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후퇴하는 탈시설 정책
장애계, 탈시설가이드라인 적용 이행지표 개발
모의적용해 보니 국내 이행률 0%
복지부는 무관심으로 일관, 유엔협약 왜곡하기도

정부와 서울시가 ‘장애인거주시설에 살 권리’, ‘시설 선택권’ 등을 언급하며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을 위반하는 가운데, 탈시설가이드라인을 국내에 적용할 이행지표가 개발됐다. 정부가 탈시설가이드라인을 잘 준수하고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 일종의 체크리스트를 개발한 것이다.

김기룡 중부대학교 중등특수교육과 교수는 지난달 31일 오후 2시, 서울시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유엔 탈시설가이드라인 국내적용 방안을 위한 토론회’에서 연구를 통해 개발한 이행지표를 공개했다. 연구에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의 김정하·이정하 활동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의 연윤실·정다운 활동가, 최한별 한국장애포럼 사무국장이 참여했다.

이행지표를 국내 탈시설 정책에 모의적용해 본 결과, 이행률은 0%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정부가 탈시설가이드라인을 전혀 지키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연구팀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정부에 11개 정책과제를 제안했다.

토론회 현장. 참가자들이 책상에 앉아 있다. 사진 하민지
토론회 현장. 참가자들이 책상에 앉아 있다. 사진 하민지

- 탈시설가이드라인, 어떤 타협점도 없는 대원칙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는 지난해 9월, 탈시설가이드라인을 공개했다. 이는 협약 14조(장애인의 자유 및 안전할 권리)와 19조(장애인 자립생활 및 지역사회 참여)에 관한 일반논평 5호를 보충하기 위해 제정됐다.

탈시설가이드라인이 제정된 배경에는 코로나19 대유행이 있다. 2020년 4월 20일, 민간단체가 자발적으로 결성한 ‘코로나19 장애인권 모니터링 협의체’는 각국에서 장애인을 어떻게 지원하고 있는지 조사했다. 조사보고서는 “전 세계 모든 정부가 장애인, 특히 시설 거주인을 코로나19로부터 보호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스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시설이 봉쇄됐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외부에서 전혀 모니터링 할 수 없었다. 벨기에는 시설 거주인의 외부인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아일랜드에서는 코로나19 사망자 중 69%가 시설 거주인이었다. 이에 따라, 코로나19를 통해 드러난 시설의 위험성과 시설사회에 대한 전 사회적 문제제기가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위원회는 민간단체의 모니터링 결과에 호응하며 2020년 9월, 제23차 회의에서 탈시설가이드라인 제정을 결의하게 된다. 전 세계 장애계의 의견을 취합하기 위해 아프리카, 아시아·태평양 등 7개 권역으로 나눠 온라인 간담회를 진행했다. 6개월간 진행된 간담회에는 141개 국가의 462개 단체가 참여했다. 이를 통해 245개의 서면·영상 의견서가 유엔에 제출됐다.

이처럼 전 세계 장애인권단체, 장애인 당사자 등 시민사회의 의견을 취합한 결과, 위원회는 2021년 9월에 탈시설가이드라인 초안을 채택할 수 있었다. 초안에 대해서도 장애인 당사자의 피드백을 받았다. 각국 117개 단체에서 초안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렇듯 약 2년간의 노력 끝에 지난해 9월 9일, 탈시설가이드라인 최종안이 채택됐다.

김기룡 교수는 “탈시설가이드라인은 소수의 전문가 혹은 정부 관계자가 모여서 만든 지침이 아니다. 세계 곳곳 장애인 당사자의 의견을 반영해 ‘상향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또한 “위원회는 일반논평 5호에 이어 탈시설가이드라인까지 채택하면서 탈시설과 지역사회 자립생활이 협약의 핵심적 원칙임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권재현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사무차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권재현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사무차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권재현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사무차장은 “탈시설가이드라인은 시설이 주거 선택지 중 하나라는 점을 아예 일축하고 있다. 어떤 타협점도 없다. 국제적으로 합의된 인권 기준이므로, (탈시설가이드라인이 가지는) 위상에 대해 모두가 숙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 사무차장은 또 “(탈시설)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토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탈시설가이드라인이라는) 원칙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원칙을 향해 가는 방법, 속도, 순서 등을 논의해야 할 차례”라고 말했다.

