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내 삶을 내 손에 움켜쥐고 _ 박명애 ②

《 박명애 _ 내 삶을 내 손에 움켜쥐고 》
① 등에 기대어 어린 세상을 살다 
② 기쁨도 불편도 없이, 살아왔던 대로

- 불도저에 몸을 싣고

저는 한국SGI불교회라는 종교를 갖고 있어요. 가족 중에 엄마와 저만 그 종교를 갖고 있었는데 남동생이 제대하니까 엄마가 교단에 포교를 부탁했어요. 동생에게 포교하러 온 우리 아저씨를 그렇게 처음 만났어요. 몇 차례 다녀가고는 아무 일 없이 세월이 흘렀는데 그분이 엄마한테 느닷없이 나를 사귀어볼 수 없느냐고 했대요. 엄마가 놀러 오라고 해서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그분은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했는데 퇴근하면 일주일에 한 번씩 나를 만나러 왔어요. 그런 게 연애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만났어요. 아저씨가 말하면 겨우 대답이나 할 정도였지 대화라고 할 것도 별로 없었어요. 그렇게 1년쯤 흘렀을까. 우리 아저씨가 엄마한테 결혼 이야기를 꺼냈나 봐요.

꿈에서도 결혼이나 독립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30년을 그렇게 살면서도 그 삶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막상 결혼하자는 사람이 나타나니까 그때까지 아무 불만도 아니었던 것들이 불만으로 변하면서 집을 떠나고 싶어졌어요. 결혼이라는 게 핑크빛으로 보여서가 아니라 왜인지 지금과는 다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내 몸에 자신이 없어서 “예, 결혼합시다”라고 한 번도 제대로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론 결혼이 하고 싶었어요. 아버지는 반대했어요. 당신이 저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동생들도 그냥 자기들이랑 같이 살자고 했어요. 고모와 큰엄마는 그래도 결혼은 한 번 해봐야 된다고 하시고 엄마는 하면 좋겠지만 내가 아무것도 못하는데 어떻게 살겠냐고 하셨어요.

1986년 남편과 해운대 조선비치 앞에서. 남편과는 1984년 12월 23일 결혼했다. 제공 박명애 
1986년 남편과 해운대 조선비치 앞에서. 남편과는 1984년 12월 23일 결혼했다. 제공 박명애 

장애인 언니들 서너 명을 알고 지냈는데 그 언니들이 내 결혼을 기를 쓰고 반대했어요. (웃음) 결혼하면 상처만 입는다고 했어요. 모두 걸어 다니는 경증 장애인들이었는데 동네 수예점에 모여 뜨개질도 하고 교회도 함께 다니는 사람들이었어요. 내가 수긍을 잘 안 하니까 1박 2일 교회 행사에 데려가서 집중적으로 설득할 정도였어요. 그 언니들이 여수 애양병원에 가면 장애를 낫게 하는 수술을 받을 수 있다면서 결혼하지 말고 수술을 하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그 병원에 갔었어요. 그런데 의사가 내 다리는 수술한다고 나아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대신 척추측만이 심해지는 걸 지연시키도록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하자고 했어요. 날짜까지 잡고 돌아왔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너무 무섭더라고요. 아는 언니도 철심을 박았다가 너무 아파서 결국 제거했다는 말을 듣고는 겁이 나서 수술을 안 받았어요. 남편은 내가 수술해서 나아지면 자기와 결혼 안 할 것 같아서 병원에 갈 때부터 마음이 안 좋았대요. 그런데 나는 수술해서 나아지면 결혼해도 함께 살기가 더 낫지 않을까 싶었던 거예요. 결국 수술 안 하고 결혼했죠. 그 언니들이 나를 되게 나무랐어요. (웃음)

남편은 불도저 같은 사람이었어요. 내가 강하지 못하니까 남편처럼 강한 사람이 좋았어요. 뭔가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하루아침에 아버지한테 막 대들면서 나가겠다고 말할 용기도 없었고 집이 시끄러워지면 고생하는 건 엄마였어요. 선뜻 나서기 어려운 핑계가 많았는데 남편이 밀어붙여서 아버지 허락을 받아냈어요. 여러 사람 앞에서 뭔가 하는 게 부끄러워서 결혼식을 꼭 해야 되나 싶었는데 남편이 해야 한다고 했어요. 결혼을 앞두고 휠체어를 처음 샀어요. 1984년 12월 23일에 결혼식을 했어요.

