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운동은 내 삶을 구할 수 있을까 _ 노금호①

- 한 사람의 힘

어느 해인가 광화문광장에서 장애인운동판의 큰 집회가 열렸던 날이었다. 대로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구에서 막 도착한 활동가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광경을 보았다. 그들은 관광버스를 대절해 온 것이었는데 버스만 온 게 아니라 대형 트럭도 함께 왔다. 트럭이 열리자 검은색 전동휠체어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연식도, 스타일도, 기능도, 매달린 짐들도 모두 다른 휠체어들이었다. 남성 활동가들이 목장갑을 끼고 트럭 위로 가볍게 올라가 육중한 무게의 휠체어를 노련하게 내리기 시작한다. 버스 안에서 이제 막 잠에서 깬 사람들은 뒷머리가 좀 눌린 채 창밖으로 자신의 휠체어가 무사히 도착한 걸 확인한다.

잠시 후 트럭에서 내려진 전동휠체어와 버스에서 업혀 내려온 사람들이 땅 위에서 착착착착 합체되기 시작한다. 모두의 손발이 척척척척 맞는 것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많을 땐 그렇게 100명도 넘게 온댔다. 나는 이 엄청난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둔다. 트럭 위에서 이 모든 상황을 총괄하고 있는 활동가 민제도 지금 자신이 좀 멋져 보인다는 걸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가 무대 위의 배우라면 가슴을 두드리며 이런 대사를 읊을 것이다.

- 이 정도는 돼야 장애인운동 좀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안겨 내려올 땐 조그맣고 수동적으로 보이던 사람들이 자신의 휠체어에 앉자마자 시끄럽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변신하는 모습은 봐도 봐도 재미있다. 나는 연신 감탄하며 이것이 장애인운동 제5 절경쯤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 사이로 한 활동가가 구호가 적힌 몸자보를 입혀주면서 돌아다닌다. 착착착착 사람들이 전사가 되고 누군가 주섬주섬 깃발을 꺼내 낚싯대에 묶는다.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대구장애인지역공동체,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등의 깃발이 하나둘씩 올라간다. 그들은 서울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광장으로 들어온다. 서울에서 큰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이 전사들에겐 뭔가 특별한 아우라가 있는데 아마도 그런 걸 ‘기세’라고 부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들의 한가운데엔 언제나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노금호가 있다.

2016년 9월 9일, 장애인 생존권 예산 쟁취를 위한 전국 투쟁 결의대회에서 노금호 소장이 삭발했다. 삭발한 머리카락이 들어 있는 박스를 들고 행진하던 도중 경찰에 막히자 이에 항의하는 노금호 소장. 사진 강혜민 
2016년 9월 9일, 장애인 생존권 예산 쟁취를 위한 전국 투쟁 결의대회에서 노금호 소장이 삭발했다. 삭발한 머리카락이 들어 있는 박스를 들고 행진하던 도중 경찰에 막히자 이에 항의하는 노금호 소장. 사진 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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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서울에서 시작된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투쟁하는 지역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지방정부가 활동지원서비스제도화를 앞 다투어 약속하자 중앙정부가 이 흐름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고 이듬해 활동지원서비스는 전국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데에는 대구의 힘이 컸다. 서울에서 활활 타오른 투쟁의 불꽃을 이어받아 대구에서 다시 불을 지핀 사람이 바로 노금호와 그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대구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 ‘레츠’를 중심으로 형성된 장애‧비장애 청년들이었다. 일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데 심지어 랩도 잘했던 그 빛나는 청춘들은 대학 기숙사 시절부터 ‘함께 살기’에 단련된 삶과 투쟁의 공동체였다. 그들은 대학 졸업 후 대구 지역에 진출해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공간을 스스로 개척하면서 활동해왔다.

