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태현의 장애와 경계적 사유
디즈니 애니메이션 〈위시〉와 탈시설 서사

디즈니 애니 〈위시(Wish)〉 포스터. 
디즈니 애니 〈위시(Wish)〉 포스터. 

2023년 겨울, 미국의 영화사 디즈니는 100주년 기념작으로 〈위시(Wish)〉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떠나서, 이 애니메이션에 담겨 있는 ‘소원을 이뤄주는 좋은 왕’에 대한 원형적 이야기는 시설에 대한 비판적 서사로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 탈시설 운동과 정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영이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작품 속의 이야기와 상징들에서 시설을 둘러싼 맥락과 상황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될 것이다(이하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들어가 있다).

이 작품에는 가족을 잃고 지중해의 외딴섬에 흘러 들어간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마법을 통해 다른 사람의 소원을 이뤄주는 능력으로 점점 알려졌고, 그 섬에는 소원을 이루고 싶은 사람들이 계속 이주해 왔다. 어느새 그는 왕이 되고, 왕국은 소원을 이룬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들어오면서 성장한다.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이던 그 왕국에서 왕의 마법 견습생이 되고자 찾아온 주인공 아샤가 왕의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된다. 왕은 사람들의 소원이 담긴 구슬을 관리하고(“쟁여놓고”) 있고, 모두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누구의 소원을 들어줄지는 오로지 왕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 주인공 아샤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며 저항을 시도하고 왕은 아샤와 주민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폭주한다.

언뜻 이 작품은 흔히 접할 수 있는 독재적인 혹은 기만적인 리더에 대한 이야기로 보인다. 악역을 맡은 왕 매그니피코에게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개인적 상실의 경험과 그러한 상실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동기가 있다. 냉정한 관리주의적 행태를 보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일구어낸 왕국 로사스의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에 기인한다.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자 한 인간으로서 배신감을 느낀다. 자신의 삶을 희생으로 틀짓고, 사람들의 문제 제기를 자신의 헌신에 대한 부당한 대접이라고 느끼며 자기 연민에 빠진다(“이게 나에 대한 감사야?”).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종착역으로서 자신마저 파괴할 어두운 힘을 추구하게 된다. 영화 〈다크 나이트〉의 등장인물 투페이스를 통해 보여준 통찰처럼, 이 캐릭터에는 한때의 영웅이 너무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되어버리는 씁쓸함이 녹아 있다. 사실 후반부에 매그니피코를 철저히 집착적인 존재로만 그리다 보니 전형적이고 납작한 악당이 되어버렸지만, 여느 영화들처럼 왕이 잠시 고뇌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중간에 삽입했다면 그에게는 적지 않은 우군 관객이 생겼을 것이다. 왕은 그저 자신이 일구어낸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을 따름이야. 그 방법이 조금 문제일 뿐. 그는 ‘좋은 왕’1)이야.

하지만 문제는 그 방법이 문제라는 것이다. 왕은 로사스라는 왕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소원을 들어준다는 ‘정책’으로 유명해지면서 인구 유입을 경험한다. 시스템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한 방법이니 정책이고, 유입되는 인구보다 들어주는 소원이 훨씬 적으니 이는 일종의 상징정책(symbolic policy)이다. 그럼 시간이 흐르고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시스템이 흔들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마치 후발 투자자들의 돈으로 선발 투자자들에게 수익금을 배분하면서 실제로 수익이 나는 것처럼 속이는 폰지 사기(Ponzi scheme)의 구조와 유사하게, 어쨌든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고 그 작은 왕국은 나름 ‘성장한다’. 그러면 시스템은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소원을 부탁하기 위해 잠시 방문했던 이 왕국에 소원을 저당잡힌 채 어느 순간 나갈 수조차 없게 된다.

매그니피코 왕이 사람들의 소원이 담긴 파란 구슬들을 보며 기묘하게 웃고 있다. 

여기서 이 작품의 서사는 시설사회에 대한 서사와 병치된다. 시설은 사람들에게 재활과 복귀를 약속하면서 성장해왔고 정치공동체는 그러한 시설의 성장을 지원했다. 장애인들과 노숙인들, 노인들과 청소년들은 시스템이 갖춰진 시설에 잠시 머물면서 시설장이라는 ‘좋은 왕’의 지도와 규율 아래 언젠가는 사회에 당당하게 복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는다. 아니, 사회가 그렇게 기대한다. 그리고 시설을 소유하고 유지하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기대는 정확히 대중들이 매그니피코에게 거는 그 ‘좋은 왕’의 기대와 일치한다. 시설 소유자들과 운영자들의 마음도 매그니피코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게 해주고 싶고, 돕고 싶은 것이라고. 그 마음에 영화 속 대중들은 왕에 대한 지지와 사랑으로, 현실의 시민들과 정부는 시설에 대한 후원과 정책 지원으로 반응한다. 그럼 우리는 디즈니의 문구처럼 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까?

