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니에 8인’ 맏형으로 탈시설제도 초석이 된 사람
“시설 사는 장애인 3만 명 탈시설 할 때까지 열심히 투쟁해라”
유족 인사 “아빠의 딸인 게 자랑스럽습니다”

김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가 고 김진수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대표의 빈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김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가 고 김진수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대표의 빈소에서 조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추모식장은 전국에서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다.

탈시설제도가 없던 시절에 탈시설제도의 초석을 만든 사람이기에, 그의 삶을 딛고 살아가는 수많은 탈시설장애인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며 관계 맺은 다양한 사람들이, 고인이 1989년 시설에 입소하며 “모질게 연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이 그 시간을 함께했다. 가족들은 고인의 활동이 담긴 영상을 보며 내내 눈물지었다.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생이었다.

‘시설수용에 저항한 탈시설 장애인 김진수 동지 추모제’가 1일 저녁 7시, 서울대병원 1층 추모식장에서 열렸다. 고인의 영정 앞엔 ‘고 김진수 동지’라고 적힌 위패와 하얀 국화가 놓였다.

2009년 6월, 쉰아홉 살의 나이에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탈시설하여 빈틈없이 살다 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많은 사람이 서럽게 울었다.

추모제에 참석한 고 김진수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대표의 유족들. 사진 강혜민
추모제에 참석한 고 김진수 대표의 유족들. 사진 강혜민
‘시설수용에 저항한 탈시설 장애인 김진수 동지 추모제’가 1일 저녁 7시, 서울대병원 1층 추모식장에서 열렸다. 사진 강혜민 
‘시설수용에 저항한 탈시설 장애인 김진수 동지 추모제’가 1일 저녁 7시, 서울대병원 1층 추모식장에서 열렸다. 사진 강혜민 

- 탈시설의 맏형, 김진수

고인은 지난 6월 26일 척추협착증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수술 후 심근경색으로 중환자실에 다시 입원했다. 심근경색 수술을 마친 후에도 산소포화도와 신장 기능이 떨어지고, 폐에 물이 차 숨쉬기 어려운 상태가 반복되면서 중환자실 신세를 져야 했다. 결국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7월 31일, 가족들 앞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74세였다.

고인은 37살이던 1987년, 인천 유원지 수영장으로 가족 여행을 갔다가 사고로 목뼈가 부러지면서 전신마비 장애를 입었다. 입원 기간 동안 병원비로 재산을 모두 소진하게 되자, 더 이상 가족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집을 나왔다. 1989년에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석암재단(현 프리웰) 산하의 베데스다요양원에 자진 입소했다. 석암재단의 인권침해, 시설 비리가 세상에 드러날 때까지 그곳에서 20년을 살았다.

당시 법인의 시설 비리를 알게 된 거주 장애인들은 힘을 모아 비리 세력을 내쫓았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 나아가 시설 거주인 8명은 “더는 시설에서 살고 싶지 않다. 지역사회에서 살겠다”며 시설을 뛰쳐나왔다. 훗날 ‘마로니에 8인’이라 불린 이들은 2009년 6월 4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그때 고인의 나이 쉰아홉이었다. 그는 마로니에 8인의 ‘맏형’이었다. 농성은 62일간 이어졌고, 투쟁의 성과로 만들어진 체험홈 등은 오늘날 탈시설제도의 초석이 되었다.

석암재단에서 탈시설한 장애인들은 베데스다 요양원이 있는 김포시에 “탈시설의 깃발을 꽂듯” 2012년에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만들었다. 고인은 2015년에 부소장을 역임하고 2017년에는 소장이 되었다. 탈시설뿐만 아니라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등 지역사회에서 장애인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수많은 투쟁 현장에 그가 있었다. 2020년 3월에는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아래 탈시설연대) 공동대표를 맡아 탈시설에 반대하는 세력에 맞서 적극적으로 탈시설 투쟁을 해왔다.

