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운동은 내 삶을 구할 수 있을까 _ 노금호

- 운동은 우리의 삶을 구할 수 있을까

2020년 여름 코로나가 잠시 사그라들었다가 가을에 서울에서 다시 확산되었어요. 서울의 어떤 근육장애인 분이 페이스북에 자기가 확진이 됐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글을 올리셨어요. 대구에서 그 난리를 겪고 그 와중에 저희가 계속적으로 대책 마련을 요구했고 복지부에서도 대구 활동가들을 불러서 추석도 없이 서울로 올라갔거든요. 복지부에서도 자기들의 노력을 자랑처럼 떠들기에 뭔가 대책이 마련되었겠지 생각하면서 물러나 지켜봤어요. 그런데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그분이 상황을 페이스북에 계속 올리셨어요. 안 그래도 병상이 부족한데 중증장애인의 신체 지원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야 하니까 병원 후송이 더 늦어지고 있었어요. 가족과 활동지원사도 모두 자가격리를 해야 해서 그분 곁에서 당장 활동지원을 해줄 사람이 없었어요. 밥 먹고 물 먹고 화장실 가는 일조차 못하는 거예요. 그런 글 아래에 “어떡해요”, “힘내세요” 하는 댓글만 올라오는 거예요. 거기엔 제가 아는 단체 대표들도 있었어요. 너무 화가 났어요. 그런 말할 때가 아니잖아요. 감염되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한테는 위로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보를 주거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죠.

보다 못해 제가 그분께 서울시사회서비스원이라는 조직이 있으니 연락해보시라고 했어요. 저희가 요구해서 대구에선 대구시사회서비스원에서 확진자에게 긴급활동지원서비스를 제공하거든요. 그분이 알아보셨는데 서울엔 그런 시스템이 없다고 했대요. 제가 서울의 전장연 활동가에게 물어봤더니 제안하긴 했지만 이후 확정된 건 없다는 거예요. 휴… 코로나 초기엔 정부의 대책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화가 났다면 나중엔 전장연 운동에 화가 나더라고요. 대구에서 계속 필요한 제도와 정책을 올렸는데 중앙에서 너무 태만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2월, 대구 자택에서 노금호 소장이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지난 2월, 대구 자택에서 노금호 소장이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그분은 며칠 더 집에서 방치되었어요. 다행히 그분의 배우자분이 감염 위협을 무릅쓰고 곁을 지키기로 하셨어요. 처음에 그 소식을 듣고 혹시 아내분이 방호복 착용 같은 방역 조치를 다 취하고 들어가느냐고 물으니까 전혀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 주의사항에 대해 들은 바가 없대요. 잘못하다간 아내까지 위험해지는 상황이었어요. 그거 대구에서 저희가 다 겪은 거예요. 질병관리본부(아래 질본, 현 질병관리청)와 장애인복지 분야가 서로 전혀 소통하지 않거든요. 질본은 장애인 확진자나 자가격리자가 어떤 상황과 조건에 있는지 전혀 몰라요. 알아서 자가격리하겠지 하는 거예요. 제가 그분한테 절대 안 된다고 그러다 큰일 난다고 방호복이나 방역물품들을 준비해서 들어가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이건 기본 중에 기본이거든요. 그것조차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상황이었어요.

며칠 후 그분이 생활치료센터로 가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저는 또 불안불안했어요. 대구의 생활치료센터엔 장애인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한바탕 또 난리를 쳤었거든요. 저희 지역이 아니니 제가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또 제 예상이 맞았어요. 그분이 생활치료센터에 힘들게 갔는데 계단밖에 없었대요. 휴…

