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홈리스추모제, 쪽방 등 열악한 거처에서 삶 마감한 이들 추모
동자동·양동 쪽방 주민들, 재개발로 삶터 잃을까 전전긍긍
안정적 거처 보장되어야 아프지 않고 살 수 있어
정부 코로나19 방역 대책도 ‘안정적 주거’ 전제… 배제되는 홈리스
- 밤이 가장 긴 동짓날, 395명의 영정을 비추다
오늘은 이들이 주인공인 듯, 동그란 핀라이트 조명이 395명을 비춘다. 현수막에 영정 사진으로 걸린 395명의 얼굴은 대부분 까맣게 묵음처리 되어 있다. 컬러 사진으로 낯빛을 드러낸 이는 몇 없다.
이들은 고시원, 쪽방, 여관, 혹은 알 수 없는 이 세계 어딘가에서 살다가 각자의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영정 사진 밑에는 그이가 살아생전 불렸던 이름 석 자와 생년월일, 사망일시, 거주지, 사망 장소, 사망이유, 장례를 치른 날이 하얗게 쓰여 있다. 사망 날짜와 장례 치러진 날이 같은 사람은 없다. 대개 보름에서 한 달 정도 훌쩍 벌어져 있다. 구청이 죽은 이의 연고자(혈연 가족)를 수소문하여 연락을 타진하는 시간의 길이다. 그 시간 끝에, 연고자가 없거나 사망자 신원을 알 수 없어서, 혹은 연고자가 시신 인수를 거부하였다는 답이 오면 이들은 무연고자로 ‘처리’된다. 보통 무연고자가 되면 장례식 없이 영안실에서 화장장으로 바로 이동하여 태워진다(직장直葬).
연고자의 답을 기다리는 시간은 때론 기약 없어서, 죽은 이는 영안실 냉동고에 누워 자신의 장례를 기다리고, 죽은 이와 살아생전 연을 맺었던 이들 또한 그의 장례를 마냥 기다린다. 죽은 신체에 관한 권한은 혈연 가족만이 소유할 뿐, 그이가 생시에 맺은 숱한 관계들엔 없다.
사람이 태어나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고, 사망할 때, 우리는 의례를 통해 기뻐하고 축하하고 애도하며 삶의 한 시절을 지나왔음을 머리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의례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러나 무연고자에겐 죽음의 문으로 들어서는 장례의례가 사회적으로 허락되지 않는다. 다만 서울시의 경우 2018년 서울시공영장례조례가 제정된 후로 서울시립승화원에 마련된 빈소에서 화장 전에 무연고자에 대한 장례를 지낼 수 있다. 무연고자에 대한 공영장례는 서울을 시작으로 인제야 몇몇 지자체에서 시행되고 있다.
애도를 허락하지 않는 사회, 가난하다고 멸시하는 사회 속에서 ‘2021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은 395명의 영정을 깃발처럼 펼친다. 395명, 작년 12월부터 올해 11월 사이에 거리와 시설, 쪽방, 고시원 등 열악한 거처에서 삶을 마감한 이들의 숫자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 서울역에서는 21년째 그 깃발이 펄럭인다. 22일 저녁 6시, 올해 동짓날에도 어김없이 서울역 광장에선 홈리스추모제가 열렸다. 395명의 영정 앞에는 하얀 국화가 반듯이 놓였다.
- 동자동 쪽방 주민 유영기, 서울역 홈리스 주광석
그러나 이들을 ‘홈리스 무연고자’라는 단일 집단으로 기억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들은 서로 다른 존재였고 누군가에겐 특별한 한 사람이었음을, 떠난 이를 기억하는 살아있는 자의 목소리를 통해 확인한다. 그럴 때면 흑백의 얼굴 없는 영정엔 색채가 입혀지고, 익명의 홈리스들에겐 이름과 시간이 드러난다.
동자동 쪽방에 사는 정대철은 동자동사랑방 사업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과거 그는 쪽방에서 전화기만 만지작거릴 뿐, 좀처럼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그의 삶이 이젠 많이 바뀌었다. 주민들을 만나고, 사랑방 소식지 나누는 활동은 정말 재밌다. 바깥 생활을 하니 집에만 있을 때보다 오히려 몸은 덜 아프다. 이는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 활동을 함께한 유영기 이사장 덕분인데, 야속하게 그이는 작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정대철은 그가 끓인 국, 명절 때 새꿈어린이공원에서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나누어 먹던 시간, 사랑방에서 그가 주민들에게 건넸던 커피 한 잔을 기억한다. 그런 기억이 깃든 동자동 쪽방이 최근 재개발을 둘러싸고 시끄러워서, 정대철의 마음도 수런거린다.
“올해 2월, 동자동 공공개발 발표가 났을 때 유영기 이사장님이 생각났습니다. 쪽방을 벗어나서 싱크대도 있고 따뜻한 욕실도 있는 좋은 집에서 유영기 이사장님도 함께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중략) 지금 동자동 공공개발 지구지정이 늦춰져서 많이 불안하고 혹시라도 민간개발로 넘어갈까 불안하지만 유영기 이사장님의 뜻을 잘 이어 나가서 활동 잘 해내겠다고 다짐합니다.” (정대철)
동자동만의 문제는 아니다. 남대문 5가 양동 쪽방촌은 민간개발이 추진되면서, 쪽방 주민들이 주거권을 지키기 위해 양동쪽방주민회를 꾸렸다. 이차복은 양동쪽방주민회 장례위원이다. 올해만 양동 쪽방촌에서 스물아홉 명이 숨졌다. 주민회는 이들의 공영장례를 치르고 상주 역할을 한다. 2주에 한 번꼴로 장례를 치른 셈인데 사망자의 평균 연령은 48세, 대부분 무연고자다. 밥 한 끼 제대로 챙겨 먹기 힘든 쪽방의 삶은 신체를 쇠약하게 하고, 삶을 비관하게 만들기에 이들 죽음이 이차복에겐 몹시 가까웠다.
