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6월 24일, 민들레장애인야학 오명진·김선철 학생이 삭발했다. 문상민 활동가가 지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6월 24일, 민들레장애인야학 오명진·김선철 학생이 삭발했다. 문상민 활동가가 지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승리할 때까지 돌아오지 마

저는 3년 동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조직국에서 상근활동을 했어요. 2006년은 전국적으로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이 뜨겁게 타올랐던 해였어요. 서울에서의 투쟁이 승리한 뒤 대구, 인천, 경기 등으로 투쟁이 번졌고 모두 승리하면서 지역마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건설해나갔어요. 나도 전국을 누비면서 농성을 하고 사람들을 조직했어요. 2년 뒤엔 강원, 대전, 충북까지 총 9개의 지역에 전장연 지역조직이 생겨났죠.

2006년 6월 초 어느 날 경석(현 전장연 대표) 형이 인천에 같이 가자고 했어요. 서울에서 벌어졌던 43일간의 농성이 끝난 뒤 대구에서도 막 투쟁이 시작되었을 때였어요. 어떤 장애인이 인천 간석역에서 들어오는 전철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고 동료 활동가들이 모여 있다고 했어요. 도착해서 그분의 사연을 들었어요. 이름은 박기연, 48세의 남성 중증장애인이고 언어장애가 심하셨대요. 화장실 가려면 타인의 지원이 필요하니까 집 밖에 나오면 물을 한 모금도 안 먹고 버텼대요. 그런 조건에서도 이동권, 교육권, 시설비리 투쟁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도착해있고 가장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던 분이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연로하신 아버지와 단둘이 집에 남았는데, 시설엔 죽어도 가기 싫고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방법은 보이지 않으니 괴로우셨던 것 같아요. 활동지원서비스만 있었어도 죽지 않았을 분이죠. 그 자리에서 경석 형이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를 위한 농성투쟁을 제안하니까 사람들이 좋다고 했어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경석 형이 나에게 농성이 시작되면 인천에서 함께 싸우고 승리할 때까지 돌아오지 말라고 했어요.(웃음)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요.

며칠 후 간석역에 주인을 잃고 남아있던 박기연 씨의 전동휠체어를 인천시청으로 가져와 불태우고는 천막농성을 시작했어요. 50여 명이 먹고 자면서 싸웠는데 대부분 활동지원서비스가 절실했던 중증장애인이었어요. 다들 민중가요도 모르고 구호도 몰라서 대자보에 써서 하나하나 가르쳐드렸어요. 모두 열의가 넘쳤어요. 공무원 출근시간에 맞춰 선전전도 하고 낮엔 구월동 번화가에 가서 시민들에게 알리고 모금도 했죠. 밤마다 회의도 하고 협상 준비도 함께했어요. 힘들고 재밌었어요. 농성이 일주일쯤 지난 주말이었어요. 전날 밤 그동안 열심이었던 사람들을 모아 술을 마신 다음 날이었죠. 중증장애인들이 새벽에 집에 돌아갈 방법이 없으니까 다들 농성장에서 잤어요. 아침에 여기저기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깼어요.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비장애인은 나밖에 없으니까 나만 깨어나길 기다렸던 거예요. 소변통 갖다주고 비우고 옷 입혀드리고 침낭 개느라 오전이 다 갔더라고요.

인천시청 앞 잔디밭에 문상민 활동가가 서 있다. 사진 현다혜 
인천시청 앞 잔디밭에 문상민 활동가가 서 있다. 사진 현다혜 

그 농성을 하면서 당시 OO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였던 박길연을 만났어요. 휠체어를 탄 장애 당사자였는데 굽 높은 구두를 신고 화려한 패션을 입고 남성들에게 “오빠~” 하면서 애교 섞인 소리로 부르는 걸 보면서 ‘이 사람 뭐지?’ 하고 생각했어요. 운동권들 사이에선 전혀 못 보던 캐릭터였죠. 그날 세숫대야 냉면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냉면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두 그릇을 먹었어요. 길연은 속으로 ‘저런, 식충이를 봤나. 싸우러 왔지 먹으러 왔나…’ 하고 생각했대요.(웃음) 농성이 시작되자 길연은 아주 열심이셨어요. 새벽 2시에 끝나서 집에 들어가는데도 다음날이면 새벽같이 나왔어요. 총무를 하시라고 제안했더니 꼼꼼하게 잘하셨어요. 집회 사회도 보라고 했더니 그건 죽어도 못 하겠대서 그럼 같이하자고 하고는 팔뚝질하는 법도 알려드렸죠. 들어보니 길연은 스물일곱 살에 류마티즘 관절염으로 중도에 장애를 입은 뒤 내내 집 안에서만 지내다 16년이 흐른 그해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이었어요.

