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 성을 밝히고 재생산에 올라타다
[좌담회]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젠더 관점을 진단하다 ②

《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젠더 관점을 진단하다’ 좌담회 》
① 장애인운동 현장의 젠더 불평등을 말하다
▶ ② 젠더 관점 부족한 장애인운동, 동의하는 단 한 사람 어딨나요?

좌담회 사회를 맡은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대표. 사진 강혜민
좌담회 사회를 맡은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대표. 사진 강혜민

부모운동과 발달장애인의 성

진희: 섹슈얼리티를 논의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안이 ‘발달장애인의 성적 권리’다. 그런데 이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제일 먼저 부모나 주변의 지원인들과 부딪히게 된다. ‘성적 권리’라는 말을 쓰더라도 결국 ‘문제적 행동’을 어떻게 통제할지, ‘규범적 성교육’이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하게 된다. 주변인이 통제적인 성규범을 가진 발달장애 여성들은 ‘손만 잡아도 임신하나 봐’, ‘남성과 성관계하면 죽는대’라는 말을 많이 한다. 자립생활운동에서 부모는 조력자이지만 어떤 면에선 장벽이기도 한 것 같다. 

다운: 부모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면 정상가족을 넘어선 섹슈얼리티에 대해 급진적으로 이야기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운동은 자녀에 대한 모부성을 기반으로 강력한 결집력을 지닌다. 그런데 모부성이 장애인 자녀에게는 보호·통제로 작동하는 경우도 있어서 ‘양날의 검’ 같다.

진희: 장애인운동에서 성에 관한 문제 호소는 주로 어머니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한다. 이는 바로 양육에 구체적으로 개입하는 사람이 여성이라는 증거일 수 있다.

다운: 경제력에 따라 가부장제가 영향을 미치는 모습은 가정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난한 가정일수록 남성은 위험해도 많은 시간 일해서 돈 벌 수 있는 일을 택하고, 여성은 수입이 적어도 양육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가난하지 않은 가정이어도 마찬가지다. 남성은 경제력을 쥐고, 여성은 자녀에 대한 돌봄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된다. 

좌담회가 진행하는 동안 타플렛 피씨를 이용해 꼼꼼히 필기하고 있는 한 활동가의 손. 사진 강혜민
좌담회가 진행하는 동안 타플렛 피씨를 이용해 꼼꼼히 필기하고 있는 한 활동가의 손. 사진 강혜민

‘어쩌다 보니’ 장판 리더는 다 남성이더라

진희: 장애인운동 현장에는 주로 여성 활동가들이 활발하게 목소리 내고 활동에 참여하지만, 집행부에는 남성의 비율이 높다. 

아라: 기자회견 발언자나 인터뷰이를 섭외하고 보면 다 남성이어서 종종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수경: 기자회견을 구성할 때 대표자를 중심으로 섭외하는데 대부분 남성이다. 한자협(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전체 회원센터 90개소 중 여성 소장이 있는 곳은 14곳 밖에 없다. 정말 세상에 장애여성이 그렇게 없는 걸까? 이에 대해 기시감을 느끼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도 문제다. 여성 소장이 45명이 될 때까지 비례대표 할당제처럼 적극적 조치를 해야 하지 않는가.

다운: 언젠가 전장연을 성평등한 조직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누군가 ‘전장연은 여성동지들이 상위문화인 곳이 아니냐’고 하더라. 실제로 여성 활동가들이 과연 ‘상전 노릇’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직함만 달고 모든 일을 도맡아 ‘허드렛일’을 하는지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점이 안타깝다. 센터 소장은 남자, 사무국장은 여자인 것처럼 젠더 역할이 규정되어 있는 느낌이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라는 뉘앙스로 여성 사무국장의 노고를 칭찬하지 않나. 

