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내 삶을 내 손에 움켜쥐고 _ 박명애 ⑤

《 박명애 _ 내 삶을 내 손에 움켜쥐고 》
① 등에 기대어 어린 세상을 살다
② 기쁨도 불편도 없이, 살아왔던 대로
③ 저 싸움을 내가 해야 한다
④ 내 삶을 내 손에 움켜쥐고
⑤ 마흔일곱에 시작된 삶의 기쁨과 슬픔

 - 홀로서기

2014년 어느 날 남편이 얼굴색도 안 좋고 기침을 많이 했어요. 감기 같았는데 잘 낫지 않아서 검사했더니 급성 폐암이라고 했어요. 3개월 뒤에 돌아가셨어요. 결혼 30년 만이었어요. 내가 예순 하나, 남편이 예순둘이었어요. 남편이 나보다 먼저 돌아가실 줄 꿈에도 몰랐어요. 젊다면 젊은 나이에 그렇게 갑자기 가고 나니까… 진짜 많이 힘들어서 생활이 심하게 무너졌어요. 

살면서 홀로서기를 세 번 했어요. 결혼할 때 한 번, 친정에서 애들 키워서 독립할 때 한 번, 그리고 남편 떠났을 때 한 번. 남편이 떠났을 때가 그야말로 홀로 서야 할 때였어요. 같이 다닐 땐 몰랐는데 혼자 다녀보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더라고요. 기차 타러 가면 역무원이 “혼자 왔어요?” 하고 묻고 물건을 사러 가면 직원이 “혼자 오셨어요?” 하고 물었어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항상 도와줘야 하는 사람인 것처럼 나를 인식하는 게 서글프고 화가 났어요.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걸 묻느냐고, 머리가 이렇게 백발인 사람이 누구와 같이 다녀야 하느냐고 쏘아붙인 적도 있죠. 

남편과 나는 언제나 같이 다녔어요. 다른 지역에 갈 때면 남편은 출발하기 전에 벌써 가방을 싸놓고 기다렸어요. 나는 짊어지고 나서기만 하면 됐죠. 내가 운동하며 사는 것을 참 좋아했어요. 고속버스도, 서울의 지하철도, 남편이 있어서 큰 걱정 없이 타고 다녔어요. 남편이 없었다면 그렇게 활동할 마음을 먹지 못했을 거예요. 내가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거죠. 누군가 남편을 보고 천사라고 했는데 문득문득 진짜 천사였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방 안에서만 살던 나를 남편이 집 밖으로 데리고 나왔어요. 그전까지 가족 중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요. 그것이 아버지가 나를 책임지는 방식이었어요. 집 안에서만 평생 살았던 장애인이 밖으로 나온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에요. 남편과 여기저기 다녔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혼자 콜택시를 불러서 야학에 찾아갈 용기도 낼 수 있었던 거예요. 야학을 만나 세상 밖으로 나왔고 전장연을 만나 투쟁의 세계도 만났으니 나는 어떻게든 살아가겠죠. 우리 남편은 마음 놓고 떠났을 것 같아요. 

2020년 1월 7일, 만 65세 생일을 맞이하여 활동지원서비스 중단 위기에 처한 박명애 대표는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 진정을 했다. 이날 인권위 건물 1층에서 장애인 활동가들이 ‘활동지원 연령제한 폐지 투쟁’을 결의하며 박명애 대표 생일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있다. 
2020년 1월 7일, 만 65세 생일을 맞이하여 활동지원서비스 중단 위기에 처한 박명애 대표는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 진정을 했다. 이날 인권위 건물 1층에서 장애인 활동가들이 ‘활동지원 연령제한 폐지 투쟁’을 결의하며 박명애 대표 생일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있다. 

- 저승사자가 찾아왔다

남편이 떠난 뒤 활동지원서비스가 하루 16시간 정도 필요했어요. 하지만 딸과 함께 산다는 이유로 6~7시간 밖에 안 나왔어요. 나는 팔에 힘이 없어서 우리 집 현관문도 못 열어요. 딸이 있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어서 그 애가 늦는 날이면 여기저기서 시간을 보내야 했어요. 24시간 하는 커피숍이 많다고 하던데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잘 안 보였어요. 나 때문에 딸도 불편하죠. 독립하고 싶다는 걸 내가 붙잡고 있었어요. 어려서 나가 살다가 혹시 빚이라도 생기면 나도 갚아주는 게 힘들고 애도 상처받을까 걱정됐어요. 그러다 몇 년 전에 내보냈어요. 

