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전근배의 받아쓰기
극단의 상황이 되어서야 돌봄 관계가 주목받는 일 자체가 비극
돌봄 니즈의 사회화 없이는 돌봄 관계의 민주화 이루어질 수 없어

손과 발, 가슴을 단단히 묶는다. 환자는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침대에 결박되어 누워 있다. 299개 병상을 갖춘 작은 정신병원인 춘천○병원에서 환자는 구원받지 못했다. […] 시시티브이 영상에서 환자는 매일 신음하고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다 서서히 죽어갔다. 의사도, 간호사도, 보호사도 적절한 구호조처를 외면했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그 죽음의 동조자인 것처럼 보인다.1)

그들은 정말로 병원이 환자들의 집과 같으며, 병원에서는 환자에게 시민으로서 과거의 활동을 잊으라고 환자에게 요구하지 않아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달랐다. 환자는 그저 병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만이 있고, 이에 따라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적인 구호와 치료뿐이라고 의사들은 믿고 있다. […] 환자는 병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다. 병원은 수도원에서의 규칙을 환자에게 강요한다. […] 아주 사소한 지침과 지적들로 인해 환자의 신경 조직은 탈진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날들이 길어지면서, 환자들은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지속적으로 비난과 아픔이 일어나는 상황 아래 노출되는 것이다. […] 그런 경우 간혹 환자는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예민한 감정과 감각을 획득하기도 한다. 환자는 자신이 처한 모든 불행한 고통을 감내한다. […] 병원은 병자들을 맞이하는 현실 조직이지만, 아직 병원이라는 조직의 본질적 역할과 목적을 구현할 수 있는 민주적 기관은 되지 못했다. 이럴 경우 환자를 맞는다는 것은 그저 무의미한 일일 뿐이며, 병원은 단지 슬픔의 탄식만이 남은 장소가 되며, 시민들과의 사회적 연대와 지속성이라는 장점을 전혀 가질 수 없는 무의미한 환대만 남는다.2)

보호실에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정면에 있는 벽 왼쪽에는 문이 있고, 오른쪽에는 쇠창살이 달린 창문이 있다. 그림 이정하(2010년)
보호실에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정면에 있는 벽 왼쪽에는 문이 있고, 오른쪽에는 쇠창살이 달린 창문이 있다. 그림 이정하(2010년)

학대와 같은 돌봄의 극단적인 부정의 현상은 돌봄 관계를 다룰 때 늘 쟁점이 되어왔다. 사람들은 피해자의 취약성에 대비하여 가해자의 악마성이나 전문가성 여부에 대해 묻거나, 돌봄 노동의 조건과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도 아니면 CCTV와 같은 감시 장치를 더욱 확대하여 예방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그러나 가해자의 악마성은 학대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을 때 문제 해결의 힘을 잃고, 가해자의 전문가성을 따지는 일은 정작 가해자가 가장 대표적인 전문가로서 인정되는 집단에 속한 사람일 때 무력해진다. 인간의 악마성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누구에게 그러한 속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사건이 터지기 전에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즉 원천적으로 예방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대책이 되지 못한다. 더 많은 전문가의 양성과 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 역시 인력의 절대 부족 단계를 거친 이후의 시점에서는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전문가들의 이해관계가 확장되어 도리어 상대방의 권리 주장을 압도하는 일이 쉽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되면 좋은 돌봄이 떨어질 것이라는 ‘돌봄의 낙수 효과’도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일면 타당한 면이 없지 않지만, 평균적으로 처우가 더 나은 거주시설의 돌봄 노동자가 지역사회 기반의 돌봄 노동자보다 더 많은 학대의 가해자로 지목된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는 거주시설의 돌봄 노동보다 지역사회 기반의 돌봄 노동이 더 대체 가능성이 크다는 점(즉 돌봄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점), 후자의 환경이 덜 분리적이어서 의도하지 않더라도 이해가 다른 여러 사람 간의 일상적 교차 감시가 작동한다는 점의 영향 때문일 수 있다. 이처럼 좋은 돌봄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준다.

CCTV는 인권 침해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인권 감시의 보루와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장애인, 가족, 서비스 제공자 각자의 입장에서 현장의 특성에 따라 설치 여부에 대한 찬반이 엇갈려 왔다. 그러나 CCTV는 사후 처분의 과정에서 법적 유용성을 제공하는 점 외에 뚜렷한 학대 예방이나 서비스 문화 개선 효과는 증명되지 않았다. 한편 이를 활용하기 위한 법적‧실천적 지침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 정서적 학대를 포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 해석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지적되어 왔다. 즉 CCTV가 제약하는 기본권에 비하여 그를 통해 보장되는 기본권이 더 클 것인지 알 수 없다. 나아가 CCTV를 정의를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장애 급여의 판정에서도 이의 적용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되돌아올 수 있다.