코로나 초기도 아니고 지방도시도 아니고 한국에서 가장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는 서울이 이렇게 장애인을 방치한다면 도대체 한국 땅에서 생존할 수 있는 장애인이 얼마나 있을까. 작년 초 청도대남병원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희생되었고, 대구에서 그 큰 혼란을 겪고 저희가 겪은 고통과 대처 방안을 피 토하듯 외쳤는데 아무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마련된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한 거예요. 끓어오르는 분노가 주체가 안 되었어요. 여전히 나 같은 장애인은 감염되면 갈 수 있는 병원도 없고, 대기 중에 지원받을 시스템도 없어 홀로 방치되어야 한다는 게, 그 부담을 오직 가족이 목숨을 담보로 져야 한다는 게 너무 화가 났어요. 그냥 우리 같은 사람은 죽으라는 거구나, 존엄이 산산이 찢기는 느낌을 받아서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이런 재난 상황에서 장애인을 구제하려면 전장연이 더욱 열심히 싸워야 하는데 그냥 기자회견만 하는 것처럼 보여요. 언론에 알린다고 실질적인 대책이 마련되진 않아요. 기자회견 그다음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분이 위독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위독했으면… (한숨) 전장연이라는 조직의 범위 안에 저 같은 중증장애인들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답답함이 있어요. 코로나를 거치면서 그런 소외감이 더 커졌어요. 각자도생해야 하는구나. 전장연의 대표적 얼굴들을 나열해보면 어떻게든 이 사회의 속도에 적응하거나 대응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이에요. 물론 저도 그중 하나였죠. 사회적 여건 속에서 저의 장애는 어떤 식으로든 돌파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어요. 그런데 제 장애가 더 진행되고 난 요즘은 그것이 막혔다는 생각을, 아무리 노력해도 돌파가 안 된다는 생각이 드니까 절망감 같은 게 계속 와요.

지난 2월, 대구 자택에서 노금호 소장이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지난 2월, 대구 자택에서 노금호 소장이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절대자 예수와 혁명가 예수

작년부터 장애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요. 그나마 잘 움직일 수 있던 오른팔과 손가락에 근력이 점점 빠지고 있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핸드폰으로 문자 쓰는 게 힘들진 않았는데 요즘엔 핸드폰을 오래 들고 있는 게 힘이 들어서 손목이 약간 꺾여요. 제가 갖고 있는 공포감 중 하나가 이러다 밥숟갈도 못 들면 어떡하지, 예요. 요즘 잠을 잘 못자요. 수면제도 잘 안 들어요. 그냥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압박이 되고 통증이 있어서 힘들어요. 체력은 눈뜨고 출근 준비하고 나면 모두 소진돼요. 악으로 하루를 견뎌요. 폐근육 손실도 많이 진행되어서 가끔 숨쉬기가 어렵고 머리가 멍할 때가 많아졌어요. 어지럽고 멍한 증상이 예전엔 띄엄띄엄 왔다면 지금은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시작돼요.

친구와 둘이 함께 산 지 10년 넘었는데 그 친구도 버거운 것 같아요. 밤에 통증 때문에 친구를 깨우게 되고, 원래도 성질이 안 좋은데 계속 짜증을 내게 되고. 친밀한 사람일수록 더 잘해야 하는데 짜증을 더 많이 내게 돼요.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제 좀 알아줄 만도 한데, 하는 마음이 들고 이해받지 못한다는 서운함도 생겨요. 짜증을 많이 내지만 실제 제가 느끼는 힘듦의 백분의 일도 내색하지 않아요.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실제 나의 고통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여력조차 없는 것 같아요.

관계에서 질문할 수 있으면 권력자라고 하더라고요. 설명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약자라고요. 저는 (센터) 소장이면서도 계속 설명해야 해요. 소장이면서 활동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에 대해, 중증장애인의 속도에 대해, 왜 내가 짜증이 폭발하는지, 시시각각 엄습하는 불안감과 스트레스에 대해, 한 해가 다른 몸 상태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해요. 제 장애의 진행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제 처절함을 모르고 누가 지나가면서 한마디 툭 내뱉으면 주눅이 들어요.

