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운동은 내 삶을 구할 수 있을까 _ 노금호②

《 운동은 내 삶을 구할 수 있을까 》

① 괄호 밖의 존재

② 인생의 패러다임이 변하다

2학년 여름에 남자 동기 둘과 여수로 무전여행을 떠났다. 여수 돌산대교 위에서. 사진 제공 노금호
2학년 여름에 남자 동기 둘과 여수로 무전여행을 떠났다. 여수 돌산대교 위에서. 사진 제공 노금호

- 스무 살, 인생의 패러다임이 변하다

대학은 서울로 가고 싶었어요.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고 가족의 간섭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수능을 말아먹었어요. 아버지가 대구대학교가 장애인에 대한 지원이 좋다는 얘길 듣고 오셨어요. 장애학생 특별전형도 있고 특수교육과도 있다고요. 특수교육학부 안에는 유아특수교육과, 초등특수교육과, 중등특수교육과, 치료특수교육과 이렇게 네 개 학과가 있었어요. 저는 대구대를 다닐 마음이 없었어요. 그래도 일단 집에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학교 다니면서 재수를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 마음으로 입학하는 건데 저 때문에 떨어지는 사람이 생기면 미안하니까 가장 경쟁률이 낮은 과에 넣었어요. 그렇게 유아특수교육과에 들어가게 되었죠. 어린이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대구대는 원래 대구 대명동에 있었는데 그즈음 캠퍼스를 경산시로 이전해 가는 중이었어요. 본교는 이미 경산으로 옮겨갔고 사범대는 아직 대구에 남아 있었어요. 대구 캠퍼스엔 기숙사가 없었는데 다행히 정부에서 군인 자녀들을 위해 운영하는 기숙사가 대구에 있어서 거기서 지내면서 학교로 통학했어요. 그때부터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입학 전에 모꼬지를 갔어요. 수십여 명 중에 남자가 3명밖에 없고 다 여자들이었어요. 그런데 공동체 의식을 함양시킨다면서 군대에서 하는 얼차려 같은 걸 주면서 막 굴리더라고요. 저는 참여할 수 없으니까 시작부터 소외되었죠. 그날 저녁에 술 먹으면서 소감 나누는 자리가 있었어요. 그때 제 상태가 워낙 바닥을 치고 있을 때여서 되게 씨니컬하게 막 쏟아내듯이 말했어요. 그런데 예쁜 누나들이 막 취해서 울고… 그러다 토하고 대짜로 뻗어서 자는 거예요. (웃음) 여성에 대한 환상이 있었는데 어안이 벙벙했죠. 이게 뭔 상황인가. (웃음) 같이 어울려 얘기도 하고 망가지는 것을 보니까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어요. 독특한 경험이었죠.

대학 캠퍼스가 허름하고 작아서 규모가 좀 큰 고등학교 같았어요. 어떤 강의동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특수교육과니까 학생들이 장애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어요. 무얼 하더라도 제 상황을 고려해줬어요. 장애 있는 선배들이 저를 챙겨주기도 했고요. 네 개의 특수교육과가 연합해서 어울리는 기풍이 있어서 다른 과 남자들과 친해졌어요. 수업은 그 친구들한테 업혀서 듣고 다녔죠. 선배들한테 밥 얻어먹고 노는 게 아주 재미있었어요. 아침 수업 전에 기독교 동아리 모임에 참석해서 기도하고 찬송가도 불렀어요. 그때까진 신실해서 술도 먹지 않았어요.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재미 같은 걸 많이 느꼈어요. 생각 없이 노느라 1학기가 다 지나갔어요. 아, 이 맛이구나! 대학은 이런 거구나! 재수할 생각은 싹 잊었죠. 사람들에게 주목도 받고 존중도 받았어요. 사춘기 내내 교우관계를 잘 맺지 못해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마음이 컸는데 무너진 자존감이 많이 회복되었던 것 같아요. 행복했어요.

