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장애인 접근권 외면한 국가 손해배상 책임 첫 인정
국가가 장애인 접근권 제약하는 규정 ‘방치’했다고 판시하기도
장애계 “판결이 문서로만 남지 않도록 정부가 책임져야”
복지부 “장애인편의시설 설치 바닥면적 기준 점차 폐지 예정”
“한 사람의 생활사에서 사적이거나 공적인, 크고 작은 만남과 활동의 많은 부분이 건물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그곳에 이르기 위한 통로의 시작인 ‘1층’의 공유는 일상성의 동등한 참여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에게는 불과 2센티미터의 턱도 1층에 이르는 것을 방해한다. 지체장애인에게 턱과 계단은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선과 같다.”
“소규모 소매점에 대한 장애인 접근권의 문제는 ‘쇼핑’의 문제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의 문제이다. 비장애인은 점심시간에 우연히 친구를 만나 식당이나 커피숍을 가거나, 귀가하다 문득 생각이 나서 서점과 꽃집에 들르고, 갑자기 배가 아파 약국을 이용하거나 동네 의원에 가면서, 내가 그곳에 접근할 수 있는지 없는지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장애인의 일상생활 또한 그래야 한다. 계획된 ‘쇼핑’은 대형 할인점과 온라인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우연과 즉자성으로 이루어진 나날의 ‘삶’은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2022다289051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오경미 대법관, 신숙희 대법관의 보충의견)
2024년 12월 19일, 장애인 접근권 보장에 관한 역사적인 판결이 내려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조희대 대법원장, 주심 이숙연 대법관)가 대한민국이 장애인의 접근권을 보장하지 않아 왔다고 인정하며 이에 대한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장애인들이 소를 제기한 지 6년 8개월, 휠체어 이용 장애인인 김순석 열사가 서울 거리에 턱을 없애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40년 만의 일이다.
이번 판결의 의의를 되짚고 장애인 접근권 보장을 위한 앞으로의 과제를 모색하기 위해 지난달 24일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공익법단체 두루 등이 김예지·최보윤 국민의힘 국회의원,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등과 함께 장애인생활편의시설 접근권 대법원판결 평가 토론회 ‘모두의 1층을 위한 향후 과제’를 국회 도서관 소회의실에서 열었다.
-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편의점 100개 중 1곳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장애인들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차별구제청구소송에서 “건물의 턱과 계단 때문에 접근권을 침해당한 장애인에 대해 국가 책임이 없다”고 판단한 원심을 깨고, 파기자판을 통해 “국가가 장애인들에게 각 1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파기자판은 원심판결을 파기한 경우, 사건을 하급심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대법원이 직접 사건을 재판하는 것을 말한다.
소를 제기한 2018년 4월 11일은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등편의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된 지 각각 20년, 10년 된 날이었다. 이 법들은 휠체어 이용 장애인 등이 편의점, 카페 등 공중이용시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시설주, 국가 등에 대책을 마련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턱과 계단이 존재해 장애인의 출입과 이동을 가로막아 왔다.
당시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 제3조 별표1에 따르면 슈퍼마켓·일용품 등의 소매점 중 바닥면적이 300㎡(약 90평) 미만인 경우 장애인 등의 통행이 가능한 접근로, 경사로, 점자 표기 등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고 규정돼 있었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 크게 동떨어진 기준이었다.
통계청의 ‘2018년 사업장 면적 규모별 사업체 수’ 조사에 의하면, 체인화 편의점 4만 2820개소 중 바닥면적이 300㎡ 이상인 경우는 542개소로 1.2%에 불과했다. 나머지 98.8%는 편의시설 설치 의무가 없는 것이었다. 즉,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갈 수 있는 편의점은 100개 중 1곳뿐이었다.
장애인들은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의 시설 접근권을 보장하지 않는 대한민국이 헌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 등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 500만 원을 청구했다. 1심은 4년 간의 심리 끝에 대한민국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를 기각했다. 바닥면적 기준을 규정한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은 위헌적인 규정이라고 인정했지만, 그를 만든 국가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은 것이다.