2005년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설립하고 소장이 된 노금호는 2006년 대구지역에서 활동지원서비스제도화 투쟁을 이끌었고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을 조직해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이들이 활동을 시작한 2006년 이후 10년 동안 대구시 장애인 예산은 6배 늘었다. 2016년 대구시립희망원에서 수백 명의 장애인들이 소리 없이 죽어갔을 때 줄기차게 싸우며 시설을 폐쇄시키고 장애인들을 탈시설 시켜온 것도 이들이다. 코로나가 대구에서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되던 2020년 2월 장애인 확진자와 자가격리자에 대한 정부 지원 대책이 전혀 없음을 알리며 재난 시 사회적 돌봄 시스템을 마련하라고 촉구한 것도 이들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대표는 대구라는 어마어마하게 보수적인 동네에서 이들이 만든 역사는 너무나 대단한 것이라며 대구 활동가들이 전국에서 제일 잘 싸우고 서울보다도 더 잘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와. 대구는 어떻게 그렇게 잘 싸우게 되었는데요? 하고 묻자 박경석이 대답했다.

- 노금호가 있었으니까.

한 사람의 선택과 결단이 얼마나 많은 걸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이 바로 노금호야, 라고 박경석이 말했다. 그가 없었다면 대구 지역 장애인운동은 지금처럼 확장되지 않았을 거야. 중요한 건 성과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대중의 물리적인 힘을 조직해서 권리로서 쟁취하는 방식이지. 그건 시혜적으로 받는 것과 아주 다른 거야. 나는 물었다. 우와. 금호는 어떻게 그걸 할 수 있었는데요? 박경석이 대답했다.

- 금호는 전망을 볼 수 있었어. 전선이 어딘지를 이해했고 이렇게 싸워야지만이 변화가 있을 거라는 걸 이해했어. 이해만 한 게 아니라 죽자사자 사람들을 조직하고 실천했지. 자신감이 없으면 투쟁하기보다 협상을 하려 드는데 금호와 그 친구들은 규모는 작아도 자신감이 있었어.

2010년 420장애인차별철폐대구투쟁연대가 대구지역 정책요구안 설명회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노금호, 조민제, 전근배 활동가. 대구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 ‘레츠’에서 만난 이들은 현재 대구지역의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다. 사진 제공 노금호   
2010년 420장애인차별철폐대구투쟁연대가 대구지역 정책요구안 설명회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노금호, 조민제, 전근배 활동가. 대구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 ‘레츠’에서 만난 이들은 현재 대구지역의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다. 사진 제공 노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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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와 그 친구들은 나보다 서너 살쯤 어렸는데 나에게 그들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기대고 이끌어줄 선배가 없었다는 게 그들의 가장 멋진 점이었다. 보수적인 땅에 깃발을 꽂고 그 지역에서 먼저 활동해온 선배들과는 다른 더 낮고 더 급진적인 운동을 개척해온 그들에겐 단단한 자부심과 동지애가 흘렀다. 나는 사심을 담아 일찌감치 금호를 인터뷰 목록에 올려두었다. 하지만 순서로는 가장 뒤로 미뤄두었는데 이유는 금호가 평균 연세 60세의 구술자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젊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 말 페이스북에 그가 쓴 글을 보았고 갑자기 순서를 앞당기게 되었다.

최근 지병인 근이영양증 진행이 갑자기 빨라졌다. 연초부터 몸의 이상 조짐을 느꼈지만 돌아볼 여유도 없이 코로나라는 직격탄을 맞았고 그 여파로 파생된 사회와 조직의 양면성과 밑바닥을 바라보며 정신적 충격을 받고 휘청였다. (…) 아무리 싸워도 차별은 공고하여 무력감에 휩싸이고, 생존을 지켜줄 제도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 코로나라는 재난을 겪으며 우리 사회와 운동조직이 나 같은 중증장애인을 돌볼 능력이 없음을 확인하니 생존에 대한 근원적 공포가 엄습해왔다. (…) 하루만이라도 신체적 정신적 고통 없이 자유로이 살고 싶다. (…) 하루를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보고 싶다. (…) 오늘도 수면제가 들지 않는다.