어렸을 땐 절대자 예수가 아픈 사람을 치료하거나 기적을 이루는 모습을 동경했어요. 장애인운동을 시작하고 장애를 받아들이면서 예수와 멀어졌다가 혁명가 예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위안 같은 걸 얻었어요. 사회적 약자 앞에 서서 그들을 방어하고 목소리를 내줬던 예수를 다시 만나면서 제 활동의 정당성이나 의미를 부여했죠. 그런데 요즘은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우니까 다시 절대자 예수를 찾게 돼요.

어린 시절 포천 기도원 생활 당시, 같은 방을 사용하는 원생과 찍은 단체 사진. 비석에는 “오직예수”라고 쓰여 있다. 글자 “예” 위에 있는 아이가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어린 시절 포천 기도원 생활 당시, 같은 방을 사용하는 원생과 찍은 단체 사진. 비석에는 “오직예수”라고 쓰여 있다. 글자 “예” 위에 있는 아이가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최근에 장애 진단을 다시 받았어요. 급격히 몸이 나빠져서 근육장애 전문의를 만났거든요. 병원에 가면 늘 유전자 검사를 새로 해보자고 하는데 그 검사비만 수백만 원이 깨져요. 그 결과가 나왔는데 척수성 근위축증이래요. 치료제가 있대요. 그런데 30억 정도 든대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웃긴 게 만 3세 이전에 발병한 것을 본인이 증명하면 건강보험 적용을 해준대요. 보험이 적용되면 첫해에 자부담 5천만 원이고 매년 1천만 원 정도씩 든다고 하더라고요. 나이가 들어서 발병했으면 약효가 떨어져서 그런 기준을 뒀대요. 하지만 오래전 병원기록을 찾아 증명하는 것도 어렵고 운 좋게 보험 적용을 받는다 치더라도 사람마다 임상 효과가 다르니까 마음이 복잡하네요.

기사를 찾아봤는데 너무 스트레스받더라고요. 몸이 너무 안 좋아지니까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시도는 해봐야 하나 싶다가도 그렇게 했는데도 나아지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고, 또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떠실까 걱정돼요. 고등학교 때도 근육병을 치료할 방법이 있는데 그 돈이 3억쯤 된다는 뉴스가 있었거든요. 공무원 월급이 빤하니까 아버지가 돈을 불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주식투자를 하셨다가 홀딱 말아먹은 적이 있어요.

건강보험 적용 문제를 갖고 싸운다 해도 얼마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차라리 병명을 모르고 살았다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한숨) 아예 가난하면 모금운동이라도 할 텐데… 어렸을 때 부모님이 제 몸 관리에 너무 엄격한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던지라 스무 살 이후엔 그 반대급부로 막살았어요. 투쟁하느라 몸을 돌보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것도 후회가 돼요. 남의 인생은 어떻게든 개선해왔는데 내 인생은 왜 구제가 안 될까. 전장연이 좀 싸워주면 좋겠어요. 저는 전장연의 어려움을 참 많이 알아차렸다고 생각해요. 어려울 때마다 알아차려서 돈을 내든 사람을 대든 어쨌든 애쓰면서 왔는데 정작 내가 이렇게 어려울 때 전장연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까 사실 외롭습니다. 혼자 있는 거 같아요.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꿈꿨고 그걸 실현하고 싶어서 시간과 건강, 청춘을 갈아 넣었어요. 그게 기쁨이고 희망이었어요. 그렇게 살면 불편할 수는 있지만 불안하거나 불행하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국가와 사회, 조직과 공동체는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 나를 돌보지 않고 돌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생존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엄습해 왔어요. 요즘 돈 얘기를 많이 한다고 핀잔을 들었어요. 저도 그러기 싫고 그렇게 살지 않았는데, 사회와 공동체가 내 생존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돈이 필요해요. 저 혼자 감당해야 하니까요.

