시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시설에 산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곳 한 곳 조사할 때마다 무겁고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744명의 이야기를 담은 보고서의 결론은 ‘좋은 시설 없다’, ‘인권적인 시설은 없다’였어요. 정부는 2005년까지 예산을 지원해 옥석을 가리겠다고 했지만 조사 결과 시설의 80%가 부적격이라고 평가되었어요. 그러나 정부는 결과와 상관없이 계속 양성화 정책을 진행했어요. 미신고시설들이 정부의 인가를 받아 대거 신고시설로 전환된 거죠. 우리의 조사는 시설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린 성과는 있었지만 미신고시설 양성화 정책을 막지 못했어요. 결국 우리의 활동은 실패한 거예요. 성공한 투쟁을 보면 사회적으로 여론을 환기시킨 후 대중 투쟁을 이어가면서 성과를 만들 때까지 밀고 나가요. 대중 투쟁이란 장애인 당사자들이 싸우는 것인데 시설 문제의 당사자들은 모두 시설에 갇혀있고 발달장애인이 많아서 문제를 제기하기가 어려워요. 시설 비리 투쟁은 애초부터 그런 한계를 갖고 있었어요. 만난 사람은 744명이나 됐지만 이들을 조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어요. 탈시설운동을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 막막했어요. 핸드폰을 가진 사람도 없으니 연락할 수도 없었죠. 조사사업을 끝내면서 우리는 탈시설운동의 구체적 전략을 세워야 할 때라고 생각했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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