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내 삶을 내 손에 움켜쥐고 _ 박명애 ④

《 박명애 _ 내 삶을 내 손에 움켜쥐고 》
① 등에 기대어 어린 세상을 살다
② 기쁨도 불편도 없이, 살아왔던 대로
③ 저 싸움을 내가 해야 한다
④ 내 삶을 내 손에 움켜쥐고 

2006년 5월 23일, 대구 장애인들이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투쟁하는 모습. 도로 위에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 활동보조인 제도화하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펼쳐 있고, 중증장애인들이 휠체어에서 내려와 아스팔트 도로 위에 누워 있다. 그 주변을 경찰들이 에워싸고 있다. 사진 김유미
2006년 5월 23일, 대구 장애인들이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투쟁하는 모습. 도로 위에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 활동보조인 제도화하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펼쳐 있고, 중증장애인들이 휠체어에서 내려와 아스팔트 도로 위에 누워 있다. 그 주변을 경찰들이 에워싸고 있다. 사진 김유미

- 아스팔트 위를 기어가는 사람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기록한 다큐 ‘버스를 타자’를 보면서 와! 우리도 저렇게 싸우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투쟁을 이끄는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선생님처럼 우리 중에도 저렇게 총대 맬 사람이 있었으면 했어요. 질라라비야학 교장선생님은 대학교수님이었어요. 명예 교장이라고 해서 일상적으로 우리와 같이 생활하진 않으셨어요. 야학 선생님 중에 장애인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한테 “대구의 박경석이 되어 주세요. 그럼 내가 열심히 도와줄게요” 했어요. 그분이 웃으면서 “졸업하고 직접 하시면 되잖아요” 했어요. 깜짝 놀라서 그랬죠. “선생님은 대학 나왔지만 나는 ABCD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해요!” (웃음)

질리라비야학은 ‘장애인지역공동체(아래 장지공)’의 부설기관인데, 2006년에 장지공의 대표를 뽑는 선거가 있었어요. 어느 날 활동가가 나에게 장지공의 대표를 해보시면 어떻겠냐고 했어요. 야학 다니는 동안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마음은 품고 살았지만 대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분이 나에게 “대표가 되어서 꿈꾸던 그 일을 하시라” 했어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지하시더라고요. 펄쩍 뛰면서 “안 돼요. 나는 아무것도 못해요. 손에 힘이 없어서 결재 도장도 못 찍는다고요” 했어요. 아버지가 사업하실 때 집에서 도장 찍는 것을 많이 봤거든요. 땀 흘려 일하는 건 내 눈으로 본 적이 없으니까 다른 건 걱정도 안 하고 오직 도장 못 찍는 게 제일 걱정이었어요. (웃음)

그런데 한 달 넘게 얘기하셨어요. 나는 대표를 할 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더니 그분이 그러셨어요. “완벽하게 준비된 그런 때는 오지 않습니다. 대표를 하면서 준비하시면 됩니다. 대표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말이 좋았나 봐요.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소방차가 사이렌을 막 울리면서 지나가는 걸 봤어요. 소방관들이 달리는 차 안에서 방화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아, 저 위험한 현장으로 가면서 자기 목숨을 지켜줄 옷 하나도 제대로 못 갖춰 입고 출발했구나, 달려가는 저 촉박한 상황에서 하나씩 준비하는구나, 저렇게 사람을 구하는 거구나.’ 그렇다면 나도 대표를 맡아도 되지 않을까, 지금은 아무것도 못하지만 대표를 하면서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도록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장애인에 대해 말하려면 장애인이 나서서 해야지 남이 해주길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다고,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렇게 장지공의 대표가 되었어요.

그 후 대구 지역 단체들이 연대하는 회의에 나가게 되었어요. 그런 회의를 처음 해보니까 오가는 말들이 너무 어려워서 귀에 잘 들어오질 않았어요. 그날도 회의 내용을 귀담아듣지 못하고 있었는데, 끝날 무렵에 서울에 가야 하는데 누가 갈 수 있는지 손들어 보라고 했어요. 나는 화장실 문제 때문에 멀리 갈 생각은 아예 못하던 사람이었어요. 며칠 후 시내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텔레비전 뉴스에 장애인들이 나온 걸 봤어요. 사람들이 휠체어도 없이 아스팔트 도로 위를 꼭 자기 집 방바닥처럼 앉아 있었어요. ‘저게 뭐하는 거지?’ 유심히 바라보는데 저번 회의가 딱 떠올랐어요.

