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운동은 내 삶을 구할 수 있을까 _ 노금호 ④

《 운동은 내 삶을 구할 수 있을까 》

① 괄호 밖의 존재

② 인생의 패러다임이 변하다

③ 더 낮고 더 급진적인

④ 투쟁의 낭만과 삶의 지긋지긋함

2007년 ‘420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이하여 대구시청 앞에서 천막농성 투쟁을 하는 모습. 사진 제공 노금호
2007년 ‘420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이하여 대구시청 앞에서 천막농성 투쟁을 하는 모습. 사진 제공 노금호

- 쉼 없이 달려온 15년

2006년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농성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정말 쉼 없이 달려온 15년이었어요. 2007년엔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을 확대하고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 조례를 만드는 투쟁을 강력하게 펼쳤어요. 2005년 제정된 교통약자이동편의법이 많은 부분을 지자체로 이양해 놓아서 허술한 점이 많았어요. 그중 대표적인 게 특별교통수단(장애인콜택시)이었는데 조례가 없으면 도입하기 어려웠어요. 2007년엔 대구시의 반격이 거셌어요. 천막 치면 부서뜨리고 천막 치면 부서뜨렸어요. 이전에는 분노감이나 해방감으로 싸웠다면 이젠 조직화된 틀을 갖추면서 싸움을 만들어야 했죠. 장애인단체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시민사회에 제안해서 420장애인차별철폐대구투쟁연대(아래 420장애인연대)를 조직해서 활동을 펼쳐나갔어요. 저희가 몸을 던지는 급진적 투쟁을 전개하는 모습을 보고 민중운동 그룹이 고무되었던 것 같아요. 대구엔 그런 투쟁이 별로 없었거든요.

추석 직전 대구시에서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 조례안을 내놓았는데 문제가 많았어요. 특별교통수단 요금을 일반 택시 요금과 똑같이 하겠다, 대상자에 노인을 포함하겠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도입 대수는 몇 대 안 되는데 대상자는 무리하게 넓힌 생색내기용 계획이었죠. 추석 이틀 전 시청 교통국을 점거해서 답변 줄 때까지 버티겠다고 했어요. 추석이 되어도 나갈 생각이 없으니까 시청 공무원들이 우리한테 학을 뗐어요. 기존 단체들은 시끄럽게 굴다가도 단체의 이익을 챙겨 주면 철수하는데 우리는 그러지를 않으니까. 다행히 협상이 잘 되어서 요금 문제를 막아내고 추석 전에 농성을 풀었어요. 이때부터 대구시청 내에 420장애인연대와 협의하는 담당 부서가 구성됐어요. 그 정도로 데인 거죠.

2009년엔 근배가 대학을 졸업하고 지역운동에 결합했어요. 근배는 정책적인 고민이 많은 친구였어요. 저는 그즈음 장애가 급속히 진행되어서 문건을 만드는 게 버거워졌어요. 제 속도가 느려지니까 근배가 어느 날 “문건 정리하는 거 그냥 제가 알아서 할까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주면 좋지” 했어요. 제가 생각을 말하고 아이디어를 내면 근배가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보태니까 속도가 붙기 시작했어요. 그해는 서울에서 탈시설 문제가 대두되었죠. 시설 문제에 집중하되 우리식으로 만들어가자고 했어요. 그때 프랑스에서 젊은 사람들이 도심에서 텐트를 치고 주거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거든요. 우리도 시청 앞에 텐트를 스무 개 치고 3일간 농성을 했어요.

그 성과로 체험홈 2개, 탈시설 정착금 등을 얻어냈고 민관합동 거주시설 장애인인권실태 전수조사를 실시하게 되었죠. 조사 결과 50% 이상의 장애인들이 당장 탈시설을 원한다는 분명한 근거도 만들었어요. 2010년도에 주거권 요구를 전면화했어요. 탈시설 문제는 결국 주거권 문제인데 주거는 시설 장애인뿐만 아니라 저 같은 활동가들에게도 직결된 문제였어요. 주거권은 일반의 장애인들에게 보편적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식의 화두를 던졌죠. 자립생활 주택처럼 주거를 확보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주택 개조 사업, 그리고 임대아파트에 장애인들이 입주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문제들까지요.