마음이 무거웠다. 다른 때였다면 한숨을 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있었다. 금호에게 전화해서 우리, 인터뷰할까요? 하고 제안한 것이다. 금호는 좀 망설였다. 나는 말을 하는 게 어쩌면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하고 그를 설득했다. 금호는 나의 성의를 생각해 적극적으로 거절하지 못했다. (나중에 세 번의 인터뷰를 마쳤을 때 나는 내가 한 말을 오래오래 후회했다. 진통제도 듣지 않을 만큼 극심한 통증에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이깟 인터뷰가 뭐라고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던 걸까. 그의 상황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웠고 무거웠다.)

지난 2월, 대구 자택에서 노금호 소장이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지난 2월, 대구 자택에서 노금호 소장이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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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인터뷰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을 때 금호에게서 연락이 왔다. 채식을 하는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은 먹지 않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전동휠체어를 탄 금호와 채식을 하는 내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울 것이므로 나는 아무 식당이나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진심으로 말했다. 어디든 흰밥에 김치는 있겠지, 속으로 생각하면서. 며칠 후 금호는 시내에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비건 식당을 찾았다며 기뻐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식당으로 출발할 때 그는 커다랗고 무거운 가방 하나를 챙겼다. 휴대용 경사로였다. 1m×40cm쯤 되는 그것을 그는 마치 우산을 챙기듯 아무렇지 않게 휠체어에 걸었다. (비장애인으로 치자면 자신이 디딜 계단을 휴대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계단이 3개 있는 식당이었다. 금호는 미리 답사까지 다녀온 것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경사로를 놓더라도 몹시 접근성이 나쁜 식당이었다. 오직 나를 환대해주려고 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금호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다음부턴 절대 그럴 필요 없다고 연신 강조했다. 그러자 금호가 말했다.

- 일상에 제약이 많이 생기는 게 어떤 건지 잘 압니다. 멀리서 오셨는데 저녁 정도는 편히 드셔야죠. 신념을 지켜주는 게 찐 친구 아닙니까. 껄껄껄껄.

그 와중에 나는 금호가 ‘취향’이 아니라 ‘신념’이라고 말해줘서 감격했고 나를 ‘찐 친구’라고 불러줘서 너무 신이 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를 신경 쓰지 말라던 직전의 입장을 순식간에 철회하고 한국에서 비건(동물에 대한 착취와 폭력에 반대해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제약이 많은지에 관해 정신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 어떤 비건은 눈앞에 먹을 수 있는 게 있을 때 배가 안 고파도 일단 막 먹어둔대요. 다음 끼니를 못 먹을지도 모르니까요. 또 어떤 비건은 먹을 게 있어도 굶는 연습을 한대요. 언제든 그런 상황이 닥칠 때를 대비하려고요. 재밌죠! 장애로 인한 제약과 뭔가 비슷하지 않아요?

금호도 떠오르는 일이 있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 대학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활동하려고 준비할 때였어요. 그땐 활동지원서비스가 없던 시절이니까 운동을 하려면 제 생활을 지원하면서 함께 활동할 비장애 동료가 꼭 필요했어요. 처음엔 의기투합해서 시작했는데 언젠가부터 삐거덕거려서 저 혼자 덩그러니 집에 남는 일이 자주 생겼어요. 그때 가장 힘든 게 물 먹는 거였어요. 끼니는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면서 근근이 해결했지만 물이 떨어지면 해결하기가 어려웠어요. 배달음식에 따라오는 콜라를 남겨서 쟁여두는 습관이 생겼어요. 그걸 손에 닿는 곳에 두고 갈증 날 때마다 먹었죠. 그랬더니 얼마 가지 않아서 요로결석이 오더라고요. 의사 말이 그 통증이 산통과 비슷한 수준이래요. 일상적인 건강관리가 안 되니 살도 급격히 찌고 근육 소실도 빨리 진행되면서 그나마 혼자서 할 수 있던 동작들을 더 못하게 되었어요. 껄껄껄껄.

노금호 일러스트. 노금호 소장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해 괄호 밖에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밝혔다. 일러스트 훗한나. 
노금호 일러스트. 노금호 소장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해 괄호 밖에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밝혔다. 일러스트 훗한나. 