남편이 신혼여행도 꼭 가야 한다고 해서 부산으로 갔어요. 부모·형제가 아닌 사람과 집을 떠난다는 건 생각도 못한 일이었어요. 동생들이 집안의 자가용을 빌려와 우리를 부산에 데려다주고 떠난 후엔 우리 둘이 다녔죠. 용두산 공원도 가고 국제시장도 갔죠. 업혀서 택시도 타야 하고 화장실 가는 것도 큰 문제였는데, 남편이 오래 알았던 사람처럼 어렵지 않았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결혼이었으니 고생스럽지도 않았어요. 그게 나의 첫 독립이에요.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세상을 완전히 몰랐으니까요.

지난 2월, 대구의 한 카페에서 홍은전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박명애 대표의 모습
지난 2월, 대구의 한 카페에서 홍은전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박명애 대표의 모습

- 연탄보일러와 세상구경

친정집 위층에 방이 있어서 부모님이 거기서 살라고 했는데 그러기 싫었어요. 친정 가까이 전셋집을 구했어요. 독립해 나오니까 현관문부터 걱정이었어요. 문고리가 내 손에 닿지 않으니까 내가 안에 있어도 잠그거나 열 수가 없었어요. 남편이 출근할 때 밖에서 잠그고 나갔어요. 손님이 찾아오면 엄마가 와서 열어줬고요. 결혼 반대했던 그 언니들이 놀러 와서는 거봐라, 이래서 우리가 결혼을 못 하게 말렸던 거다, 네가 집 지키는 강아지냐, 했어요. 그런데 나는 어차피 혼자 나갈 수도 없었고 또 평생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런 생활이 불편하지 않았어요.

내가 정말로 불편했던 건 연탄보일러였어요. 남편이 퇴근할 때쯤 되면 연탄보일러의 불이 꺼지거나 간당간당하게 꺼지기 직전이었어요.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오면 남편도 쉬고 싶을 텐데, 그 시간에 와서 불 피우려고 애쓰는 걸 보면 저런 것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어요. 어렸을 때부터 엄마 혼자 동동거리는 걸 보면서도 도와주지 못하니까 자꾸자꾸 용기가 꺾였는데 결혼해서도 나는 못하는 게 참 많다는 걸 확인해야 하는 게 괴로웠죠.

시가에서는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어요. 나는 부모님한테 결혼하고 싶다고 한 번도 제대로 풀어서 말해 보지 못했는데 남편은 자기 가족들한테 이 결혼에 반대하지 못하도록 다 만들어놨더라고요. 남편은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는데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돈을 벌면서 공부했다고 했어요.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게 아니라서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했던 것 같아요. 활동적이고 가정적인 사람이었어요.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일도 없었어요. 퇴근해 집에 오면 한시도 쉬지 않고 바람 쐬자면서 나를 데리고 나갔어요. 우리 집이 4층이었는데 한 손으론 나를 업고 한 손에는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갔어요. 대구 시내를 샅샅이 돌아다녔어요. 수성못에도 가고 포장마차도 가고 놀이공원도 갔어요. 비행기 모양의 놀이기구를 탔다가 너무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서 다시는 그 근처에도 안 가요. 텔레비전에서 늘 보던 세상이니까 특별히 낯설지는 않고 재밌었어요.

아버지는 내가 업혀서 나가는 걸 싫어하니까 돈이나 벌 것이지 그런 일에 시간 쓴다고 사위를 탐탁지 않아 했어요. 그러든지 말든지 남편은 나를 데리고 나갔어요.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해서 신도들과 같이 어울려 야영도 했어요. 우린 자동차가 없어서 남편이 짐도 지고 나도 업고 밀어야 하는 강행군이었을 텐데도 힘든 내색 하나 없었어요. 친정 식구들은 무뚝뚝하고 말이 없었는데 남편은 많이 달랐어요. 아버지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 엄마가 뭔가 부탁하길 어려워했거든요. 나는 남편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이것저것 부탁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 때마다 전혀 싫어하지 않고 농담까지 하면서 즐겁게 하는 게 신기할 정도였어요. 밖에서 있었던 얘기도 지칠 줄 모르고 신나게 떠들어서 어떨 때는 “그렇게 말을 많이 하면 머리 안 아파요?” 할 정도였어요.