농성 14일 만에 인천시가 활동지원서비스 시범사업을 운영하겠다고 발표했고 농성단은 자연스럽게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로 넘어갔어요. 드디어 저에게도 승리의 역사가 시작되었어요. 9월엔 경기도청을 점거하면서 78일 동안 노숙, 삭발, 도로점거, 단식농성 등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어요. 이듬해엔 대전에 가서 19일간 싸웠고 대전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건설했어요. 전장연은 활동지원서비스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뜨거운 열망과 현장 투쟁을 통해 지역 조직을 확장해나갔어요.

활동지원서비스 투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이 투쟁을 일으킨 건 전장연이 아니라 열두 명의 중증장애인이었어요. 2004년 장애인복지시설 정립회관에서 관장의 비민주적 운영에 대한 투쟁이 벌어졌을 때 1년 넘게 점거농성을 했던 사람들이었죠. 직원이었던 노동자와 복지관 이용자였던 장애인들이 관장 퇴진을 요구하며 1년 넘게 점거농성을 했는데 결국 실패했어요. 퇴진하는가 싶었던 관장이 더 높은 이사장이 되어 돌아왔죠. 그 농성에 결합했던 남병준이란 사람이 있었어요. 노동운동하던 사람이었는데 노조 위원장의 친구였어요. 그분이 함께 싸우다가 나중엔 중증장애인들과 세미나를 했어요. 일본어를 번역해서 일본의 활동지원서비스 투쟁 역사를 공부한 거죠. 농성이란 게 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남거든요. 중증장애인들이 1년 동안 농성을 했으니 함께 부대끼면서 활동지원서비스에 대한 절실함이 더 커졌겠죠. 그 사람들이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를 위한 투쟁단을 만들고 이 싸움을 일으킨 거예요. 당시 전장연은 그 싸움을 감당할 만큼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에 옆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기로 했죠.

운동은 대중이 한다고 하지만 조직된 소수의 사람이 시작하기도 한다는 걸 그때 느꼈어요. 그 열두 명이 세미나를 하지 않았다면 그 운동은 시작될 수 있었을까? 이 제도가 워낙 중요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도입되었을 순 있지만 교수나 공무원들이 주도했다면 지금의 양상과는 많이 달랐을 거예요. 우리가 왜 장애 당사자를 조직해야 하는지, 왜 그들과 함께 공부하고 투쟁현장에 나오게 해야 하는지, 한 사람을 주체를 만드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열두 명이 만든 거대한 역사를 보면서 다시 한번 느꼈어요. 정립회관과의 싸움은 실패했지만 그 싸움은 사람을 남겼고 그 사람들이 또 다른 싸움을 만들어내면서 장애인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썼죠. 이동권 투쟁으로 중증장애인이 운동이라는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했어요. 하지만 아직은 극소수의 사람들뿐이었어요. 활동지원서비스까지 제도화되었을 때야 드디어 중증장애인이 이 운동의 중심이 되었어요.

6월 24일, 삼각지역에 설치된 발달·중증장애인 참사 분향소 앞에서 민들레장애인야학  오명진·김선철 학생이 삭발 투쟁을 하고 있다. 인천에서 온 활동가들이 함께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6월 24일, 삼각지역에 설치된 발달·중증장애인 참사 분향소 앞에서 민들레장애인야학 오명진·김선철 학생이 삭발 투쟁을 하고 있다. 인천에서 온 활동가들이 함께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민들레장애인야학을 시작하다