나는 그때 우리 사이에 오고 간 ‘제약’에 관한 대화가 몹시 즐거우면서도 두 제약이 얼마나 다른가를 깨닫고 정신이 좀 아득해졌다. 한쪽은 제 의지로 선택한 일이었고 한쪽은 의지와 상관없이 제 존재가 버려진 일이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그 일은 정말로 가슴 아픈 상처였다고 금호가 말했다. 가난한 청춘들이 열정과 헌신으로 만들어온 그 운동의 역사엔 그런 말 못할 아픔들이 켜켜이 쌓였을 것이다. 금호는 내 덕분에 비건 식당에 처음 와 봤다며 음식 하나하나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었다. 나는 금호를 보면서 이렇게 꼼꼼하고 섬세한 사람이 그토록 제약 많은 삶을 사느라 얼마나 괴로웠을까를 생각하다가, 금세, 이토록 제약 많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그런 운동을 만들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포천의 기도원에 있을 당시 수요집회 공연 사진. 원생들이 준비하는 공연에서 노금호(남색 땡땡이 옷 입고 일어나 있는 아이) 소장이 마이크를 들고 공연하고 있다. 사진 제공 노금호
포천의 기도원에 있을 당시 수요집회 공연 사진. 원생들이 준비하는 공연에서 노금호(남색 땡땡이 옷 입고 일어나 있는 아이) 소장이 마이크를 들고 공연하고 있다. 사진 제공 노금호

- 기도원에서 보낸 어린 시절

1982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어요. 어렸을 땐 인물이 좋아서 동네 사람들한테 예쁨을 많이 받았대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떼쟁이였대요. 두 살 위에 형이 있었는데 아홉 살 때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형이 뭔가 사달라고 할 때 형편 때문에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게 부모님 마음의 한이라고 하셨어요. 나는 그게 꼭 나 때문인 것 같아 마음에 걸려요.

네 살 때 근이영양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 시절엔 근육병을 통칭해서 루게릭이라고 했어요. 희귀난치성 질환은 병원에서도 잘 몰라요. 근육이 퇴화하는 속도가 빠르고 특별한 치료제가 없어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고 의사가 말했대요. 부모님이 되게 충격을 받으셨는데 저한테는 차마 이야기를 못하시다가 제가 스무 살이 넘었을 때 말씀하시더라고요.

부모님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신앙의 힘으로 고쳐보려고 노력하셨어요. 일곱 살 때 경기도 포천의 기도원에 용한 원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저를 데려가셨어요. 원장이 ‘안수’라는 의식을 해요.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손톱으로 환부를 마구 할퀴어요. 암 걸린 사람의 환부에 혹이 있는데 그걸 핀셋으로 꺼내요. 수천 명 앞에서 공개적으로 퍼포먼스를 하는 거예요. 불법 의료행위인데 당시엔 문제없이 행해졌어요. 그걸 믿을 수밖에 없는 게 굉장히 아팠던 분이 몸이 좋아져서 나가는 걸 제 눈으로 확인했어요. 제 경우엔 원장이 등을 할퀴었는데 아직도 그 상처가 커다랗게 남아있어요. 군중심리인지 모르겠는데 그땐 정말 몸이 나아진 것 같아서 막 뛰어다녔어요. 그 영상이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 기도원 홈페이지에 올라가 있었어요.

포천 기도원 원장의 안수 기도 후, 치료 효과를 알리는 차원에서 노금호 소장이 강단에서 뛰는 모습. 사진 제공 노금호
포천 기도원 원장의 안수 기도 후, 치료 효과를 알리는 차원에서 노금호 소장이 강단에서 뛰는 모습. 사진 제공 노금호