2010년 ‘420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이한 투쟁 결의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2010년 ‘420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이한 투쟁 결의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2011년도에는 발달장애인 지원에 관한 요구들을 걸었어요. 그동안 발달장애인 요구는 후순위로 밀렸는데 이때부터는 의도적으로 앞쪽으로 배치해서 요구안을 만들었어요. 성과가 당장 보이지 않더라도 계속적으로 정책 요구들을 했어요. 그리고 2012년에는 ‘중증장애인 자립생활 지원 조례’ 제정 운동을 펼쳤죠. 당시 자립생활 지원 조례가 전국 지자체마다 생겼는데 대구시의회에서는 저희와 논의 없이 엉망으로 통과시켰어요. 주거권, 탈시설 관련된 것들이 많이 빠져있어서 시의회 의장실을 점거했어요. 그런 투쟁은 대구시 역사상 처음이었대요. 일주일 정도 농성을 했었죠. 다른 지역 조례는 대부분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지원하는 수준인데 저희는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보다 강력한 조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 조례가 있었기 때문에 자립주택 같은 것이 더 확대될 수 있었어요.

2014년도에는 지방선거가 있었어요. 지방선거는 그간의 투쟁이 성과를 맺는 과정이에요. 2.28공원에서 농성장을 펴고 대중투쟁을 만들었어요. 모든 시장 후보자들에게서 저희 요구안을 걸고 공약 합의서를 받아냈어요. 그때 핵심 요구 중에 장애인 거주시설에 더 이상 입소하지 않도록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이전부터 저희가 계속해온 요구였는데 이때 거의 확정적으로 마무리되었죠. 대구시의 장애인시설엔 장애인이 이제 입소할 수 없어요. 수년간 제도적 지원을 받으면서 시설에서 나온 분들이 늘어났고 그분들이 장애인야학에 다니거나 자립생활센터 이용자가 되면서 장애인운동에 결합하는 순환구조가 만들어졌어요. 2015년도에는 이분들을 중심으로 ‘탈선’이라는 이름의 탈시설 선봉대를 조직해서 대구시와 8개 구 순회 투쟁을 벌이기도 했어요.

2018년 5월 10일, 대구시청 앞에서 장애인 탈시설 문제를 외면하며 희망원 문제해결을 위한 특별예산을 책정하지 않은 권영진 대구시장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아스팔트 바닥에는 대구시를 규탄하는 문구들이 락카로 쓰여 있다. 사진 제공 노금호
2018년 5월 10일, 대구시청 앞에서 장애인 탈시설 문제를 외면하며 희망원 문제해결을 위한 특별예산을 책정하지 않은 권영진 대구시장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아스팔트 바닥에는 대구시를 규탄하는 문구들이 락카로 쓰여 있다. 사진 제공 노금호

- 희망원의 절망

2016년에 대형 장애인‧노숙인 수용시설인 대구시립희망원에서 비리문제가 터졌는데 그때 시작된 투쟁이 2019년까지 이어졌어요. 2017년에 대구시와 합의했던 게 시설을 폐쇄하고 장애인 분들을 탈시설 시킨다는 것이었는데 2018년까지도 잘 안 지켜졌어요. 농성을 다시 깔고 150일간 싸웠어요. 그러면서 거주인들의 탈시설 욕구를 파악하고 지원하는 조사가 이루어졌어요. ‘시설이 문을 닫은 후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라고 묻고 그 답을 파악하는 조사였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조사하는 사람들이 장애인들의 의사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었던 거예요. 중증·중복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이들은 ‘무응답층’으로 분류됐어요. 저희는 당연히 그들도 탈시설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시에서는 의사를 확인할 수 없으니 다른 시설로 전원시키겠다고 나왔어요. 마지막까지 싸웠던 문제가 바로 그 무응답층에 대한 부분이었어요.

우리나라의 가족주의 제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그때 알았어요. 무응답층이 30여 명이었는데 그중에 스물 몇 분 정도는 가족이 있었어요. 가족에는 부모, 자식, 형제뿐만 아니라 사촌들까지도 포함되더라고요. 오래전에 연락 끊긴 사촌한테 연락해서 이 중증장애인을 탈시설 시킬지, 다른 시설로 보낼지 의견을 물어보는 거예요. 한 사람의 인생 향방을 정할 법적 권한이 그들에게 부여되더라고요. 그럼 당연히 다른 시설로 보내달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법적으로 저희 같은 단체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때 정말 무력한 느낌이었어요. 농성할 때 선거가 끼어있어서 아주 열심히 싸웠는데, 선거는 끝나버렸고 시장은 계속 전원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이었어요. 너무 막막하더라고요. 더 열심히 싸우지 못해서 이분들의 권리를 지키지 못한 것 같고, 뭔가 큰 죄를 짓는 느낌이었어요.