농성 후에 길연과 연인이 됐어요. 어느 날 길연이 나한테 전화를 해 장애인 중에 왜 이렇게 무학이 많으냐고 물었어요. 오래전 시몬 형을 만났을 때 내가 받았던 충격이 길연에게도 찾아온 것 같았어요. 왜 그걸 묻느냐고 물었더니 길연이 겪은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그날 길연은 부평역에서 몇몇 중증장애인들을 만나 놀기로 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1시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대요. 전화를 해서 어디냐고 물었더니 시원하게 답을 하지 않더래요. 앞에 보이는 제일 큰 간판을 알려주면 길연이 데리러 가겠다고 하는데도 계속 대답을 해주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한글을 몰랐던 거예요. 길연이 더 놀랐던 건 그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옆에 있던 다른 장애인도 다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이었어요. 내가 웃으면서 장애인의 45.2%가 무학이거나 초등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이라고 말해줬더니 길연이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길연도 중도장애인으로 16년 동안 집 안에서만 갇힌 채 살아왔지만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다른 장애인들은 세상 어딘가에서 다들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대요. 나는 길연에게 야학이 필요하다고 얘기했어요. 야학은 교육받지 못한 장애인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의 역할도 하지만 차별받는 대중들을 조직하는 운동의 공간으로서도 큰 역할을 해왔어요. 길연은 2006년 내내 활동지원서비스 투쟁으로 몹시 바쁘고 단식농성까지 하는 와중에 정말로 야학을 만들었어요. 나한테 이름을 지어달라기에 ‘민들레’가 어떠냐고 했어요. 그렇게 2007년 3월 민들레장애인야학이 문을 열었어요.

초기엔 돈도 없고 장애인을 받아주는 건물주도 찾기 어려워 계속 쫓겨 다니다가 1년 뒤 작은 공간을 구했지만 월세 내기가 벅찼어요. 2008년 서울 노들장애인야학이 원래 있던 정립회관에서 쫓겨나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천막을 치고 교육공간을 요구하면서 농성을 했는데, 몇 개월 뒤 성과를 얻어 이사를 했어요. 그걸 보고 길연에게 전화해서 민들레야학도 투쟁하자고 제안했어요. 알아보니 인천의 작은자야간학교도 컨테이너 건물을 쓰고 있었는데 불법건축물이라고 퇴거명령을 받았더라고요. 대책위를 꾸려서 같이 싸우기 시작했어요. 교육청 앞에서 천막 쳤다가 다 뜯기고 연행된 뒤 다시 풀려나서 자리를 옮겨 인천문화예술회관 인도 옆에 또 천막을 쳤어요. 거기서 한 달 넘게 수업하고 투쟁하는 ‘천막야학’을 운영하다 마침내 예산지원을 약속받고 지금의 공간으로 오게 됐어요. 그때 길연이 많이 힘들었는지 나한테 전장연 활동을 정리하고 인천에 와서 같이 야학을 하자고 했어요. 야학을 만들라고 한 것도 나이고, 농성하자고 펌프질한 것도 나인데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고민하다가 그러겠다고 마음먹었어요.

5월 9일 박길연 민들레야학 교장, 문상민 민들레야학 사무국장이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하며 삭발 투쟁을 했다. 삭발 후,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문상민 활동가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5월 9일 박길연 민들레야학 교장, 문상민 민들레야학 사무국장이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하며 삭발 투쟁을 했다. 삭발 후,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문상민 활동가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저는 쭉 활동가 조직에서만 일해 오다가 처음으로 대중들과 일상을 함께하는 공간으로 온 거였어요. 속도가 너무 느려서 적응이 잘 안됐어요. 전장연 중앙은 정보도 많고 일정도 많아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투쟁을 조직하는 일을 하죠. 그런데 야학에선 어제 만난 사람을 오늘도 만나고 내일도 만나서 똑같은 얘길 계속 반복해야 해요.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말을 더듬을 정도로 성격이 급한 사람인데 언어장애가 있는 회원들과 얘기하려면 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물어봐야 하고 그래도 못 알아들어서 종이에 써달라고 하면서 대화를 해야 돼요.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현장에서 부대끼면서 느림의 가치에 대해 배우게 됐어요. 느리게 조직한 것들은 쉽게 무너질 수 없더라고요. 중증장애인들이 모여 있으면 그들이 차별받고 배제당한 경험과 역사들도 함께 모여요. 교육 사업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수한 삶의 문제들이 생겨났기 때문에 우리는 2008년 5월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만들고 정부와 지자체, 구청을 상대로 끊임없이 요구하고 투쟁해야 했어요.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은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들, 가령 권리란 누가 대신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사실 같은 것들을 배우며 천차만별의 속도로 성장해갔고 민들레도 그 이름처럼 척박한 땅에서 투혼을 발휘해 뿌리를 내렸죠.

