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최중증·발달장애인은 탈시설 불가능”
장애계, 탈시설 반대하는 천주교 규탄하며 성탄절 미사 드려
“‘시설서 살 권리’는 강제된 동의… 하느님 뜻 아냐”

미사 현장. 빨간 현수막에 트리가 그려져 있고 ‘성탄절 맞이 전국 탈시설 미사’라고 적혀 있다. 활동가들 뒤로 거대한 명동성당이 보인다. 사진 하민지
미사 현장. 빨간 현수막에 트리가 그려져 있고 ‘성탄절 맞이 전국 탈시설 미사’라고 적혀 있다. 활동가들 뒤로 거대한 명동성당이 보인다. 사진 하민지

크리스마스이브, 서울시 중구 명동성당 앞. ‘탈시설 아기예수’가 “투쟁, 투쟁” 울며 태어났다. 동방박사들은 탄생을 축하하며 황금, 유향, 몰약 대신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지원주택, 자립 정착금, 장애인 주치의, 지역사회 24시간 지원체계 등을 선물로 바쳤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탈시설장애인당(當) 등 장애인운동단체가 24일 오후 2시부터 드린 미사 내용이다. 장애인활동가들은 탈시설 권리를 거듭 부정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를 규탄하며 ‘성탄절 맞이 전국 탈시설 미사’ 투쟁을 진행했다.

피플퍼스트성북센터 활동가가 ‘크리스마스에 자립을’이라 적은 피켓을 들고 있다. 피켓 속 그림에 산타가 ‘탈시설지원법 제정하라’라고 외치고 있다. 왼쪽에 커다란 트리가 보인다. 사진 하민지
피플퍼스트성북센터 활동가가 ‘크리스마스에 자립을’이라 적은 피켓을 들고 있다. 피켓 속 그림에 산타가 ‘탈시설지원법 제정하라’라고 외치고 있다. 왼쪽에 커다란 트리가 보인다. 사진 하민지

- “시설에 있는 모든 장애인이 나와 예수님 사랑 실천하며 살아야”

천주교는 노골적으로 탈시설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지난 8월, 탈시설에 반대하는 토론회를 열어 ‘탈시설’ 용어 사용을 부정하면서 “시설폐쇄는 곧 주거 선택권 침해이며 최중증·발달장애인은 자립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해 논란을 빚었다.

이후 장애계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거세게 반발하자, 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탈시설로드맵 정책에 거듭 반대하는 입장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입장문에서 “지역사회는 아직 충분한 지원 체계가 구축되지 않았다. 중증발달장애인, 최중증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의 어려운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이고 강제적인 정책”이라면서, ‘시설에서 살 권리’를 주장했다.

이에 전장연은 천주교를 규탄하며 지난 10월 6일부터 매주 수요일 오후 2시, 명동성당 앞에서 ‘탈시설 미사’를 드려 왔다. 지난 두 달 반 동안 11회의 미사를 드렸다. 성탄절을 맞아 진행된 전국 미사에 참가한 활동가들은 “탈시설 권리를 부정하는 건 하느님 뜻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최근에 탈시설한 장애인당사자들이 ‘탈시설장애인당’이 한 글자씩 적힌 피켓을 들고 춤을 추고 있다. 사진 하민지
최근에 탈시설한 장애인당사자들이 ‘탈시설장애인당’이 한 글자씩 적힌 피켓을 들고 춤을 추고 있다. 사진 하민지

“예수님은 생명 가진 모든 것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천주교는 대규모 장애인거주시설들을 운영하면서 최중증·발달장애인을 시설에 갇혀서만 살아야 하는 사람으로 규정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사람인데 지역사회와 분리해 시설에 격리했습니다. 모든 장애인이 스스로 결정하는 삶,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천주교가 참다운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게 해 주소서.” (강희석 나야장애인권교육센터 대표)

“하느님의 자녀 3만 명이 전국 각지의 시설에 갇혀 소외와 불평등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는 세상은 장애라는 이유로 작은 방에 가둬진 채 삶의 종말을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탈시설 권리를 지키러 이 땅에 찾아오신 주님, 천주교가 탈시설에 반대한 걸 부끄러워하며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 목소리를 잃은 이들과 함께하게 하소서.” (다니주누 전장연 활동가)

이진우 대선후보가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이진우 후보를 지지하는 활동가가 ‘시설로는 배달 안 가, 탈시설장애인당, 한뇌협 이진우’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웃으며 이 후보를 바라보고 있다. 수어통역을 하는 통역사도 보인다. 사진 하민지
이진우 대선후보가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이진우 후보를 지지하는 활동가가 ‘시설로는 배달 안 가, 탈시설장애인당, 한뇌협 이진우’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웃으며 이 후보를 바라보고 있다. 수어통역을 하는 통역사도 보인다. 사진 하민지