‘무장애대학교 만들기’ 캠퍼스 간담회를 한 후 참가자들이 현수막을 펼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 가장자리에 휠체어를 탄 사람이 노금호 소장. 대학교 1학년 때의 모습이다. 사진 제공 노금호 
‘무장애대학교 만들기’ 캠퍼스 간담회를 한 후 참가자들이 현수막을 펼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 가장자리에 휠체어를 탄 사람이 노금호 소장. 대학교 1학년 때의 모습이다. 사진 제공 노금호 

여름방학 때는 전북 완주에 있는 우석대학교로 전국특수교육과학생회연합(아래 전특련)의 수련회를 가게 되었어요. 거기서 장애인운동에 대한 고민을 처음 하는 계기가 됐던 사람을 만났어요.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수백 명 왔는데 그 사람들 앞에서 김형수라는 분이 강의를 하셨어요. 그분은 뇌성마비장애인이었어요. 너무 놀라웠죠. 저한테 뇌성마비장애인은 기도원 시절부터 동정의 대상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거든요. 얕잡아봤던 거죠. 그런데 그분이 장애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너무 당당하게 하는 모습이 제 눈엔 후광 같은 게 보일 정도로 크게 다가왔어요. 저는 그때까지 제 장애로 인해서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분은 전혀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했어요.

그 후에 그분이 기획한 ‘무장애대학교 만들기’라는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게 됐어요. 30명 정도의 대학생이 모여서 수련회를 했는데 대학 내 장애학생 교육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때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어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인식체계래요. 우리는 그동안 장애를 ‘극복해야 할 어떤 것’으로 보았는데 그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 여름엔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어요. 인생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죠.

저는 장애가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이고 개인적인 노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나빠지니까 스스로를 부정했던 거죠. 그런 시기에 새로운 관계를 만나서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됐어요. 그건 정말 중요한 순간이죠. 나에게로 향했던 분노와 실망감이 바깥을 향하기 시작했으니까. 그걸 인식하면 표출할 수 있으니까요. 그전엔 표출할 수 없어서 삶이 아주 암울했거든요.

여름방학엔 포항 집에 와 있는데 친구들이 놀러 와서 처음으로 술을 먹었어요. 뭔가 금기된 것을 한다는 해방감이 있었어요. 또 어느 날은 동기 중에 김종훈이라는 형이 연락해서는 안치환 콘서트 티켓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했어요. 버스를 탈 수가 없는데 어떻게 가냐고 했더니 자기가 업고 가면 된대요. 그래서 정말로 버스 타고 사람들한테 업혀 가면서 콘서트에 갔어요. ‘아, 하면 되는구나!’ 생각했죠. 그전에는 뭔가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으면 아예 시작도 안 했는데 그렇게 콘서트에 다녀오면서 그 생각이 깨졌던 것 같아요. 그 형도 저한테 많은 변화를 줬던 사람 중 한 명이예요. 그 이후부턴 어딘가 가야 할 때 주저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사람들을 모아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커다란 소라 앞에 휠체어 탄 노금호 소장이 있고, 오른손 주먹을 꽉 쥐고 있다. 그의 주변으로 하얀 종이가 눈처럼 내린다. 1학년 때, 노금호 소장이 쓴 시 중에 ‘깨어지는 소라의 아우성’이라는 문구가 있다. 노 소장은 “깨지더라도 한번 아우성을 질러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러스트 훗한나
커다란 소라 앞에 휠체어 탄 노금호 소장이 있고, 오른손 주먹을 꽉 쥐고 있다. 그의 주변으로 하얀 종이가 눈처럼 내린다. 1학년 때, 노금호 소장이 쓴 시 중에 ‘깨어지는 소라의 아우성’이라는 문구가 있다. 노 소장은 “깨지더라도 한번 아우성을 질러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러스트 훗한나

- 깨어지는 소라의 아우성

1학년 2학기 때 사범대도 경산시로 옮겨갔어요. 그때부터 지금의 제 역사가 만들어졌죠.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어요. 그래서 장애학생들은 모두 1층으로 배치되었어요. 어느 날 기숙사 복도를 지나다 어떤 중증의 장애를 가진 형이 있는 방을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방에 소변통이 주욱 쌓여있는 모습이 너무 지저분했어요. 처음엔 그냥 지나쳤는데 며칠이 지나도 상황이 나아지질 않아서 룸메이트인 종훈 형과 함께 그 방에 찾아가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어요. 그분 말씀이 비장애인 룸메이트가 도망을 갔대요.

