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태현의 장애와 경계적 사유
장애를 통해 노동을 사유하기 ①

- 사라진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내게 지난 2월 27일은 숨 가쁜 노동의 날이었다. 새벽 5시 30분 열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일을 본 후, 택시를 타고 울산으로 이동해 또 일을 보고, 다음 날 일정을 위해 다시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이동해서 저녁 6시 50분쯤 역 앞의 한 모텔에 겨우 짐을 풀었다. 숨 쉴 틈도 없이 노트북을 열고 목록에 뜨는 와이파이 중 하나를 잡아 줌을 연결했다. 탈시설정책위원회 2월 연속 세미나 2부인 ‘탈시설 장애인의 노동과 사회통합’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줌으로 모여 이슬 교수님의 발표(‘탈시설’ 사회에서의 장애인 노동: 당사자의 경험을 통해 본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와 세 명 토론자들의 토론까지 들었다. 최바름 토론자는 주로 방법론에 대해 지적했고, 최석윤 토론자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개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으며, 김기룡 토론자는 왜 그 일자리가 중요한지를 역설했다. 발표와 토론 모두 다채로운 목소리로 꽉 찬 세미나였고, 그 풍성한 내용에 듣고만 있어도 가슴이 뛰었다. (이 칼럼의 많은 논점들은 이 날 세미나에서 나온 이야기들에 빚지고 있다. 찬반을 넘어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약칭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은 2020년 하반기 서울시에서 시작되어 경기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강원도 등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에서는 보통 한 지자체가 시작한 좋은 사업이 다른 지역들로 금방 퍼져나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역시 좋은 사업임에 틀림없다. 특히 중증장애인 당사자들의 권익옹호 활동, 문화예술 활동, 인식개선 활동이라는 ‘직무’를 개발하여 중증장애인들을 ‘고용’하고 ‘임금’을 지급한 서울형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은 참신했다. 그런 사업이 2024년 폐지되고 대신 ‘장애 유형 맞춤형 특화일자리’ 사업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어떤 이들에게는 일의 질이 저하되고, 대다수 참여자들에게는 사실상 일자리가 사라진 상황을 비마이너 독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관련 기사: 「“이것도 노동인데” 사라진 일자리, 연휴가 서러운 장애인들」, 노컷뉴스, 2024. 2. 11).

“서울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지속가능한 일자리 보장, 내년에도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적힌 피켓 아래로 국화꽃이 보인다. 사진 하민지
“서울시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지속가능한 일자리 보장, 내년에도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적힌 피켓 아래로 국화꽃이 보인다. 사진 하민지

이 지면에서 새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서울시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 폐지는 단지 중증장애인들만의 일자리가 사라진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인간의 노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갈 기회가 사라진 사건이고,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쌓아갈 실험실이 폐지된 사건이며, 서울시로서도 공공사업의 혁신성을 학습하고 홍보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사건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이 사라지면서 소중한 많은 것들이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필자는 몇 차례 연재를 통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이 우리에게 던져준 질문들을 돌아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그 유산을 간직하고, 사업의 본뜻을 되살릴 가능성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노동이란 과연 무엇인가.

- 노동이란 무엇인가

1) 노동의 의미

인간은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일상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자연에 의식적인 작용을 가하여 이를 변형시키는 반복적 활동인 (좁은 의미의) 노동(labor), 자신의 생애를 넘어 이 세계에 무언가 영속적인 것을 남기는 활동인 작업(work), 마지막으로 인간을 다른 인간과 구별되게 만드는 독자적인 활동으로서 (정치적) 행위(action)이다. 아렌트는 이 세 활동을 독립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우리의 전통 유교 문화는 노동보다는 행위를 의미 있는 것으로 보았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노동은 자신의 의지를 담아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인 활동이다. 다만 그 노동의 산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이 문제였다.

많은 철학자들이 노동 혹은 일에 내재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여러 논리를 제시했다. 어떤 이들은 노동을 인간의 존엄과 연결시킨다. 우리는 노동이라는 활동 속에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기 위한 땀, 이 세계에 뭔가를 남기고 싶어 하는 욕망, 그리고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꿈을 모두 담는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낸 것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존재다. 이때 노동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서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가치 있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활동을 의미하게 된다. 자신의 활동으로 세계가 변화했음을 느낄 때, 혹은 타인의 행복이 증진되는 것(이 역시 세계의 변화이다)을 볼 때, 인간은 ‘할 수 있다’는 효능감을, 자신이 세계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비장애중심주의적 세계에서 이러한 ‘할 수 있다’는 감각과 세계에 속해있다는 느낌으로부터 오랫동안 소외되어 온 장애인들에게 노동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는 다시 강조할 필요도 없다.