- 탈시설가이드라인 이행지표 적용해 보니, 국내 이행률 0%

탈시설가이드라인은 12개의 챕터와 143개 단락으로 구성돼 있다. 이를 그대로 국내 정책에 적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중복되는 내용이 있고, 국내 현실에 곧바로 도입하기 어려워 중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내용도 있기 때문이다.

김기룡 교수는 “탈시설가이드라인을 분석해 국내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내용을 추출하고, 장황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이행지표를 만들었다. 국내 탈시설 정책을 평가하고, 개선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 근거로 활용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연구팀은 단순한 현황 또는 문제를 보여주는 단락, 탈시설에 관한 일반적 원칙이나 방향을 제시한 단락, 다른 단락과 유사한 내용의 단락은 이행지표 개발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를테면 7번 단락 “시설수용은 장애인의 자립생활과 지역사회에 참여할 권리를 침해한다”는 제외됐다.  유사한 내용의 단락이 있는 데다가 일반적인 원칙을 제시한 단락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114개 단락이 추려졌다.

연구팀은 114개 단락의 이행 수준을 평가할 지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예를 들어 8번 단락을  평가하기 위해 총 5개의 지표를 개발했다.

8. 당사국은 모든 형태의 시설수용을 폐지하고, 시설 신규 입소를 금지해야 하며, 시설에 대한 투자를 막아야 한다. 시설수용이 장애인의 보호 조치 혹은 ‘선택’으로 고려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협약 제19조 이행은 공공 보건 긴급상황을 포함한 위기 상황에서도 중단될 수 없다.

시설수용 폐지 시행과 관련해, 정책 또는 법령에 내용이 있으면 ‘이행’, 계획이 있으면 ‘부분 이행’, 계획도 없으면 ‘미이행’으로 한다. 시설 투자 금지의 경우 ‘거주시설에 대한 예산 지원 금지’로 변경했다. ‘거주시설 지원 예산’을 ‘중앙정부 장애인복지예산’으로 나눈 값에 100을 곱해, 장애인복지예산 중 거주시설 예산의 비율을 따져 평가한다.

이렇게 마련된 이행지표는 당장 시행 가능하고 적용해야 할 지표 157개, 중장기적 지표 34개 등 총 191개가 개발됐다. 연구팀이 191개 이행지표로 국내 탈시설 정책을 모의적용한 결과, ‘이행’ 평가를 받은 정책은 0개였다. ‘미이행’은 80.6%(154개 지표), ‘부분 이행’은 14.1%(27개 지표)로 나타났다. 나머지 10개 지표는 연구팀이 확보한 자료만으로는 측정할 수 없었다.

김기룡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김기룡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김 교수는 “좀 더 검토를 거쳐야겠지만, 이 이행지표를 가지고 현재 한국에서 탈시설이 얼마나 잘 진행되고 있는지 모니터링 용도로 쓸 수 있으며 탈시설 정책을 개선하기 위한 지표로도 활용할 수 있다. 이행지표 적용 결과를 가지고 다른 나라와 비교도 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정부에 11개 정책 과제를 제안했다. △현행 시설에 대한 폐쇄절차 마련 △장애인 요구에 기반한 개별화된 자립적 생활지원체계 구축 △탈시설 인식개선 및 교육 실시 △탈시설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지지체계 구축 △성년후견제 폐지하고 이를 대신할 의사결정 지원체계 구축 △탈시설 추진 과정에서 장애인단체와의 협의체계 마련 △탈시설장애인의 가족 지원 △가정생활 보장에 기반한 시설 거주 장애아동 지원체계 구축 △장애노인에 대한 시설화 지양 대책 마련 △탈시설 추진을 위한 강력한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 △국가가 시설수용 장애인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책임 있는 배·보상 실시 등이다.

현재 윤석열 정부는 탈시설 정책에서 ‘탈시설’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삭제하는 중이다. 지난달 9일 확정된 제6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아래 6차 종합계획)에서는 ‘주거결정권’이라는 이름으로 시설을 주거 선택지의 하나로 인정했다. 김 교수는 “현재 탈시설 정책은 아주 제한적이고 소극적이며 비겁한 정책이다. 이제는 탈시설가이드라인에 기반해 (탈시설지원법을 제정하고) 법에 의해 탈시설 정책이 추진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명현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과 자립지원팀장이 발언 중이다. 사진 하민지
정명현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과 자립지원팀장이 발언 중이다. 사진 하민지

- 탈시설가이드라인도, 이행지표도 관심 없는 복지부… 협약 왜곡까지

탈시설가이드라인과 시민사회에서 개발한 이행지표에 관해, 정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정명현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과 자립지원팀장은 이미 발표된 탈시설로드맵과 6차 종합계획을 반복해 설명하는 데 그쳤다.