엄마 도움 없이 우리 힘으로 살림을 살았어요. 싱크대가 높아서 쓸 수 없으니까 쌀은 욕실에서 씻고 밥 안치는 건 남편이 했어요. 그릇이나 버너를 내려달라고 해서 고등어 굽고 콩나물 무치고 파김치, 정구지 김치도 만들었어요. 저는 별당아씨처럼 곱게 커서 엄마와 살 땐 전혀 안 하던 일이었죠. (웃음)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시어머니와 같이 살게 됐어요. 우리 집에 방 있으니 같이 살자고 제가 먼저 말했어요. 나를 며느리로 생각하면 친부모님이라도 답답할 테니 몸 불편한 딸이라고 생각하면서 같이 계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니까 어머니가 되게 고마워하셨어요. 그때부턴 어머니가 밥을 하셨어요. 제가 어머니를 모신 게 아니라 어머니가 나를 모신 거예요. (웃음) 같이 산 지 6개월 만에 간경화 진단을 받았어요. 내가 갖고 있던 금목걸이를 팔아서 약을 해드렸는데 열흘 만에 돌아가셨어요. 좋은 분이어서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예요. 나를 모시던 분이 가셔서 나는 좀 어려워졌죠. (웃음)

- 기쁜 줄도 모르고

결혼하고 3년쯤 됐을 때 남편이 배 타는 일을 해봐야겠다고 했어요. 미국도 가고 유럽도 가는 배인데 3년 동안 안 돌아온다고 했어요. 반대했는데 못 말리겠더라고요. 남편 없이 혼자선 살 수 없어서 친정으로 다시 들어갔어요. 그런데 남편이 탄 배가 태풍을 만나서 계획보다 빨리 돌아오는 바람에 부모님, 남편과 함께 친정에서 살게 되었죠.

1987년에 친정에 들어가서 1988년에 아들을 낳았어요. 세 번인가 유산을 해서 못 낳을 줄 알았는데 그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어요. 애를 낳고 일주일 만에 퇴원해 오니까 엄마가 세 살까지는 당신이 키워주겠다고 했어요. 나중에 애가 엄마 방에 알아서 갈 수 있을 때까지라면서요. 낮엔 같이 놀다가 밤에 씻기는 건 할머니가 하고 잘 때도 할머니가 데리고 잤어요. 그런데 진짜 세 살이 되니까 이제부턴 엄마 방에서 자자고 말한 것도 아닌데 희한하게 애가 우유병을 딱 쥐고 엄마 방으로 오더라고요. (웃음)

아들이 7살 때 속초에서 함께. 제공 박명애 
아들이 7살 때 속초에서 함께. 제공 박명애 

90년에 딸을 낳았어요. 하나도 키우기가 힘들어서 둘째는 안 낳을 생각이었어요. 엄마로서 무언가 못해주는 마음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내가 한 살 때 갑자기 열이 나면서 갑자기 장애를 갖게 되었으니 어머니는 손자 열나는 게 참 무서웠을 거 같아요. 늦은 밤 애가 열이 나면 남편과 어머니가 애를 업고 나갔어요. 한의원이나 동네 침술원에 갔겠죠. 어디로 갔는지 나는 몰라요. 핸드폰도 없었으니 연락할 방법도 없고 올 때까지 마음 졸이며 기도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애가 아픈데 병원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게 참 괴로웠어요.

둘째가 생겼을 때 유산 시키면 좋겠다고 했는데 남편은 아들 둘에 딸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둘째는 진짜로 유산을 못 시켜서 낳은 거예요. 임신이 안 되게 하는 수술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알았다면 첫째 낳고 바로 했을 거예요. 그래도 둘째 가졌을 때 사람들이 “하나만 낳고 말지” 하는 소리는 서운하더라고요. 둘째 정도는 다 낳는 건데, 내가 장애인이니까 저런다 싶으니까요. 어떻게든 잘 키워야 한다는 걱정이 앞서서 아이를 낳고도 좋은 줄도 몰랐어요.

우리 애들은 유치원도 자기가 알아서 가방 메고 갔어요. 아침 먹으면 어머니는 상을 치우고 내가 준비시켜서 내보내면 아이가 인사하고 나갔어요. 나중에 세상에 나와서 휠체어 타고 길을 가다 보니까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와 엄마가 많이 보이더라고요. 버스 올 때까지 엄마와 아이가 나란히 이야기하면서 기다리다가 버스 도착하면 선생님이 데리고 올라갔어요. 우리 애는 혼자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겠죠. 그땐 내 눈에 안 보이니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 것도 참 미안해요.

