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복수해달라.”
장애빈민운동가 최정환 열사 30주기 추모제 열려
여전한 장애인, 노점상에 대한 탄압과 폭력
“열사 살아있다면 ‘윤석열 파면’ 외쳤을 것”

 21일 오후 3시, 최정환 열사 30주기 추모제가 진행됐다. 최정환 열사의 영정 앞에 향과 국화꽃들이 놓여있다. 사진 김소영
21일 오후 3시, 최정환 열사 30주기 추모제가 진행됐다. 최정환 열사의 영정 앞에 향과 국화꽃들이 놓여있다. 사진 김소영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복수해달라.”

서초구청의 폭력적인 노점 단속에 항의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당긴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의 유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30년이 되는 21일 오후 3시, ‘장애인거주시설 인권참사 해결을 위한 농성장’이 있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최정환 열사 30주기 추모제가 진행됐다.

정부서울청사가 있는 광화문 앞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이들이 차린 농성장들이 줄지어 있다. 장애인들도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복수해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난 최정환 열사가 살아있었다면,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 대통령이 여전히 대통령으로 남아있는 오늘의 현실에 어떻게 맞섰을까. 잘 ‘복수’하기 위해 살아남은, 남겨진 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최정환 열사 30주기 추모제 참석자들이 민중의례 순서에서 주먹 쥔 손을 높이 들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사진 김소영
최정환 열사 30주기 추모제 참석자들이 민중의례 순서에서 주먹 쥔 손을 높이 들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사진 김소영

- 살고자 했던 자, 저항을 위해 죽음을 택하다

1958년에 태어난 최정환 열사는 어린 시절 보육원에 맡겨졌다. 성인이 되어 보육원을 나온 그는 21세에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마비를 입고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1985년, 27세에 신문광고를 통해 어렵게 아버지를 찾았으나 아버지는 그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호적상으로 아버지가 있어 생활보호대상자(현 기초생활보장수급자)가 될 수 없었다. 별다른 기술이 없던 그는 다방을 돌며 껌을 팔거나 시장에서 수세미를 팔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천동 근처에서 월세 10만 원짜리 집을 얻어 노점을 시작한다.

삼륜오토바이에 카세트테이프와 스피커, 배터리 통을 실었다. 그는 양재역 부근에서 스피커와 배터리를 단 삼륜오토바이로 테이프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1994년 6월, 서초구청의 폭력적인 노점상 단속으로 왼쪽 다리마저 부러졌다. 거리에서 돈을 벌며 보냈어야 할 3개월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리고 1995년 3월 8일 저녁, 서초구청의 무자비한 단속이 또다시 그의 삼륜오토바이를 덮친다. 단속반은 스피커와 배터리 등을 그에게서 빼앗아 갔다. 그는 그날 밤, 곧바로 서초구청을 찾아갔다. 단속에 항의하고 생계가 걸린 빼앗긴 물건들을 되찾아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구청에서 물건들을 되찾기는커녕 공무원들에게 심한 모멸감만 받게 된다. 분에 차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구청을 내쫓기듯 나온 그는 준비해 간 시너 1리터를 몸에 쏟아붓는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불을 당겼다.

이후 13일 동안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맸다. 그는 곁을 지키던 동료 장애인 노점상에게 “4백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내 한 몸 죽어도 좋다. 복수해달라”는 말을 남긴 채 3월 21일 오전 1시 50분 눈을 감는다.

최정환 열사의 분신은 가난한 자들의 투쟁을 촉발했다. 수천 명의 장애인과 노점상, 도시 빈민, 학생, 노동자들이 종묘공원과 성균관대 그리고 연세대에 모여 거세게 항의했다. 그동안 은폐되어 있던 장애인 노점상 등 가난한 이들의 문제가 화염병과 뒤섞여 터져 나왔다. 이를 계기로 김영삼 정부에 맞선 대대적인 대중투쟁이 전개된다.

김종환 장애해방열사_단 활동가(왼쪽)와 이혜규 노동가수(오른쪽)가 함께 추모공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진 김소영
김종환 장애해방열사_단 활동가(왼쪽)와 이혜규 노동가수(오른쪽)가 함께 추모공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진 김소영

- “최정환 열사 살아있다면 ‘윤석열 파면’ 외쳤을 것”

그로부터 서른 해가 지났다. 당시 전국노점상연합회 부의장이었던 김흥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고문은 30주기 추모식에 참석해 최정환 열사를 “고집스러우면서도 고운 사람”으로 기억했다.

김 고문은 “최정환 열사는 원래 양재역이 아니라 성내역(현 잠실나루역)에서 노점을 했었다. 성내역에서 장사가 아주 잘됐다. 그런데 본인보다 더 형편이 어려운 중증장애인 동료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단속이 심한 양재역으로 가 장사를 하다가 결국 분신으로 항거했던 고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전했다.

그는 “최정환 열사 투쟁이 노점상 철거민들과 장애인들이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오늘에까지 오고 있다. 최정환 열사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이라며 “최정환 열사가 ‘복수해달라’고 한 이야기 잊지 말고 계속 투쟁해 가자”고 힘차게 이야기했다.

김병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해방열사정신계승위원회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김병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해방열사정신계승위원회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30년 전 투쟁에 함께했던 김병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해방열사정신계승위원회 위원장은 어느새 하얗게 센 머리로 발언에 나섰다.

김 위원장은 “최정환 열사는 전신 86%의 화상을 입었다. 그 고통 속에서도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내 한 목숨 죽어도 좋다. 복수해달라’고 천천히, 알아듣기 어려운 목소리로 이야기하셨다. 최정환 열사의 유언은 살아오면서 겪었던 억압과 차별에 대한 응축된 저항과 분노의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바꿔 달라는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정환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어떠한가. 윤석열이 한밤중에 계엄을 빙자한 내란 폭동을 일으켰다. 지금도 우리는 생존권을 위해 여전히 거리에서 노점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노점에 대한 강제 탄압이 자행되고 있다. 그리고 장애인의 노동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탈시설할 권리를 위해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싸우고 있다”며 “오늘 최정환 열사가 있었다면 ‘민중의 생존권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 정권은 파면돼야 한다’고 이야기할 것 같다. 윤석열이 파면되는 그날까지 함께 투쟁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헌화하는 박김영희 장애해방열사_단 대표가 최정환 열사의 영정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김소영
헌화하는 박김영희 장애해방열사_단 대표가 최정환 열사의 영정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김소영
최정환 열사 30주기 추모제 참석한 이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최정환 열사 30주기 추모제 참석한 이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이날 추모제에 참석한 이들은 분향과 헌화로 최정환 열사 30주기 추모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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