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을 여섯 군데나 옮겼지만, 제 동의를 한 번도 구하지 않았어요”
[편집자 주] 지난 5월 11일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국가 주도의 탈시설 지원 강화를 위한 정책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박경인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준비위원장 겸 피플퍼스트서울센터 동료지원가가 시설에서의 삶과 자신의 탈시설 과정을 발표했습니다. 비마이너는 탈시설 과정에서 당사자의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며, 이날 발표된 탈시설 당사자의 글을 동의받고 게재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동료지원가 박경인입니다. 오늘 저는 왜 탈시설이 필요한지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 시설의 삶
저는 부산의 한 미혼모시설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에 있는 비장애인 시설에 옮겨졌습니다. 그곳에서 잘 적응하지 못해 노원구에 있는 장애인 시설로 다시 옮겨졌습니다. 그곳은 스케이트장과 학교까지 있는 아주 큰 시설이었습니다. 복지사 선생님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수영과 스케이트를 배웠습니다. 메달을 딸만큼 잘했고 열심히 했습니다. 운동하는 게 참 좋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천주교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아동 그룹홈이 생겼습니다. 제가 있던 시설의 선생님들이 저를 추천해 혼자 그곳으로 가게 됐습니다. 집처럼 생긴 집에서 사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서 나를 보냈다고 합니다. 경인이는 밝고 명랑하고 똑똑하니까 더 잘 크라고 보내셨다는데 나는 많이 우울했습니다.
그룹홈으로 옮기면서 제가 그렇게 좋아했던 스케이트를 그만둬야 했습니다. 그리고 악기를 다뤄야 했습니다. 나는 음치인데 악기를 다루라고 하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열심히 연습해서 무대에 설 때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스케이트 선수가 되고 싶었지, 악기 연주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결정은 누가 내렸나요? 시설의 선생님들입니다.
시설을 옮길 때도 제 결정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시설을 여섯 군데나 옮길 때마다 제 동의를 구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시설에서 살 때 나는, 갑자기 있었다가 뚝 사라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선생님들 어깨도 주물러주고, 힘내라고 말도 해주고, 사랑을 받으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또 다른 시설로 보내지기 싫었으니까요.
23살에 자립하기까지 10년 정도를 그룹홈에서 살았습니다. 방 3개짜리 빌라에서 살았는데, 방 하나는 선생님이 쓰시고 나머지 방 두 개를 우리가 썼습니다. 보통 5~6명, 많게는 7명이 살았습니다. 잠깐만 살다가 가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선생님도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시설에 살면서 어느 날 갑자기 친구들도 없어지고 선생님도 없어지는 게 무서웠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지겨웠습니다. 숨이 막혔어요.
그룹홈에서는 정해진 대로만 살아야 했습니다. 집에 들어오는 시간도 정해져 있고, 자야 하는 시간도 정해져 있고. 밥 먹는 시간도 정해져 있었어요. 현관문은 밖에서 잠그면 안에서 못 열게 해놨어요. 선생님이 열어줘야 나갈 수 있었습니다.
방도 좁았어요. 그리고 뭘 그렇게 고칠 게 많은지 공사하고 또 공사하고, 공사 좀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선생님도 없이 아이들끼리만 자고 있는데 갑자기 공사하는 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서 일어난 적도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시설에 살 때 저는 아끼는 옷이 없었어요. 시설에서는 내 옷이 네 옷이고 네 옷이 내 옷이었거든요. 사람들 옷을 한꺼번에 세탁기에 돌려요. 그러니까 옷이 금방 낡고 상해버려요. 옷도 잘 잃어버려요. 필요한 옷은 선생님과 마트에 같이 가서 사 입었는데, 옷에 자기 이름을 써요. 뭘 샀는지 다 사진을 찍었습니다. 허락 안 받으면 살 수 없었습니다.
스무 살 넘어서는 10만 원씩 용돈을 받아서 썼는데, 용돈기입장에 돈 쓴 걸 일일이 다 쓰고 검사를 받았습니다. 20살 되기 전에는 용돈이 없었어요. 급할 때만 조금씩 받아서 썼는데, 저는 먼저 돈 달라고 해 본 적이 없던 것 같아요.
- 나의 기도
아주 옛날부터 저는 “내 방 생기게 해주세요, 내 방 생기게 해주세요” 기도했어요. “남들과 똑같이 살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소원도 빌었고. 근데 그게 쉽게 되지 않더라고요. 제가 시설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좋은 정책이 나오기를 기도하고 기다렸습니다. 1년만 더 참자, 1년만 더 참자.
22살 때 그룹홈 선생님들이 새로 왔는데, 한 선생님이 내가 아끼던 스케이트화를 내 허락도 없이 버렸습니다. 맞지도 않는 스케이트화를 왜 가지고 있냐면서. 제가 받은 금메달도 짐이 된다며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방을 예쁘게 꾸며준다고 했습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시설을 옮길 때도 소중히 가지고 다녔던 물건들이었습니다. 더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시설을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밖에 나가서 너희끼리 어떻게 살 거냐. 혼자서는 못 산다. 돈도 없지 않냐. 저는 그룹홈의 도움을 못 받고 혼자서 자립해야 했습니다.
23살에 자립했는데, 제가 소규모 그룹홈에 살고 있어서 자립정착금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시가 그룹홈을 시설로 인정하지 않아 정착금을 주지 않습니다. 내 월급과 수급비를 열심히 모아서 나왔습니다. LH대출을 받아서 집을 힘들게 구했고 살림을 샀습니다. 내 방이 생겼다는 게 너무 행복했습니다.
