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라꾸라꾸 위에서 읽고 쓰다
2003년 인권운동연구소에서 장애인운동에 관한 언어나 이론 같은 것을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구속되면서 불가능해졌죠. 감옥 안에서는 할 일이 없으니 장애에 관한 좋은 책을 사람들에게 몇 권 넣어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만난 책이 영국의 장애인 사회학자 마이클 올리버의 책 『장애화에 대한 정치』(The Politics of Disablement)였어요. 당시에 이 책을 보니, 그 안에는 장애를 설명하는 모델이 있고, 언어가 있었어요. 와, 이런 것을 계속 연구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이후부터 나는 서구에서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이라고 부르는 논의들을 읽고 번역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장애학은 1960년대 말 대중적인 장애인운동이 국제적으로 일어난 이후인 1970년대 중반,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장애인운동의 이론적 무기를 벼리는 과정에서 형성된 학문이에요. 장애를 개인의 손상이 아니라 사회문제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장애인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천 지향적 성격을 띠죠. 학제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사회복지학처럼 특정한 학문 분과에 한정되지 않고 인문사회과학 전반의 지식을 연결해 장애를 연구해요.
나는 이런 논의들을 우리말로 옮기고 공부하는 일에 열의를 갖게 되었지만, 책을 출간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2005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에서 장애인운동의 역사를 정리하는 사업을 한국장애인재단의 지원을 받아 기획했어요. 사업비를 받았지만 그 일을 마땅히 할 사람이 없었어요. 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를 조직하는 일로 정신이 없던 때라 도저히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는데, 결국 이걸 누군가 정리를 해야 했고, 해야 한다면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시절 DPI로 통합된 사람들 쪽보다는 전장연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전장연에서도 할 사람이 없었으니, 내가 책임연구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실상 혼자 작업을 했어요. 그 결과물이 2005년 12월 『한국사회 장애민중 운동의 역사』라는 책자로 만들어졌고, 이 책자를 좀 더 대중적으로 풀어써서 정식으로 출간한 게 『차별에 저항하라』(박종철출판사, 2007)에요.
다른 한편으로 장애인운동을 대중적으로 풀어낸 입문서를 써보자는 출판사의 제안이 있었어요. 당시 전장연 조직국에서 일하던 문상민 활동가(현 인천 민들레장애인야학 사무국장)가 잘 아는 분들이 운영하던 출판사였기에 상민이 형이 다리를 놨죠. 이전까지 읽고 정리했던 내용, 강의를 위해 만든 교안들을 모았고, 그 결과물이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 2007)예요. 이걸 시작으로 장애학에 관한 이론적 논의를 정리해서 2009년 『장애학 함께 읽기』를 출간했고, 어쩌다 보니 다시 10년만인 2019년에 『장애학의 도전』을 쓰게 되었어요. 『장애학의 도전』도 두 챕터를 제외하고는 활동 과정에서 작성한 글들을 새롭게 업데이트하고 재구성한 거예요.
2000년 노들야학 사무국장으로 시작해서 장애인이동권연대를 거쳐 전장연 상근자로 일하던 2010년 즈음까지, 나는 집이 없었어요. 일종의 홈리스였죠. 노들야학 상근 활동을 시작하고 장애인이동권연대 활동 초반까지는 노들야학 사무국에서 숙식을 해결했고, 전장연이 생긴 다음에는 전장연 사무실에서 계속 그렇게 지냈죠. 장애학 관련 문헌을 읽고 정리하는 일도 사무실에서 주로 밤 시간에 했어요. 나의 주요 활동은 이동권연대와 전장연 상근 활동가로서의 업무였으니 이 작업은 일종의 부수적인 일이었죠. 활동가들이 밤 9시나 10시쯤 퇴근하고 나면, 나도 상근 활동가로서의 본업을 마치고 작업 모드를 전환했어요. 사람들과 술 마시는 날이 아니면 그때부터 보통 책 읽고 논문을 번역했어요. 새벽 4시쯤까지 작업하다가 잠이 들고, 아침이 되어 사람들이 출근하면 ‘어 왔어? 안녕’하면서 부스스 일어나기도 했죠. 이게 10년간의 내 생활이었어요. 한 사람이 평생 쓸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는데, 나는 어쩌면 그 시기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가장 밀도 있게 소비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때 일상이 그다지 힘들거나 괴롭지는 않았어요. 다만 조금 서러웠던 적이 있기는 한데…. (웃음) 내가 스티로폼 위에 담요를 깔고 덮고 잤거든요. 2008년 즈음으로 기억해요. 당시 전장연 사무실이 사직공원 내에 전교조 서울지부 건물 1층에 있을 때예요. 그때까지도 계속 스티로폼 위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했는데, 활동가들이 보기에도 좀 안됐나 봐요. 그들이 돈을 조금씩 모아서 꽤 좋은 라꾸라꾸 침대를 사줬어요. 밤에 잠을 잘 때는 펼쳐서 자고, 낮에는 접어두고. 삶의 질이 올라갔죠. 밤에 책 보고 공부도 하다가 거기서 잠을 자니 좋았어요. 그런데 얼마 뒤 전장연에서 투쟁을 위한 농성장을 차렸어요. 우리는 그게 일상이니까요. 당시 농성장이 좀 갑자기 마련되어서, 장애인들이 야간 사수를 할 때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았죠. 라꾸라꾸를 잠시 농성장에 보내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사무실에 살면서 이 침대 때문에 삶의 질이 많이 올라갔는데, 다른 방법으로 마련을 하지 이걸 달라고 하나 싶었지만, 농성이 길어질 거 같지는 않아서 빌려줬어요. 그런데 곧 농성장이 침탈되면서 라꾸라꾸도 사라지고 말았죠.