시설에서 살다 나온 탈시설장애인 당사자의 투쟁발언도 이어졌다. 이진우 탈시설장애인당 대선 경선후보는 “때리고 욕하는 것만이 인권유린이 아니다. 정해진 시간에 밥 먹고, 잠자고, 씻어야 하는 것 또한 인권유린이다. 천주교는 이 같은 인권유린을 옹호하며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배재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개인대의원 또한 “22시에 자서 6시에 일어나는 생활, TV도 9시 뉴스밖에 볼 수 없는 생활에서 내 결정권은 없었다. 시설은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할 수 없다. 천주교는 시설에서 살 수밖에 없는 장애인이 있다고 하지만, 탈시설장애인은 지역사회에서 멋지게 살고 있다. 여기 모인 활동가들처럼 말이다”라고 말했다.

천성호 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천성호 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천성호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은 “더 많은 학생이 탈시설 할 수 있도록 야학이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학생 중에 최근에 탈시설하신 만수 님이 계세요. 시설에서 49년을 살았대요. 지금 이 자리에 만수 님도 오셨는데, 만수 님! 시설 밖으로 나오니까 어때요? (좋아요!) 다시 시설에 가고 싶어요? (아니요!)

야학에서는 5년 전부터 탈시설 자립생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이 야학에 와서 낮에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지금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 20명 중 18명이 탈시설했습니다. 나머지 2명을 포함해, 내년에는 우리 야학 다니는 모든 학생을 다 탈시설시키는 게 목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하려고 이 땅에 왔습니다. 장애인은 시설 밖에서 자유롭게 사람을 사랑하며 살 권리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나요?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계속 시설을 운영하고 장애인을 가두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고 착각합니다.

시설 밖에서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사랑은 지역사회에서 이웃과 함께 살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것,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입니다. 노들야학은 모든 시설에 있는 장애인이 세상 밖으로 나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할 것입니다.”

전장연은 “천주교는 ‘지금 있는 시설에서 살고 싶다’고 동의한 거주인이 많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선택의 여지를 봉쇄한 채 한 동의는 ‘강제된 동의’다. 우리는 천주교가 탈시설 반대를 철회하고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에 앞장설 때까지 명동성당 앞 미사 투쟁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수리야 집행위원장(세례명 율리아나)이 닫는 기도를 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수리야 집행위원장(세례명 율리아나)이 닫는 기도를 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모든 예언자는 탈시설의 별이 오늘 밤 구유 위로 떠오를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성모님께서는 모든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같이 살자고 품어주셨고, 요한은 이미 와 있는 탈시설의 기대를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투쟁하고 기쁘게 탈시설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부디 바라옵건대 성탄을 맞이하여 사회복지 전문가라 자신을 칭하는 저들이 아기예수처럼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는 주님의 일꾼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옵소서. 동방박사가 가리키는 별을 따라 저희가 놀라운 이 미사로 투쟁의 생기를 되찾고 비오니, 마땅히 경배하올 성자의 성탄 축일에 기쁜 마음으로 탈시설의 선물을 받게 하소서.

이제 미사가 끝났으니 여러분은 세상에 탈시설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투쟁!” (수리야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장)

'탈시설 아기예수 동박박사 만나다' 퍼포먼스 모습. 동방박사가 하늘에 뜬 탈시설 아기예수 별을 보고 놀라서 주저앉았다. 사진 하민지
'탈시설 아기예수 동박박사 만나다' 퍼포먼스 모습. 동방박사가 하늘에 뜬 탈시설 아기예수 별을 보고 놀라서 주저앉았다. 사진 하민지
동방박사가 헤롯의집(모형)이라는 장애인거주시설 장에게 “탈시설 아기예수가 오셨으니 시설을 폐쇄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헤롯은 아기예수를 싫어했던 유대 왕이다.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의 탄생을 두고 ‘유대인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자 헤롯은 화를 내며 사진 하민지
동방박사가 헤롯의집(모형)이라는 장애인거주시설 장에게 “탈시설 아기예수가 오셨으니 시설을 폐쇄하라”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 속 인물 헤롯은 아기예수를 싫어했던 유대 왕이다.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의 탄생을 두고 ‘유대인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자 헤롯은 화를 내며 베들레헴에 사는 2세 이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고 전해진다. 사진 하민지
장애인거주시설은 폐쇄됐고 시설장은 쓰러져 있다. 사진 하민지
장애인거주시설은 폐쇄됐고 시설장은 쓰러져 있다. 사진 하민지
동방박사들이 탈시설 아기예수에게 장애인 자립생활에 필요한 지원들을 선물로 바치고 있다. 사진 하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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