반면 노동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관점도 있다. ‘칼퇴근’이라는 표현이 시사하듯, 우리는 노동을 생계유지를 위해 해야만 하는 일로 인식하기도 한다. 가급적 덜 하거나 안 하면 좋은 것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아담이 금지된 선악과를 먹는 행위를 저지른 후 창조주의 명령으로 비로소 인간에게 땀 흘리는 노동이 시작된 것으로 나온다. 노동이 징벌로 이해되는 장면이다. 이후 19세기 말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기독교 국가들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기반을 둔 노동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는 장애인의 노동을 강조하는 것이 마치 그들에게 구속된 삶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처럼 오해될 수 있다. 장애인들에게도 노동할 권리를 달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고된 짐을 지우려는 주장이 아니냐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2000년 11월 대학로에서 열린 노동자대회. '장애인 노동권 쟁취-노들장애인야학'이라고 적힌 빨간색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 사진 제공 노들야학
2000년 11월 대학로에서 열린 노동자대회. '장애인 노동권 쟁취-노들장애인야학'이라고 적힌 빨간색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 사진 제공 노들야학

2) 장애인의, 사실은 모두의 노동을 둘러싼 난제

노동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의 노동’이라는 말을 들을 때 다소 혼란스러운 것은 오늘날 노동에 최소한 두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모든 노동이 이 세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 다른 하나는 산업화가 진행된 자본주의적 노동사회에서 노동은 인간의 존엄과 괴리된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첫 번째 문제는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다. 세상에는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일이나 대포폰을 만들어 누군가를 착취하는 일처럼 해악적인 노동도 있고, 탐욕적 금융 산업에 종사하는 일―정창조가 지적했듯, 세상에 기여하는 것 같지만 세상을 파괴하는―과 같이 이 세계를 반드시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킨다고 볼 수 없는 많은 형태의 노동이 존재한다(▷관련 기사: 정창조, 「장애인 ‘권리생산’ 활동, 이것은 왜 노동이 아니란 말인가」, 비마이너, 2023. 7. 10). 우리가 장애인들도 노동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때, 이런 노동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장애인들은 이러한 노동의 희생자였다.

두 번째 문제는 상대적으로 복잡하다. 오늘날의 생산 구조가 인간을 부속품처럼 만드는 경향은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세분화된 분업 구조를 지닌 포디즘 시대의 공장에서 인간의 노동은 전체 생산라인이 만들어내는 가치에 비해 볼품없는 부분적 가치만을 생산해 왔고, 너무나 반복적이어서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자율성과 역량이 증진되는 경험을 할 수 없었다. 최근에는 유튜브에 올라오는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영상을 직접 보고 걸러내는 일처럼 처음부터 인간성의 증진을 기대할 수조차 없는 노동도 늘어나고 있다. 이얼 프레스는 『더티 워크』라는 책에서 개인의 인간성도 파괴되고 사회의 존중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로 교도소 간수, 분쟁 지역 드론 원격 조종사, 대규모 가축 살처분장의 노동자 등을 들었다.

우리가 장애인도 노동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때 이는 어떤 노동을 의미하는 것인지, 자본주의 시장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노동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지, 거부한다면 그것이 해당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비장애인들에게는 어떤 의미일지 등을 짚어보아야 한다. 장애인들이 비인간적 노동까지도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 반면, 비장애인들도 다 이런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다 정확한 논란의 지점은 노동의 고됨과 규율이다.

전태일 열사 51주기인 11월 13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여의도 이룸센터 앞 농성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성 중심 노동’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했다. 가운데 ‘자본주의적 생산성 이윤 중심’이라고 적힌 종이가 불타고 있다. 사진 강혜민
전태일 열사 51주기인 11월 13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여의도 이룸센터 앞 농성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성 중심 노동’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했다. 가운데 ‘자본주의적 생산성 이윤 중심’이라고 적힌 종이가 불타고 있다. 사진 강혜민