‘교황 즉위 4주년 기념 미사’가 열렸던 2017년 3월 22일, 장애인 활동가들이 천주교에 희망원 문제해결을 촉구하며 명동성당에서 기습시위를 벌였다. 희망원은 대구천주교회유지재단이 대구시로부터 수탁 받아 37년간 운영했다. 손펼침막에는 “대구시립희망원에 희망이 어디있으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 강혜민
‘교황 즉위 4주년 기념 미사’가 열렸던 2017년 3월 22일, 장애인 활동가들이 천주교에 희망원 문제해결을 촉구하며 명동성당에서 기습시위를 벌였다. 희망원은 대구천주교회유지재단이 대구시로부터 수탁 받아 37년간 운영했다. 손펼침막에는 “대구시립희망원에 희망이 어디있으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 강혜민

다른 시설로 옮겨지면 완전히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인데 중증 발달장애인들에겐 너무나 힘든 일이에요. 희망원에 그대로 있는 것보다 못해요. 희망원은 학대받던 시설이라도 어떻게든 적응해 살던 곳이잖아요. 그나마 희망원은 시립이어서 민간시설보다는 나아요. 희망원의 장애인분들이 대부분 나이가 많으세요. 몇 해 전에 어떤 장애인을 만나기 위해 울산에 있는 노인요양시설에 가본 적이 있는데 너무 처참했어요. 아주 작은 공간의 사방 벽면에 침대가 빼곡하게 둘러져있고 공간을 놀리지 않으려고 가운데에도 침대를 더 놓았더라고요. 빈틈이라곤 없고 냄새도 엄청 심한데 노인과 장애인들이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었어요. 그런 곳이 있다는 걸 보고 되게 충격받았어요.

희망원 분들이 그런 곳으로 보내질 걸 생각하니까 너무 절망적이고 서러워서 집회 발언을 하는데 눈물이 나서 울었어요. 그들의 미래가 우리의 미래인 것 같기도 하고 저의 미래인 것 같기도 했어요. 당시 대구시에서 별 쓸 데 없어 보이는 건물을 짓는 데 200억 정도를 들였다가 거의 날리다시피 했는데 우리가 요구했던 건 몇억도 안 되었거든요. 우리가 그거보다 못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 결국 무응답층 중에 가족이 있으신 분들은 모두 다른 시설로 옮겨졌고 가족이 없는 아홉 분만 가까스로 탈시설 하기로 해서 저희가 지원했어요. 장애인들이 탈시설하기 위해선 차라리 가족이 없는 게 더 낫다는 사실이 참 슬프죠.

2006년부터 한 해도 투쟁을 쉰 적이 없어요. 그러면서 피로감이 상당히 누적되었어요. 희망원 아홉 분의 경우에도 저희는 장애 당사자들에 대한 인권적 이해를 가진 기관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요구했는데 정작 그걸 수행할 의지나 경험이 있는 기관이 대구엔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저희가 맡을 수밖에 없었어요. 기존의 탈시설 지원 제도와 서비스가 모두 신체장애인 중심이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어요. 그런 와중에도 중증·중복 발달장애인의 탈시설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잘하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그러다 보니 이중으로 힘들었던 것 같아요.

대구시립희망원에서 탈시설한 중증·중복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맨 왼쪽이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대구시립희망원에서 탈시설한 중증·중복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맨 왼쪽이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 투쟁의 낭만과 삶의 지긋지긋함

장애인운동을 왜 하냐고요? 깊이 생각 안 해봤는데, 우선은 저의 문제였기 때문에 해야 할 이유는 명확했어요. 장애인운동은 나 혼자 내 장애를 극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을 주었어요. 종교적인 면도 있어요. 제 활동의 기준점이 되는 존재 중 하나는 혁명가 예수예요. 그는 개인을 위한 삶을 살지 않았어요. 이 운동은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권리를 회복하는 과정이잖아요. 가깝게는 희망원에서 학대받다가 다른 시설로 보내진 분들에서부터 어릴 때 기도원 친구들이 학교에서 놀림당하고 차별받았던 모습들을 많이 봤으니까요.