수경: 맞다. 신입 활동가 때 어떤 교육에 참여했는데 당시 한 강사가 ‘센터의 소장은 아버지고, 사무국장은 어머니’라고 이야기했다. (참여자 모두 탄식)

김상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가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김상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가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상희: 장애여성 중에서도 자신이 리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장애여성 본인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으로 주체로서의 역할을 한 번도 제안받지 못했거나, 비켜나간 적이 많았다면 더욱 리더로 설 수 있다는 상상을 하기 힘들 것 같다. 또 장애여성이 충분히 리더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활동 경력이 조금 더 높은 장애남성이 있다면 그 남성이 너무나 당연하게 ‘장’급의 직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봤다. 마치 가부장제 가족 안에서 가부장이 초라해 보이면 큰일 날 것처럼, 기관의 장은 장애남성이 해야 하고, ‘남성의 권위’가 돋보이게 해야 한다는 구조가 깔려있다. 이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본다. 

진희: 장애인운동에서 장애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는 포스트 리더가 없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 과거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여성 리더들을 되짚음으로써 지금의 여성 리더들을 지원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과거보다 구조나 체계가 탄탄해진 지금, 장애인운동은 장애여성 활동가들이 리더로서 더 성장하고 뛸 수 있는 필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남성들의 축 처진 어깨’를 돌보는 여성 활동가들의 감정노동

수경: 저는 여성들이 야망을 품지 못하게끔 만드는 구조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매번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 말하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다운: 남성들의 상처까지 생각하는 착한 마음 때문이 아닌지. ‘남성들의 축 처진 어깨’를 보고 싶지 않다. 말하면 보나 마나 상처받을 게 뻔해서. 

김수경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활동가가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김수경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활동가가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수경: 젠더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하면 심장부터 벌렁벌렁 뛴다. 적절하고 현명한 방식을 취했는지, 충분히 맥락에 맞는 말인지 끊임없이 자기검열 하다가 결국 말하지 않게 된다. 어쩌다가 젠더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런 운동 하고 싶으면 여성단체로 가라’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 장애인 자립생활운동이 좋고, 더 잘하고 싶어서 이야기한 건데… 그래서 이번 좌담회에 참여하면서 제 고민이 정말 장애인운동의 맥락에서 벗어난 고민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진희: 중요한 고민이다. 저도 그런 압박이 있다. 젠더 이슈를 이야기한다는 건 일단 분위기부터 깨는 느낌이다. 젠더 문제를 제기하려면 매우 조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수많은 논거를 준비해야 하지 않나. 이미 불평등한 위치에 서 있다.

아라: 논리정연하게 말하려면 많이 알고 공부해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으니 젠더 문제는 부차적 일로 미뤄지게 된다. 

수경: 저는 때에 따라 여러 포지션을 취한다. 젠더 문제와 마주할 때 어떨 때는 못 들은 척하거나, 혹은 웃으면서 ‘직장 내 성교육 들으셨나요?’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오래 활동한 여성활동가들에 대해 ‘젠더 문제에 대해 왜 안 싸우지?’라는 물음이 들었는데, 저 또한 점점 싸우지 못하게 되는 느낌이다. 조직에서 직접 마주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문제제기하기 어렵다. 

다운: (수경과 같이)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여성 활동가에게는 중년 남성들의 긴장감이 더 떨어지는 문제도 있는 것 같다.

아라: 기분 상해서 요청하는 자료를 안 줄까 봐 혹은 관계가 깨지면 비협조적일까 봐 ‘관계의 을’을 스스로 자처하게 된다. 

진희: 연대와 협력이 중요한 운동의 특성상 더 이야기하기 어려운 이유도 있다. 다운 님이 앞서 언급한 ‘남성들의 축 처진 어깨’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결국 여성 활동가들의 감정노동과 연결된다. 

아라: 운동에 있어 많은 실무를 하다 보면 감정노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잘 할 수 있게 하려면 서로의 감정을 돌보는 일이 필요한데, 그 일은 주로 여성 활동가들이 많이 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노동은 노동이 아닌, 여성의 당연한 몫으로만 여겨지는 것 같다.

진희: 이런 분위기가 바로 ‘젠더 불평등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운동 안에서 젠더 불평등 문제를 포착하기도 어렵고, 포착되더라도 말하기 어렵다. 공동체가 문화적으로 변화해야 할 부분이다.

