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생존자 다수 증언 “야산에 희생자 암매장됐다”
진실화해위원회, 닷새간 시굴 작업 착수
유해 확인되면 국가에 본격적 유해 발굴 권고
오는 10월 시굴 결과 발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가 선감학원에 강제수용된 후 암매장당한 피해자의 유해 시굴 작업에 착수했다.
진실화해위는 26일 오전 11시, 피해자들이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야산(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산 37-1)에서 개토제(땅을 연다는 뜻으로, 흙을 파기 전 한을 풀어주는 제사)를 지내고 시굴 작업을 시작했다.
- 피해생존자 다수가 야산에 희생자 암매장됐다고 진술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인 1942년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에 만들어진 ‘부랑아’ 수용소다. 수용 대상은 18세 이하 남성이었는데 대부분 12세 이하 어린이였다. 소년들은 당시 길거리를 단속하던 공무원에게 붙잡혔다. 부모 심부름을 가거나 친척 집에 가다가 잡혔고, 신문 배달을 하다가 붙잡히기도 했다. 입은 옷이 남루하다는 이유로 잡힌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선감학원으로 끌려온 4700여 명의 소년은 불법 감금, 강제 노역, 가혹 행위 등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탈출을 시도하다 파도에 휩쓸리거나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등 수많은 소년이 희생됐다. 이들 중 일부는 ‘우물재 산’이라 불리던 선감학원 인근 야산에 비석도 없이 여기저기 암매장당했다.
김영배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을 비롯한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190명은 2기 진실화해위 출범 첫날인 2020년 12월 10일,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5월 27일 조사개시를 결정하고 현재까지 조사 중이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신청인 190명을 대상으로 진술조사를 하던 중 다수가 ‘선감학원 수용 아동 중 익사, 구타, 병사로 인한 사망자가 적절한 조처 없이 선감학원 인근 야산 등 6곳에 매장됐다’고 진술했다.
김진희 진실화해위 선감학원 조사팀장은 “원아대장에 기록된 사망자와 진실화해위가 확인한 공식 기록 사망자 수가 다르다. 따라서 피해생존자 중 다수가 암매장 장소로 지목한 야산에서 유해를 시굴해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시굴 장소는 2016년 KBS ‘추적 60분’에서 피해생존자의 증언에 따라 확인한 결과, 아동의 유골과 꽃신 한 켤레가 발굴된 지역이기도 하다.
- “과거 악(惡)과의 화해는 오직 사실의 힘으로만 가능”
유해 시굴 전 개토제가 열렸다. 김영배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은 추도사에서 “이곳 야산에 150여 명의 원혼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혹독한 강제노동과 심각한 폭력으로 많은 소년이 생명을 잃었다. 탈출을 시도하다 파도에 휩쓸려 사망했고 적절한 절차 없이 이곳에 암매장됐다”며 “선감학원의 진실을 새롭게 밝히고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은 “지난 1년간 참고인 조사를 거의 완료했다. 공식 기록에는 사망자가 24명이라 돼 있지만 피해자 증언에 따르면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며 “여기에 얼마나 많은 유해가 있는지, 누구의 유해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유해 확인 작업을 잘 마무리해서 완전한 유해 발굴과 후속 조치를 당국에 권고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개토제에는 김훈 작가도 참석했다. 김 작가는 옛 선감학원 터에 들어선 경기창작센터에 2014년 입주해 1년간 머무르며 글을 썼다. 그는 그때 당시 마을의 오래된 주민들로부터 선감학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김 작가는 크게 탄식하며 “지금도 놀라운 것은 지역 주민들의 생활과 연결된 농경지 바로 옆에, 생활 한복판 일상의 한 가운데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라면서 “부산 형제복지원도 시가지에서 사람들을 붙잡아다 도심지에서 매우 가까운 공간에서 시설을 차리고 수십 년을 야만적 행위를 자행했다. 그런 국가권력과 경제권력에 의한 폭력과 야만 행위가 지금도 우리 일상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 자리에 와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의 악과 화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직 사실의 바탕 위에서만 화해할 수 있다. 사실이 힘이 없으면 화해는 불가능하다. 유해 개토(開土) 작업을 통해 많은 사실이 확인돼서, 사실의 힘으로 화해의 단초가 잡히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 오는 10월, 선감학원 진실규명 결과 발표… 시굴 내용 포함 예정
이날 시굴은 얕은 봉분 위 잔디를 호미로 걷어내는 작업까지만 공개됐다. 보통 유해를 발굴할 때는 포클레인 등 중장비가 동원된다. 사망자가 깊게 묻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감학원 피해아동의 경우 성인보다 체구가 작아 얕게 암매장됐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호미, 삽 등의 도구를 이용해 수작업으로 유해를 시굴한다.
이번 시굴은 26일부터 30일까지 5일간 진행된다. 유해나 유품이 발견되면 우선 인류학적 감식을 통해 성별, 나이, 사망 시점 등을 확인한다. 이후 진실화해위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유해 발굴을 권고하고 나면 본격적인 유해 발굴이 시작된다. 즉, 시굴은 본격적 발굴의 계획을 세우는 기초 확인 작업이다.
진실화해위는 오는 10월, 발표할 진실규명결정문에 이번 시굴 결과를 반영할 예정이다. 진실화해위는 “선감학원 설립 80년째이자 어린이날 100주년인 올해,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실규명이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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