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CRPD 비준했지만 이행 않는 정부
UN 직권 조사 가능한 선택의정서 비준, 지지부진
장애계, 세계 장애인의 날 맞아 정부·국회 규탄
한국은 12년 전인 2008년에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아래 CRPD)를 비준했다. CRPD는 국제 인권법에 따른 인권 조약으로,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체결된 유엔 인권협약이다.
이 협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 우리나라 헌법 제6조 1항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돼 있다. 즉, 한국은 CRPD를 국내법과 동일하게 이행해야 한다.
하지만 CRPD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 9조(접근성)에 따르면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못 가는 곳은 없어야 한다. 19조(탈시설 자립생활)가 이행됐다면 시설에 갇혀 사는 장애인이 아무도 없어야 한다. 정부는 왜 CRPD 비준을 해놓고 이행하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정부가 선택의정서를 비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택의정서는 CRPD를 비준한 나라가 장애인을 차별했을 때, 차별당한 사람이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에 진정을 넣을 수 있게 하는 협약 부속 문서다.
예를 들어 “한국이 CPRD를 완전히 이행하지 않고 한국 국회가 법을 바꾸지 않아서 휠체어 이용자인 제가 한국에서 카페, 식당, 병원에 가기가 너무 힘듭니다”하고 유엔에 알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유엔이 한국에서 일어난 장애인 차별을 직권 조사할 수 있다.
이렇듯 정부가 선택의정서를 비준해야 CPRD가 국내에서 더 강한 법적 강제력·구속력을 가질 수 있다. 국내 장애계는 지난 12년간 선택의정서 비준을 촉구했고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도 2014년에 한국 정부에 선택의정서를 비준하라고 권고했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이에 장애계는 세계 장애인의 날인 3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선택의정서 비준 △긴급 탈시설 및 탈시설 지원 정책 즉시 마련 △장애성인 교육권 보장 △중증 장애인 노동권 보장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촉구했다.
- 21대 국회, CRPD 실현 위해 탈시설법 제정·선택의정서 비준해야
선택의정서는 정부가 서명하고 국회가 동의하면 비준이 완료된다. 윤종술 한국장애포럼 상임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부와 국회가 조속하게 선택의정서를 비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윤 상임대표는 “유엔에 진정이 접수되면 유엔이 직권 조사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부담을 느끼는 것인가. 국가인권위원회도 선택의정서 비준을 권고했는데 왜 아직까지 비준하지 않나. 선택의정서 비준은 CRPD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며 한국이 국제 협약 기준에 부응하는 정책을 실현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21대 국회는 선택의정서를 비준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21대 국회의원을 향해 선택의정서를 비준하자고 했다. 장 의원은 “모든 의원에게 촉구한다. 선택의정서를 비준해야 12년 전 약속을 지킬 수 있다. 이 자리에서 호소드린다”고 전했다.
또한 “첫 코로나19 사망자인 청도대남병원 정신장애인은 그곳에서 20년간 살았다. 12년 전 약속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그분은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 CRPD 19조에는 자유로운 삶, 시설 밖에서의 삶, 장애가 있든 없든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권리가 명시돼 있다. 장애인 탈시설 지원법, 이번 21대 국회에서 제정하겠다. 부당하게 권리를 박탈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길에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장 의원이 말한 ‘장애인 탈시설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아래 탈시설지원법)’을 이달 중 대표 발의하는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법안을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말했다.
최 의원은 “그 지역에서 나고, 자라고, 살아가는 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인데 많은 장애인이 그러지 못하고 있다. 이번 달 10일에 장 의원과 함께 탈시설지원법을 발의하려고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통과시키겠다. 시설에 사는 많은 장애인이 지역사회로 나와서 이웃, 가족과 함께 살려고 한다. 응원해 주고 힘을 모아 달라”라고 호소했다.
- 이동, 교육, 노동… 여전히 차별받는 대한민국 장애인의 현실
정부는 탈시설뿐 아니라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등 여러 분야에서 CRPD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기자회견 참가자는 각 권리의 실현이 어떻게 가로막히고 있는지 증언했다.
CRPD 9조 ‘접근성’ 조항에는 “당사국(CRPD를 비준한 국가)은 장애인이 자립적으로 생활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물리적 환경, 교통, 정보와 의사소통, 기타 시설 및 서비스에 대한 접근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저상버스가 100% 도입되지 않는 등 장애인의 이동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문애린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이런 현실을 지적하며 “장애인이 코로나19에 감염되면 치료를 받으러 갈 수조차 없다. 길거리에 흔하게 있는 택시도 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대한민국 장애인이동권의 현실”이라고 규탄했다. 또한 “장애인이동권을 요구한 지 20년, 선택의정서 비준을 촉구한 지는 12년이 됐다. 정부는 생색만 내지 말고 CRPD를 완전히 이행해 주길 다시 한번 요청한다”고 촉구했다.
장애인은 교육권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배미영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서울지부장은 “전체 장애인 중 54.4%는 중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갖고 있다. 전체 국민 중 중졸 이하의 학력은 12%다. 장애인은 4.5배 이상 높은 심각한 학력 소외 현상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배 지부장은 온라인 비대면 교육의 허점을 지적하며 “CRPD 24조는 장애인이 차별 없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온라인 강의 시스템에서 장애인에게 편의가 제공된 적은 없었다. 국가는 ‘포스트 코로나(코로나 이후)’가 아니라 ‘위드 코로나(코로나와 함께)’를 생각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장애인이 원활히 교육받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는 CRPD 27조에 따라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전국적으로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장애 때문에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장애인이 약 70%다. 장애인에게 맞는 옷을 주고 입으라고 해야 하는데 맞지도 않는 옷을 주고 입으라고 하면 어떻게 입을 수 있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서는 최중증 장애인이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장애인 권리옹호, 문화·예술 활동, 장애인식 개선 활동 등 당당하게 노동하고 있다. 정부는 중증장애인에게 맞는 일자리가 더 확대될 수 있도록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전국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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