8월 25일, 인천 민들레 ‘불나비’ 회원들과 장애인운동 세미나를 하고 있는 문상민 활동가. 사진 현다혜 
8월 25일, 인천 민들레 ‘불나비’ 회원들과 장애인운동 세미나를 하고 있는 문상민 활동가. 사진 현다혜 

- 자유의 맛 혹은 모양

2009년 어느 날 탈시설 운동단체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행동)에서 연락이 왔어요. 시설에서 나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데 서울에선 받아줄 자립생활센터가 없다면서 민들레센터가 지원해주면 안되느냐고 부탁하는데 그때 우린 체험홈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민들레야학은 몇몇 중증장애인들이 작은 방에서 공동체처럼 함께 먹고 자면서 시작했던 역사가 있어요. 다들 집에서 20년 넘게 갇혀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죠. 그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친구가 시설에 있는데 나오고 싶어 한다면서 민들레에서 받아주면 안되냐고 길연에게 물었대요. 그때는 활동지원서비스가 아직 시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나오면 길연이 신변처리를 다 해줘야 했어요. 그땐 제가 함께 일할 때가 아니었고 길연은 관절을 쓰면 쓸수록 더 못 쓰게 되는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나는 안 된다며 말렸어요. 그런데 길연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는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같이 살아보겠다면서 강행하더라고요. 그렇게 야학 한켠에서 함께 먹고 자며 생활했던 중증장애인이 다섯 명이었어요. 힘들고 고단했어도 그렇게 자립한 사람들의 삶이 변하는 걸 똑똑히 지켜봤기 때문에, 길연은 발바닥행동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보증금 500만 원을 구해서 작은 원룸을 마련하고 그분의 탈시설을 지원했어요. 체험홈 사업의 시작이었죠.

한번은 가평 꽃동네에서 나오기로 한 분을 모시러 간 날이었어요. 도착했더니 갑자기 그분이 안 나간다는 거예요. 당황하고 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척수장애인 한 분이 그럼 자기가 나가면 안 되냐고 물었어요. 알았다고 하고는 다시 준비에 들어갔어요. 시설장, 실무자들과 조율하면서 이주할 날을 잡고 다시 꽃동네에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또 다른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도 같이 가면 안 되냐고 했어요. 지적·뇌병변 중복장애를 가진 분이었어요. 나오고 싶으세요? 하고 물으니 논리정연하게 대답하진 못하셔도 나오고 싶다는 얘기는 계속 반복하셨어요. 그러자 꽃동네 수녀님이 딱 막으면서 지적장애인은 자기결정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법적인 보호자인 군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아니, 이분이 계속 나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걸 왜 군수한테 물어봐요?”하면서 막 따졌죠. 인권위에 진정하겠다고 하니까 그제야 물러서더라고요. 결국 그분도 데리고 나왔어요.

막상 나왔는데 바로 입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일단 길연과 내가 사는 집으로 오셔서 며칠간 함께 살았어요. 첫날 그분 얼굴이 아직도 생생해요. 라면을 끓여드렸는데 계속 히죽히죽 웃으시는 거예요. 너무 맛있어서 웃는대요. 라면 드시는 내내 웃으셨어요. 그런 게 바로 자유의 맛인가 보다 했죠. 어떤 분은 시설 나온 뒤 박스 가득 1.5리터 콜라를 쟁여놓고 드셨어요. 시설에선 ‘장애인은 몸에 좋은 것만 먹어야 하니까’ 콜라 같은 건 절대 주지 않죠. 그분은 콜라 못 먹은 게 한이 된 거예요. 나중에 그 집에 가보니 콜라가 없더라고요. 언제든지 사서 먹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신 거예요.

