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내 삶을 내 손에 움켜쥐고 _ 박명애 ③

《 박명애 _ 내 삶을 내 손에 움켜쥐고 》
① 등에 기대어 어린 세상을 살다
② 기쁨도 불편도 없이, 살아왔던 대로
③ 저 싸움을 내가 해야 한다 

2018년 11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 활동가들이 국회 앞 도로를 점거하며 복지예산 확대를 촉구했다. 박명애 대표가 몸에 쇠사슬을 두르고 있다.
2018년 11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 활동가들이 국회 앞 도로를 점거하며 복지예산 확대를 촉구했다. 박명애 대표가 몸에 쇠사슬을 두르고 있다.

- 깨지고 깨어나다

야학에 갔더니 류재욱이라는 분이 학생회장을 하고 있었어요. 하루는 재욱 씨가 자립을 했다면서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했어요. 그분은 손을 못 쓰셔서 혼자서는 밥을 먹기도 힘든 중증장애인이었어요. 집들이를 한다기에 살림을 해주는 사람이 있나 보다 생각했는데 가보니까 야학 선생님들이 상을 차려주고 음료수를 따라주더라고요. 아니 선생님을 시켜서 집들이를 하다니 정신이 있는 사람인가, 생각했어요. (웃음) 거기서 그분의 사연을 듣게 되었어요. 댐 건설로 고향마을이 수몰되면서 도시로 나와서 살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시장에 일하러 나가면 종일 혼자 있어야 했대요. 어머니가 연로해지니까 이렇게 대책 없이 살다간 시설에 들어가게 되겠더라면서 어떻게든 살 궁리를 하려고 임대아파트를 얻어 자립하셨대요.

야학 교사들이 한 번씩 그 집에 가서 도와주었는데 교사들이 밥을 비벼놓고 가면 재욱 씨가 나중에 혼자 먹는다고 했어요. 짜장면을 배달시켜서 배달원에게 비벼달라고 부탁해서 먹기도 하는데 재욱 씨 손이 불편하니까 40분이 걸렸다던가. 야학에서 자원봉사자를 연결해주긴 했지만 전혀 충분하지 않았겠죠. 어느 날 어떤 중학생이 재욱 씨의 휠체어를 밀고 왔기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방금 길에서 만났다고 했어요. 지나가는 사람한테 휠체어 밀어달라고 부탁해서 지하철역까지 이동하고, 거기서 또 지나가는 학생에게 부탁해서 야학까지 이동한다고 했어요. 용기가 참 대단하죠. 아마 그분도 나처럼 야학을 만나 그런 용기를 얻으셨던 것 같아요.

야학에 갔더니 싹 다 내가 도와줘야 될 사람들이었어요. (웃음) 학교에 가면 그분들 밥을 떠먹여 줄 수 있어 좋았어요. 내 밥도 먹으면서 남도 먹여줘야 하니까 처음엔 이건 내 숟가락, 이건 재욱 씨 숟가락, 하면서 구분을 했는데 먹다 보면 어느샌가 내가 재욱 씨 숟가락으로 먹고 있어요. (웃음) 밥을 같이 먹을 수 있어서 야학이 정말 좋았어요. 나도 할 일이 있구나, 나도 쓸모가 있구나, 하는 경험을 처음 했죠. 야학 다니기 전엔 나중에 국문학을 전공해서 작가가 되겠다는 우아한 꿈을 꾸었는데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 더 이상 그런 포시러운 꿈은 안 꾸었어요.

재욱 씨는 문을 안 잠그고 산다고 했어요. 누가 와서 도와줘야 살아갈 수 있는데 문을 잠가놓으면 자기가 안에서 열어줄 수 없어서 그런대요. 난 여자라서 그런지 그분이 문 안 잠그고 산다는 게 그렇게 신경 쓰일 수가 없었어요. 아침마다 전화해서 잘 잤는지, 살아있는지 안부를 물었어요. 그분은 남들보다 빨리 신용카드를 만들어서 생활하셨는데 누가 그걸 알고 훔치러 오면 어떡하나, 이 카드 때문에 이 사람이 죽는 일이 생기면 어떡할까 걱정되어서 그 집에 갈 때마다 카드를 휴지로 둘둘 말아서 장판 밑에 숨겨주었어요. (웃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그런 거밖에 없었어요.