첫째가 입학할 무렵에 남편의 사업이 잘못되었어요. 그 후 10년 가까이 남편은 외지에 살면서 공사현장 같은 데서 일하고 집엔 가끔씩 왔어요. 아이가 입학한 후에 내가 따라다니면서 이런 건 해도 되고 저런 건 조심해야 된다는 걸 알려줄 수 없고, 비가 갑자기 쏟아져도 우산을 갖다줄 수 없었어요. 내가 챙겨줄 수 없으니까 절대로 회장 선거할 때 손들지 말라고 했는데 떡하니 부회장을 맡아온 적이 있었어요. 회장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소풍을 가면 엄마들이 선생님 목욕 보내드리는 돈을 모아야 됩니다” 하더라고요. 그런 거 있을 때마다 돈 보내주는 것밖에 못했어요. 다시는 못하게 했어요. 애들이 더 클 수 있었는데 내가 못 크게 만들었어요.

둘째가 4학년이 될 때까지 친정에 살았어요. 더 일찍 분가해 나왔다면 애들과의 추억이 많았을 텐데 남편 없이 혼자서 아이들을 키울 자신이 없었어요. 결혼 전에는 ‘나는 왜 이런 것도 못할까,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그런 생각을 별로 안 했어요. 그냥 사는 날까지 이렇게 사는 거라고 여겼죠. 그런데 아이들 키우면서 나는 정말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많이 괴로웠어요. 그런 마음을 이야기할 사람도 없어서 더 힘들었는데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생명의 전화’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전화를 걸어서 누군지도 모르는 분한테 이야기를 터놓았어요. 그분과 몇 차례 더 통화했어요. 이름은 잊었는데 그분이 내 얘기를 듣더니 어머니가 긍정적이라 아이들도 괜찮을 거라고 말해줬어요. 죽고 싶어서라기보단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2019년 6월 4일, 탈시설 제도의 초석을 만든 석암재단 투쟁 1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제에서 박명애 대표가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하던 중 활짝 웃고 있다. 
2019년 6월 4일, 탈시설 제도의 초석을 만든 석암재단 투쟁 1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제에서 박명애 대표가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하던 중 활짝 웃고 있다. 

- 택시비를 움켜쥐고

어느 날 아는 언니가 장애인야학이 생겼다면서 한번 다녀보라고 했어요. 그땐 누가 그런 말을 꺼내기만 해도 대번에 “못 간다”는 말이 튀어나올 때였어요. 우리 집에 계단이 다섯 개 있어서 나가려면 누가 업어주어야 했는데 그땐 남편도 없었어요. 얘길 들었던 건 5월인데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몇 개월 동안 생각만 했어요. 11월이 되었을 때 그 학교를 한 번이라도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나는 다녀본 적이 없는 그 학교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어요.

어떻게 갈까 방법을 궁리하다가 비장애인들이 타는 콜택시가 생각났어요. 택시회사에 전화해서 사정을 얘기했는데 기사님이 집에 들어와서 업고 나가는 건 해줄 수 없다고 했어요.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는데 다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러다가 ‘사랑 실은 교통 봉사대’라는 곳을 알게 됐어요. 회사의 수익금 중 일부를 심장병 어린이들을 돕는 데 기부하는 곳이었어요. 전화 받은 아가씨가 “한번 기다려 보세요” 하더니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했어요. 조마조마해 하면서 기다렸는데 잠시 후 “도와주신다고 하네요” 했어요. 너무 기뻤어요. 기사님이 나를 업고 나와서 야학에 데려다주셨어요. 야학이 2층에 있어서 나를 또 업어주고 휠체어도 올려다 줬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마워요.

야학 선생님이 나를 면담하고는 2~3일 후에 연락 주겠다고 했어요. 내가 너무 중증이라 집에 가 있으라고 해놓고 연락이 안 올까 봐 걱정이 됐어요. 처음 야학에 갈 때는 학교가 어떻게 생겼나 보고나 와야겠다는 마음 정도였는데 한번 가서 보니까 두 번째도 가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얼른 연락이 안 왔어요. 2~3일이 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전화했어요. “아무래도 제가 너무 중증장애인이라 좀 어렵겠죠?” 하니까 “아닙니다, 내일쯤 전화 드리려고 했습니다” 했어요. 걱정 말고 오라고 했어요. 그렇게 대구 질라라비 장애인야학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때 내 나이가 마흔일곱이었고 우리 딸이 초등학교 4학년이었어요.