2심은 1심보다 후퇴했다. 2심 재판부는 바닥면적 기준을 두는 것이 “대한민국 정부의 재량”이라며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이 장애인 차별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 대법원 “장애인 접근권 보장 의무 불이행한 대한민국, 손해 배상해야”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대한민국은 헌법상 기본권의 일종인 장애인의 접근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았고, 그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부작위)은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된 2008년 4월 11일에는 장애인 접근권 보장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봄이 타당하므로, 행정청은 늦어도 그 무렵부터 개선입법의무를 부담하고 있었다”면서,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14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바닥면적 기준을 규정한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았다. 이를 이행하지 않은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로 인해 법률이 보장하고자 한 지체장애인의 접근권이 유명무실해졌다고 할 것이므로, 이는 대한민국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위법”이라고 명확히 밝혔다.
또한, 대법원은 “장애인의 접근권을 제약하는 규정은 전혀 개선되지 않은 채 ‘방치’됐고, 그 결과 장애인의 고통이 장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위법한 부작위로 인해 장애인이 겪었을 고통을 위자하는 것은 동정이나 시혜가 아니라,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국가가 적절한 의무를 이행하며 적극적인 장애인 보호정책을 시행하도록 촉구하는 데 의의가 있다”며 대한민국이 장애인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 법조계 “접근권 실질적 보장 위해 장애인등편의법 및 시행령 개정돼야”
소송대리인이었던 한상원 공익법단체 두루 변호사는 대법원판결 평가 토론회에서 “이번 판결은 장애인의 접근권이 기본권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는 점을 처음 확인했다는 점과 ‘부진정 행정입법 부작위’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하였다는 점 등에서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부진정 행정입법 부작위’란 행정부가 법을 만들긴 했지만 그 내용이 불완전하거나 불충분한 경우를 말한다.
한 변호사는 대법원판결의 후속 과제로 “장애인등편의법 및 시행령이 개정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복지부에서 바닥면적 기준을 단계적으로 철폐할 예정이라는 의견을 여러 차례 밝혔지만, 가장 중요한 소급시기 기준에 대해서는 여전히 보류적인 입장을 보였다”며 “새로 건축되는 건축물만을 대상으로 편의시설 설치의무를 부과한다면 시간이 지나도 장애인의 접근권 보장이 어려워진다. 따라서 소급 적용 방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소송 중이던 2022년 4월 27일 편의시설 설치의무 대상시설에서 제외되는 바닥면적 기준이 기존 300㎡ 미만에서 50㎡(약 15평) 미만으로 축소됐다. 그러나 이 기준은 2022년 5월 1일 이후에 건축행위가 있는 경우에만 적용 대상이 되어 현실적으로 장애인 접근권에 개선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 장애계 “판결이 문서로만 남지 않도록 정부가 책임져야”… 복지부 “면적 기준 폐지 점차 확대 예정”
김성연 장추련 사무국장도 “법이 문제다. 장애인등편의법은 접근권을 보장하는 법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장벽을 만들고 있는 법”이라고 지적했다.
김 사무국장은 “2021년, 정부에서 바닥면적 기준을 줄이겠다고 했을 때 강력히 반발을 했었다. 당시 ‘면적 기준을 명확히 폐지하고 그다음에 소규모 사업주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보건복지부는 사업주들의 입장을 더 고려하며 입법을 강행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이제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이 판결을 얼마나 실효성 있게 이행하느냐이다. 이 역사적인 판결이 문서로만 남지 않도록 보건복지부를 비롯한 각 행정부처들이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춘희 보건복지부 장애인권익지원과 과장은 “대법원판결의 취지를 공감하며, 이를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속한 후속 조치를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며 “장애계, 학계, 현장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단을 꾸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장애인 당사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하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장애인등편의법을 개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이 이야기한 면적 기준 폐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공감하지만 쉽지 않은 과제”라며 “작년 9월에 의원, 한의원, 치과의원, 산후조리원 등의 면적 기준을 삭제하는 등 장애인등편의법이 개정됐다. 이를 시작으로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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