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손가락 절단된 HIV 감염인, 병원 20곳에서 수술 거절당해 
“아파도 차별 두려워 병원 못 가”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차별 진정

19일 오후 2시 레드리본인권연대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은 서울시 중구 인권위 앞에서 HIV 감염인의 차별 진정 및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전면 장애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이가연
19일 오후 2시 레드리본인권연대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은 서울시 중구 인권위 앞에서 HIV 감염인의 차별 진정 및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 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이가연

장애계와 HIV 인권운동 활동가들이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에 HIV 감염인에 대한 장애인정을 촉구하며 차별 진정을 제기했다. 

19일 오후 2시 레드리본인권연대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은 서울시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HIV 감염인의 차별 진정 및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전면 장애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차별에 보호망 없는 HIV 감염인, 장애인차별금지법 장애인정 필요해

올해,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13주년을 맞았다. 특히 올해부터 장애인정 기준이 확대됨에 따라 지체장애 유형에 CRPS(복합부위 통증 증후군), 안면장애 유형에 백반증, 정신장애 유형에는 투레트 증후군 및 기면증 등 10가지 질환이 장애의 범주에 추가됐다. 이와 같이 앞으로도 법령에 명시되지 않은 다양한 유형의 질환이 장애로 인정될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HIV 감염인은 장애의 범주에 속하지 못해 감염을 이유로 사회적 차별을 당하고 있다. 

작년 9월, 공장에서 일하던 HIV 감염인 ㄱ 씨는 엄지손가락이 절단되어 20여 개의 병원을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병원에서 거절당한 뒤, 사고 후 13시간이 지나서야 노원구의 한 병원에서 수술 받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피해자는 현재 손가락을 굽힐 수 없는 상태다. 오늘 장애인 차별 진정을 제기한 ㄱ 씨는 그동안 겪은 심리적 어려움으로 인해 기자회견에 함께하지 못했다. 

차명희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 상담소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차명희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 상담소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차명희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 상담소장은 “당시 ㄱ 씨가 에이즈 치료를 위해 약을 처방받던 감염내과가 있는 국립의료원에서도 수술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 순간 ㄱ 씨는 그동안 의지했던 믿음이 깨지면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고 했다. 어떤 병원에서는 ㄱ 씨가 수술 대기 시간 동안 침상에 잠시 누울 수 있겠냐고 묻자, 머리가 깨지지 않는 이상 누우면 안 된다고 했으며, 결국 제대로 된 수술을 받지 못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차 상담소장은 “HIV 감염인도 인간이다. 급한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수많은 의료기관들은 HIV 감염인들을 거절하지 마라”라고 말했다. 

지난 2019년 1월 28일, 인권위는 ㄱ 씨와 유사한 사례에 대해 ‘장애인 차별’이라고 결정한 바 있다. 당시 HIV 감염으로 인해 시력손상과 편마비가 찾아온 ㄴ 씨는 재활치료를 받기 위해 국립재활원을 찾았지만, 입원을 거부당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HIV 감염인을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규정한 장애인이라고 보고, 이를 장애인 차별이라고 결정했다. 장애를 의료적으로 규정한 장애인복지법과 달리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는 ‘신체적·정신적 손상 또는 기능상실이 장기간에 걸쳐 개인의 일상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초래하는 상태’로 폭넓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HIV 감염인 및 에이즈 환자를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인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혀 반쪽짜리 결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염형국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염형국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가 2019년 HIV 감염인이 장애인차별금지법상의 장애인 차별로 인정받은 사례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감염인에 대한 노골적 차별… “거절 두려워 아파도 병원 못 가”

한울 대구경북 HIV/AIDS감염인 자조모임 해밀 대표는 병원에서의 잦은 진료 및 수술 거절로 인해 병원에 가기 두렵다고 전했다. 

한 대표는 “병원에서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인 차별을 당해도, 법적대항을 전혀 할 수 없어서 병원의 횡포를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다”라며 “집 가까운 병원에서는 의사가 아예 면담조차 거절했다. 한 병원에선 수술을 거부할 때에 가족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 정보가 밝혀지는 바람에 너무 힘들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지금도 병원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을 정도다. 제발 장애인이라는 보호 아래, 병원이라도 편하게 갈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달라”라고 요구했다.

윤가브리엘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대표 또한 “언젠가 이국종 의사가 티비에 나와 ‘에이즈환자인지도 모르고 수술을 한 적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과연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도 수술했었을지를 묻고 싶다”라며 “에이즈 환자에 대한 수술은 무용담이 아닌, 의사로서의 당연한 의무다. 손가락 절단 수술을 거부한 20곳의 의사들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의사가 되었나”라고 되물었다. 

윤가브리엘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윤가브리엘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공공의료병원이 유일하지만, 코로나19 속 거절당해 ‘의료 사각지대’

ㄱ 씨가 수술을 거부당한 병원 중에는 공공의료병원이 두 곳이나 있었다. 그러나 모두 코로나19 전담 병원으로 지정되어 버리는 바람에 인력이 부족하여 수술을 받지 못했다. HIV 감염인은 민간병원에서 거절당할 경우 공공의료병원이 유일한 희망이지만, 이곳에서조차 코로나19 이후에는 거절당하게 되는 셈이다. 윤 대표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매일 늘어나는 추세지만, 정부는 이러한 의료공백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방법을 내놓지 않고 있다”라며 불안함을 호소했다. 

이어 윤 대표는 “우리 HIV 감염인도 사람이다. 약만 잘 먹으면 혈액검사에서 HIV 검출도 안 된다. 그런데 B형 간염, 말라리아 질병과 같이 혈액과 체액으로 전염되는 다른 질병들은 수술 거부 안 하면서 왜 HIV/AIDS만 거부하나. 여전히 80년대의 공포와 낙인의 시대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대표는 “장애를 이유로 차별 받는 사회에서 오늘 우리는 장애인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HIV 감염인이 차별을 겪게 되면, 장애인으로라도 차별 시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다”라며 “지금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또 다른 HIV 감염인들이 계속해서 차별을 겪게 될 것이다. 끝까지 함께 투쟁해서 HIV 감염인이 인간으로서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내자”라고 결의했다. 

따라서 이들 단체는 인권위에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 정의를 보다 사회적이고 포괄적으로 해석해 HIV 감염인을 장애인으로 인정할 것 △HIV 감염인이 겪는 차별을 장애로 명확히 인식하고, 감염인을 향한 차별행위 구제를 위해 적극 나설 것 등을 요구하며, 차별 진정을 제기했다. 

기자회견에 참여한 사람들이 인권위 앞에서 ‘HIV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다. 정부는 적극 구제하라!’, ‘HIV 감염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라!’ 등이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이가연
기자회견에 참여한 사람들이 인권위 앞에서 ‘HIV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다. 정부는 적극 구제하라!’, ‘HIV 감염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라!’ 등이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이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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