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지난 10월 12일, 김도현 활동가가 김원영 작가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지난 10월 12일, 김도현 활동가가 김원영 작가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내 안에는 김도현의 수많은 언어가 새겨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비장애인이 ‘장애인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이유는 언젠가 장애인이 될 수 있어서라기보다 장애인 문제가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립이란 혼자 힘으로 서는 것이 아닌, 실은 상호 의존하는 연립이다 등등.

내가 처음 김도현의 언어를 만난 것은 2005년쯤이었다. 당대 유행하던 소셜미디어 사이트인 싸이월드에서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이론과 전략을 위하여’라는 클럽을 우연히 방문했고 그곳에 김도현이 미국의 장애인 이론가이자 운동가 마르타 러셀의 글을 번역해 둔 것을 읽었다. 이후 그가 2007년 출간한 두 권의 책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와 『차별에 저항하라』를 시작으로 2019년 나온 『장애학의 도전』까지 모든 글을 읽고, 그가 번역한 책들도 대부분 보았다. 2005년 김도현은 학자나 연구자가 아니고 당대 가장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던 단체의 상근활동가였다. 그런 김도현이 장애에 관해 궁리하고 정돈하고 번역한 말들이 한국사회에 도착한 시점은 놀라울 만큼 시의적절해서, 그 시기 이 말들을 얻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의 절반밖에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장애에 관해 연구하고 말하고 쓰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감히 생각한다.

그 자신이 2000년대 장애인운동의 역사를 채우는 일부이지만, 다른 한편 김도현은 그 역사를 보는 강력한 렌즈다. 장애인운동을 지켜보았으나 그 내부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던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김도현의 언어를 통과하여 장애인운동의 역사와 사회적 의미를 이해한다. 인터뷰에서도 그는 장애인운동사를 정리한 저자답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 많은 시간을 운동사를 소개하는 데 썼다. 실제로 그 운동사가 그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나는 조금 더 김도현 개인이 궁금했다. 김도현을 통과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김도현 자체를 보고 싶었다.

김도현은 비장애인남성이고, 강력한 체력과 큰 목소리, 신속하고 정확한 지성의 소유자다. 그의 가족 중에는 장애인이 없다. 그는 3년간 혼자 힘으로 돈을 벌어 부모님에게서 독립한 뒤 특수교육을 전공하러 또래보다 늦게 대학에 진학했다(그것도 그 대학의 사범대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다). 이 진로를 그토록 열심히, 끈질기게 추구한 마땅한 이유를 찾기란 쉽지 않아서 그는 자연스레 이런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어떻게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요?”

“특수교육과에 진학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그렇게 들어간 특수교육과에서 정작 그는 교사가 될 생각을 버리지만, 특수교육을 전공한 것이 계기가 되어 90년대 말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하던 장애인운동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독자라면 이미 알고 있는 바로 그 이야기가 시작된다.

세상은 이해하기 쉽고 필연적인 원인으로 이뤄진 세계가 아니다. 김도현이 도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특수교육과에 가려고 했는지, 왜 사회운동을 했는지, 그중에서 왜 하필 장애인운동을 선택했는지 필연적이고 확실한 원인이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는 무엇을 욕망하는 사람이었을까.

11월 14일, 노들야학 인근 마로니에공원에서 김도현 활동가. 사진 현다혜
11월 14일, 노들야학 인근 마로니에공원에서 김도현 활동가. 사진 현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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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현 어린이의 욕망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고려대 근처 종암동과 월곡동 쪽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죠. 그 동네는 당시 빈곤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우리 집도 다르지 않았어요. 월세방을 전전하다 처음 가지게 된 집이 7평 시민 아파트였어요. 화장실이 복도에 따로 있고 연탄으로 난방을 하는 집이었죠. 초등학교 시절부터 미술 시간 준비물이 필요해 어머니에게 말하면 잘 마련해주지 못하시는 모습을 보았고, 4학년쯤 반장 선거에 나가서는 선생님에게 ‘반장이 되면 부모님이 학교에도 자주 오셔야 하는데, 너는 좀 어렵지 않겠냐’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나는 어린이답지 않은, 그다지 좋지 않은 면에서 철이 일찍 든 아이가 되었던 거 같아요. 돈을 빨리, 많이 벌고 싶은 욕망이 아주 컸거든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신문 배달을 시작했어요. 여전히 돈이 부족했죠. 잘 사는 집 아이들이 당시에 많이 보던 『보물섬』이나 『소년중앙』 같은 잡지들, 그런 책을 발간된 달이 지난 후 아이들을 구슬려서 달라고 했어요. 공짜로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거기서 재미있는 기사나 만화들을 추려서 복사본을 만들어 다른 아이들에게 팔았어요. 선생님이 아시고는 혼을 냈죠. 그 나이에도 빨리 돈을 벌어서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그만큼 컸던 거예요.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에서 무시 받지 않으려 공부를 잘하려 애쓰고, 체격이 크지도 않으면서 어떻게든 남자아이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독하게 싸움도 했어요. 중학교 시절까지 그런 종류의 욕망에 압도당해 있었던 거 같아요.