평범하고 존엄하게 살고 싶어요. 하루만이라도 신체적·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나의 다리와 엉덩이의 고통을 줄여줄 2천만 원짜리 전동휠체어가 필요해요. 배가 아플 때 화장실을 갈 수 있도록 3천만 원짜리 리프트 시스템과 이 시스템이 달려있는 전동휠체어가 필요해요. 내 몸과 조건을 이해하고 지원할 남성 활동지원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요. 국가로부터 지급되는 비용 외에 개인적으로 제가 비용을 더 부담하겠다고 해야 가까스로 구해지거나 유지가 돼요. 좀 더 장애가 진행되고 현재의 개인적 관계에 기댄 지원이 끊어진다면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아야 하겠죠. 하지만 국가는 그걸 보장하지 않으니까 제가 부담해야 돼요. 그 비용이 10년만 잡아도 10억이에요. 일을 못하게 되어 집에만 있어야 될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데 최소한의 존엄한 생존을 보장하려면 돈이 필요해요.

2016년 여름,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여름 워크샵 물놀이에서 김봉조 활동가와 함께. 사진 제공 노금호
2016년 여름,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여름 워크샵 물놀이에서 김봉조 활동가와 함께. 사진 제공 노금호

- 몸이 변하면 세계도 변한다

절망감이 더 깊어졌던 이유 중 하나는 2010년 즈음 글쓰기가 안 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어요. 문장이 매끄럽지 않더라도 토론회나 대중 연설을 할 때 쪽팔리지 않을 수준은 되었는데 그게 안 되기 시작한 거죠. 생각하는 것이 내 손으로 정돈되지 않으니까 거기서 오는 좌절감이 컸어요. 옆에서 근배나 민제, 연희가 그걸 채워 주었죠. 우리는 하나의 목표를 가진 조직이니까 그런 식으로 역할분담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더 집중하고 할 수 없는 건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 내 장애를 수용하는 태도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게 외교하고 정세 판단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더라고요. 그래도 그게 아직 되니까 몸이 축나더라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코로나 이후에 그조차도 못하는 상황이 되니까 이 조직 내에서 나의 쓸모가 사라져버린 느낌이에요. 사실 이건 후배 활동가들이 성장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이기도 해요. 연차도 쌓이고 사회적 역할이 높아지면서 언어 수준도 같이 높아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더 배우고 노력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저는 그럴 체력이 없어요.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에너지를 다 써버리면 정작 제가 생존할 에너지가 고갈되는 거예요.

저희가 외부로 내보내는 문건들은 대부분 근배가 정리하는데 그게 대표인 제 이름으로 나가요.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마음의 병 같은 게 생겼어요. 정리는 근배가 해도 내용은 제가 낸 것이고 제가 그걸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 말이 중심이고 문건은 양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점점 제가 작아져서 양념이 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양념 역할도 못한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내가 장애인이고 대표라서 그 역할을 할 뿐이지 실제로는 후배들이 하면 더 잘할 일인 거예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느낌이었어요. 몇 년 전 어느 토론회에 참석했을 땐 과호흡이 심하게 왔어요. 몸이 막 떨리고 어지러웠는데 억지로 참고했죠. 그런데 그 후부터 그런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 증상이 나오더라고요.

2016년 10월 21일 창원에서 열린 피플퍼스트 대회에서 노금호 소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2016년 10월 21일 창원에서 열린 피플퍼스트 대회에서 노금호 소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예전에는 제가 하는 발언이 힘이 있으니까 설득이 되고 선동이 됐는데 언젠가부턴 내가 얘기하면서도 내가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멍해질 때가 있어요. 행사할 때 장애인들에게 발언을 시키면 대부분 못한다면서 빼거든요. 예전에는 그걸 이해 못했는데 이젠 이해돼요. 예전엔 사람들이 제가 발언하는 걸 보고 질투심을 느낀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요. 젊고 똑똑한 장애인 활동가가 시원시원하게 발언하는 거 보면 박탈감 같은 걸 느껴요. 정리벽이 있어서 회의할 때 장애인들이 이상한 얘기를 막 늘어놓으면 제가 어떻게든 정리해서 하나의 결론을 지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저도 두서없는 이야기를 막 늘어놓고 있는 게 느껴져요. 체력이 안 되니까 집중력이 떨어지더라고요.

