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장애인권리협약 반영 안 된 우리나라 탈시설 로드맵
장애계, 인권위 앞 기자회견서 탈시설 정책 권고 촉구
탈시설 장애인들 “인권위가 정부 탈시설 정책 이끌어야”
‘모든 장애인은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살아가야 한다. 정신병원, 특수기숙학교, 재활센터, 그룹홈 같이 ‘돌봄’이나 ‘치료’를 이유로 장애인을 특정 시설에 가둬서는 안 된다. 시설은 그 자체로 폭력이자 인권침해다.’
위 내용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에 명시된 장애인의 탈시설에 대한 기본적 권리다. 한국 사회가 탈시설을 장애인의 ‘선택’이라고 보는 것과 달리, 협약은 탈시설이 장애인의 ‘기본적 권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아래 탈시설연대)는 8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협약에 기반한 탈시설 및 시설폐지 정책을 권고하라고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에 촉구했다.
- 정부 탈시설 로드맵, 사실상 ‘시설 유지’ 다름없다
탈시설은 장애인이 거주시설에서 나와 개인별 주택에서 자립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받으며 지역사회에서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는 2020년 12월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68명이 공동발의한 탈시설지원법안 제2조 5항에 따른 탈시설의 정의다. 단순히 시설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나오는 것을 넘어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권리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탈시설에 관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범이 바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이다. 장애인이 적절한 지원을 받으며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탈시설 권리를 규정하는 협약 제19조에는 ‘모든 장애인은 다른 사람과 동등한 선택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2017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는 협약 제19조를 구체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일반논평 5호’를 발표했다. 그동안 위원회는 장애인을 지역사회에서 격리하는 시설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우리나라의 시설 중심 정책에 꾸준히 우려를 표해 왔다. 일반논평 5호는 ‘지속적으로 시설화를 방지하고, 소규모 거주시설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시설을 폐쇄할 것과 장애인의 지역사회 내 독립적 생활을 지원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규정하고 있다.
올해 9월에는 일반논평 5호를 보완하는 ‘긴급상황을 포함한 탈시설 가이드라인’이 공개됐다. 이는 위원회가 전 세계에서 500명이 넘는 장애인과 시민사회단체를 만나 장애인 거주시설 수용 피해 사례를 조사한 결과다. 위원회는 총 143개 항에 걸쳐 탈시설 정책의 국제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협약 당사국 차원의 시설 수용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앞선 2019년 인권위는 정부에 장애인 탈시설 로드맵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2021년 8월, 정부는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을 발표했다. 신규 시설 설치를 금지하고 인권침해가 한 번이라도 발생한 시설을 즉시 폐쇄하는 등 탈시설 정책을 국가 차원에서 처음으로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탈시설 로드맵은 ‘시설 폐쇄’가 아니라 ‘시설 소규모화’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장애계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탈시설을 ‘권리’가 아닌 ‘선택’의 문제로 보고 자기 결정과 의사 표현이 어려운 최중증장애인을 여전히 시설에 남겨둔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시설 유지’와 다름없다는 게 장애계의 판단이다.
이 같은 정부의 로드맵에 인권위 역시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2021년 10월 인권위는 정부가 인권위 권고를 “일부만 수용했다”고 밝혔다. △탈시설 정책 모니터링 체계 △지방자치단체의 탈시설 계획수립 원칙 및 지침 △노숙인 시설, 정신요양시설 등 다른 유형의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에 대한 탈시설 전략 등이 미비하다는 게 이유였다.
- 탈시설 당사자, 발달장애인 부모도 “인권위, 탈시설 정책 권고 내려달라”
이날 장애계는 협약을 비롯해 유엔이 한국 정부에 권고한 제2·3차 병합보고서 최종견해, 탈시설 가이드라인 등에 기반한 탈시설 정책을 인권위가 정부에 강하게 권고할 것을 촉구했다.
탈시설 발달장애인 당사자인 박경인 탈시설연대 공동위원장은 “자립하고 싶어도 집을 얻지 못하거나 활동지원을 충분히 받을 수 없어 어려운 장애인들이 주변에 많다”며 “인권위는 정부의 탈시설 정책을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의 권리는 ‘시설’이 아니라 ‘자립’에 있다”고 말했다.
탈시설 제도의 초석을 마련한 ‘마로니에 8인’ 중 한 명인 김진수 탈시설연대 공동위원장 역시 “시설에 사는 장애인들은 지금도 인권을 억압 당하며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 인권위는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어도 시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 막다른 길에 내몰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을 위하는 탈시설 정책 권고를 내려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발달장애인 부모인 김수정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장은 “발달장애인 부모들이 시설을 원한다고 하는데,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원 체계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면 어느 부모가 자식을 계속 시설에 가둬 두겠느냐”면서 “인권위는 유엔 협약과 가이드라인을 정부에 강력하게 권고하고, 정부는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 대책을 포함하는 탈시설 정책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실제로 2·3차 병합보고서에 대한 위원회의 최종견해는 인권위 권고보다 훨씬 구체적인 탈시설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가령 인권위 권고는 민관이 참여하는 ‘장애인 탈시설 추진단’을 구성하라는 수준에 그쳤지만, 위원회는 장애인단체와 협의해 탈시설 로드맵을 검토하고, 시설 수용 생존자(시설에 갇힌 장애인)가 참여하는 탈시설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류다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유엔 탈시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정부는 장애 당사자의 의사와 선호를 바탕으로 탈시설 정책을 꾸려야 하고, 장애를 이유로 사람을 구금하는 모든 시설을 탈시설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면서 “인권위는 정부가 위원회 권고와 맥을 같이할 수 있도록 탈시설 정책 권고를 속히 내려달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