중학교 때 나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반항적이었고 삐딱한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생분들과는 친하게 지냈어요. 그분들은 내 모습을 보고서도 별로 구박하지 않더라고요. 당시는 1987년을 막 지난, 한국 사회가 한창 뜨거웠던 시절이에요. 교생으로 온 선생님들 가운데 학생운동에 참여한 분이 많았죠. 그 이유였을까요? 학교 선생님들과 늘 대립하던 나는 역사교육과 교생선생님 몇 분과는 무척 친해졌어요. 어느 날 한 교생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선생님이 ‘도현이는 나중에 뭐 할 거니’라고 물었어요. 나는 별로 하고 싶은 건 없고 어쨌든 돈을 많이 벌 거라고 답했죠. 아마 기존 학교 선생님이었다면 ‘그래 네가 집안을 일으켜야지, 열심히 돈을 많이 벌어서…’ 이런 식으로 반응하셨을 텐데, 그 선생님은 조금 달랐어요. 그저 돈을 버는 것 말고, 너에게 분명히 꿈이 있을 거라고 하셨죠.

정말 ‘왜 나는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돈을 많이 버는 것밖에 모르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압도했던 무엇인가가 깨지는 순간이었죠. 그리고는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있겠구나, 그동안의 생각과 달리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직업인 거 같다는 생각이 이어졌어요. 커서 선생님이 되자고 마음먹었죠.

고등학교 문예부 시절, 문암문학회에서 시낭송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김도현
고등학교 문예부 시절, 문암문학회에서 시낭송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김도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문예부에서 활동하면서 시도 쓰고, 동아리 친구들이랑 일찍부터 술도 마시며, 문학 소년인 것처럼 생활했죠. 공부보다는 문예부 활동에 빠져 살았어요. 그즈음 부모님이 경동시장에서 옷가게를 하셨는데,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집안 사정이 나빠졌어요.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던 차에, 우연히 어떤 신문에서 특수교육과를 소개한 기사를 읽었어요. 특별한 계기나 고민이 있던 것이 아니라, 선생님을 한다면 이 분야에서 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죠. 지금 돌아보면 시혜적인 동기에 가까워요. 고3 진학상담 때 특수교육과를 가겠다고 하고 아버지에게도 말했어요. 아버지는 선생님을 하려면 그냥 선생님을 하면 되지 무슨 장애인 선생을 하냐고 크게 반대하면서, 세무대학을 가라고 했어요. 지금은 사라진 세무대학은 학비와 기숙사비가 무료였고 당시 졸업을 하면 바로 7급 공무원으로 일할 자격을 주었거든요.

이 일로 아버지와 갈등이 심했어요. 어머니가 가운데서 너무 힘들어하셨고, 나는 결국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의 말을 따라 세무대학에 진학했어요. 수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세무대학 공부가 하나도 맞지 않았죠. 결국 한 학기 만에 부모님 몰래 자퇴서를 내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명동의 상가, 유흥가에서 청소를 담당하는 용역회사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몇 달 후에는 숙식을 제공해 주는 종로의 호프집에 일자리를 얻었어요. 시민호프라는 큰 가게였어요. 그곳에서 ‘아라이’라고 부르는 설거지 담당으로 일을 시작해서 3개월 후 칼질을 배웠죠. 과일을 깎아서 모양을 내어 안주를 만들고, 치킨 양념을 해서 튀기는 일이에요. 손님이 엄청 많은 가게였기 때문에 무조건 빨리하는 것이 기술이었어요. 1994년에 월 100만 원이 넘는 월급을 받았고 대부분 적금을 넣어 돈을 모았죠. 2년 가까이 일하며 나중에는 주방장이 되었어요. 돈을 어느 정도 모으자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러 대학에 갈 준비를 했죠. 다른 식당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공부를 계속했어요. 당시 서울에 특수교육과가 있는 학교는 이화여대를 제외하면 단국대가 유일했기에 그곳으로 갔죠.