그게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는 시위였는데 중증장애인들이 서울 한강대교를 기어서 넘는 투쟁이었어요. 하루 종일 도로를 점거하는 바람에 난리가 났더라고요. 기어가는 게 되게 힘든 일이거든요. 그땐 활동지원서비스가 뭔지 잘 몰랐는데도 저 사람들 많이 힘들겠다, 춥겠다, 생각하니까 같이 못 간 게 되게 미안했어요. 나중에 서울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활동가가 와서 그 제도에 대해 설명해줬어요. 일본이나 유럽은 30, 40년 전부터 장애인의 일상 활동을 지원하는 활동지원서비스 제도가 시행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이 나라가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정말 억울했어요. 아이를 낳고도 마음에 근심이 가득해서 기쁜 줄도 몰랐는데 그 제도가 있었다면 나도 좀 당당할 수 있었을 거잖아요. 지금이라도 정부가 우리에게 미안해하면서 제도를 만들어줘도 모자랄 판인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어요.

한 달 뒤엔 대구에서도 활동지원제도화를 요구하는 농성을 한다고 했어요. 몇 날 며칠 농성에 들어간다, 각 단체에서 이불을 몇 개 가져와라, 그런 말들이 오갔어요. 좀 무서웠어요. 서울사람들이 투쟁하는 거 보니까 다칠 수도 있고 경찰에 연행될 수도 있겠더라고요. 어쩌면 오랫동안 집에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딸을 시켜서 엉망진창인 집을 정리했어요. 딸에겐 엄마 일주일 동안 집에 안 들어온다고 말했어요. 몸싸움을 하려면 핸드백은 불편할 것 같아서 어깨에 메는 튼튼한 가방도 하나 사두었어요. 짐을 챙겨 가방을 둘러매고 집을 나왔어요. 그날이 2006년 5월 18일이었어요.

그림 훗한나
장애인의 출입을 막는 각종 계단과 턱들이 있다. 비장한 표정의 박명애 대표가 그 턱과 벽을 부수며 등장하는 듯하다. 그는 보라색 모자를 쓰고 어깨에는 분홍 가방을 메고 있다. 그 옆으로 그의 등장을 반기는 듯한 신장개업 인형이 그로테스크하게 손을 흔들며 웃고 있다. 그림 훗한나

- 뒷모습이 부끄럽지 않게

첫날 싸움이 아주 격렬했어요. 시청 안으로 밀고 들어가려다 경찰에게 붙잡혀서 몸부림을 쳤어요. 동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판사판으로 싸웠어요. 그렇게 몸으로 싸운 건 처음이었는데 자연스럽게 되더라고요. ‘전동사모’ 회원들과 민원실에 찾아갔을 때는 공무원들이 친절하게 응대해주더니 “국장 나와라!” 소리를 치니까 태도가 완전히 달랐어요. 그날 저녁 국장이 나타났는데 ‘나왔다, 어쩔래?’ 하는 식으로 우리를 우습게 보니까 속이 아주 뒤집어졌어요.

5월인데도 밤이 되면 추웠어요.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서 이불을 돌로 눌러놓고 자야 할 정도였어요. 노숙은 처음이었는데 잘 잤어요. (웃음) 해 뜨자마자 휠체어에 타서 하루 종일 싸우고 집회하고 바쁘게 움직이다 새벽 한두 시가 되어야 누울 수 있었어요. 너무 피곤해서 별 볼 틈도 없이 바로 곯아떨어졌어요. 우리의 몸은 점점 지쳐 가는데 대구시 공무원들은 정문을 딱 닫아걸고 뒷문으로 출퇴근하면서 꼼짝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삭발투쟁을 하기로 했어요. 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았어요. 엄마가 치매로 고생하고 계셨는데 그즈음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던 때였거든요. 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해서 치매가 일찍 온 게 아닌가 너무 죄송했는데 삭발하고 농성할 때 혹시 돌아가시면 그 모습으로 장례식장을 지켜야 하는 게 마음이 착잡했어요.

2006년 6월 7일, 대구에서는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식을 단행했다. 당시 삭발한 박명애 대표의 모습. 목에 건 피켓에는 “53년을 활동보조인을 원하며 살아왔다. 53세 많은 나이에 삭발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삭발을 택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사진 김유미
2006년 6월 7일, 대구에서는 활동보조제도화를 요구하며 장애인 활동가들이 삭발식을 단행했다. 당시 삭발한 박명애 대표의 모습. 목에 건 피켓에는 “53년을 활동보조인을 원하며 살아왔다. 53세 많은 나이에 삭발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삭발을 택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사진 김유미

우리가 삭발까지 하면서 악착같이 싸우는 걸 보고 시청에서 이 사람들 웬만해선 안 물러서겠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를 전부 들어다가 시청 건너편 주차장으로 천막 두 개를 쳐주면서 쫓아냈어요. 장애인들은 농성할 때 전동휠체어를 충전할 전기와 화장실이 제일 중요해요. 그거 내놓으라고 또 붙어서 사람들이 땅에 나뒹굴고 한바탕 난리가 났어요. 그랬더니 전기와 화장실을 쓰게 해주더라고요. 고생스러워도 재미있었어요. 나중엔 냉장고와 가스레인지를 갖다 놓고 비 오면 부침개도 부쳐 먹었어요. 농성을 43일간 했는데 집엔 한 번도 가지 않았어요. 내가 자리를 비우면 지구가 망할 것 같았어요. (웃음)