학교는 장애인이 있는 방에 비장애인 룸메이트를 배치해서 장애학생의 생활을 지원하게 했어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비장애학생의 의사를 묻지 않았어요. 배치받아서 처음 방에 왔다가 장애인을 보고 놀라서 가버리는 사람도 있고 얼마간 지내보다 힘드니까 나간 사람도 있었대요. 그분은 혼자 있다가 저녁이 되면 친구가 와서 배달음식을 시켜주면 먹는다고 했어요. 학교는 그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텐데 아무런 대책도 없었어요.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술 한잔하면서 그런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까 1층에 있던 사람들이 한 명씩 한 명씩 모이는 거예요. 저녁 시간이면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종훈 형과 고민을 나누고 토론하면서 우리가 특수교육과 학생인데 정작 우리가 다니는 학교에 장애인이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것을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어요. 전단지를 만들어서 이 상황을 알리자고 했어요. 제가 썼던 시가 있었는데 제목이 ‘절름발이 외침’이었어요. 시 마지막 문구가 ‘깨어지는 소라의 아우성’이었어요. 소라는 아무리 외쳐도 그 소리가 안으로만 울리고 바깥에선 들리지 않잖아요. 깨지더라도 한번 아우성을 질러보자는 뜻이었죠. 그 문구로 전단지를 만들었어요. 학교 내 장애인 편의시설이 뭐가 문제이고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썼어요. 무슨 용기였는지 점심시간에 둘이서 마이크도 없이 그냥 학교 광장에서 그냥 소리를 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매일 하자고 했는데 인쇄비용도 만만치 않고 힘도 들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도 했다가 그것도 힘들어서 나중엔 한 달에 한 번으로 정착했죠.

나중엔 종훈 형과 수민선배가 장애인권동아리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어요. 수민선배는 초등특수교육과였는데 전특련 활동도 하고 무장애대학교 만들기 활동도 한 사람이었어요. 저는 장애인들이 주로 모이는 동아리를 한다는 게 썩 당기진 않았어요. 왜냐하면 비장애 사회에서 비장애인들과 노는 게 더 재미있었거든요. 다른 장애인을 바라보면 나의 힘든 장애를 더 의식하게 되어서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어요.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도 문제의식은 있었으니까 함께 하기로 했어요.

동아리 이름을 ‘레츠’로 정한 뒤에 회원을 모집했어요. 대구대 전체 학생이 1만8천 명 정도였는데 장애학생 특별전형으로 들어온 사람은 300명 정도 됐어요. 그중에 열댓 명 정도가 동아리에 들어왔어요. 주로 대자보 붙이고 사람들에게 현실을 알리는 활동을 했어요. 학교에서 운영하는 장애학생지원센터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교육지원은 없었어요. 청각장애인을 위한 문자통역이나 수어통역,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교재나 파일 제공, 신체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 설치와 학교생활을 지원하는 인력 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장애학생들을 지원하는 일엔 관심이 없고 홍보에만 활용하는 학교에 문제제기를 계속했어요.

대구대 장애인권동아리 ‘레츠’ 회원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네 번째, 뒷줄에 안경 쓴 사람이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대구대 장애인권동아리 ‘레츠’ 회원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네 번째, 뒷줄에 안경 쓴 사람이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 내 인생의 황금기

2학년 여름방학에도 전특련 수련회가 열렸는데 이번엔 평택 에바다투쟁 현장에서 했어요. 에바다투쟁은 청각장애인 시설인 에바다복지회의 비리와 폭력에 맞서 싸운 투쟁이에요. 에바다복지회는 특수학교와 거주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996년에 그곳의 특수교사와 농인들에 의해 처음 비리 문제가 터져 나왔어요. 그 후 계속 싸웠는데 2002년 그때가 에바다 투쟁이 아주 극렬할 때였어요. 우리가 갔을 땐 에바다시설 측에서 건물을 점거한 상태였고 수백 명의 대학생들과 활동가들이 밖에서 대치하고 있었어요. 거기서 충격적인 경험을 했어요. 시설 측 사람들이 쇠파이프를 마구 휘둘러서 제 옆에 있던 친구가 머리를 맞는 걸 눈앞에서 봤어요. 현장에서 싸우는 건 처음 봤는데 너무 무섭더라고요.

수련회 마지막 날엔 시설에 맞서 저항하는 농인들이 모여 살던 ‘해아래집’이라는 공간에서 뒤풀이가 열렸어요. 백 명도 넘는 대학생들이 모여서 꼭 잔치 같았죠. 거기서 에바다대학생연대회의에서 활동하는 서울대, 고려대 학생들을 만났어요. 막걸리에 인사불성 취해서는 서울대 다니던 진영이라는 친구한테 서울대 출신들이 사회 권력을 쥐고 독점하고 있어서 세상이 이렇게 부조리한 거라고 막 진상을 부렸어요. 열등감 같은 거죠. 엉망으로 토해서 그 집을 아주 어지럽혀 놓았어요. 종교적 이유로 술도 안 먹던 제가 그렇게 변한 거예요. (웃음) 에바다 투쟁 이후에 삶의 방향이 변했어요. 이렇게 부조리한 세상이 있다는 걸, 이렇게 처절한 곳이 있다는 걸 제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요.