시민호프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 종로3가 거리에서. 사진 제공 김도현
시민호프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 종로3가 거리에서. 사진 제공 김도현

- 촉망받는 운동권 새내기

1996년은 문민정부 들어 대학가의 학생운동이 침체되다가 다시 격렬해지던 시기였어요. 학교 입학 직전에도 호프집에서 파트타임으로 계속 일을 했는데, 그때 고등학교 문예부 시절 1년 선배가 단국대 4학년 학생이었어요. 그는 단국대에서 학생운동을 했는데, 우연히 내가 일하는 곳에 손님으로 왔다가 만나게 되었죠. 종로 피맛골 일대에서 집회를 하고 뒤풀이를 하러 가게에 오면 내가 서비스로 안주를 더 챙겨주고 그랬죠. 그러다 운동권 사람들과 친해져서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학생회 활동에 참여하게 됐어요. 그들이 나를 앞으로 열심히 활동할 활동가라면서 학생회 간부들만 가는 수련회에도 데려가고요. ‘나이도 많은 신입생인데 단과대 수석으로 들어와서 데모도 열심히 나온다고?’ 이런 식으로 선배들 사이에 알려진 거죠.

하지만 그 활동을 오래 할 수는 없었어요. 당시 단국대 학생운동은 소위 NL(민족해방파: 민족해방, 통일, 자주 등을 중시하는 정치운동) 운동이 주류였어요. 나는 들어가자마자 선배들에게 신임을 얻었고 그래서 그들과 깊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빨리 찾아왔죠. 알면 알수록 나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할 수가 없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술병이 날아다닐 만큼 대판 싸운 뒤 활동을 그만뒀죠.

이후 특수교육과 내의 일부 선배들과 실천을 뜻하는 ‘프락시스’라는 이름의 동아리에서 같이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노동운동이나 철거민 투쟁 등에 연대하는 활동을 했어요. 어머니와 몇 번 연락을 주고받은 것 외에 가족과 연락이 모두 끊긴 상태였기에 그 동아리에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채운 거 같아요. 힘든 현장투쟁을 나가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특수교사가 되기 위해 특수교육과에 들어갔지만 성실한 학교생활은 하지 않았어요. 특수교육과의 교수부터 조교들까지 굉장히 보수적이었고, 무슨 단합대회 같은 행사를 하면 정원의 10%밖에 안 되는 남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여학생들은 응원을 하는 그런 분위기였죠.

1999년 12월 27일, 에바다대학생연대가 광화문을 점거했다. 대형현수막에 “김대중 대통령은 거짓말쟁이. 에바다 문제해결 약속을 지켜라” “장애인시설 비리 척결!”이라는 문구가 손글씨로 쓰여 있다. 사진 제공 김도현
1999년 12월 27일, 에바다대학생연대가 광화문을 점거했다. 대형현수막에 “김대중 대통령은 거짓말쟁이. 에바다 문제해결 약속을 지켜라” “장애인시설 비리 척결!”이라는 문구가 손글씨로 쓰여 있다. 사진 제공 김도현

1996년 말 ‘에바다 사건’이 터졌어요. 평택에 위치한 에바다복지회 산하 에바다 학교의 학생들과 농아원 원생들이 농성을 하며 인권침해와 비리를 세상에 알렸어요. 장애아동 3명이 의문사하고, 시설 내 작업장에서의 강제 노동과 임금 착취, 수억 원대에 이르는 공금 횡령 등이 드러났죠. 이 사건에 관해 학과 소모임 차원에서 기자회견을 같이한 적이 있었지만, 그 이상의 활동은 없었어요. 그런데 한 선배가 이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책임자 한 명이 처벌받은 후 전국에서 잊히고 있다고 했어요. 그는 나에게 특수교육과에 온 건 어찌 되었든 장애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냐고, 노동조합이나 철거민 문제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장애인의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죠. 맞는 말이었어요. 특수교육과에는 그때 ‘반딧불’이라는 소모임이 있었어요. 거기서 연세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 게르니카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95학번 김형수(현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를 초대해 장애인권에 관한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죠. 나는 반딧불 모임의 이름으로 형수를 찾아갔어요. 게르니카와 반딧불이 함께 에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적인 대학생조직을 제안하자고 했죠. 1997년 여름 게르니카와 반딧불의 공동제안으로 전국의 장애인권동아리와 관련 학과 학생회가 연대한 ‘에바다문제해결을 위한 전국대학생연대회의’(아래 에바다대학생연대)*가 출범했어요.

*1997년 에바다 사건의 문제해결을 위해 결성된 대학생 단체의 초기명칭은 ‘에바다비리재단퇴진과 학교정상화를 위한 전국대학생비상대책위원회’였고 그것이 1999년 에바다대학생연대로 명칭을 바꾼다. 본문에서는 편의상 후자로 통칭했다.