디즈니는 이 작품에서 스스로 ‘아니다’라고 답한다. 그 ‘좋은 왕’ 매그니피코는 이들을 하루하루 먹여 살리는 일은 하지만, 소원을 이뤄주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앞서 폰지 사기처럼 유출보다는 유입이 많아야 공동체가 유지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들의 소원을 담고 있는 구슬을 흡수하면 자신의 마법력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왕이 뒤늦게 깨닫고 폭주하는 장면은 매우 시사적이다. 어떤 동기에서든 일단 시설이 만들어지고 나면,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는 수익을 낳고 고용을 창출하고 세를 넓히는 사업이 되어 사람보다 시스템이 더 중요해지는 현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좋은 왕’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을 정당화한다. “왕은 자신의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시설사회에서는 누구나 이렇게 자신을 정당화한다. 모든 것은 왕국과 백성을 위한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작품 속의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100살이 되도록 소원을 이룰 선택을 받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이미 자신의 소원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주인공이 왕의 진실을 밝히면서 할아버지의 소원을 봤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듣고 싶지 않다며 오히려 화를 낸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을 왜 알려주려 하냐며 원망하고, 어쨌든 그간 믿어 왔던 왕에 대한 진실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도 진실을 어렴풋이 느끼지만 다른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 이 모습은 시설에서 20년 넘게 거주하며 다른 가능성을 체념한 채 살아왔던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시설을 나가고 싶냐고 물었을 때 주저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 시설의 비리를 들었을 때 그럴 리가 있냐며 흔들리던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주인공 아샤의 이야기를 듣고 자유를 선택한 이들은 왕에게 공격받기 시작한다. 그들의 소원 구슬은 왕에 의해 파괴되고, 왕의 마법에 고통당하며, 물리적 공격에 노출된다. 하지만 그들은 멈출 수 없다. 여기서 왕에게 대항하고자 모인 여덟 명의 캐릭터는 ‘마로니에 8인’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함께 노래하며 왕의 마법에 저항한다. 이들이 원한 것은 자유의 회복, 자신이 빌었던 소원에 대한 기억의 회복, 그리고 스스로 그 소원을 달성해가는 삶의 회복이다. 현실 세계에서 이것을 우리는 탈시설이라고 부른다.

2009년 6월 4일, 마로니에공원에서 농성을 시작하는 ‘마로니에 8인’의 모습. 사진 김유미
2009년 6월 4일, 마로니에공원에서 농성을 시작하는 ‘마로니에 8인’의 모습. 사진 김유미

탈시설(!)하는 과정에서 주인공 캐릭터들은 불안정해지고, 위험에 처하며,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그것을 감수한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선택한다. 소원은 자기 것이라고 말한다. 돌려달라고 말한다. ‘시설 밖은 위험하다’며 탈시설을 만류하는 이들에게 우리의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설 밖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너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데 괜찮겠냐, 가능하겠냐고 묻는 이들에게 소원은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택할 수 있느냐이다. 탈시설의 삶은 당연히 쉽지 않다. 현실은 디즈니의 세계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탈시설한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이 당당하게 말하듯 그들이 선택할 문제이다. 당혹스럽게도 매그니피코는 소원을 이뤄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선택지를 지우는 데 자신의 모든 힘을 쏟는다. 로사스 왕국 백성들의 소원은 자신을 통해서만 이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왕의 모습에서 시설사회에 대한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왕의 대척점에 서 있는 주인공을 생각해본다. 〈위시〉의 주인공 아샤는 일종의 내부고발자다. 왕의 견습생이 되기 위한 면접에서 소원 구슬이 관리되는 실체를 알고 주변 지인들에게 알리는 것에서부터 내부고발의 과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저항하는 8인을 조직한다. 이러한 내부고발자로서 아샤의 모습은 강력한 정보 비대칭으로 인해 시설에 대한 공적 감독이 어려운 현실, 그리고 일부 내부고발자들에 의해 시작된 탈시설 운동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시설의 현실에 대한 고발에서도 그러했듯 처음에 사람들은 아샤의 고발을 믿지 않는다. 소원을 이루고픈 간절한 마음에 왕을 믿어볼 수밖에 없어, 오히려 아샤를 왕에게 밀고하는 캐릭터까지 등장한다. 이 역시 너무도 현실적이다. 이런 모습은 우리 안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현재의 정책이 최선일 것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은 새로운 길(정책)에 대한 두려움을 먹고 자라, 그 마음이 절실함과 만나면 탈시설은 위험하고 무책임한 선택으로 치부되고 만다.

〈위시〉라는 대중적 애니메이션에서 탈시설 운동의 역사가 보이는 것은 탈시설이 지향하는 가치가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 사회 곳곳에 ‘시설성’이 배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현실에는 좀 더 복잡한 모습의 매그니피코들과 아샤와 백성들이 있다. 탈시설 운동은 누군가를 매그니피코라고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메시지는 다른 데 있다. 아샤가 별을 만났을 때 별에게 건네는, 위시의 가장 아름다운 대사 중 하나는 탈시설 운동의 진정한 가치를 함축적으로 전달해 준다.

“그들의 소원에게도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I just want their wishes to have a chance).”

탈시설 운동은 누구에게나 한 번 주어지는 삶에서 각자가 바라는 소망에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권리라는 것이다.

최태현.
최태현. 사진 필자 제공 

 


1) 김은정, 「‘좋은 왕’과 ‘나쁜 왕’이 사라진 자리: 불온한 타자의 삶을 가능케 할 반폭력, 탈시설의 윤리」, 장애여성공감 엮음, 『시설사회: 시설화된 장소, 저항하는 몸들』, 와온, 2020.

필자 소개

최태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다. 『유언을 만난 세계』를 접한 한 사람으로 조금이나마 응답해보고 싶어 경계를 더듬으며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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