일주일에 세 번 검정고시 수업이 있었는데 야학 가는 일이 나의 가장 신나는 일이 되었어요. 국어, 영어, 수학을 배우는 것도 좋았지만 더 큰 배움은 세상을 알게 된 거였어요. 선생님들이 말하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쏙쏙 들어왔어요. 내가 학교에 다니지 못한 것이 절대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학교에서 배웠어요. 예전엔 데모하는 걸 뉴스에서 보면 나라에 돈이 없어서 그러는 걸 어째 저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어쩌면 이렇게 세상을 모르고 살아왔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는 가슴을 치고 싶었어요.

교통봉사대에서 계속 저를 학교에 데려다주셨어요. 그때 제가 콜번호 ‘180번 아줌마’였어요. 딸이 학교 마치면 야학에 와서 내 휠체어를 밀어줬어요. 수업 마치면 선생님들이 낡은 봉고차로 학생들을 집집마다 데려다줬어요. 두 선생님이 짝을 지어 한 사람은 운전하고 한 사람은 학생들을 태우고 내리는 식이었어요. 우리 집이 학교에서 제일 가까워서 내가 제일 먼저 내려야 했는데 너무 아쉬웠어요. 우리 학생들이 어디 사는지 알고 싶어서 나를 제일 마지막에 내려달라고 했어요. 밤마다 대구 시내를 다 돌고 우리 집으로 왔죠. 그날의 운행을 마치면 선생님들끼리 술도 한 잔씩 하는데, 그러고 집에 돌아가면 새벽 두 시쯤 된다고 했어요.

야학 선생님들은 정말 헌신적으로 우리를 가르쳤어요. 그 선생님들이 너무너무 좋았어요.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어요. 나이가 스물한 살, 스물두 살, 군대 갔다 왔으면 스물네 살 정도였어요. 그렇게 어린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너무 신기하고 정말 너-어-무 좋아했어요. 말로 다 못할 정도로 그렇게 좋았어요. 학생들에게 보여줬던 모습이 존경스러워서 나는 그분들을 끔찍이 어른으로 생각했어요. 집에서는 엄마가 해주는 밥도 안 먹으려고 할 사람들이 우리한테는 저녁밥까지 해 먹여가면서 공부를 가르쳐주었어요. 그때 저는 아침에 애들 학교 보내고 나면 혼자서는 밥 생각이 별로 없어서 종일 안 먹을 때가 많았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들이 해주는 저녁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요. 된장국이라고 해봤자 된장 풀고 두부 썰어 넣은 수준이었을 텐데도 나한테는 너무너무 좋은 밥으로 느껴졌어요.

박명애 대표의 전동휠체어 컨트롤러.  

집에서 야학까지 콜택시 요금이 2,200원 나왔는데 3,000원을 내면 양심상 거스름돈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일주일이면 9,000원이 필요했어요. 아이들 가르치면서 그 돈 쓰는 게 쉽지가 않았지만 주먹을 움켜쥐듯이 택시비를 꼭 준비해뒀어요. 얼마 후에 친정에서 분가해 나왔는데 택시비가 한 번에 7,000원으로 껑충 뛰었어요. 그만둬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어떤 사람이 KBS 사랑의 리퀘스트에 사연을 보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랬더니 전동휠체어를 주셨어요. 그때부턴 전동휠체어를 타고 야학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학교까지 두 시간 걸렸어요. 곧장 가면 그보단 빨랐을 텐데 길가에 가게며 꽃이며 구경하며 가느라 오래 걸렸죠. (웃음) 나 혼자 다닐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것도 좋았고 비 올 때 우산 쓰고 가는 것도 너무 좋았어요.

하루도 빠지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하셨던 아버지도 학교 가는 것에 대해선 뭐라 못하셨어요. 호주에 사는 동생이 집에 온 적이 있어요. 학교 갈 시간이 되어서 내가 가야 한다고 하니까 동생이 자기도 왔는데 오늘은 학교 가지 말라고 했어요. 그 소리가 그렇게 서운했어요. 저 나이에 무슨 학교냐는 생각인 건지, 장애인들이 심심하니까 모여서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건지. 자기들은 학교 다닐 때 집에 손님 왔다고 결석한 것도 아니면서 왜 우리 학교에 대해선 저렇게 말할까, 동생이 멀리서 온 건 맞지만 그래도 학교는 가고 싶다고 가고 손님 왔다고 안 가는 그런 데가 아니지 않나요. 내가 발끈하니까 지금은 그런 소리 안 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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