어차피 나 혼자 살아야 되는데 딸이 있으면 더 의존하게 되고 평소에 잘하던 딸이 한 번씩 입이 삐죽 튀어나오면 그거 보기가 싫더라고요. 딸이 분가하니까 활동지원서비스가 늘어서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활동지원사가 옆에 있게 되었어요. 그분 퇴근하면 혼자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고, 서울 다녀와서 피곤한 날이면 한 시간만 늦게 출근하시라고 연락하기도 하고요. 충분치는 않아도 이제 조금 살만해졌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몇 해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65세가 다가왔어요.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던 사람이 65세가 되면 자동으로 노인장기요양보험 대상자로 전환되는데 그건 길어야 하루 4시간 밖에 지원을 못 받아요. 65세 생일이 다가오는 게 너무 두려웠어요. 장애계에선 농성도 하고 계속해서 인권위 긴급구제도 신청했어요. 하루 4시간만 지원받는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아침 한 끼만 먹고 화장실도 그때만 갈 수 있어요. 활동도 못 하고 꼼짝없이 집에 갇혀 살던 시절로 돌아가거나 요양병원에 가야 해요. 죽어도 그러기 싫었어요.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가슴이 아파서 진짜 죽고 싶었어요. 전태일 열사처럼 장애인들을 위해 죽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어요. 싸워야 할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닌데 전국 조직의 대표라는 사람이 자기 문제에 너무 안달복달한다고 할까 봐 겉으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가슴앓이를 했던 게 아직도 가시지를 않았어요.  

2020년 1월 7일, 만 65세 생일을 맞이하여 활동지원서비스 중단 위기에 처한 박명애 대표는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 진정을 했다. 생일잔치 상에는 ‘만 65세 연령제한 폐지 투쟁 생일상’이라는 피켓이 붙어 있다. 
2020년 1월 7일, 만 65세 생일을 맞이하여 활동지원서비스 중단 위기에 처한 박명애 대표는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 진정을 했다. 생일잔치 상에는 ‘만 65세 연령제한 폐지 투쟁 생일상’이라는 피켓이 붙어 있다. 

현 제도에 의하면 65세가 되면 강제로 노인장기요양보험 등급 심사를 받아야 해요. 그런데 ‘등급 외’(부적합) 판정을 받으면 기존의 활동지원서비스를 유지할 수 있어요. 

등급 심사관이 찾아올 땐 꼭 저승사자가 오는 것 같아요. 그런 기분은 안 당해본 사람은 정말 모를 거예요.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도 3년마다 등급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그때마다 혹시 등급이 떨어져서 서비스가 줄어들까 너무 두려웠어요. 그땐 어떻게든 ‘장애가 중해서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증명해야 했어요. 심사관들이 가져와 묻는 체크리스트가 아주 촘촘해요. 혼자 옷을 입을 수 있느냐, 스스로 씻을 수 있느냐, 손으로 문고리를 돌릴 수 있느냐. 다 못한다고 해야 돼요. 

그 심사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노인요양서비스 등급 심사를 받으래요. 그런데 이번엔 부적합 판정을 받아야 하니까 ‘다 혼자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한대요. 똑같은 질문에 대해 이 저승사자에겐 잘한다고 말하고 저 저승사자에겐 못한다고 말해야 돼요. 아유, 참, 세상은 요지경이에요. “저번 심사에선 다 못하신다면서요!”라고 말할까 봐 너무 무서운데 두 기관이 달라서 절대 그럴 일 없다면서 활동가들이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드라마도 이 정도로 엉망이면 채널을 돌려버릴 텐데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이상해요. 이런 상황에서도 우린 그들에게 잘 보여야 해요.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내 몸에 등급을 매기고 내 삶의 시간을 판정한다는 것인지 억울하고, 저 사람들이 휘두르는 칼날에 베일까 이리저리 피하면서 살아야 하는 게 너무 자존심 상해요. 내 삶의 칼자루를 왜 내가 쥐지 못하는지, 왜 나는 칼날을 붙잡은 채 이렇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지, 왜 우리에겐 무엇 하나 그냥 주어지는 게 없고 이 모든 걸 극복하며 살아야 하는지, 왜 우리는 긴급구제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지 서글프고 화가 나요.  