2018년 11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 활동가들이 국회 앞 도로를 점거하며 복지예산 확대를 촉구했다. 박명애 대표(오른쪽)가 몸에 쇠사슬을 두르고 있다. 그의 옆에 있는 다른 활동가들이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2018년 11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 활동가들이 국회 앞 도로를 점거하며 복지예산 확대를 촉구했다. 박명애 대표(오른쪽)가 몸에 쇠사슬을 두르고 있다. 그의 옆에 있는 다른 활동가들이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야학에선 문화체험이란 걸 했어요. 교사들이 학생들의 집에 가서 휠체어를 밀고 지하철로 이동해서 목적지까지 갔어요. 가는 길에 보도블록이 얼마나 엉망인지, 편의시설 환경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함께 느끼는 거죠. 극장이나 경기장에 가기도 하고 월드컵이 한창일 때는 빨간 옷 챙겨 입고 거리 응원도 했어요. 한 번은 아주 큰 사건이 있었어요. 한국시리즈 야구경기를 보러 대구야구장에 갔는데 엘리베이터가 없고 리프트만 있었어요. 리프트 한 대로 여러 명이 관중석까지 올라가려니까 처음 올라간 학생은 1회 초부터 보고 나중에 도착한 사람은 4회 말부터 보게 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어렵게 올라가도 화장실에 가려면 다시 내려와야 했는데 설상가상 장애인 화장실도 없어서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서 볼일을 보고 컵라면 용기에 소변을 보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우리가 엄청 분노해서 야구장 앞에서 편의시설 설치를 요구하는 집회를 했어요. 나중에 야구장 측에서 바꿨다고 해서 가보니 또 리프트였어요. 대구대학교 학생들과 연합해서 그 리프트를 아예 고장 내 버리자면서 리프트를 계속 타는 시위를 했어요. 한 사람이 타고 올라갔다 내려오면 다음 사람이 타고 올라갔다 내려오길 반복했어요. 그랬더니 진짜 고장 나버렸어요. (웃음) 그 후 엘리베이터로 바뀌었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많이 깨졌어요. 선생님들이 가는 곳마다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저렇게 싸워서 바꿔야 되는구나!’ 생각했어요. 뭔가를 하면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렸어요. 그때 학생들은 용기가 없어서 교사들 뒤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지만 분노를 그냥 잠재워선 안 된다는 걸 배웠던 것 같아요. 선생님들은 당사자가 아니니까 저렇게 안 싸워도 될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분들이 우리를 위해 열심히 나서 싸우는 걸 보면서 저 싸움은 내가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2년쯤 한창 재미있게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이제 그만 나오라고 했어요. 학교 형편도 좋지 않고 다른 장애인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면서 학교 규정이 그렇다고 했어요.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이렇게 그만두면 옛날처럼 집안에만 갇혀 살 게 뻔했어요. 도저히 그때로 돌아갈 순 없었어요. 다음날 선생님들에게 말했어요. “선생님들은 유치원에서부터 대학, 대학원까지 다녔으면서 왜 나보고는 2년 했으니 이제 집으로 가라고 합니까?” 선생님들도 할 말이 없었는지 그 후에 그 규정은 없어졌어요. (웃음)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야학밖에 없는데 언젠가는 졸업을 해야 하니까 졸업 후에도 장애인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겠다, 이 젊고 패기 넘치는 선생님들과 같이 있을 때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그때 생각했어요. 그땐 세상을 바꾸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는데도 그런 마음이 움텄어요.

2018년 4월 19일, 장애인활동가 77명이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광화문사거리에서 효자동 입구까지 2시간 30분 동안 오체투지 투쟁을 벌였다. 오체투지를 마친 박명애 대표가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아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울부짖고 있다. 거리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2018년 4월 19일, 장애인활동가 77명이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광화문사거리에서 효자동 입구까지 2시간 30분 동안 오체투지 투쟁을 벌였다. 오체투지를 마친 박명애 대표가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아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울부짖고 있다. 거리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 저 싸움을 내가 해야 한다

야학 학생회장이 되었을 때 학생들을 선동해서 ‘전동사모’라는 팀을 만들었어요. ‘전동휠체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에요. 선생님들 없이 장애인인 우리가 직접 나서서 행동하자고 모인 거예요. 문화체험활동을 통해 선생님들에게 배운 걸 실천하고 싶었어요. 좁은 길을 넓히라고 민원을 넣는다거나 가게에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추도록 요구하는 활동을 했어요. 장애인은 두세 명만 되어도 식당에서 눈치를 줘서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우리를 받아주는 딱 몇 군데의 식당에만 갈 수 있었죠. 우리도 계모임도 할 수 있고 단체로 여행도 가야 한다고, 만날 가는 식당 말고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갈 수 있어야 한다고, 기상도 드높게 7월 17일 제헌절에 발대식을 했어요. 예산이나 행정, 법이니 정치니 그런 거 하나도 모르면서 일단 바꿔야 된다는 생각만으로, 왜 우리만 못 다니게 해, 그런 마음으로요. (웃음)

전동사모 초대 대장은 재욱 씨가 맡았어요. 우리는 재욱 씨가 아침이고 저녁이고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는 사회를 만들어야 된다면서 시청으로 찾아갔어요. 공무원에게 다짜고짜 이분이 혼자 살고 있는데 밥이라도 먹을 수 있게 누굴 보내줄 수 없느냐고, 도움받을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어요. 면담 약속 같은 걸 잡고 간 게 아니라 그냥 찾아간 거예요. 대구시 예산이 얼마이고 장애인복지 예산이 얼마인지, 장애인이 몇 명인지, 그런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내가 볼 땐 우리 동네에 그런 사람이 재욱씨 한 사람뿐이잖아요.(웃음) 재욱씨는 언어장애가 있어서 말로 떠드는 건 나 같은 사람이 했어요. 내 것을 해달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하는 거니까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시청 공무원들이 커피를 타주면서 정중하게 대해줬어요. 그러면서 자기들이 지금 어떤 제도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만 시행되면 장애인도 밥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될 거라고 하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였던 것 같아요. 그땐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라는 게 있다는 걸 우리도, 공무원도 몰랐을 때였거든요. 그분이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기에 아, 기다리면 곧 되는구나, 안심하면서 돌아왔어요. (웃음) 촌스러운 옷 맞춰 입고 격식도 체계도 없이 순진했어도 내 마음에 있던 말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 번 하니까 다음엔 더 잘 말하게 됐어요. 그래서 내가 야학을 그렇게 좋아했는지도 몰라요. 40년 동안 집에서 가족과 살면서 나를 위해선 단 한 마디도 못하던 사람이 밖에 나와선 할 수 있었으니까요. 야학 이야기만 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아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