어쩌면 극단의 상황이 되어서야 돌봄 관계가 주목받는 일 자체가 비극일지 모른다. 돌봄 관계에서 일어나는 비극이 아니라, 비극적으로 구성되는 돌봄 관계 자체가 더 문제일지 모른다. 돌봄 관계는 돌봄 니즈와 돌봄 노동이 만남으로써만 성립한다.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의 지적처럼 돌봄 니즈가 존재해도 돌봄 노동이 없다면 돌봄 관계는 만들어질 수 없고, 돌봄 니즈가 없다면 돌봄 노동은 애초 존재할 수 없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돌봄 니즈인지, 마찬가지로 무슨 일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일이 돌봄 노동인지는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국가에 의해 돌봄 니즈로 승인되지 않거나 돌봄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아 비공식이거나 사적인 영역에 머물 때에도 돌봄이 언제나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따라서 공식적 돌봄 관계의 범위와 성질을 구축하는 일은 국가의 돌봄 정책에서 핵심적 사안이 된다.

장애인에 대한 공식적인 돌봄 관계 성립의 조건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리나라는 민법에 따라 부부(제826조), 부모-자녀(제913조),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 기타 생계를 같이하는 친족 간(제974조)에 상호 부양의 의무가 있다. 이 사적 부양 의무가 이행될 수 없다고 판단될 때에 국가는 장애인의 배우자나 부양의무자인 1촌의 직계혈족의 의사에 따라 장애인 거주시설에 입소시키도록 길을 열어 두었다. 지역사회도 마찬가지다. 활동지원서비스 급여를 판정할 때에도 신체의 기능 제한을 묻는 항목을 제외한 환경적인 맥락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한부모 및 조손가족 여부, 취약가구(중증장애인이거나 만 19세 미만, 만 65세 이상으로만 구성된 가구) 여부, 가족의 사회활동 여부가 거의 전부이다. 긴급돌봄센터의 이용은 보호자의 긴급한 상황(입원, 경조사, 소진 등) 여부에 따라 결정되며, 최중증 발달장애인 통합돌봄서비스의 경우에도 가족과 독립하여 주거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가정 내 보호 체계’가 무너졌다고 인정되어야 한다.

결국 시설에서도 지역사회에서도 돌볼 가족이 있는가가 관건이다. 장애인 돌봄 관계가 대부분 유사 부모-자식 관계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돌봄 니즈를 가진 사람들은 ‘자식의 윤리’를, 돌봄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부모의 윤리’를 강요받는다. 윤리를 어기는 일은 배은망덕한 자식이 되거나, 천륜을 저버린 악인이 되는 일이다. 돌봄 니즈를 가진 사람들은 부모처럼 대해줄 사람을 찾고, 돌봄 노동을 해온 사람들은 자식처럼 대해줄 사람을 찾는다. 이 유사 부모-자식의 관계에서 허용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일이 아슬아슬하게 서로 간의 학대와 비학대의 경계를 넘나들며 역동한다. 일반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때로는 이 관계를 이유로 합리화되거나 선처 받으며, 반대로 용납될 수 있는 일들이 이 관계에 의해 심판 받거나 처단된다.

유사 부모-자식의 돌봄 관계에서는 비극이 나타날 때면 돌봄을 받는 자와 돌봄 제공자 간에 ‘자식으로서의 권리’와 ‘보호자로서의 권리’가 마치 결투를 벌이는 듯 보인다. 보호자를 더 선별할 것, 보호자를 더 감시할 것 등의 요구와 보호자에게 더 많은 재량권을 인정할 것, 보호자의 부차적인 일을 더 줄여줄 것 등의 요구가 경합한다. 보호자를 더 많이 배치할 것과 같은 요구는 비교적 원활하게 합의를 이룬다. 이러한 투쟁은 부모와 자식에게 주어진 권력이 동등하지 않기에 ‘그럼 더 이상 돌보지 않겠다’는 보호자의 선언에 취약하여 보호자의 승리로 끝날 때가 많다. 하지만 이따금씩 ‘아무리 그래도 보호자가 그래서는 안 되지’라는 도덕적 여론과 국가의 뒤늦은 심판 노릇으로 자식이 이기기도 하여 보호자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분을 살 때도 있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 이기든 강요된 유사 가족 돌봄 관계는 강화되며 의료적 영역과 관계될수록 그 정도는 심해진다.