사람들에게도 집에 가지 말라고 했어요. 집에 가봤자 벽밖에 더 보냐고, 여기 있으면 사람 구경이라도 할 수 있지 않느냐고요. 엄마가 하도 집에 안 들어오니까 딸내미가 농성장으로 찾아왔어요. 하루 이틀 그러다 나중엔 아예 가방 싸들고 와서 농성장에서 자고 아침에 학교 갔어요. 친구들도 데려와서 밥 먹여줘야 하는 장애인들의 활동지원도 하고요. 우리 딸 낳길 참 잘했죠. 딸에게 “너 커서 데이트할 때 되면 엄마는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 거야. 너도 친구들처럼 마음껏 데이트하고 놀 수 있는 세상을 엄마가 만들 거야” 그랬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죠.

마흔일곱에 야학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고 5년 뒤 갑작스럽게 대표가 되었어요. 그리고 진짜 투쟁다운 투쟁을 시작했죠. 내 나이 오십 셋이었어요. 활동지원서비스 투쟁은 전장연과 손잡고 싸운 것이었는데 장지공 안의 어떤 사람들은 그 투쟁을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농성하고 있을 때 야학 교장선생님이 전화해서는 그만하고 집에 가라고 했어요. 예, 알겠습니다, 하고는 계속했어요. 내가 그렇게 뻔뻔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랬나 모르겠어요. (웃음) 대표 선거에서 날 추천했던 또 다른 분도 나를 만나자고 하더니 이제 그만하면 됐으니 들어오시라고 했어요. 내가 말했죠.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만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시청에서 약속한 게 없는데 이대로 철수하면 장애인들이 와서 난리 한 번 친 거밖에 더 됩니까? 안 그래도 시청 쪽에선 저놈들 저러다 말겠지 하면서 우리를 무시하는데 그 사람들 생각대로 해주란 말입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그럼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장애인들 꼴값 떤다는 말은 안 들어야죠. 나는 내 뒷모습이 안 부끄러울 때 돌아올 겁니다.” 했어요. 그분들은 노선을 달리해서 나중에 다른 단체로 분리해 나가셨어요.

2006년 5월 23일, 보라색 모자를 쓴 박명애 대표가 발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전동휠체어 뒤에는 “중증장애인 처박아둔 대구시장 나와라”고 적힌 작은 피켓이 매달려 있고 그 뒤로는 완전무장한 경찰들이 보인다. 사진 김유미
2006년 5월 23일, 보라색 모자를 쓴 박명애 대표가 발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전동휠체어 뒤에는 “중증장애인 처박아둔 대구시장 나와라”고 적힌 작은 피켓이 매달려 있고 그 뒤로는 완전무장한 경찰들이 보인다. 사진 김유미

5월 18일에 시작해서 6월 29일에 합의했어요. 대구시가 활동지원서비스를 제도화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참말로 열심히 싸워서 항복을 받아냈어요. 다음 해엔 보건복지부에서 전국적으로 활동지원서비스 사업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는데 문제가 많았어요. 한 달에 받을 수 있는 서비스 시간이 형편없이 적었고 성인만 이용할 수 있고 자부담 비용을 내야 했어요. 그걸 막으려고 서울에 올라갔어요. 이번에도 딸에게 “엄마 일주일 동안 안 들어온다” 하고는 집을 나왔어요. “만날 일주일이래!” 하면서 딸이 입을 삐죽거렸어요.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어요. 재욱 씨도 함께 했는데 1주일 만에 창백해지더니 쇼크가 와서 그만두어야 했어요. 18일이 지나니까 버티기가 힘들어졌는데 다른 사람들 몫까지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커졌어요. 다행히 끝까지 갔어요. 23일 만에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합의를 해줬어요. 그리고 2007년 4월, 활동지원서비스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죠. 참말로 악착스럽게 싸웠어요. 한 번도 ‘아! 힘들어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 안 했어요. 오히려 평생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았던 한을 투쟁하면서 다 풀었죠. 투쟁장에 있는 하루하루가 행복했어요.

그 후 10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재미나게 살았어요. 2007년엔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되었고 2009년에는 우리 야학의 교장이 되었어요. 장애인특별교통수단을 도입하라고 대구시청을 점거해서 장애인 콜택시 제도도 만들어냈고 활동지원서비스를 늘리기 위해 계속 싸웠어요. 해마다 정부는 예산을 깎으려고 하고 우리는 늘리기 위해 숱하게 투쟁했어요. 그리고 대구 희망원에서 비리와 인권유린 사건이 터졌죠. 직원들이 빨리 퇴근하려고 오후 4시부터 밥 먹이고 약 먹인 뒤 장애인들만 놔두고 모두 퇴근해버리면 그 안에서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 괴롭히고 때리고 엉망진창이었대요. 2년 동안 129명이 죽었어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시설이라 더 분노가 치솟아서 밤낮없이 쫓아다녔어요.