민들레야학에 붙어 있는 탈시설 선언문. 탈시설 당사자들이 직접 썼다. 사진 현다혜 
민들레야학에 붙어 있는 탈시설 선언문. 탈시설 당사자들이 직접 썼다. 사진 현다혜 

그 후에도 계속 발바닥행동에서 사람들을 보냈고 그때마다 우리는 돈을 마련해 체험홈을 한 채씩 늘려갔어요. 한번은 시설에서 만나 결혼한 부부가 오셨어요. 여성분이 우리한테 한 첫 질문이 “몇 시에 일어나야 돼요?” 였어요. 시설에선 모두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질문을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어요. 나의 기상 시간을 남에게 묻는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인데 그분은 그걸 당연하게 여기셨어요. 자유로운 삶을 위해 엄청난 용기를 내 시설을 나왔지만 이제 자신이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도 되는 땅으로 넘어왔다는 걸 잘 이해하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시면 됩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못 믿겠다는 듯이 “진짜요?” 했어요.

어떤 분은 지적·뇌병변·청각 중복장애인이었어요. 소통하기가 어려워서 시설에 있을 때도 ‘없는 존재’ 취급을 받은 분이었어요. 시설에서 나오시면 우리는 제일 먼저 체크카드를 만들어드리는데 그분께도 그렇게 했고 ATM(현금자동인출기)에서 현금 인출하는 법도 알려드렸어요. 카드를 긁으면 돈이 나오니까 그걸 갖고 편의점에 가서 맛있는 걸 사 드셨어요. 어느 날 우리한테 와서 카드를 긁었는데 돈이 안 나온다고 하셨어요. 수급비가 다 떨어졌던 거죠. 수 개념을 설명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통장을 보여드리면서 숫자들이 점점 줄어들다가 0이 되면 카드를 긁어도 안 나온다고 손짓, 발짓해가면서 설명했는데도 처음엔 이해를 못하셨어요. 그런데 한두 달 경험이 쌓이니까 돈이란 게 계속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시더라고요.

또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전동휠체어를 타는 분이셨는데 ATM에 다가가는 게 어려웠어요.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으려면 기기의 아래쪽이 테이블처럼 뚫려있어야 하는데 모든 기기들은 박스처럼 막혀 있잖아요. 그분이 지나가는 사람한테 비밀번호를 가르쳐주면서 돈을 인출해달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돈을 들고 튀어버렸어요. 아, 함부로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비밀번호를 알려주면 안 된다는 걸 경험으로 배우게 되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그러니까 장애인은 자립하기 어렵다거나 관리와 통제가 필요한 존재라고 함부로 심판하지만 우리는 이걸 실패의 경험이라고 불러요. 실패를 경험할 기회가 더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상민 활동가. 사진 현다혜 
문상민 활동가. 사진 현다혜 

체험홈을 운영하는 게 처음엔 버거웠어요. 이사 지원만 한 달에 다섯 번을 한 적도 있죠. 실무자들이 우리가 이삿짐센터 직원도 아닌데 너무 힘에 부친다면서 발바닥행동에서 또 요청이 와도 당분간 안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박길연 대표도 미안해하면서 그러겠다고 했어요. 그즈음 어떤 시설에서 나오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서 길연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분이 있었어요. 길연이 통화할 때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하면서 안심도 시키고 용기도 주고 있었는데 실무자들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 길연이 그분께 ‘미안한데 당분간은 힘들 것 같아요’라고 말했어요. 몇 개월 뒤 그분이 그 시설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하셨어요.

우리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이 그분에겐 칠흑 같은 어둠을 버티게 했던 한 줄기 빛이었는데 그 빛이 사라져버려서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닐까. 무리를 해서라도 데리고 나왔어야 하는 게 아닐까, 길연도 나도 괴로워했어요. 그 일이 다시 마음을 다잡는 계기였던 것 같아요. 활동가들도 힘들고 지칠 때가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한편에서 우리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힘들다고 말하는 게 사치처럼 느껴져요. 내가 지치고 힘든 순간 누군가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잊지 않고 그런 분들을 지원하기 위해 나도, 조직도 더 튼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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