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최태현의 장애와 경계적 사유
장애학을 기웃거리고 장애인 당사자들과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마주친 첫 번째 장벽은 언어였다. 평소 하는 말들에는 수많은 차별적 언어들이 김치에 묻어 있는 고춧가루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심한다 하더라도 함께 나누는 이야기가 무르익고 긴장이 풀리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한국어에서 신체 및 정신 장애를 비하해 온 오래된 표현들이 튀어나왔다. 내 입에서 나간 말의 소리가 초당 343m의 음속으로 내 귀에 다시 들어와 박히는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머리가 하얘지곤 했다. 사람들과 헤어지고 돌아와서는 괴로워했다. 윤동주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지만, 차별의 언어들은 잎새에 이는 바람보다 훨씬 폭력적이었다.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언어를 단련하기로 했다. 쉽지는 않았다. 언어란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것이지 억지로 습득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장애와 관련된 다양한 표현들을 찾아보고, 외국에서는 장애를 비하하는 뉘앙스를 지닌 표현들을 최근 어떻게 바꾸었는지 공부하고,1) 나 자신이 평소에 쓰는 표현들에 혹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곤 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결정장애’라는 말을 무심하게 사용한다. 의사결정을 주제로 강의를 하다 보니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을 자주 언급하게 되는데, 이전 같으면 쉽게 썼을 결정장애라는 표현을 더 이상 쓰지 않는다. ‘맹점’ 같은 용어도 피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어느새 ‘장애인’이라는 말도 구어에서는 ‘장애를 지닌 분,’ ‘○○장애가 있는 분’과 같이 표현하려 하고 있다. 대화의 주제상 굳이 어떤 이의 장애를 특정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당연히 장애를 언급하지 않는 것도 원칙이다.
어떤 국가이든, 어떤 언어이든, 장애와 관련된 표현들에 대부분 비하의 뉘앙스가 있다는 사실은 현대 사회가 어느 정도로 장애인의 인권에 무감했는지를 반영하는 무서운 지표다. 누군가가 어떤 역량이 부족하거나 ‘보통’ 사람들(사실 사람들은 다 다르다. 각자의 머릿속에 추상적인 ‘평균인’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과 다르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무심결에 장애와 관련된 비유를 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입에 붙고 적절한 비유인 것처럼 유통된다. 이는 사회적으로 권력이 큰 사람이든 작은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그 가운데서도 권력이 큰 사람들, 말하자면 정치인들의 차별적인 언어는 더더욱 폭력적이다. 그들의 언어는 언론이라는 확성기를 통해 전파되기 때문이다. 장애인 당사자인 한 국회의원은 동료 의원들의 잘못된 언사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언어의 단련은 단지 부적절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부적절한 언어를 없앤다고 해서 적절한 언어가 바로 입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중간에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장애에 대한 편견이 그대로 묻어나는 과거의 언어가 사라지고 난 자리는 과연 어떤 언어로 메울 것인가.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 하나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장애를 비하하지 않으면서 어떤 상태를 묘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저 침묵하는 것이 최선이다. 다른 하나는, 그런 상황들을 마주했을 때 곧바로 돌아보고 적절한 표현을 탐색하는 것이다. 언어는 혼자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표현들을 서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는 것 역시 운동의 일부다. 무엇이 적절한 표현인지 불확실할 때는 장애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외국의 장애운동가들은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바로 장애인들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언어들을 찾고 만들어내는 일이다. 은유 작가는 자신의 책 『글쓰기의 최전선』(메멘토, 2022)에서 “약자는 달리 약자가 아니다.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라고 말했다.