2학년 2학기엔 동아리 회장이 되었어요. 좀 더 틀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목표는 장애학생들이 접근성을 고민하지 않고 모일 수 있는 동아리방을 확보하는 거였어요. 동아리연합회 찾아가서 동아리방 필요하다고 요구하면서 대신 너희들 행사 있으면 내가 열심히 도울게, 했어요. 동아리연합회에서 주최하는 제일 큰 행사로 마라톤이 있었어요. 대구대는 장애인들이 있는 학교니까 뭔가 행사를 할 때 장애인을 끼워서 그림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우리가 장애학생들을 모아주겠다고 했어요. 전동휠체어 탄 사람들이 마라톤을 한다는 게 좀 어색하지만 그래도 걷는 장애인, 휠체어 탄 장애인 열댓 명 모아서 한 바퀴 돌아줬죠. (웃음) 그랬더니 얘네 열심히 하네, 싶어서 그해 말 비어있는 동아리방을 우리에게 줬어요.

그런데 저의 노력이나 열정과 다르게 동아리 사람들은 좀처럼 적극적이지가 않았어요. 장애인들과 뭔가 함께 하는 게 되게 괴로웠어요. 그와 달리 비장애 친구들과 지내면 너무 즐거웠어요. 직전 여름엔 남자 동기 둘과 함께 무전여행을 갔어요. 여수 바닷가에서 1인용 텐트를 치고 세 명이서 노숙 비슷한 여행을 1주일 정도 했어요. 책임감을 벗고 그렇게 무계획적으로 살아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제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경험이고 소중한 추억이에요. 제가 불안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들과 함께하면서 틀을 벗어나는 경험들을 많이 했고, 생각의 틀이 넓어지는 계기가 됐어요.

2학년 여름에 남자 동기 둘과 여수로 무전여행을 떠났다. 여수 돌산대교 위에서. 사진 제공 노금호
2학년 여름에 남자 동기 둘과 여수로 무전여행을 떠났다. 여수 돌산대교 위에서. 사진 제공 노금호

그런데 다수의 동아리 회원들은 모임을 하자고 해도 한두 시간 어기는 건 다반사이고 왜 안 오냐고 계속 확인해야 되고 제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행동을 많이 했어요. 애써 기대를 하지 않아야 했어요. 약속을 했어도 이 사람들은 안 올 거야, 안 할 거야, 늘 그걸 염두에 두면서 플랜B를 생각해야 했어요. 캠페인 활동이 있으면 장애인들은 시간 맞춰서 오지 않으니까 제가 친한 인맥들을 따로 불러서 짐을 옮기게 했어요. 다 정리될 때쯤 회원들이 슬금슬금 오는데 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어요.

동아리 회원 중에 조미경이라는 누나가 있었어요. 서울에서 노들장애인야학을 졸업하고 대구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분이셨어요. 제가 너무 답답해하니까 그 누나가 그러시더라고요. 회원들 다수는 너처럼 일반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장애인들은 경쟁사회에 익숙한 존재들이 아니라고요. 계속 배제되고 결정권을 박탈당하면서 무기력이 체화되어 있고, 스스로 동기부여를 해서 뭔가 이루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많은 생각을 했어요. 아, 그럴 수 있겠구나. 내가 너무 내 속도 위주로 일을 해왔구나. 좀 어설프게 느껴지더라도 이들의 결정을 존중하면서 동아리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됐죠.

나중에는 장애인만으로 활동이 어려워서 비장애인 회원도 적극적으로 모집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엄청 허세인데 후배들 앞에서 “너희가 장애를 아느냐” 썰을 풀면 후배들이 막 열광하던 시절이었어요. 대학시절엔 2학년만 되어도 엄청 커 보이니까요. 처음으로 후배랑 연애도 했어요. 제가 그때 말발이 좋았거든요. 지금보다 더 거침없었어요. 이 시절이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황금기였던 거 같아요. 제일 재밌고 생각의 변화도 컸어요.