정말 고맙게도 훌륭한 동지들이 옆에 있어서 하나도 어려운 게 없었어요. 나는 정책도 모르고 전략 같은 거 짤 줄도 모르고 살림도 못 살지만, 우리가 얼마나 참고 또 참으며 힘들게 살아왔는지, 얼마나 벼랑 끝에 내몰려 있는지, 이 문제가 얼마나 절실한지를 잘 보여주려고 고민하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때로는 좀 느긋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다가도 그런 호사스런 생각하면 안 된다고 나를 다잡아요. 일이 주어진 걸 영광으로 여기고 피곤하다, 힘들어서 못하겠다, 그런 말 절대 안 하겠다는 걸 좌우명처럼 품고 살았어요. 기차 타고 멀리 가야 할 때도 고단하다 여기지 않고 여행한다고 생각하면서 풍경을 바라봤어요. 너무 행복했어요.

- 엄마의 인생

야학 다니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엄마가 건망증이 좀 심한 것 같아서 한의원에 갔더니 가슴 속에 화가 너무 많이 차 있다면서 잘 풀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했어요.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죄송했어요. 엄마를 좀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서 서둘러 분가했어요. 그 후에 검사하니 치매셨어요. 남들보다 일찍 온 거였죠. 10년 정도 고생하시다 77세에 돌아가셨어요. 스물둘에 나를 낳아서 55년을 나 때문에 마음고생 많이 하셨죠. 정신이 좀 있으실 때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가 학교에도 다니고 너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된 것 같아서 이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고요. 평생 그런 말을 하시던 분이 아니었고 그때도 이미 많이 아프실 때였는데 꼭 유언처럼 하셨어요.

2007년 4월 14일, 여의도 국회 앞에서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위한 총력 투쟁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날 박명애 대표는 장애부모들과 함께 국회에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요구하며 삭발했다. 사진 김유미
2007년 4월 14일, 여의도 국회 앞에서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위한 총력 투쟁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날 박명애 대표는 장애부모들과 함께 국회에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요구하며 삭발했다. 사진 김유미

어느 날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아이들의 교육권을 위해 투쟁하는 현장에 갔었는데 그날 부모님들이 삭발을 하셨어요. 현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도 같이 삭발하겠다고 했어요. 자식보다 하루 더 사는 게 소원이라는 부모들의 말을 들으면 잘못한 것도 없이 늘 기죽어 있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요. 부모들의 운동이 곧 나의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엄마가 하면 부모운동인데 엄마가 못했으니까 내가 하는 거죠. 어머니는 내성적이어서 당신 자식이 장애인이라고 먼저 말하는 성격이 못 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건강한 자식을 잘 낳는데 당신은 그러질 못했으니 부끄럽기도 했을 테죠. 그저 전생의 업이 깊다고 하셨고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장애인운동을 만나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이 나라가 장애가 있건 없건 차별 없이 사는 세상만 만들어놨으면 나는 정말로 내 장애에 불만이 없었을 거예요.

투쟁장에서 만난 부모들을 보면서 우리 엄마는 저 나이에 어땠을까 생각했어요. 나보다 젊지만 다 우리 엄마 같아서 부모님들이 운동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요. 엄마가 못한 그 운동을 내가 하고 싶어서 나도 삭발하겠다고 한 거예요. 혹시 우리 엄마처럼 나서기 힘드신 분도 있을 것 같아서 한 사람이라도 더 같이하면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우리 엄마가 힘들어하고 있을 때 누군가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세상을 바꿔야 된다고 소리쳤다면 엄마도 좀 위로가 됐을 텐데, 그런 사람이 없어서 그 긴 세월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요즘 세상에 살았다면 엄마도 좀 다르게 살았을 텐데. 부모운동이 꼭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엄마는 당신의 젊음을 바쳐 나를 키워주셨어요. 50년간 엄마가 올바르고 착하게 사는 거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웠어요. 늦은 나이라도 나는 세상에 나와서 집회하고 투쟁하면서 마음속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는데 엄마는 그러질 못해서 치매가 빨리 오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엄마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발달장애 자녀를 두고 갈 부모들이 마음 놓고 갈 수 있도록, 엄마들이 자기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발달장애인들이 활동지원서비스도 어느 정도 받고, 낮에 마음 놓고 지낼 수 있는 기관들도 여러 곳 생긴다면 엄마들도 마음 놓고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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