이 서비스가 줄어들면 딸에게 그만큼 기대야 하는데 그럼 딸이 자기 삶을 줄이고 조정해야 되잖아요. 우리는 항상 줄이고 조정하는 삶을 살아왔어요. 그렇게 사는 거 아주 힘든 일인데 남의 인생까지 그렇게 만드는 게 괴로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내가 낳았을 뿐이지 자식도 남이잖아요. 나한테서 안 태어났으면 더 멋지게 살 수도 있었는데 더 해주지는 못하면서 나 때문에 뭔가를 포기하게 만든다는 게 너무 미안해요. 짐이 되어선 살 수 없어요. 

나라에선 장애인이라고 서비스를 많이 받으면 서비스를 적게 받는 비장애 노인들과 형평성이 안 맞대요. 그 말이 내 가슴에 아프게 박혔어요. (눈시울 붉어짐) 형평성이라니… 우리 앞에서 어떻게 형평성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나라가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나요. 내가 학교를 가봤나, 직장을 다닐 수가 있었나,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을 할 수가 있었나. 아무것도 받은 거 없이 하루하루 참고 살아왔더니 이제 와서 비장애인과의 형평성을 들먹이면서 우리의 것을 또 빼앗아 가려고 해요. 이것(활동지원서비스)은 우리가 농성하고 단식해서 만들었고 해마다 싸우면서 확대하고 지켜낸 제도예요. 

등급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괴로웠어요. 얼마 뒤에 통지서가 왔는데 ‘등급 외’ 판정을 받아 노인장기요양보험을 못 받게 되었다면서 죄송하다고 적혀 있었어요. 맥이 탁 풀렸어요. 이 문제를 두고 죽기 살기로 애를 썼더니 머리가 좀 이상해진 느낌이었어요. 혹시 치매가 온 거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 MRI 사진을 찍어볼까 생각하다 그만뒀어요. 그런 기록이 남으면 당장 저승사자가 찾아와서 장기요양 등급을 받으라고 할 거니까요. 나처럼 투쟁하는 사람도 제도 앞에선 이렇게 무력한데 힘없고 고립된 사람들은 얼마나 지옥 같은 나날을 겪고 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2016년 9월 28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농성 1500일을 맞아 2박 3일간 결의대회가 열렸다. 박명애 대표가 정부(서울정부청사 건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분노하고 있다. 
2016년 9월 28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농성 1500일을 맞아 2박 3일간 결의대회가 열렸다. 박명애 대표가 정부(서울정부청사 건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분노하고 있다. 

- 잃어버린 청춘 소송

두 살에 장애를 입고 64년을 사는 동안 어떤 기관도 나에게 학교에 가라고 말해준 데가 없어요. 마흔일곱에 콜택시 기사님 등에 업혀서, 우리 딸내미를 활동지원사 삼아서, 우리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장애인야학의 문을 두드리면서 내 인생의 길을 내가 찾았어요. 내 인생은 제대로 살지 못했어도 다른 사람은 그렇게 안 살게 해주고 싶어요. 나훈아의 노래 ‘청춘을 돌려다오’를 들을 때면 내 마음도 그렇다고 늘 생각해요. 우리 삶이 너무 억울해요. 언젠가는 잃어버린 청춘에 대해 국가에 피해보상 소송을 하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면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는데, 이렇게 운동해서 사회가 바뀐다면 이런 삶을 마다하진 않을 거 같아요. 나는 투쟁이 체질인 사람이에요. 내가 싸워서 내 삶도 바뀌고 옆에 있는 사람들의 삶까지 바뀔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을까요. 가끔 싸워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장애인들을 만나요. 나는 앞으로도 싸울 것이 많으니 언제든지 현장에 나오라고 해요. 그러면 자기는 용기가 없어서 싸움을 못한대요. 그러면 나와서 놀아도 되니까 그 자리에 있기만 하라고 해요. 세상 밖으로 나와 자기를 드러낼 용기만 있으면 된다고요. 이렇게 어렵고 불편한 사람이 많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요.  

집에서만 지내던 시절 텔레비전에서 장애를 가진 정치인을 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정치를 한다고 내 삶이 바뀔 것 같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아무도 내가 그 방 안에서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항상 강조해요. 안 보이는 사람들도 찾아야 된다고, 눈에 보이는 사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야 된다고요. 우리는 수용시설에 살진 않았지만 각자의 집에 격리되어 살았고 세상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던 사람이니까요. 방 안에 살 때는 대책 없이 살았어요. 그 환경에 녹아들어 살았어요. 그렇게 안 살면 살 수가 없었으니까요. 살 수 있었든 말았든, 옷에 흙이 묻든 말든 기어 나왔어야 했어요. 아버지한테 끌려들어가도 또 기어 나오고 또 끌려들어가도 또 기어 나오고 그렇게 이 세상에 손 내밀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안 하고 가만히 있었던 걸 후회해요. 