살면서 안타까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가족에게 긍정적인 대상이 아니잖아요. 비장애 형제자매들에 비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기도 해요. 활동하고 싶어도 저처럼 집에서 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오갈 데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공감이 되니까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아요. 어떤 활동가들은 갑자기 돈이 필요한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사람들 모아서 돈을 걷어서 드리기도 했죠. 어떤 사람이 문제 상황에 처해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너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좀 화가 나요. 냉철하게 접근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는 옆에서 걱정하고 있고 뭔가 함께하고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거든요.

저는 요즘 전장연 운동에 박탈감 같은 걸 많이 느껴요. 장애인운동 멋있고 급진적이죠. 낭만이 있어요. 그런 면을 저 또한 좋아하고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모습 때문에 현실이 가려진다는 느낌을 받아요. 더 처절한 밑바닥, 삶의 어떤 지긋지긋함이 있는데 그것이 잘 안 보인다는 느낌이요. 투쟁판에 있으면 생동감이 있어요. 존재가 존재로서 인정받는 것 같죠.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존재로서 가치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지금의 제 상황이 그래요. 작년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만약 내가 지금 정도의 사회적 권력을 갖지 않았다면 과연 생존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회의적이에요.

청도대남병원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하고 매일 사람이 죽어나갔잖아요. 그런데 문제를 사회에 던져놓기만 할 뿐 실제로 구제를 못한 거잖아요. 사회 비판도 중요하지만 단 한 명의 삶이라도 구제하고 일상을 어떻게 지원하는가의 문제가 저에겐 더 절실하게 느껴져요. 거리 투쟁만이 운동인 것처럼 여겨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희망원 투쟁처럼 싸움보다 싸움 그 이후에 상황을 수습하고 세밀하게 챙겨야 할 것들이 더 많은데 전장연 운동이 그것을 못 챙기는 게 아닌가, 이슈를 드러내는 기자회견만 하고 그 이후의 디테일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커요.

2020년 2월 26일, 장애계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시설 내 집단감염 문제에 대해 ‘시설의 폐쇄성’을 지적하며 긴급구제를 신청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청도대남병원에서 코로나로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얼굴 없는 영정 앞에 국화가 놓여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2020년 2월 26일, 장애계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시설 내 집단감염 문제에 대해 ‘시설의 폐쇄성’을 지적하며 긴급구제를 신청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청도대남병원에서 코로나로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얼굴 없는 영정 앞에 국화가 놓여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최근에 박명애 대표님이 장애인차별금지법 기자회견에서 치아가 다 고장이 났는데 갈 수 있는 병원이 없다면서 서러움에 북받쳐서 말씀하셨어요. 여덟 군데를 알아봤는데 휠체어를 탄 사람이 갈 수 있는 병원은 겨우 한 곳이었고 그마저도 치과 의자에 앉을 수가 없었고 얼굴 엑스레이도 찍을 수가 없었대요. 병원의 기기들과 우리의 몸이 맞지 않으니까요. 당사자들의 공포 중 하나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제대로 된 치료는 고사하고 병원에 입원할 여건조차 안 되는 거예요.

저는 몸무게가 많이 나가고 일상생활을 위해 보조기구도 많이 필요해요. 저를 지원하려면 제 몸에 대한 이해도 반드시 필요해요. 그런데 감염병의 경우는 정해진 인력에게만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들은 내 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어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장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는 사람들에게 덩그러니 던져질 상황에 대한 공포감이 너무 커요. 게다가 저는 면역력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감염되면 죽음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겠죠.

그런데 이게 처음이 아니잖아요. 메르스 때부터 문제제기 했던 거예요. 그런데 제기만 할 뿐 누구도 후속 과정을 밟지 않았던 거예요. 우리 진영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이 사안에 대한 민감성이 없으니까 그걸 필사적으로 챙기지 않은 거죠. (한숨) 대구에서 2020년 2월 코로나가 처음 터졌을 때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요. 장애인 자가격리자가 속출하는 데도 지원인력을 어떻게 투입해야 할지 매뉴얼이 없는 거예요. 보건소에 전화해도 통화도 안 되고 그 와중에 확진자도 나오고요. 보건 당국에선 무조건 격리해야 한다는데 격리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누군가는 곁에서 지원해야 하는데 감염병 환자에 대한 지원을 함부로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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