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시설 가이드라인 최종본, 지난 9월 공개
시설 폐지, 신규 입소 금지 등 명확히 규정
“시설 수용은 폭력”… 국가 사과와 배·보상 의무도 명시
김미연 부위원장 “혁명적 가이드라인, 국가가 따라야”

지난 6월 21일, 서울시 탈시설조례가 제정됐다. 서울시의회 앞에 있는 한 활동가가 ‘탈시설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명시된 권리이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지난 6월 21일, 서울시 탈시설조례가 제정됐다. 서울시의회 앞에 있는 한 활동가가 ‘탈시설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명시된 권리이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대한민국 정부의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 이행에 대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의 2·3차 최종견해가 지난 9월 5일 채택됐다. 한국 정부가 장애인권을 얼마나 잘 보장하고 있는지에 대해 유엔으로부터 받은 이 성적표는 9월 9일 공개됐다.

위원회는 이날 중요한 문서 하나를 더 공개했다. ‘탈시설 가이드라인’이다. 위원회는 전 세계 7개 지역에서 500명이 넘는 장애인과 시민사회단체를 만나 장애인거주시설 수용 피해 사례를 청취해 탈시설 가이드라인을 작성했다. 그간 탈시설 가이드라인은 개요, 초안 정도만 공개됐다. 완성본이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최한별 한국장애포럼 사무국장은 “한국 정부는 탈시설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심의를 받은 첫 번째 정부”라고 말했다.

위원회는 무려 143개 항을 통해 △시설 수용의 정의 △탈시설 과정 △선택권 △지역사회 지원 △예산 할당 △소득 지원 △자립생활 지원 등 탈시설의 목적과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나아가 시설 수용을 “장애인 폭력”, 시설에 갇힌 장애인을 “시설 수용 피해자”, “시설 수용 생존자”라 칭하며, 당사국(협약을 비준한 국가)이 지금 당장 시설을 폐쇄하고 탈시설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위원회가 당사국을 향해 시설 수용 생존자에게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이에 따른 배·보상 절차를 마련해야 하며,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해 시설 수용의 사회적 해악을 밝히라고 한 점이다. 가이드라인 제작에 참여한 김미연 위원회 부위원장은 “가이드라인을 단순한 지침 수준으로 보면 안 된다.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는 국제법일 뿐만 아니라, 아직도 장애인거주시설을 운영하는 국가에 혁명에 가까운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내용은 지난 3일 오후 4시, 서울시 영등포구 이룸센터에서 열린 탈시설 국제 콘퍼런스에서 다뤄졌다.

김미연 부위원장이 탈시설 콘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김미연 부위원장이 탈시설 콘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 탈시설 가이드라인 만들어진 배경은?

위원회가 탈시설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전 세계에 배포한 지 두 달이 지났다. 그 사이 한국에서는 탈시설과 관련한 가짜뉴스가 쏟아졌다. 가짜뉴스는 국정감사 기간에 국민의힘 의원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콧줄로 식사하는 장애인은 탈시설 대상에서 제외돼야 한다”,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수 없는 무연고 장애인은 상주 의료진이 있는 시설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등 장애인의 기본권 보장은커녕 기초적인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망언을 남발했다.

위원회는 한국처럼 장애인거주시설이 버젓이 용인되는 국가를 겨냥해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위원회는 가이드라인 4~5번을 통해 “국제법에 따른 의무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장애인은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의 시설에 수용되고 있다. 위원회는 탈시설 과정이 협약과 일치하지 않으며 지체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라고 설명한다.

탈시설 권리는 협약 19조와 이를 해설한 일반논평 5호에 자세히 설명돼 있다. 그러나 위원회는 협약, 일반논평으로도 부족해 탈시설 가이드라인까지 만들어, 탈시설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김미연 부위원장은 “협약에 비준한 국가를 심의하다 보니 전 세계적으로 명확한 공통점이 있었다. 장애인을 시설에 모아 배제·분리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긴박한 상황이었다. 여러 국가에 탈시설에 대한 더 상세한 내용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김 부위원장은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였지만, 위원회는 지난 2년간 모든 대륙의 장애인 당사자, 특히 시설 수용 피해자와 장애인권운동가를 만나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협약 제정 16년 만이다”라며 “이 가이드라인은 법률가나 개인 몇 명이 모여 만든 게 아니다. 전 세계에 사는 장애인의 피맺힌 삶의 목소리를 담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4월 20일,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출범식이 열렸다. 활동가들이 “하늘 아래 좋은 시설은 없다. 모든 장애인수용시설을 폐쇄하라!”라는 판넬을 들고 있다. 사진 강혜민
지난 4월 20일,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출범식이 열렸다. 활동가들이 “하늘 아래 좋은 시설은 없다. 모든 장애인수용시설을 폐쇄하라!”라는 판넬을 들고 있다. 사진 강혜민

- “모든 시설 폐지, 신규 입소 금지” 명확히 규정

탈시설 가이드라인 15

장애인 시설 수용은 장애만을 근거로 하거나 “돌봄”이나 “치료” 등 다른 요소와 연결되어 행해지는 모든 구금을 의미한다. 장애 관련 구금은 일반적으로 사회 보호 기관, 정신병원, 장기입원병원, 요양원, 치매병동, 특수기숙학교, 지역사회 기반이 아닌 재활센터, 중간 홈, 그룹홈, 어린이를 위한 가족형 홈, 쉼터 및 보호거주홈, 법의학 정신시설, 전환홈(체험홈), 알비니즘 수용소, 한센인 마을 및 기타 집단 환경들을 포함하며,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관찰, 보살핌, 치료 및/또는 예방적 구금과 같은 목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정신건강시설은 시설 수용의 한 형태이다.