‘박원순 사건’을 둘러싼 긴장감, 젠더 이슈는 장애인운동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수경: 지난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사망했을 때 조직 내 분위기로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한 인권단체가 박원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와 연대하겠다는 성명을 내면서 전장연에도 연명을 제안했다. 전장연은 이제껏 수많은 연대단체에서 연명 요청이 오면 어렵지 않게 연명했는데, 이 연명에 대해서는 망설이다가 시간을 놓쳐 결국 못했다. 당시 왜 다들 긴장감만 느끼고 충분하게 논의하지 못했는지 물음이 끊이지 않는다.

정다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가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정다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가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다운: 전장연이 충분히 입장을 낼 수 있는 주제임에도, 논의하고 토론하지 못하는 조직 문화로 인해 입장을 내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조직 문화를 바꿔보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장연의 ‘성평등위원회’는 원래 ‘반성폭력위원회’였다. 그런데 당시 위원회가 처벌의 역할만 할 뿐, 성차별적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래서 위원회의 명칭을 바꾸고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해보자고 결의했다. 조직 안에 위원회를 활발히 운영할만한 인력이 없어서 일을 제대로 못 하고 있지만….

진희: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하는 단체라고 하지만 선명한 이슈 중심으로만 입장을 내는 것 같다. 젠더 이슈는 민감하고 토론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서, 이를 장애인운동 안에서 어떻게 다룰지 잘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젠더 이슈들은 대부분 성평등위원회의 몫으로만 몰리고 있고, 전체 구조적 고민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상희: 진보적 장애인운동 안에서 젠더 이슈는 ‘구색 맞추기’처럼 여겨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장애여성운동’은 전체 진보적 장애인운동에서 하나의 퍼즐 조각 같다. 퍼즐 조각 하나 없다고 해서 전체가 무너지는 건 아니다. 다만, 진보적 장애인운동이 완성되지 못할 뿐이다.

서로에게 힘이 되는 단 한 사람이 되었으면

진희: 이제 좌담회를 마무리해야 한다. 이번 좌담회에 참여한 소감을 한마디씩 해 달라. 

다운: 사실 장애인운동 안에서 왜 젠더 이슈는 의제화되지 못하는지 오랫동안 생각만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잊고 있었다. 이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너무 일적으로만 접근하게 되고, 별도의 정성이 들어가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좌담회에 참여하게 되면서 기존의 고민을 더 확장하고 구조화할 수 있었다. 

상희: 제 활동에 있어 뒤를 돌아보게 된 계기였다. 저도 그동안 어렴풋이 고민했지, 구체적으로 고민해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실제로 머릿속에서만 있던 고민을 발현하게 되어 너무 좋았다.  

좌담회에 참석한 여성 활동가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강혜민
좌담회에 참석한 여성 활동가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강혜민

아라: 평소 ‘젠더 감수성과 장애 감수성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오늘에야 특히 와닿는 것 같다. 여성 증언자, 발언자를 찾기 힘든 탈시설 운동에서 앞으로 장애여성분들을 적극적으로 더 만나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장애여성의 언어를 부지런히 기록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분들을 만나 자신의 기록이 남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경험하게 해드리고, 사회적 발언의 기회를 더 많이 드리고 싶다. 

수경: 예전에 페미니즘 이슈에 크게 관심을 두게 되면서 많이 날카로워졌던 적이 있다. 그런데 장애인운동을 만나고 ‘소수자의 차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고 난 뒤로부터는 어떻게 하면 타자에게 잘 전달하고 변화를 일으킬지 고민하게 되었다. 이번 좌담회를 하면서 그때만큼의 충격과 파장이 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장애인운동에서 건강하게 젠더 이슈를 잘 녹여낼지 고민하게 된다. 언젠가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듣자고 제안했을 때 한 사람이 동의해 준 경험이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동의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만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조직에서 말하기 어려운 것들에 대해 조금 더 편해지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서로에게 그 한 명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희: 이번 좌담회를 하면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폭발적으로 말문이 터졌다가도, 사안에 대한 분석이나 대안은 제시할 수 없었던 한계도 있었다. 그러나 장공감이 아닌, 다른 장애인단체 활동가들과 이런 이야기들을 두 차례에 걸쳐 진솔하게 나눈 것 자체가 큰 의미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논의가 더욱 의미 있도록, 지금 당장 반영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 변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보자.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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