왜 아니겠는가. 가까운 사람들이 아닌 사회적인(?) 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가장 적극적으로, 그리고 풍부한 언어로 말하는 이는 보통 누구인가? 상대적으로 권력이 큰 이들이다. 이들의 삶을, 이들이 처한 상황을 묘사할 수 있는 수많은 표현이 이 사회에 유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과 TV는 주류적 삶을 묘사하는 언어와 영상들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반면 ‘발달장애’를 생각해보자. 어떤 표현들이 떠오르는가? 몇 개나 떠오르는가? 우리에게는 이들의 삶을 묘사할 언어들이 많지 않다. 이들의 삶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동시에 언어가 부족하니 삶의 디테일을 포착하고 표현하기도 더 어려워진다. 악순환인 것이다. 이들의 삶 역시 언어를 통해 말해지고 알려질 가치와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이들을 지하철과 광역버스뿐만 아니라 언어의 세계에도 초대하지 않는다. 박김영희는 홍은전의 책 『전사들의 노래』(오월의봄, 2023)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를 향해 무언가 말하려면 우리 자신부터 장애여성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겐 언어가 없었죠. […] 장애여성에게는 장애와 여성이라는 교차성이 있다는 걸 느꼈지만 설명할 언어가 없었죠.”
어떤 언어는 정치적 투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탈시설’이라는 말이 대표적인 예다. 탈시설이라는 개념이 어려워서 선택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미 투쟁의 역사를 반영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반면 ‘지역사회 자립 지원’ 같은 말은 훨씬 기능적으로 들린다. 매끄럽다. 반대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어떤 말을 쓰든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탈시설은 지역사회 자립 지원보다 훨씬 넓은 실천을 내포한다. 흥미롭게도 ‘자립’의 의미 역시 명확하지는 않다. 자립도 적극적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채워나가야 하는 개념이다.
장애인권 운동가들은 이미 언어투쟁의 전문가이다. ‘이동권,’ 그리고 ‘장애인 권리예산’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감탄했다. ‘감정노동’이라는 표현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직관적인 깨달음을 주는 표현이었다. 『나는 ‘나쁜’ 장애인이고 싶다』(삼인, 2003)의 표제에서 사용되고 있는 ‘나쁜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구조에 저항하기에 나쁘게 여겨지는 장애인이라는 의미로 쓴 이 말의 양가적 성격은 매력적이다. 그뿐만 아니다. 장애인권 운동사를 장식하는 ‘차별에 저항하라,’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 ‘자유로운 삶, 시설 밖으로’와 같은 아름답고 강력한 말들이 꾸준히 만들어져 왔다.
새로운 언어의 근원은 물론 장애인 당사자들 자신이어야 한다. 하지만 위에서 본 박김영희와 홍은전의 협력에서처럼, 언어가 지닌 사회적 특성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생산하거나 암시한 언어를 누군가가 듣고 받아안아 이를 확장할 수 있게 해준다. 시인 심보선이 만들고 고병권이 퍼올려 홍은전에게 부은 ‘두 번째 사람’이라는 표현은, 장애인권 운동에서 활동지원사들(예를 들어 이규식의 이야기를 적은 김형진, 박경석의 이야기를 적은 정창조 등), 기록작가들, 기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삶이 공유되면 언어도 공유된다. 타인과 가까워지고, 애태우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노래들에서 우리 자신의 사랑과 아픔을 발견하듯, 좋은 언어는 서로 다른 이들의 삶을 포개어준다. 그래서 언어를 돌아보는 일은 어느 치아파스 원주민의 말처럼2) 언제나 당신과 나 모두의 해방을 지향하는 일이다. 일상의 말하기에서 편견과 차별의 언어를 지워나가고 존중과 해방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운동이기도 하다.
1) 예를 들어 적절한 장애 표현에 대해 영국 정부 웹사이트(https://www.gov.uk/government/publications/inclusive-communication/inclusive-language-words-to-use-and-avoid-when-writing-about-disability)가 제공하는 간략한 가이드라인만 보아도 많은 함의를 얻을 수 있다.
2)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며,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필자 소개
최태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다. 『유언을 만난 세계』의 한 사람으로 조금이나마 응답해보고 싶어 경계를 더듬으며 글을 쓴다. 2725senator@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