2010년 3월 26일, 박명애 대표가 경찰의 저지를 뚫고 “탈시설을 권리로서 보장하라”고 외치고 있다. 사진 김유미 
2010년 3월 26일, 박명애 대표가 경찰의 저지를 뚫고 “탈시설을 권리로서 보장하라”고 외치고 있다. 사진 김유미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열심히 싸워서 만든 권리를 누군가는 아무 노력 없이 누린다면서 불평을 해요. 나는 이렇게 말해요. 우리나라가 해방될 때 모두가 독립군이었던 건 아니지 않냐고, 소수의 독립군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 아니냐고요. 우리의 싸움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누구는 했네, 누구는 안 했네, 따지기 시작하면 자기네 단체의 이익만 챙기려는 그런 단체들과 다를 게 없다고요. 유관순이 손톱, 발톱 다 빠지는 고문을 당하면서 저 백성들은 안 싸우는데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억울해했다면 독립이 되었겠어요? 우리 운동을 독립운동에 빗대면 너무 거창하다고 할지 몰라도 47년간 억압되어 살다가 해방되었으니 이것이 독립이 아니면 뭔가요? 이것은 장애인들의 독립운동, 해방운동이에요.  

 

짐작과 달리 집 안에서만 보냈던 47년에 대해 명애는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그냥 학교에 안 가는 건가 보다 했어요. 심심하다는 생각도 없었고 나가서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오히려 밖에 나가는 게 두려웠죠.” 

그런 삶에도 생각보다 많은 일이 일어났다. 같은 종교를 가진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두 아이를 낳았다. TV만 보며 지루하고 우울한 삶을 살았을 거라는 짐작이 가장 결정적으로 비껴간 것은 그의 집 책장에 꽂힌 앨범을 열었을 때였다. 젊은 명애는 그 시대를 산 평범한 부부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도, 설악산, 해운대 같은 곳을 다녔고 남편은 그 특별한 날들을 빠짐없이 기록해 두었다.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이나 편의시설이라곤 전무하던 시절이었으므로 그것은 명애를 향한 남편의 비범한 사랑의 증거처럼 보였다. 앨범을 넘길 때마다 연신 호들갑스럽게 놀라는 나에게 명애가 말했다.

“그건 남편의 의지였지, 내 의지가 아니었어요.” 

너의 짐작처럼 그게 그렇게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는 듯한 투였다. 그러고 보니 사진 속 젊은 명애에겐 명애를 명애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것 같았다. “너는 학교에 가지 말고 엄마랑 놀자” 하던 말을 그냥 받아들였던 것처럼, “나중에 아버지 죽을 때 너도 같이 가자” 하던 말에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 못했던 것처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보러 가자” 했던 남편의 말도 어쩌면 명애에겐 그저 따라야 할 무엇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것은 명애가 말하는 본격적인 인생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었다. 

장애인지역공동체 2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 ‘그럼에도, 지금 여기’(감독 장호경)의 한 장면. 과거 박명애 대표가 질라라비 장애인야학에서 공부하는 모습. 사진은 다큐 캡처. 
장애인지역공동체 2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 ‘그럼에도, 지금 여기’(감독 장호경)의 한 장면. 과거 박명애 대표가 질라라비 장애인야학에서 공부하는 모습. 사진은 다큐 캡처. 

명애의 인생은 오직 야학을 만나던 마흔일곱에 시작되는 것이다. 별안간 그의 이야기엔 놀라운 생기와 빛깔이 생겨났다. “너무너무 좋았어요. 지금도 야학 이야기만 하면 소름이 돋아요.” 라며 그가 ‘너무너무’를 남발했다. 스무 살 남짓한 교사들이 서투른 솜씨로 해주는 밥도 너무 맛있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줄 알았던 자신이 손이 불편한 누군가에게 밥을 떠먹여 줄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나섰던 날 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것도 너무 좋았고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나가 비를 맞는 것도 너무 좋았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이 하나도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너무 좋았고 내가 싸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서 너무 좋았고 싸우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배워서 너무 좋았다. 매일 매일 깨지면서 깨우치고 그렇게 깨어나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제 걱정은 말고 맘 편히 사시라고 말 못 했던 지난 세월이 한이 됩니다. 내가 옷에 흙을 묻히더라도 세상 밖으로 기어 나오지 못하고 방안에서 보낸 지난 세월이 한이 됩니다. 지금 용기를 못 내고 망설이는 분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기어서라도 나오면 이 세상은 바뀐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습니다. 같이 바꿉시다! 이 세상 바꿔서 저와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저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부에서 장애인에게 맞춰준다고 말하는 복지는 우리에게 맞지 않습니다. 그런 복지는 확실하게 버립시다! 그리고 우리가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당당하게 권리로서 누리면서 ‘나도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같이 만듭시다!” (2019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 수락 연설 중에서)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건 일상이 열렸다는 뜻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일인지도 모른다. 기쁨도 슬픔도 모르고 살았던 지난 삶이 얼마나 억울한지 명애가 가슴을 치며 증언할 때 무대 위의 그도 울고 무대 아래 사람들도 함께 울었다. 명애는 말했다.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가슴 속에 있던 말을 할 수 있어서 투쟁장에 있는 하루하루가 행복했습니다.” 