정명현 팀장의 발언이 끝난 후, 장애인거주시설이용자부모회에서 온 시민 두 명이 발언했다. 자신을 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라고 소개한 한 시민은 “좋은 시설을 원하지도 않는다. 시설 기능 보강 사업비라도 확보해서 잘 살게 해 달라. 무조건 탈시설시키는 건 답이 아니다”라며 “24시간 돌봄을 위해 (전장연에서) 많은 예산을 요청하는데, 그 많은 예산이 국민의 세금이란 걸 국민이 알면 얼마나 (부정적으로) 호응(반응)하겠나”라고 말했다.

중증 발달장애자녀를 둔 민경애 씨는 “(내 아이는) 아직 거주시설에 들어가지 못했다. 내가 70살이 넘었고 아이가 40(살)이 넘었는데도 받아주는 데가 없다. 우리 아이는 아무 표현을 못 한다. 자폐아가 어떤 아이들인지 다들 아실 거다. 우리 아이는 절대 자립할 수 없다”며 “정명현 팀장님께 간곡하게 말씀드린다. 제발 신규 시설을 설치해 달라. 활동지원사와 시설에 있는 (사회)복지사 선생님은 차원이 다르다. 복지사 선생님은 아이들을 정말 잘 케어해 주신다. 나와 남편이 죽기 전에 제발…”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두 어머니가 시설에 가지는 기대는 현실과 다르다. 지역사회에서 장애인과 활동지원사가 일대일로 매칭되는 활동지원서비스와 달리 시설에서는 한 명의 직원이 여러 명의 장애인을 관리한다.

탈시설당사자로 사례발표 한 공선진 씨(제일 왼쪽)와 안태훈 씨(가운데) 부부. 사진 하민지
탈시설당사자로 사례발표 한 공선진 씨(제일 왼쪽)와 안태훈 씨(가운데) 부부. 사진 하민지

수십 명에서 수백 명까지 관리하는 집단수용시설의 특성상 인권침해도 빈번히 일어난다. 이날 토론회에서 탈시설당사자로 증언한 공선진 씨(28세, 여성)는 “소변 실수하면 남자애들 보는 앞에서 기저귀를 채웠다. 너무 수치스러웠다. 시설은 그냥 감옥이다. 애초에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두 어머니는 탈시설을 시설 밖으로 내쫓는 것으로 오해한 듯 보였다. 그러나 현재 장애계가 주장하는 탈시설은 정부가 비준한 협약에 따라 주거부터 일상생활 지원까지, 촘촘한 서비스를 지원할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발달장애자녀의 돌봄 책임을 오롯이 지고 있는 두 어머니에게 탈시설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할 책임이 있음에도, 이날 또 한 번 협약 19조를 왜곡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정 팀장은 “‘자신의 주거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이 부분에 어머님들이 말씀하시는 시설 이용과 탈시설에 대한 내용까지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19조에서 말하는 주거지는 지역사회이며 시설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에 김남희 변호사는 “탈시설가이드라인에선 ‘시설은 선택지에 없다’는 내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정 팀장의 이야기는 협약, 탈시설가이드라인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기룡 교수는 크게 분노했다. 김 교수는 “서울시와 마찬가지로 정 팀장도 19조를 굉장히 왜곡했다. 그 조항은 시설 수용을 종식하라는 의미다. 그걸 자꾸 다르게 해석하니까 위원회가 탈시설가이드라인을 제정한 것이다. 시설은 주거 선택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정부가 더는 왜곡하지 말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또 “시설에서 사는 것보다는 지역사회 내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서비스를 받으며 의미 있게 사는 걸 모두가 원하고 계실 거다. 정부가 지역사회에 기반을 만들어 놓지 않았으니 (두 어머니가) 시설이 필요하다고 하신 것”이라며 “이젠 가족이 책임지는 게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탈시설로드맵에 맞춤형 서비스 지원을 포함해 온전한 탈시설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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