2009년 6월 마로니에공원으로 석암베데스다요양원 거주인 8명이 짐을 싸들고 나온 날,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김진수 대표. 사진 제공 김유미 
2009년 6월 마로니에공원으로 석암베데스다요양원 거주인 8명이 짐을 싸들고 나온 날,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김진수 대표. 사진 제공 김유미 

- 무모한 싸움에서 이기고, 한 번 더

김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는 2007년에 고인을 처음 만났다. 석암재단 산하 시설에 사는 장애인들이 시설 비리 문제를 제보하기 위해 그를 찾아온 것이다. 김 활동가는 “조직된 힘으로 싸워야 한다”며 그를 찾아온 장애인들에게 “시설 안에서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을 조직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할 수 있다”면서 시설로 돌아가 연판장을 돌렸다. 스무여 명이 서명한 연판장에는 “엄청난 조직가”의 기량을 가진 고인의 역할이 컸다.

“그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습니다. 거대한 사회복지법인 일가와 시설에 사는 장애인이 싸운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싸움이었는데, 2008년 1월 4일 양천구청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그 무모한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무모한 싸움에서 장애인들이 승리를 거뒀다.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을 감옥에 보낸 장애인들은 더 무모한 싸움에 나섰다. 시설 안에서 ‘비리 세력을 몰아낸 이들’로 영웅 대접 받으며 편하게 살 법도 한데, 그 시설을 박차고 나와 마로니에공원에서 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그 선택을 김 활동가는 이렇게 이해했다. “중증장애를 입었을 때, 가족과 잘 살도록 국가가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와 인연을 끊어야만 최소한의 공적 부조를 해주는 사회였습니다. 진수 형님은 중증장애를 입게 된 절망 속에서 다시 한번 가족과의 인연을 끊어내야 했고, 인간적 대우조차 받을 수 없는 시설에서 20년을 살았습니다. ‘더 이상 이건 아니다’라면서 투쟁을 시작한 건데요, 인간이 존엄하게 사는 게 무엇인지를 스스로 증언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마로니에 8인’ 김동림 김포장애인야학 교감이 추모 발언을 하고 있다. 그의 뒤로 고 김진수 대표의 영정 사진이 있다. 사진 강혜민
‘마로니에 8인’ 김동림 김포장애인야학 교감이 추모 발언을 하고 있다. 그의 뒤로 고 김진수 대표의 영정 사진이 있다. 사진 강혜민

- 김진수의 유언

‘마로니에 8인’이라는 이름으로 고인과 숙명처럼 얽힌 김동림 김포장애인야학 교감은 2009년 6월, 시설에서 나올 때 고인이 한 말을 기억한다. “동림아, 이 싸움이 어렵고 힘들지 몰라도, 전국에 있는 장애인들이 탈시설하여 지역사회에서 잘 살 수 있도록 우리 한 번 해보자.”

김 교감은 고인과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함께 살았으나 투쟁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고인을 잘 몰랐다. 그러나 투쟁을 함께하면서 두 사람은 짝꿍처럼 붙어 다녔다. 고인은 김 교감에게 “큰 형이자 든든한 지지자”였다.

눈 감기 전에는 그에게 이러한 말을 남겼다. “전국에 3만여 명의 장애인이 아직 시설에 살고 있다. 그 사람들 다 나올 때까지 니가 투쟁 열심히 해라.”

김 교감이 고인의 말을 전하며 말했다. “진수형이 나한테 그렇게 명령했어요. 저, 그 명령을 받아들일 거예요. 여기 계신 분들께 부탁하겠습니다. 서울시에서 탈시설조례가 없어졌습니다. 탈시설조례 다시 만들 수 있도록 투쟁합시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투쟁”이라고 크게 답했다.

진보적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이 평소 고인이 좋아하던 장애인차별철폐투쟁가를 부르고 있다. 사진 강혜민
진보적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이 평소 고인이 좋아하던 장애인차별철폐투쟁가를 부르고 있다. 사진 강혜민

- 초석을 딛고서

이수미 탈시설연대 서울지부 공동대표에게 김 대표는 “탈시설의 기틀을 마련해주신 큰 어른”이었다. 그 또한 탈시설 장애인인 이수미 공동대표는 시설에서의 삶과 죽음을 알고 있다. 시설에선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거주해도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기 어려웠고, 그렇기에 같이 살던 이가 죽어도 제대로 된 애도는 이뤄질 수 없었다. 애도가 불가능한 공간에서 그 스스로의 존엄을 보장받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그러한 삶을 살았던 장애인에게 이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통곡하며 그를 추모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얼마나 낯선 행위인가.