자기 고통의 주체가 되어야만 기쁨도 희열도 선명하게 움켜쥘 수 있다고 명애의 삶이 말하는 것 같다. 그는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러 가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더 많은 일상을 원한다”고 외치며 아스팔트 바닥을 맨몸으로 기어가는 투쟁을 벌이고 노숙을 하고 밥을 굶고 오줌을 참는다.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짐작과 다르고 짐작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해서 고유하게 근사하다.  

지난 2월, 대구의 한 카페. 인터뷰를 하는 박명애 대표의 백발 너머 홍은전 작가가 마주 앉아 있다. 
지난 2월, 대구의 한 카페. 인터뷰를 하는 박명애 대표의 백발 너머 홍은전 작가가 마주 앉아 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저녁을 먹을 때 명애의 활동지원사님이 뭔가 제보할 게 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표님이 아버님 이야기도 하셨어요?” 나는 들었다고 대답했다. 딸이 집 밖으로 나가는 걸 몹시 싫어했고 평생 딸의 장애를 아내 탓으로 여겼으며 술에 취하면 명애에게 “나 죽을 때 같이 가자”고 했던 그 아버지. 활동지원사님이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꽃을 주러 오셨던 것도요?” 

“네?”

“아버님이 구십이 넘은 연세에도 딸한테 찾아와서 꽃을 주고 가는 분이었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명애를 쳐다보았다. 

“진짜예요?”

명애가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감흥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예. 칠성시장에 들러서 꽃도 사오시고 검은콩도 사오시고 밤도 사오시고 갈치도 사오셨어요. 사오지 말라고 해도 한사코 사오니까 그게 낙이려니 싶어서 말리지도 않았어요."

활동지원사님이 눈을 찡긋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보탰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나 걸려서 오셨던 거예요.”

세상에. 아흔 살의 아버지가 환갑이 넘은 딸에게 꽃을 주러 오는 길이라니. 생각만 해도 너무 다정해서 수제비를 먹다 말고 꺄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명애가 말했다.

“1년을 아프시다가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아프기 전엔 매일 전화하셨어요. 어디냐고, 차 조심하라고요. 서울에 투쟁하러 왔다고 하면 뒷날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걱정하면서 전화를 하시니까 언제부턴가 서울이어도 집에 들어왔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한 번은 내가 국회의원하고 통화하는 걸 옆에서 보시고는 “이야~ 대단하다! 나는 네가 잘될 줄 알았다”면서 너무 좋아하셨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내가 자식 중에 제일 잘 될 거라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저를 최고로 여기셨어요. 덕분에 학교를 못 다녔어도 별로 위축되지 않았어요.”

인터뷰 내내 나는 대체 무엇을 들었던 것일까. 활동지원사님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아찔하고 아득하다. 이런 이야기 한 조각은 인생 전체의 빛깔을 바꾸어버릴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사랑받았다고 해서 차별받은 고통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받은 기억들은 우리가 그 고통에 직면하고 맞설 힘을 준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명애가 이렇게 잘 싸우는 사람이 된 것은 그가 극심하게 차별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극하게 사랑받은 덕분이라고. 

아버지가 평생 명애의 장애와 고통을 명애의 어머니 탓으로 돌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마도 나는 그에 대한 등급 판정을 끝내버렸던 것 같다. 그것은 개인의 탓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 탓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은 명애와 어머니의 잃어버린 청춘엔 아버지의 책임이 있다고 그를 탓하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는 내 머릿속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어둡고 험상궂고 어딘가 화가 나 있는 남자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노란색 국화꽃을 한 다발 안겨드렸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자문] 박명애(대구 질라라비 장애인야학 교장,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의 공동대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