3) 노동의 고됨과 규율에 대해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노동 조건을 동일하게 접근하려는 입장은, 장애인들이 노동사회에 완전히 편입되려면 비장애중심주의적 노동 시장의 요구에 적응해야 한다는 현실적 고민의 발로인 측면도 있다. 이는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주장의 논리 구조와 유사한 평등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이러한 평등주의는 다른 것을 다르게 다루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의 명칭에 ‘맞춤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모든 노동에 종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적절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시민들도 극단적 평등주의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 조건에 대해서는 플라톤식 분업주의의 관점도 있다. 플라톤은 이상국가론을 펼치면서 시민들은 자신의 성향에 따라 생산에 종사하거나, 군인이 되거나, 정치를 하도록 나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장애인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일을 맡겨야 한다. 이러한 분업주의는 일견 평등주의보다 나은 것 같지만 분업이 차별이 될 때 더욱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더 적절한 일’은 그렇지 않은 일과 동일한 가치를 인정받는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더 적절한 일’이 그 당사자에게 더 적절한 것이 아니라, 관리자의 관점에서 더 적절하고 당사자에게는 덜 인간적인 일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보다 인간적인 일을 고민할 때 평등주의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모든 일에는 고됨이 있고 규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비장애인도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벽에 출근해 청소를 하고, 하루 종일 위치를 지킨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루 8시간, 일주일에 닷새를 이 악물고 한다. 장애인들도 노동을 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규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장애인들이 이미 그 같은 규율이 존재하는 노동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잠시 제쳐두자.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의 많은 참여자들이 시설이라는 극단적 규율이 작동하는 공간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탈시설 장애인들이라는 사실도 잠시 제쳐두자. 어쨌든 고용주나 일반 사회의 관점에서는 이런 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 최소한 ‘압박 질문’을 던질 터이다. 어쩌면 서울형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폐지된 데에는 거리에 나가 구호를 외치는 권익옹호 활동이나, 노들노래공장처럼 노래를 만들고 연극 공연을 하는 문화예술 활동의 노동 강도에 대한 심리적 불편함―즉 그게 과연 충분히 힘든 노동이냐―이 있었을지 모른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노동자들로 이뤄진 문화예술활동팀 노들쿵쿵차카차카가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노동자들로 이뤄진 문화예술활동팀 노들쿵쿵차카차카가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노동에 대한 새로운 관점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노동의 개념을 새롭게 재구성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되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일하고 싶은가?’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조직들은 유연근무제를 확대하고 구성원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인다(물론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다). 더 이상 하루 8시간, 일주일에 5일을 기계처럼 근무하는 스케줄이 표준인 것은 아니다. 시장을 선도한다고 말해지는 기업들뿐만 아니라 정부도 보다 유연한 형태의 근무를 확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경계인으로서 필자가 활동가들을 보며 놀라는 것은 엄청난 격무와 박봉이 결합된 그들의 노동 환경이다. 역시 경계인으로서 그 자체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이들은 이런 노동을 견디는지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비록 업무 전문화가 어려운 작은 조직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활동가들이 수행하는 노동의 특징은 포스트 포디즘적 노동 전환의 한 모토인 일의 풍부함(job enrichment)이다. 문서 작업부터 거리 시위까지, 글쓰기부터 포스터 제작까지, 노래부터 청소까지, 한 사람이 수행하는 일의 폭이 놀랍도록 넓다. 어떤 이들은 정확한 직무 기술을 원하겠지만, 일의 풍부함은 오히려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의 만족도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단순한 업무는 사람을 지치게 하고, 단순한 격무는 사람을 미치게 하지만, 풍부한 격무는 또 다른 영역인 것이다.

노동이 어느 정도의 규율을 요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규율 없이 팔만대장경을 조각하고, 건물을 짓고, 노래를 만드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규율을 따르는 것, 특히 스스로 설정한 규율을 따르는 행동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성취감도 내재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노동의 규율은 그 노동의 내재적 속성에 의해 요구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생산 기술상의 특성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수많은 사람을 컨베이어 벨트에 앉혀 놓고, 그들의 모든 활동을 동일하게 한정해 놓은 후, 그 활동을 시간적으로 동기화해야만 생산물이 나올 수 있는 구조를 과학적 관리의 이름으로 설계해 놓았다. 노동을 의미 있는 활동이 되게 하는 데 필요한 규율보다 더 심한 조직적 규율을 개발해 온 것이다. 육체노동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예컨대 상담사들에게도 동등한 인간으로서 고객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활동이 아닌 현대판 노예의 심정을 갖게 만들기 위해 감정노동적 규율을 개발해 왔다. 오죽하면 공무원들도 자신들의 영혼을 옹달샘에 두고 일한다고 푸념한다.

백 보 양보해서, 그 같은 노동의 규율 덕에 오늘날과 같은 풍요로운 물질문명이 건설되었다고 하자. 이제는 더 이상 이러한 체제가 유지되기 어려운 시대에 이르렀다. 여전히 그런 체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오늘날 이른바 선진국들에서 비인간적 규율이 지배하는 노동시장이 어떻게 채워지는지 돌아보자. 바로 이민자나 소수인종, 저학력·저소득층 사람들을 통해서다.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착취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이 고된 것은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들도 노동의 수고와 규율을 아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불필요한 규율은 덜어내고 자존감은 더할 수 있는 도전적인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럼 그런 일들이 무엇이냐, 어디 있느냐고 묻게 된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바로 그 같은 일들을 찾아내는 실험의 현장이었다. 이 실험이 더 이어질 수 있었다면 권익옹호 활동, 문화예술 활동, 인식개선 활동 외에도 우리에게 노동의 의미를 새롭게 할 더 많은 형태의 일들이 고안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멈췄다.

노동이란 세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의지적으로 변화시키는 활동이다. 동시에 그 노동자 역시 자신의 활동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더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때 우리는 그것을 참된 노동이라 말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노동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우리는 노동의 본질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을 지지하는 이들이 외치는 ‘이것도 노동이다’라는 문구는 ‘이것이 노동이다’라고 고쳐 써도 뜻이 통한다. 오히려 노동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해 보자는 제안인 것이다. (다음 글에 계속)

필자 소개

최태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다. 『유언을 만난 세계』의 한 사람으로 조금이나마 응답해보고 싶어 경계를 더듬으며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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