2004년, 대구대 점자도서관 앞에서 시각장애인 전용 식물원 개원을 규탄하면 피켓 시위를 하는 모습. 노금호 소장이 “시혜적 행정 필요없다, 장애인 교육권 확보하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제공 노금호 
2004년, 대구대 점자도서관 앞에서 시각장애인 전용 식물원 개원을 규탄하면 피켓 시위를 하는 모습. 노금호 소장이 “시혜적 행정 필요없다, 장애인 교육권 확보하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제공 노금호 

- 비장애인들의 학생운동

2004년 4학년이 되어서는 사범대 학생회 활동을 했어요. 제가 학교 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니까 학생회를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은 거죠. 사범대 학생이 1500명 정도로 규모가 꽤 컸어요. 우리 학교 사범대는 계속 반-운동권, 비-운동권 학생회가 세워졌었는데 저희 땐 압도적인 표차로 운동권 학생회인 우리가 당선됐어요. 저희 학생회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아래 한총련) 소속이었어요. 한총련은 주로 통일, 민족해방을 외치는 조직인데 저희 선배들은 썩 한총련스럽지(?) 않아서 장애나 여성 같은 소수자 문제에 대한 활동도 중요하게 여겼어요. 저는 장애인권부장을 맡았어요.

그런데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총련과는 뭔가를 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 학기 시작하자마자 한총련 중앙조직에서 온 간부가 저를 보고선 통일되면 장애문제가 다 해결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허허허. 아, 이거 아니구나, 생각했죠. 주류 학생운동 문화 속에서 관성적으로 하는 등록금 투쟁이나 국가보안법 폐지 같은 주제가 주가 되다 보니 장애 인권은 부수적으로 다뤄지기도 했고 제가 고민하는 주제와 간극이 있었어요.

한총련 대의원대회가 열려서 서울 어느 대학에 전국의 학생회 간부들 수천 명이 모였던 적이 있어요. 선배들한테 업혀서 버스 타고 갔죠. 학교에 도착했는데 행사장에도 엘리베이터가 없었어요. 또 들쳐 업고 올라가야 했죠. 참가자 중에 휠체어를 탄 사람은 저 혼자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아무 말도 없이 넘어가는 게 맞을지 고민이 된다고 했더니 선배들이 피켓을 들자고 하더라고요. 피켓을 썼어요. 장애학생들을 배제하지 말고 장애 친화적인 대의원대회를 만들어야 한다고요. 그걸 들고 행사장 뒤에서 시위를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도발적인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치는 정도. 학교 다니던 내내 그렇게 시위하는 게 저에겐 일상이었어요.

한총련 학생회 활동이 다른 사회문제에 대해 배우는 기회가 되었어요. 농민대회도 가보고 통일,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고요. 그렇지만 저희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나 장애인인 나와 연결되는 지점을 찾기는 어려웠어요. 집회할 때 다른 비장애인 학생회장들이 발언하는 것도 저와는 딱히 연결되는 게 없었고요. 저희 사범대 학생회에서는 문화혁명을 해보자고 했었어요. 얼차려 주는 그런 권위적인 문화를 없애자고요. 이전의 비-운동권, 반-운동권 학생회는 임용고사 학원에서 리베이트 받아서 그걸로 학생회장들 체육복도 맞춰주고 술값도 줬어요. 축제할 때도 납품 업체랑 말을 맞춰서 엄청 떼어먹고요. 저희는 그런 돈 일절 안 받았어요. 그랬더니 반-운동권 과학생회의 반격이 점점 심해지더니 나중엔 어떤 것을 제안해도 안 먹히더라고요. 한 학기 동안 그런 상황을 쭉 지켜보면서 이 활동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운동도 경험하고 생각의 틀도 넓어졌지만 저와는 잘 안 맞았어요.

4학년 때 대구지역 ‘420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집회에 참석했을 때 모습. 이마에 빨간색 페인팅으로 “420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제공 노금호

저는 장애학생들이 입학하면 미리 정보를 파악하고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확인하고 연결하고 학교에 요구하는 활동에 집중했어요.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날에 맞춰서 장애인이동권연대 박경석 대표를 초대해 강연회를 열었어요. 그전에도 경석 형을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이야기 나눴던 건 그날이 처음이었어요. 끝나고 나서 술을 마셨어요. 그때 제가 장애인운동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사회복지 실습을 해야 하는데 소개해줄 기관이 없냐고 물어봤어요. 저는 유아특수교육으로 진출할 마음이 없었고 사회정책 분야의 일을 하고 싶어서 사회복지학 복수전공을 하고 있었거든요. 경석 형이 자기가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까 서울로 오라고 했어요. 서울에 연고가 없어서 숙식할 곳이 필요하다 했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경석 형의 말만 믿고 여름방학 때 무작정 짐을 싸 들고 기차 타고 서울로 실습하러 올라갔어요. 대체 무슨 깡으로 그랬던 건지.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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