안수 기도가 끝난 후에 제가 어머니한테 몸이 좋아진 것 같지만 다 나은 건 아니니까 여기서 더 있겠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기도원에서 지내게 됐어요. 기도원엔 300명 정도의 어린이들이 살았어요. 모두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었어요. 대학 단과대학 건물 정도의 규모였고 방마다 열 명 정도의 아이들이 함께 지냈어요. 그중에 보행이 가능하고 인지능력이 있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줬어요. 그 수가 많지는 않았고 열댓 명 정도 됐어요. 그중에 저 혼자 성적 우수상을 받아왔어요. 말도 곧잘 해서 행사 있으면 앞에 나가서 대표 선서하고 상을 받았어요. 연극 공연하면 주인공도 맡고요. 매주 부흥회를 하면 신도가 몇천 명씩 오는 곳이라 기도원으로선 내세워 홍보하기 좋은 아이였던 것 같아요.

기도원에서의 기억이 그리 나쁘지 않아요. 그 시절에 하기 어려운 경험들을 많이 했어요. 다 같이 비행기 타고 제주도에 놀러 가고 미군 부대에도 갔어요. 전국을 다니면서 공연도 했죠.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꽤 헌신적이었어요. 나중에 그 기도원이 원장의 그 불법의료 행위 때문에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오긴 했지만 그런 것 외엔 썩 나쁘진 않았어요. 물론 학교에선 무시당하는 일도 있었고 집단생활의 병폐도 있었지만 장애인운동에서 비판하는 그런 전형적인 시설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제 삶만 놓고 봤을 땐 기도원에서 보낸 그 시간이 부모에게 예속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길러줬어요. 시설에선 해야 할 몫만 하면 간섭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크게 자존감이 훼손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전형적인 경상도 아버지라 엄하고 무서웠는데 성장기에 떨어져 지내다 보니 그 힘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었어요. 부모님 두 분 다 훌륭하신 분들이고 저를 위해 존경스러울 만큼 노력하셨지만 부모자식 관계 안에서는 의도와 달리 상처를 주고받으니까요.

기도원 생활 당시, 같은 방을 사용하는 원생들과 찍은 단체 사진. 기도원 비석에는 “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글자 ‘다’ 위에 있는 아이가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기도원 생활 당시, 같은 방을 사용하는 원생들과 찍은 단체 사진. 기도원 비석에는 “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글자 ‘다’ 위에 있는 아이가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 괄호 밖의 존재

기도원에서 살면서 5학년쯤 되었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부모님하고 떨어져 지내는 것도 이상하고 장애가 치료되는 것 같지도 않고요. 생각하는 힘이 생긴 거죠. 5학년 끝날 무렵에 다시 포항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 후엔 뭐랄까, 전반적으로 좀 더 안 좋아졌어요. 집에 왔는데 숨이 막혔어요. 아버지가 군인이셨는데 아우라가 있어요. 아버지가 저를 재활시키려고 짜놓은 틀이 있었어요. 제가 또래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있었는데 살이 찌면 안 된다고 먹는 것도 관리하고 계속 걷게 하셨어요. 학교 끝나면 아버지하고 동네 산에 올라갔다 내려왔어요. 아침엔 일찍 일어나야 하고 공부도 잘해야 하고 뭐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데 그 기대에 제가 충족이 안 되었던 거죠. 한없이 잘해 주시다가도 아버지 뜻대로 따르지 않으면 제가 감당할 수 없게 혼을 내셨어요.

저는 너무 괴로웠어요. 전학 와서 친구도 없고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몸도 마음도 힘든 상황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제 몸이 개선되는 게 아니잖아요. 장애는 빠르게 진행되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힘들긴 해도 자전거를 탈 수 있었는데 3학년이 되어선 걷는 것도 버거워졌어요. 목사들은 안수기도를 할 때 나에게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했어요. 성경의 주요 내용은 약자들이 차별당할 때 예수가 그들을 위해 말하고 저항하는 것인데, 저는 반대로 교회에 갈 때마다 소외감을 느꼈어요. 이미 또래 문화가 형성되어 있으니까 잘 끼지 못했죠. 기도원에 있을 땐 내가 제일 나은 편이었는데 여기선 제일 후진 것 같았어요. 이동도 자유롭지 않으니 모임에도 나가기 어렵고요. 그런데도 목사들은 기적에 대한 얘기만 하니까 저는 점점 지쳐갔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회 친구들과 함께. 왼쪽에서 두번째가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회 친구들과 함께. 왼쪽에서 두번째가 노금호 소장. 사진 제공 노금호