1999년 여름, 에바다대학생연대가 MT를 갔다. 카메라 날짜 설정이 잘못되어서 사진에는 연도가 1994년으로 찍혔다. 맨 앞 왼쪽 앉아있는 남성이 김도현, 오른쪽 목발 짚고 서 있는 사람이 김형수다. 사진 제공 김도현
1999년 여름, 에바다대학생연대가 MT를 갔다. 카메라 날짜 설정이 잘못되어서 사진에는 연도가 1994년으로 찍혔다. 맨 앞 왼쪽 앉아있는 남성이 김도현, 오른쪽 목발 짚고 서 있는 사람이 김형수다. 사진 제공 김도현

- 노들야학 1호 상근 활동가

에바다대학생연대에서 나는 주로 연대사업의 실무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힘을 모으기 위해 우선 두 개의 단체를 찾아갔어요. 한 곳은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전장협)였죠. 전장협은 장애인운동을 사회변혁 운동으로써 바라봤던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와 1993년 8월 통합하면서 전국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장애인운동 단체였어요. 그런데 내가 전장협을 찾아가던 무렵에는 점차 내부적으로 활동 노선을 둘러싸고 여러 논쟁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1998년 말이면 엘리트 장애인 당사자들이 주축이 된 장애인단체 한국DPI(국제장애인연맹 한국지부)에 통합되어 사실상 사라질 예정이었어요. 그런 전장협에서 한국DPI로의 통합을 반대하며 조직국장으로 활동하던 사람이 박경석(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이었어요. 나는 에바다대학생연대의 연대사업 실무자로서 전장협의 조직국장 박경석을 그때 처음 만났어요.

찾아갔던 또 다른 단체는 인권운동사랑방이었어요. 래군이 형(박래군 현 인권재단사람 이사)을 만나 그에게 사회운동 단체가 에바다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 달라고 요청했죠. 그들의 노력에 힘입어서 1999년 7월에는 전국의 사회운동 단체들이 집결한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아래 에바다연대회의)가 만들어져요. 에바다 사건 초기부터 에바다 농아원이 있는 평택 지역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해온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와 더불어서, 대학생들이 모인 ‘에바다대학생연대’, 사회단체가 결합한 ‘에바다연대회의’까지 세 개의 단위를 중심으로 에바다 투쟁이 2003년까지 전개되었어요. 수년간의 싸움 끝에 최종적으로 에바다복지회를 장악했던 최씨 일가를 완전히 몰아내는 것으로 이 투쟁이 마무리돼요.

지난 10월 12일, 김도현 활동가가 김원영 작가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지난 10월 12일, 김도현 활동가가 김원영 작가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에바다 투쟁에는 이처럼 여러 단체가 연대했지만 현장에서 사실상 같이 싸우는 장애인단체는 박경석이 교장으로 있었던 노들장애인야학(아래 노들야학) 밖에 없었어요. 노들야학은 에바다 투쟁 초기까지 전장협의 부설기관이었어요. 전장협은 한국DPI로 통합되면서 사라졌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노들야학은 유일하게 현장을 같이 지키고 싸워주는 장애인단체였죠. 오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어요. 교사 몇 사람, 학생분들 몇 명 이 정도였죠. 그러니 나를 비롯해 에바다 투쟁에 연대한 대학생들이 노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죠. 집회 끝나면 노들이 있는 정립회관까지 가서 뒤풀이 자리를 가지기도 했고요.

대학교 4학년이던 2000년, 경석이 형이 나를 성균관대 근처 자신의 동네로 불렀어요. 그간 모아놓았던 약간의 자금으로 노들야학에 상근 구조를 만들려고 한다면서 내게 상근 활동가 자리를 제안했죠. 그 시기 장애인운동은 현장 투쟁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었고, 정태수, 김종환 등과 함께 박경석은 현장에서 운동을 이어가고자 하는 소수파였어요. 결국 1999년 노들야학은 한국DPI로 통합된 전장협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오기로 하죠. 하지만 노들의 현실은 정립회관 한쪽 끝의 공간을 무상 대여해 사용하는 작은 조직에 불과했어요. 그런 상황에 있는 박경석에게 아마도 나는, 향후 운동을 같이 도모해 볼 만한 대학생 중 하나였겠죠. 어찌 되었든 대학에서 여러 운동 경험을 쌓고 있었고, 성명서도 그럭저럭 잘 써냈으니까요. 에바다 투쟁 때 평택시청으로 우리가 쳐들어간 날이 있었는데, 중앙홀에서 내가 너무 분노한 나머지 한 30분을 혼자 떠들었어요. 경석이 형이 그게 인상적이었다고 그날 말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큰 소리로 혼자 떠드냐고. 목청도 좋다고(웃음).

그가 말했죠. ‘너는 대학에서 데모만 열심히 하고 공부는 안 한 거 같고, 임용고시를 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특수교육과를 나왔으니 장애인 교육에 관심은 있을 것 아니냐. 노들야학이야말로 너와 궁합이 너무 잘 맞는다.’ 듣고 보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어요.

2001년 2월 대학 졸업식 날, 프락시스 동아리방 안에서. 노들야학 상근은 2000년 8월부터 시작하게 되어 4학년 2학기에는 재직증명서를 내고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사진 제공 김도현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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