그런데 아무도 라꾸라꾸의 행방에 관심을 두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후에는 사무실에서 기증받아 돌아다니는 장애인 보조기기용 의자를 가져다 놓고 거기서 잤어요. 다리를 앞으로 뻗어서 앉을 수 있는 특수한 의자거든요. 라꾸라꾸가 없으니까요, 내 라꾸라꾸가. 그 의자를 쭉 펼쳐서 자면서 ‘이 모습을 보면 누군가 라꾸라꾸를 떠올려서 다시 사주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했죠. 그런데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거예요. 결국 그 사무실 나올 때까지 1년 정도를 그냥 그 의자에서 계속 잤어요. 사람들은 내 손으로 규탄 성명서 쓰고 구치소 간 일이 섭섭했을 거라고 많이들 생각하지만 그건 괜찮았고, 사실 이 일이 내 활동 역사에서 제일 서러웠던 기억이에요(웃음).
- 억울할 땐 장애학을
나는 왜 장애학을 이토록 열심히 읽고 번역하고 정리하고 그랬을까. 억울했어요. 장애학을 공부한 이유는 ‘억울해서’였어요. 예컨대 노동운동이나 여성운동 등 다른 대중운동을 보면 현장투쟁이 왜 중요한지, 그 투쟁이 어떤 의미가 있고 한국사회에 어떤 함의를 갖는지를 잘 풀어서, 때로는 멋지게 설명하는 논의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 운동은, 이 운동의 중요성이나 의미를 말하는 방식이 장애인의 삶이 이렇게 열악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없었잖아요. 물론 맞아요. 우리가 투쟁하는 건 세련되고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정말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하는 거죠. 그렇더라도 이 투쟁을 주변에 알리고 사회를 향해 문제를 제기할 때, 절박한 현실 이외에도 이 투쟁이 가진 의미를 더 폭넓게 말하고 싶었는데, 당시에는 마땅한 말이 없었던 거예요. 사회운동 안에서도 장애인운동은 사회를 변혁하는 투쟁으로서보다는 열악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싸움으로만 여겨진 측면이 있죠. 이런 상황이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억울했던 거죠. 나는 장애인운동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나가는 운동이라는 생각으로 참여한 사람이니까요.
당연히 억울함이 전부는 아니에요. 장애인운동은 세계적으로, 특히 북미와 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1960년대에 소위 68혁명 이후 전개되었죠. 이 운동들은 이동권, 탈시설, 활동지원, 장애인차별금지법 이런 의제들을 중심으로 진행이 되고, 9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 각기 일정한 성과를 달성하고 그 전성기가 끝나요. 기껏해야 현상 유지 정도를 위한 운동만 남은 측면이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 그 사회에 장애해방이 이뤄진 걸까요? 여전히 비장애 중심적인 사회가 유지되는 가운데서, 각 사회가 수용할만한 정도의 어떤 선 앞에서 멈춰 선 거 같은 거죠. 장애인운동이 넘어설 수 없는 어떤 선이요. 우리나라의 장애인운동도 이동권 투쟁 이후 비슷한 의제에 관한 요구들을 부분적이나마 쟁취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도 비장애중심사회가 감당할만한 그 선에 도달한 후에는 더 나아갈 수 없는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해야 할 필요를 느껴요.
- 장애학을 함께 공부한다는 것
2010년 하반기에 전국장애인부모연대의 제안을 받고 『함께 웃는 날』이라는 발달장애 전문 계간지의 편집장을 맡았어요. 당시는 2009년 ‘마로니에 8인’의 투쟁 이후 탈시설 의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될 때였는데,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의 80% 이상은 발달장애인이죠.