포항은 입시 경쟁이 치열한 동네예요. 제가 들어간 고등학교는 우열반을 나누는 곳이었는데 저는 우등반이었어요. 걷는 게 힘들었기 때문에 내내 아버지가 자동차로 등하교를 도와주셨어요. 제가 배정받은 교실은 4층이었어요. 중학교 때까지는 꾸역꾸역 벽에 기대어 계단을 올라갈 수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그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어요. 부모님이 학교 측에 제가 배정받은 학급의 교실을 3층으로 바꿔 달라고 건의하셨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우등반의 다른 학생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어선 안 된다는 괴상한 논리로요. 결국 아버지는 군인 정신으로 키가 180cm인 거구의 아들을 매일 4층까지 업어서 올리셨어요.

화장실은 반층 아래 있어서 계단을 10개 정도 내려가야 했어요. 등교하고 나면 하교할 때까지 최대한 화장실을 안 가도록 웬만하면 참았어요. 갑자기 배가 아프면 참을 만큼 참다가 못 버티겠다 싶을 때 아버지한테 전화 드렸어요. 그러면 아버지가 외출을 끊고 나오셨죠. 화장실 변기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야 하는 거라 누가 붙잡아주어야 했거든요. 친구들한테 부탁할 수도 있지만 자존심도 상하고 창피했던 것 같아요. 알게 모르게 경쟁하는 관계이기도 하고요.

중학생 때 집 앞 골목에서. 사진 제공 노금호 
중학생 때 집 앞 골목에서. 사진 제공 노금호 

고등학교 1학년 때 너무 힘들어서 죽으려고 했었어요. 장애도 급격히 진행되고 성적도 떨어지고 친구들과 관계하는 것도 어려웠어요. 약국에서 수면제를 사서 모아뒀다가 먹었어요. 한참 자다가 깨어났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수면제였는지도 확실히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말 죽으려고 그랬던 거예요. 부모님은 몰라요. 다음날 깨어나선 마음을 달리 먹었어요. 이 상황을 극복하려면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겠다고, 마지막 동아줄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후부터 학업에 몰두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잘되진 않았어요. 머리가 아주 뛰어난 사람은 아니거든요. 1등을 하고 싶었는데 1등은 못했어요. 항상 그랬어요. 어딜 가나 우수한 그룹에는 끼는데 탑은 못 됐어요. 기도원에 있을 때도 우수하단 얘긴 많이 들었어도 최우수는 못해 봤고, 공연을 해도 첫 번째 주인공은 못하고 두 번째 주인공을 했어요. 2등 콤플렉스 같은 게 있어요. 주목을 많이 받으면 부끄러운데 안 받으면 서운해요. 완벽주의적 성격이 있어서 틀에 안 맞으면 엄청 괴로워했어요. 1등은 버릴 것과 취할 것을 잘 구분하는데 그게 잘 안돼요. 성적에 아무런 도움 안 되는 과목까지 다 공부하고 있는 그런 애였어요. 명확해지면 어느 누구보다 자신감 있게 뭘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땐 항상 불안해서 짜증이 많이 생겨요. 아버지도 그런 성격이신데 그걸 딱 닮았죠.

고등학생 때 교실에서. 노금호 소장이 브이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 노금호

10대 시절에 가장 힘들었던 건 외로움이었던 거 같아요. 괄호 밖에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교회에도 소속된 것 같지 않고 학교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디에도 나의 울타리가 없는 느낌이었어요. 항상 외로움 같은 게 있었어요. 그리고 아버지나 주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컸고요. 태생적으로 불안하고 예민한 성격인데 장애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더 강화되었던 것 같아요. 중고등학교 시절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은 그 시절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기고 평생 간다고 하던데 저에겐 그런 친구가 거의 없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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