가이드라인 15번에 따르면, 위원회는 모든 형태의 시설에 수용되는 걸 “구금”이라 정의한다. 김 부위원장은 “우리 위원회는 ‘시설이 장애인의 생명을 위협한다’고 판단한다. 구조적으로 집단화된 시설에 사는 것 자체를 폭력이라 본다”고 해설했다.

탈시설 가이드라인 6

시설 수용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인 관행이며 협약 제5조 위반이다. 장애인 법적 행위능력의 실질적 거부로 제12조 위반이기도 하다. 제14조에 반하여 손상에 근거한 구금 및 자유의 박탈에 해당하여 제14조 위반이기도 하다. 당사국은 시설 수용을 장애인 폭력의 한 형태로 인정해야 한다. 진정제, 안정제, 전기치료 및 전환요법 같은 향정신성약물을 사용하여 장애인을 강제적 의료 개입에 처하게 함으로써 제15조, 16조, 17조를 위반한다. 시설 수용은 장애인을 자유롭고 사전 고지된 동의 없이 약물과 기타 개입에 노출시키며, 이는 제15조, 25조 위반이다.

또한 위원회는 시설 수용 자체가 협약의 많은 조항을 위반한 것이라 설명한다. 가이드라인 6번에서는 시설 수용이 위반하는 협약 조항을 하나하나 나열한다. 김 부위원장은 협약 12조(법 앞의 동등한 인정) 위반에 관해 부연 설명했다. 그는 “대부분의 장애인은 누군가 그의 법적 능력을 대리해서 시설에 수용시켰다. 시설 수용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이 살고 싶은 시설의 환경과 조건을 골라 선택한 사람은 거의 없다.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은 자기선택권을 박탈당한 것”이라며 “장애인이 시설 수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는 협약 12조 위반”이라고 강조했다.

탈시설 가이드라인 8

당사국은 모든 형태의 시설 수용을 폐지하고, 시설 신규 입소를 금지해야 하며, 시설에 대한 투자를 막아야 한다. 시설 수용이 장애인의 보호 조치 혹은 “선택”으로 고려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협약 제19조 이행은 공공 보건 긴급상황을 포함한 위기 상황에서도 중단될 수 없다.

더불어 위원회는 시설 폐지를 천명했다. 신규 입소 금지와 시설에 대한 투자까지 막아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현재 시범사업이 진행 중인 한국의 탈시설로드맵에는 신규 입소 금지에 관한 내용이 없다. 또한 윤석열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에서 탈시설로드맵 시범사업에는 48억 원을 편성한 반면 장애인거주시설에는 6290억 원을 편성했다. 탈시설 예산의 131배에 달하는 예산을 시설에 퍼부은 것이다.

김 위원장은 “가이드라인은 모든 형태의 시설 수용을 폐지하라고 제시한다. 국가 상황에 따라 폐지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는 둥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내비친 문장은 단 한 줄도 없다. 시설 폐지가 명확하다”고 말했다. 또한 “폐지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신규 입소 금지다. 시설을 유지하기 위한 예산이 투입되는 이상, 시설 신규 입소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시설에 예산을 투입하는 건 탈시설을 전혀 안 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설 신규 입소를 금지했을 때, 돌봄의 책임을 가족만 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가족은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방법이 없으니 장애인을 시설에 입소시킨다. 위원회는 국가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판단하며, 시설 신규 입소를 즉각적으로 막기 위해 국가의 협약 이행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김기룡 교수가 발제 중이다. 사진 하민지
김기룡 교수가 발제 중이다. 사진 하민지

- 시설은 국가 폭력, 국가가 사과하고 배·보상해야

탈시설 가이드라인 119

당사국은 시설 수용을 경험한 장애인을 대표하는 모든 단체와 협상하고, 시설 수용 생존자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하며, (중략) 당사국은 시설수용의 결과로 경험하는 고통과 어려움 및 이에 따른 피해를 보상하는 수준에서 시설 수용 생존자들에게 자동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

 

탈시설 가이드라인 121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하여 모든 종류의 시설 수용이 과거와 현재의 생존자에게 미치는 모든 종류의 위해에 대한 공공인식을 조사 및 증진하고, 장애인의 시설 수용 제도를 유지한 역사적 정책에 내재된 사회적 해악을 이야기해야 한다.

김 위원장은 탈시설 가이드라인에서 중요하게 요구하는 것 중 하나가 국가의 사과와 배·보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위원회는 장애인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설에 갇힌 것을 구금, 국가 폭력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국가가 시설 수용 생존자에게 배·보상해야 하고, 이를 위한 법적 근거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룡 중부대학교 중등특수교육학과 교수는 “배·보상은 재정적 보상을 넘어 충분하게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선 관련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 위원장은 한국 정부가 탈시설 가이드라인을 번역해 모든 장애인에게 배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탈시설 가이드라인은 탈시설을 하느냐, 마느냐의 논의가 아니라 탈시설을 위해서 국가가 지금 당장 논의를 시작하라는 것”이라며 “이 가이드라인을 국가 차원에서 번역해 책임자들부터 공부해야 한다. 또한 전국의 장애인 누구나 가이드라인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