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3일 262일 차 혜화역 지하철 선전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들은 2021년 12월 6일부터 혜화역 승강장 5-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면)에서 장애인권리예산·입법 쟁취를 위한 선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장연은 지난해 47차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진행하고, 141일 동안(3월 30일~12월 1일) 177명의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장애인권리예산은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국회에서는 고작 1.1%만 증액됐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 증액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전장연은 올해 1월 2일, 48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교통공사·서울시의 ‘무정차’ 대응으로 지하철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장애인 권리를 무정차하는 정부를 규탄하며 전장연은 매일 아침 8시, 혜화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에게 권리예산과 입법을 알리는 선전전을 합니다. 비마이너는 꾸준한 매일의 투쟁을 꾸준하게 기록하고자 합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어제와 오늘을 사진과 글로 전합니다.
“오늘도 많은 분이 나오셔서 든든하고, 외롭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울 힘이 생깁니다.” 13일 오전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의 발언으로 시작된 선전전의 열기가 뜨겁다. 참여자 20여 명은 연대와 지지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손뼉을 치고 피켓을 흔들며 환호한다. 수어를 사용하는 한 활동가는 두 팔을 위로 흔들어 보이며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보낸다.
8시 5분, 안나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가 직접 그린 지하철 그림을 박경석 대표에게 들어 보인다. 그림에는 이동권, 노동권, 교육권, 탈시설 권리를 실은 파란색 열차가 ‘장애해방역’으로 향하고 있다. 안나 활동가가 맞은편에 있는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에게 말한다. “장애해방이라는 바람을 담아 아침에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마음 같아선 김상범 서울교통공사 사장에게 드리고 싶지만, 오시지 않으니 사장이라 생각하고 이형숙 회장님에게 드리겠습니다.”
8시 12분, ‘더딘밴드’가 등장한다. 장애, 노동, 청소년 등 다양한 의제에서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들이 모여 결성한 밴드다. 보컬을 맡은 피아 청소년인권활동가가 말한다. “더디고 서툴고 느린 것이 더 많은 사람을 초대할 수 있음을 압니다. 저희는 더딘밴드이지만 전장연의 투쟁은 더디지 않아야 합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장애인의 22년 외침에 응답하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8시 20분, 더딘밴드가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 주제가 ‘치키치키 차카차카’에 이어 ‘장애인차별철폐투쟁가’를 연주한다. 장애인·비장애인 활동가와 선전전에 함께한 시민들이 스마트폰 카메라로 공연 영상을 촬영한다. 5-3칸 승강장 양옆으로 서울교통공사 보안관 3명은 허공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다. 조끼 가슴께에 명찰이 보이지 않는다.
8시 28분, 박경석 대표가 독일 나치의 ‘T4 작전’을 언급하며 기획재정부를 비판한다. “여기 지하철이라는 장소도 상징적이지만 저희가 하는 이야기의 본질은 ‘한국판 T4’에 있습니다. T4는 1939년 독일의 히틀러가 장애인 수십만 명을 생체실험한 사건입니다. 전쟁 기간 비용을 이유로 장애인을 집단 학살한 그 방식은 유대인 600만 명이 가스실에서 희생된 홀로코스트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지난해 장애인권리예산 요구안을 0.8%만 반영한 기획재정부의 논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저희는 비용의 문제, 속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겁니다.”
전장연은 오는 19일까지 오 시장과 면담이 성사되지 않으면 20일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를 재개한다고 밝힌 바 있다. 오 시장은 앞서 9일 다른 장애인단체들과 만나 “(전장연이) 전체 장애인의 입장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고 만날 것”이라고 했다.
8시 33분, 박경석 대표가 말한다. “다른 장애인단체를 부르는 방식으로는 만나지 않겠습니다. 서울시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기재부도 불러 장애인권리예산 반영을 함께 논의해야 합니다.”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린 탓에 승강장 구석구석에 장우산 여러 개가 보인다. 검은색 스크린도어와 공사 보안관들 사이로 알록달록한 손팻말과 사람들의 옷차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노란 우비를 두른 장애인 활동가, 빨간 맨투맨을 입은 비장애인 활동가, 분홍 머리로 염색한 인권단체 활동가가 승강장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다.
8시 38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과 함께 선전전을 찾은 채윤 문화예술 노동자가 말한다. “저희는 여름방학, 겨울방학마다 정기투쟁 사업장을 돌아다니며 싸우는 이들과 연대하고 있습니다. 전장연 이동권 시위를 둘러싼 논의가 사회적으로 굉장히 활발한데요, 전국 각지에서 투쟁 성금을 모아주셨습니다. 장애인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질 때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성금을 받아 든 이형숙 회장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8시 47분, 선전전에 참여한 대학생 장세현(26) 씨가 말한다. “서울시장이 사적인 공간에서 장애인단체들 불러 간담회 한 건 20~30개씩 기사가 달리는데, 오늘 같은 선전전은 기사로 많이 안 나오더라고요. 더 많은 사람이 이 선전전을 편하게 느끼고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장애해방역에 닿을 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9시 정각, 백선영 전국장애인부모연대 활동가가 마무리 발언을 한다. “오늘 교사들도 많이 오셨는데요. 교육 현장에 장애학생이 얼마나 있는지, 어떤 교육적 요구가 있는지, 통합교육은 잘 이뤄지고 있는지 같이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발달장애인은 학교든 지하철이든 공적 공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이 이동권 투쟁은 저에게 너무나 큰 활력이자 삶의 동력입니다. 장애인이 전철을 탈까 봐 승강장을 막고 있는 보안관들과도 이러한 마음을 나누고 싶어요. 장애인이 지하철에 탈 수 있는 매뉴얼을 함께 고민해주세요.”
앞서 전장연은 용산 대통령실과 가장 가까운 삼각지역을 ‘대통령실역’으로 명명하고 지하철 4호선에서만 선전전과 시위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혜화역은 이날 전장연에 마음을 보탠 시민들의 함성과 함께 ‘장애해방역’으로 불렸다. 이형숙 회장이 외친다. “장애인을 시민으로 간주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꼭 바뀌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단지 시민으로서 살아갈 권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외칩시다. 장애인에게 권리를! 동정은 집어치워! 혐오는 쓰레기통에! 차별은 이제 그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