예전에는 어떤 문제 상황을 만나면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땐 제 몸이 돌파할 수 있었던 거예요. 지금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생각해요. 예전에는 필요하면 갈등을 만들면서까지 직진했죠. 반대하는 사람들과 부딪치고 그들과 싸웠죠. 그렇게 벽을 뚫고 갔다면 지금은 담을 넘어가는 거예요. 투쟁의 판을 결정할 때도 머리를 굴려서 계산을 해요. 몸으로 돌파할 자신이 없는 거죠. 그러니 현실적인 판단을 하게 되더라고요. 예전엔 ‘안 되면 농성하면 돼’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잘 안돼요.

농성하려면 제가 먼저 땅바닥에 앉고 마이크도 잡고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내가 버텨야 하는데 지금은 그걸 전부 남을 시켜야 하니까요. 남은 제 마음 같지 않잖아요. 그러니 다른 의견도 다 청취해야 하죠. 제 습관 중 하나가 저와 가장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을 상대로 상정해놓고 저 스스로 토론을 하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나의 또 다른 자아와 논쟁하면서 생각을 다듬어 가는 거예요.

예전에는 우리 조직 내에 가장 보수적인 사람을 상대편에 놓고 싸웠다면 지금은 가장 진보적인 사람을 상대의 자리에 놓고 논쟁해요. 주로 근배를 놓고 생각하죠. 근배가 어떻게 생각할까, 얘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후배들에게도 이야기를 해요. 내가 하는 판단이 운동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너희가 잘 주장해서 나를 설득하라고요.

2016년 9월 9일, 장애인 생존권 예산 쟁취를 위한 전국 투쟁 결의대회에서 노금호 소장이 삭발했다. 삭발한 머리카락이 들어 있는 박스를 들고 행진하는 모습. 사진 강혜민
2016년 9월 9일, 장애인 생존권 예산 쟁취를 위한 전국 투쟁 결의대회에서 노금호 소장이 삭발했다. 삭발한 머리카락이 들어 있는 박스를 들고 행진하는 모습. 사진 강혜민

나의 쓸모가 사라진다면 내 존재감, 조직 안에서 나의 위치는 보장될 수 있을까 질문해 봐요. 예전엔 스스로를 속여가면서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많은 중증장애인들이 장애인운동 안에서 느꼈을 소외감을 지금 제가 느껴요. 저의 손상이 진행되는 속도에 비해 사회의 성숙도는 너무 느린데 그 의미를 확장하는 운동조직 안에서조차 내가 깰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 것 같아요. 2006년의 노금호는 전장연 안에서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지만 2021년의 노금호는 수용이 안 되는 거죠. 물론 저 같은 사람을 포함하겠다는 의지는 가질 수 있겠지만 실제 실현하기는 어려운 여건인 것 같아요.

지금 저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어떻게 나의 존엄을 지키면서 이 사회 안에서 생존해 갈 것인가, 예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가 대표로 활동하는 센터 안에서 어떻게 월급이 깎이지 않고 권위가 훼손되지 않고 사람들과 신뢰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갈까. 그건 저에게 생존의 문제니까요. 장애 당사자 활동가들이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늘어놓으면 저는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해요. 중증장애인이 여기서 나가면 어떻게 살 거냐고요. (웃음)

요즘엔 거창한 사회적 변화를 꿈꾸기보다 개인적 삶의 여유나 일상을 회복하고 싶어요. 여행도 가고 싶고요. 병이 계속 진행되어서 일상을 많이 잃었어요. 저를 곁에서 지원하고 걱정하는 친구나 부모님이 덜 힘들 수 있도록 보조기기나 치료제의 건강보험 적용 문제 같은 의료적인 여건들도 해결되면 좋겠어요. 이 사회나 조직이 못한다면 개인적으로라도 그걸 극복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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