울음에 목이 메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던 이 공동대표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마침내 크게 터졌다. “만약 시설에서 죽었다면 (목소리가 더 커지며) 아무도 기억해 주는 사람 없이 잊힌 존재가 되었을 테지만, 김진수 대표님은, 우리 동지들 마음속에 큰 별로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커진다. “저는 탈시설한 당사자로서, 큰 어른이 돌아가신 것에 큰 슬픔을 느끼지만, 고인의 뜻을 받들어 더 열심히 투쟁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김진수 대표님, 장애해방이 되는 그날까지 하늘나라에서 함께 해주시고, 지켜봐 주십시오.”

발달장애인 동생을 둔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이 추모 발언을 하고 있다. 그 옆에는 오강현 김포시의원(부의장, 더불어민주당)이 서 있다. 사진 강혜민
발달장애인 동생을 둔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이 추모 발언을 하고 있다. 그 옆에는 오강현 김포시의원(부의장, 더불어민주당)이 서 있다. 사진 강혜민

고인의 삶은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이들에게도 가닿았다.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에게 고인은 “중증장애인도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김 대표가 시설에서 나와 탈시설제도를 요구하며 마로니에공원에 짐을 풀던 2009년, 장 전 의원은 대학생이었고 한 살 터울의 중증발달장애인 동생은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때 저는 이런 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중증발달장애인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시설에 살아야지, 그런 거지, 내가 돈 많이 벌어서 내 동생이 있는 시설, 좋은 시설로 만들어야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싸우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앞서서 싸웠던 사람이 있었기에 오늘의 싸움이 있다고 알려준 너무나 소중한 사람입니다.”

결국 장애인이 살아가야 할 곳은 지역사회였다.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물리적 공간 이동을 넘어 관계를 만들어야 했기에 고인의 관심이 지역 운동으로 향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휠체어 타고 땀 뻘뻘 흘리며 서너 시간이 걸려도” 그는 지역사회에서 부르면 어디든 달려갔다.

염은정 김포민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집행위원장은 “소장님은 정치, 문화, 사회, 복지, 교육 그 모든 것을 망라하는 김포연대회의의 모든 것을 함께 해주셨다. 내겐 든든한 지역선배님이었다”면서 “그래서 어디를 가든, 김포시민사회를 소개할 때 우리 활동의 선두에는 ‘휠체어 부대’가 있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할 수 있었다. 시민사회의 주체로 당당히 함께해주신 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 사진 강혜민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 사진 강혜민

- 지붕 있는 시설보다 지붕 없는 농성을 택한 이유

진수 아저씨, 진수 형님, 진수 동지, 소장님, 교장선생님 등 사람들은 다양한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다양한 상황과 관계 안에서 그를 만났기에 호칭의 다양함은 당연했다. 그것이 지붕 있는 시설보다 지붕 없는 농성을 택한 이유일지 모른다. 그곳에 자유가 있었다. 고인은 ‘2009년 6월의 시간’에 대해 “다시 돌아가더라도 기꺼이 선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장애인에서 장애인이 되었을 때, 모질게 끊어냈던 가족과의 인연은 시설에서 나왔을 때야 다시 희미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장례식장에 찾아오는 수많은 조문객을 맞이하며 가족들은 아버지의 생을 조우했다. 추모제 마지막, 고인의 두 딸 미정, 지영은 사람들에게 “아빠가 좋은 업적을 많이 남겨주셔서 아빠의 딸인 게 너무 자랑스럽다”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그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두 딸을 다시 만났다.

 고 김진수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대표의 영정 앞에 국화가 놓여 있다. 사진 강혜민
 고 김진수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대표의 영정 앞에 국화가 놓여 있다. 사진 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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