처음 돈 벌었던 게 고등학교 3학년 때 2학기 때인데, 바리스타 일해서 첫 월급 탄 거는 선생님이 바로 가져가셨어요. 돈 관리를 선생님이 하셨거든요. 자립하고 처음으로 내가 돈 관리를 해보게 됐어요.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처음에는 이것저것 막 샀습니다. 냉장고도 사고 청소기도 사고 집에 필요한 것들 사느라 돈을 다 썼습니다. 내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그룹홈에서는 늘 딱지 붙은 물건만 썼거든요. 내 물건이 아니라 그룹홈의 물건들이었습니다. 깨끗하게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습니다. 옷도 옷장도 다 정리해야 되고 늘 확인받아야 했습니다. 자립해서는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좋았어요.
자립하고 나서 조금 안 좋은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 친구들 때문에 삶이 좀 힘들어졌어요. 처음에는 무조건 사람을 많이 만나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를 실컷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만날수록 돈도 잃고 시간도 잃고 제 일상생활을 못 하게 되더라고요. 갑자기 많은 관계들이 생겨나서 방황했습니다.
마음이 많이 힘들어져서 1년 반 정도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제가 의사 선생님의 치료도 다 거부한 적도 있었거든요. 근데 어떤 선생님이 좋은 말을 해주셨어요. 관계는 이렇게 맺는 거 아니라고. 사람 관계는 천천히 다가가는 거라고. 이제는 내가 만나야 할 사람과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자립하고 저는 사람들 시선을 잘 의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봤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저 사람이 나를 이용하면 어떡할까. 이 사람이 지금은 나와 함께 있지만 또 떠나겠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기고, 그리고 피플퍼스트센터에서 활동하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사라졌어요.
그냥 친한 사람들이 생겨서만은 아니에요. 내가 성장한다는 게 좋습니다. 이 사람들과 만나면서 세상을 하나하나 배우는 것 같아요. ‘인생’을 배우는 것 같아요. 시설 안에 있으면 전혀 배울 수 없는 걸 배우는 것 같아요. 이 사람들은 나를 다그치고 혼내지 않아도 잘 알려줍니다. 저한테 직접 뭘 안 가르쳐줘도 아주 중요한 걸 알려주는 것 같아요. 세상에는 나를 걱정해주고 함께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돼서 좋습니다.
- 왜 우리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나요?
발달장애인들한테는 시설이 제일 좋은 곳 아니냐고 말합니다. 제 생각은 달라요. 시설이 더 위험합니다.
시설에는 많은 장애인들이 같이 사는데 같은 장애인들이 우리를 학대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시설에 있을 때 한 언니가 저를 되게 힘들게 했어요. 제 얼굴을 꼬집고 때렸을 때 너무 무서웠어요. 시설 안에서는 같이 사는 장애인 사이에도 서열이 있습니다. 폭력을 쓰거나 말로 상처 주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 말을 들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설 안에서는 싫다고 안 만날 수 없잖아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있던 그룹홈은 연고자가 없는 사람들이 살았는데, 그중에 오빠가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 오빠가 찾아올 때마다 대청소를 싹 해야 했어요. 오빠가 맛있는 걸 가끔 사 오거든요. 선생님들은 그 친구한테 잘하라고, 그 친구 덕에 좋은 거 먹는다고 말했어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오빠한테 전화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무조건 혼이 났습니다. 크고 작은 차별이 곳곳에 있었어요.
선생님들이 어떤 애 하나 때문에 단체로 야단을 치고 벌을 줄 때가 있어요. 나는 조용히 잘 있었는데 혼나니까 너무 싫었어요. 또 시설 안에는 규칙들이 많이 있는데, 누가 문제행동을 하면 그 규칙들이 세져요. 자꾸 통제만 하려다 보면 선생님도 지쳐서 나가버려요.
선생님들에게 폭력을 겪기도 합니다. 유치원 때 선생님이 제가 우유를 못 먹는다고 가두고 밖에서 자물쇠로 잠근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갇혀있는 걸 지금도 싫어합니다. 아동 그룹홈에서도 심한 폭력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늘 일이 너무 많아 바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한테 화풀이를 했던 거 같아요. 물론 좋았던 선생님도 있습니다. 그런데 좋았던 선생님들은 금방 시설을 그만뒀습니다. 윗사람들 때문이었어요. 윗사람들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시설을 나와서 사니까 행복합니다. 물론 나와서 힘든 일도 있었는데 그 힘든 일을 잘 이겨내니까 너무 좋아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면서 성장하잖아요. 발달장애인도 실수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것 같아요. ‘발달장애인은 다 저래’ 비장애인들은 쉽게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발달장애인다운 특성은 없는 것 같아요. 발달장애인도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요. 사람마다 눈 코 입 생긴 모양이 다르듯이. 발달장애인이 실수할 기회를 막아버리면 성장할 힘이 없어져요. 제가 겪어보니까 더 잘 알겠어요.
지금도 여전히 시설에 있는 발달장애인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그 친구들을 만나면 자립하고 싶다고 말해요. 그런데 선생님이 허락을 안 해준대요. 그런 말을 들으면 속상합니다. 저도 시설을 나오면서 그룹홈 선생님에게 다른 애들 바람 넣지 말고 조용히 나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 우리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까요? 왜 사회는 우리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않는 건가요? 탈시설지원법을 제정하기 위한 공청회에도 당사자의 목소리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는 존재입니다.
저는 탈시설할 때 누구의 도움이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나 홀로 모든 것을 준비해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와 같은 고생을 하지 않고도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이 탈시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꾸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버려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부당하게 상처받지 않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의 삶을 부모님이나 나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책임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임이라는 말이 어려운 말이잖아요. 잘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제게 주어진 만큼 삶을 열심히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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