이동권부터 활동지원 제도화 투쟁을 할 때까지는 우리가 발달장애에 관해 특별히 고민하지 않고도 싸움을 하는 데 큰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었죠. 탈시설과 연결되는 자립생활운동도 결국 자기결정권이 보장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에 관해 자립생활 담론 안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한편 그 시점부터 노들야학에 오는 학생분들 가운데도 발달장애인이 조금씩 늘었어요. 발달장애가 있는 학생들과 함께 교육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경험이나 나름대로 훈련을 받은 교사가 노들에는 거의 없었는데, 일단 오시는 분들이 생기고 그 수가 한 명 한 명 늘기 시작하니 그게 야학에 변화를 일으켰죠. 야학에 오는 발달장애인분들을 보면, 신체적 장애가 있는 분들보다 상대적으로 시간을 보낼 곳이 더 없어요. 그러니 낮에도 그냥 오시는 거예요. 와서 여기 상근자랑 농담 주고받으며 점점 관계를 맺는 데 서로 익숙해졌죠. 야학에서는 낮 수업을 만들었어요. 우리는 어차피 야(夜)학도 아니잖아요. 점점 더 많은 분들이 오시고, 지금은 절반 가까이가 발달장애인 분들이에요.
2010년 처음 『함께 웃는 날』을 시작할 때는 우선 운동의 의제로서 발달장애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런데 3년 정도 계간지를 만들고 더 이어지지는 못했어요. 재정 문제였죠. 이 일을 하면서 활동의 중심이 좀 더 본격적으로 담론 작업이라고 할까, 그런 쪽으로 옮겨졌어요. 이전에 전장연에서 상근하며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할 때에는 장애에 관한 여러 이론적·담론적 작업이 활동가로서의 삶에 부수적인 활동이었잖아요. 이제는 활동에서 좀 더 중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게 된 거죠. 『함께 웃는 날』이 폐간하고 나서, 2014년 1월 전장연의 조직실로 복귀했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같은 해 말 노들야학으로 돌아왔어요. 노들야학 상근자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장애인이동권연대와 전장연 사무국 활동가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으니 노들야학에는 무려 11년 만에 돌아온 거였어요. 그렇게 돌아온 노들야학에서 월요일 1, 2교시 ‘선택 인문학’ 시간에 장애학 수업을 시작했죠.
노들에서 수업을 듣는 분들은 대부분 정규 교육을 못 받으신 분들이죠. 장애학은 사회과학이나 철학 문헌의 형식으로 그 담론이 전개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같이 공부할 수 없는 건 아니에요. 나는 장애학이 꼭 그렇게 세련된 걸까 싶어요. 장애학은 물론 여러 흐름이 있고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다양한 생각이 있겠지만, 나는 여성학이 여성운동의 담론이듯 장애학도 장애인운동의 담론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장애인운동을 하고 있잖아요. 이 중증장애인분들이 주체가 되어 운동을 하고 있어요. 이분들과의 수업에서 나는 말해요. 어쩌면 이건 여러분이 몸으로, 직관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투쟁을 통한 체험으로 다 아는 것이라고. 이 공부를 같이하는 건, 우리가 이미 몸으로 아는 것을 다른 사람하고 더 잘 나누기 위해서라고. 장애학이라고 우리가 칭하는 이 장애에 관한 이론이나 담론은 한편으로 우리 스스로 단단해지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결국은 그 밖의 사람들을 설득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이야기이기도 한 거죠.
2017년 3월 노들장애학궁리소를 만들면서 나는 공식적으로 ‘연구활동가’라는 직함을 쓰고 있어요. 이건 ‘연구라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활동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연구 작업을 하는 사람임을 나타낸 말이에요. 노들장애학궁리소가 있는 이곳에는 전장연을 비롯해 장애인운동 단체들이 모여 있어요. 이제 나는 장애에 관한 담론 작업과 연구 작업을 중심으로 하는 활동가인데요, 뭐랄까요. 일상적으로 같이 고민할 동료라든지, 누군가와 언제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나 조건은 아니죠. 이 공간은 늘 현장투쟁으로 바쁘고 정신이 없는 곳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조금 재미없다고 느낄 때가 있죠. 또는 외롭다?(웃음)
그래도 장애인운동이 사회적 힘을 가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의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일부로서 이론 투쟁과 담론 투쟁도 필요하죠. 전장연이 그걸 고민하는 조직은 아닌 거죠. 거기까지 제대로 관심을 가질 여력은 없어요. 다른 사회운동들은 현장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나 조직이 있으면, 다른 한편에 연구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도 있어요. 진보적 장애인운동에 대해 그런 역할을 누가 외부에서 해줄 수 있을까요? 전장연이 뼈 빠지게 투쟁하는데 이에 대해서 같이 보조를 맞춰 목소리를 내주는 연구자가 있나요? 별로 보이지 않아요. 과거 내가 처음 장애인운동을 시작할 때에 비하면 지금은 현장에서 1인분의 몫을 훌륭히 할 수 있는 활동가들이 그래도 많이 조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렇다면 나는 이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 장애인운동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내게 장애학은 그냥 그런 의미인 거 같아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