2023년 3월 27일,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에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안 입법을 촉구했다. 사진 복건우
2023년 3월 27일,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회에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안 입법을 촉구했다. 사진 복건우

국가에 의한 이 학대적 돌봄 관계에서 돌봄은 ‘지원’이 아닌 ‘부양’이 된다. 돌봄 니즈에 대한 지원이 아닌 돌봄 노동을 통한 부양만이 공식적 돌봄 논의에서 주로 다뤄진다. 비공식적 돌봄 (노동), 사적 영역에 할당되어 온 돌봄 (노동),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돌봄 (노동)으로 간주되었던 것들은 일정한 사회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의 속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여성의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으로 자리매김한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에게 제공되는 돌봄 (노동)은 늘어나지만 그것은 가족 보호자에서 시설 보호자에게, 시설 보호자에서 지역사회 보호자에게 내맡겨지는 제도화, 즉 비공식적 시설화에서 공식적인 시설화로의 변화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사적 돌봄 관계에서의 비극은 이제 공적 돌봄 관계에서의 학대로 전환된다.

지난 4월 30일 서울시청 앞에서 ‘동료지원가 사업 폐지 대응 공동행동’이 동료지원가 고용승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서울시와 보건복지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박경인 피플퍼스트서울센터 활동가가 국정감사에서 “동료지원가 일자리가 축소되지 않도록 살피겠다”고 한 추경호 전 기획재정부 장관 발언이 담긴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김소영
지난 4월 30일 서울시청 앞에서 ‘동료지원가 사업 폐지 대응 공동행동’이 동료지원가 고용승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서울시와 보건복지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박경인 피플퍼스트서울센터 활동가가 국정감사에서 “동료지원가 일자리가 축소되지 않도록 살피겠다”고 한 추경호 전 기획재정부 장관 발언이 담긴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김소영

CCTV에는 연출자가 없다. CCTV 속 행위자들은 대부분 소리 없이 사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면 속 모습이 사실인 것만큼, 그 사실을 구성하는 (드러나지 않는) 연출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때로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돌봄 관계의 구조를 엑스레이를 통해 들여다보듯 투사할 힘이 필요하다. 돌봄 니즈가 없이는 돌봄 노동도 돌봄 관계도 성립할 수 없듯, 돌봄 관계의 민주화는 돌봄 니즈의 사회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지금의 학대적 돌봄 관계를 끊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평등하게 갈등할 수 있는 힘이 돌봄 니즈가 있는 사람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 돌봄 니즈가 있는 사람들이 그런 권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돌봄 (니즈)’, ‘배은망덕한 영역으로 강요되어 온 돌봄 (니즈)’, ‘투자할 가치가 없는 돌봄 (니즈)’을 사회화함으로써 돌봄 관계를 민주화할 수 있는 적극적인 회복 조치가 중요하다.

CCTV라는 방식마저도 돌봄 노동을 중심에 두고 감시 기술로 쓰임을 궁리할 때와 돌봄 니즈를 중심에 두고 보조기술로 쓰임을 궁리할 때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돌봄 노동을 중심에 두고 전문가의 확대를 고려할 때와 돌봄 니즈를 중심에 두고 전문가의 확대를 고려할 때 그 돌봄이 일어나는 시간과 장소는 확연히 다를 수 있다. 어쩌면 시설·병원·특수학교에는 더 많은 CCTV와 보호자 이전에, 유사 가족 관계에 있는 이들의 돌봄 니즈를 발견하고 형성하고 촉진할 한 명의 동료지원가, 동료상담가, 피플퍼스트 활동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또한 시설·병원·특수학교에 있는 시간을 가급적 줄이는 새로운 선택지를 갖는 것이 돌봄 니즈를 가진 사람에게 더 중요할 수 있을 것이다.

 

1) 고경태, 「[단독] 병원서 손·발·가슴 묶여 10일… 숨지고야 풀려난 환자」, 『한겨레』, 2024. 7. 2.

2) 안토니오 그람시,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김종법 옮김, 바다출판사, 2016, 45~47쪽.

 

* 필자 소개

전근배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대구대학교 장애학연구소, 탈시설정책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며 종종 연구도 한다. 온전히 받아쓰는 일을 활동과 연구의 주된 목적이자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rmsqo129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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