“현재 양동에서 추진되는 개발 과정에서 쪽방 주민들이 재정착할 수 있는 임대주택을 짓는다고 합니다. 아파트식으로 된 방이 첫째 필요하고 둘째로 반찬이라든가 시스템화된 식사 여건도 필요합니다. 사람다운 삶을 꾸릴 수 있는 마을이 만들어져서 더 이상 외롭고 쓸쓸하게 돌아가시는 분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차복)
그러한 집의 존재는 얼마나 절실한가. 몸이 건강할 때 마음에도 생기가 돌듯, 몸을 눕히는 집/방이 튼튼할 때 사람의 삶에도 생기가 돈다. 서울역 홈리스였던 주광석은 겨울 한파 속에서 몸 뉠 방 한 칸을 찾아 여기저기 배회했다. 겨우 방을 구한 후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신청했으나 병원은 두 달 뒤 수급자격이 확정되고서야 이용 가능했다. 하지만 병원에 다닌 뒤에도 건강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간이 안 좋아서 약을 먹는데, 약을 먹으면 다른 부위가 아팠다.
“병원에 다니면서 약을 먹는다고 병이 낫진 않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밥을 잘 챙겨 먹고, 몸과 마음이 잘 쉴 수 있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공간이, 집이 필요합니다. 그는 어릴 적 가난해서 국민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을 때도 거기가 그렇게 아팠다고 했습니다. 그때 못 먹어서, 그리고 또 못 배워서, 이렇게 또 아픈 거라고, 팔자 탓을 했습니다.” (정성철)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주광석이 방을 구하고, 병원에 가고, 매입임대주택 신청하는 것을 지원했다. 매입임대주택에 들어가면 건강이 나아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10월 22일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주광석이 고시원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부고였다. 그의 형이 시신 인수를 포기했다는 소식을 보름 전 전해 들었으나 아직 공영장례 공고는 나지 않았다. 두 달 가까이 그의 시신은 영안실에 방치되어 있다.
- 안정적 거처 전제로 한 정부 코로나19 대책, 홈리스는 집이 없다
작년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홈리스들은 안녕치 못하다. 정부의 코로나19 대책은 안정적 거처를 전제로 한 자가격리, 재택치료인데 홈리스는 집이 없다. 그러니 이들은 정부 대책에 포함되지 않는다. 고시원과 쪽방엔 많아야 한 층에 하나의 화장실이 있고 그 화장실을 사람들은 함께 쓴다. 아주 작게 쪼개진 쪽방에는 창문 없는 방이 더 많아 환기를 위해선 방문을 열어놓을 수밖에 없으니, 삶과 함께 공기를 공유한다.
지난 11월, 단계적 일상회복이 시작한 후 용산구의 한 고시원에선 집단 감염이 일었다. 확진자가 생활치료센터에 입소 되지 못하고 방치되는 사이, 바이러스는 고시원 전체로 퍼졌고 나중에는 급기야 ‘골든타임 지났으니 이젠 음성을 빼내야 하는 수준’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어떤 이는 코로나19에 확진된 후에도 갈 곳이 없어 서울역 광장에 머물며 사람들이 다가올 때면 ‘확진됐으니 다가오지 말라’며 손사래 쳐야 했다. 감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이들을 지원하는 홈리스행동은 “방역지침 이행 가능한 주거를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상태 이대로 계속 갈 수밖에 없다”고 낙담했다.
기존에 있던 홈리스에 대한 차별과 멸시에 더해, 코로나19로 더욱 처참해진 상황 속에서 그럼에도 이들은 다시 권리선언문을 꺼내 들었다. 홈리스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이며, 치료다운 치료, 존중받는 밥상, 애도할 권리, 존엄을 요구했다. 추모제가 끝날 무렵, 참가자들은 에이포 종이에 적힌 권리선언문을 종이비행기로 접어 정부와 서울시를 향해 힘껏 날렸다. 종이비행기가 향하는 곳은 이들이 마주한 395명의 죽음이기도 했다.
395명의 영정으로 만들어진 추모제 무대 뒤에는 고층 빌딩의 불빛이 찬란하다. 한국주택금융공사,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WEWORK, 서울남대문경찰서, 씨제이, 티머니, 디비손해보험. 그 빌딩 창가에서 작게 쪼개져 나오는 불빛까지도 마치 영정 사진 같다. 수많은 죽음이 도처에 널려있는데, 동그란 핀라이트 조명은 고작 이만큼만 비추고, 잘려 나간 손톱처럼 낱개의 하얀 국화 꽃잎만이 경계 없이 아스팔트 바닥을 뒹군다. 늦은 저녁, 무대 뒤편에서는 아랑곳없이 코로나19 선별진료소 검사가 내내 이어지고 이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