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김도현 활동가가 노들야학 뒤편 계단에 앉아 있다. 계단에는 ‘노들의 꿈’이라는 글자가 노란색 글자로 크게 쓰여 있다. 사진 현다혜
김도현 활동가가 노들야학 뒤편 계단에 앉아 있다. 계단에는 ‘노들의 꿈’이라는 글자가 노란색 글자로 크게 쓰여 있다. 사진 현다혜

- 복수의 보편성들

졸업을 앞두었을 때 반드시 ‘장애인운동을 하겠다’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당시 사회운동으로 진출하겠다면 1순위는 노동운동이었어요. 경석이 형에게 노들야학 제안을 받을 무렵 에바다 투쟁으로 인연을 맺었던 민주노총 평택지구협의회에서 상근 활동가 자리를 제안받았어요. 운동을 계속하려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선망할 만한 역할이었죠. 그런데 그 자리는, 사실 열심히 활동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거든요. 내가 굳이 아니어도 되는 곳이랄까요. 임용시험을 보고 특수교사가 되려는 생각을 접을 때에도 비슷한 마음이 있었어요. 교사로 일하면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활동을 하는 것도 운동을 지속하는 길이겠지만, 내가 아니어도 그 길은 잘할 사람이 많아 보이는 거죠. 교생실습을 나가보고서 특수교사를 잘 해내려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창의성도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대학 내내 나는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특별히 시간을 쓰지는 못했죠. 그렇다면 교사가 되기보다는 운동을 하자. 그리고 운동을 한다면, 활동가로서 지금 일할 사람이 더 필요한 장애인운동을 하자. 이 정도의 동기로 노들야학 상근 활동을 시작한 거예요.

물론 장애인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왜 나는 대학에 입학해서부터 계속 운동을 하려고 했을까 되묻게 되죠. 상투적이기는 해도 결국 그건 어떤 분노에서 기인한 에너지 때문인 거 같아요. 프락시스에서 활동을 하며 고려대, 동덕여대 등과 같이 철거지역에서 공부방을 같이 했고, 철거지역 투쟁 현장에 자주 갔어요. 그 현장에서 맞이한 현실에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어린 나이에도 돈밖에 생각할 줄 몰랐던 내 모습이 겹쳤어요. 빈곤한 삶의 조건 때문에 얻게 되는 연대의식도 있지만, 그 조건 때문에 한편으로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포섭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것이 어린 날의 나였고요. 가난하기에 살던 지역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의 그 현장을 결코 남의 이야기로 생각할 수 없었어요. 정의감보다는 분노가 20대의 나를 계속 추동했던 거 같아요. 혈기 왕성할 때니까, 그런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뒤집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학생운동을 계속했던 거죠.

2001년 2월 대학 졸업식 날, 프락시스 동아리방 앞에서. 사진 제공 김도현
2001년 2월 대학 졸업식 날, 프락시스 동아리방 앞에서. 사진 제공 김도현

대학에서 내가 참여했던 학생운동 조직은 소위 정통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조금 더 현대화된 입장을 가졌었어요. 프락시스가 2학년 때 동아리연합회 선거를 나가며 내세운 구호는 ‘차이와 연대’였어요. 그러니까 전통적인 노동자계급 운동 외에도 더 다양한 부문, 다양한 억압에 놓인 존재들을 포함하는 운동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죠. 이런 입장에 연결된 사상가인 에티엔 발리바르가 쓴 표현 가운데 “보편적 적대의 복수성”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전까지 보편적인 적대는 계급 적대이고, 나머지는 부차적이라는 도식 속에서 구조적 문제를 이해했다면, 이런 이론가들은 그걸 넘어서고자 한 것이죠. 대학 시절 내가 함께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장애인운동, 페미니즘운동, 환경운동과 같이 다른 운동이 가진 보편적 중요성을 인식했던 거 같아요.

노들야학에서 장애인운동을 계속하겠다는 내 선택은 대단히 확고한 신념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절 품어왔던 분노와 열정, 공부하고 활동했던 운동 진영의 흐름, 노들야학이라는 조직과 함께 싸우며 만들어진 끈끈함 같은 것이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이겠죠.

1999년 당시 노들야학 학생이던 이규식이 혜화역에서 리프트를 타다가 추락했다. 노들야학으로 향하는 혜화역 2번 출구 앞에는 이에 대한 동판이 아스팔트 바닥에 설치되어 있다. 동판에는 ‘장애인 이동권 요구 현장. 1999년 6월 28일. 혜화역 장애인(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이규식) 휠체어 추락사고 이후, 여기서 이동권을 외치다’라고 쓰여 있다. 사진 현다혜
1999년 당시 노들야학 학생이던 이규식이 혜화역에서 리프트를 타다가 추락했다. 노들야학으로 향하는 혜화역 2번 출구 앞에는 이에 대한 동판이 아스팔트 바닥에 설치되어 있다. 동판에는 ‘장애인 이동권 요구 현장. 1999년 6월 28일. 혜화역 장애인(장애인이동권연대 투쟁국장 이규식) 휠체어 추락사고 이후, 여기서 이동권을 외치다’라고 쓰여 있다. 사진 현다혜

- 선로를 한번 점거해 버릴까

2001년 1월 22일 4호선 오이도역에서 휠체어용 리프트가 추락하면서 한 사람이 죽고 한 명은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어요. 노들야학은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 등의 단체와 함께 오이도역대책위를 꾸렸어요. 노들야학은 에바다 투쟁뿐 아니라 1999년 당시 학생이던 이규식 님이 리프트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겪으며 이미 장애인운동 현장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었어요. 교사들도 학생들도 현장에서 싸운 경험이 적지 않았죠. 그래서 이 투쟁을 시작하는데 큰 고민이 필요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이 문제를 어떻게 더 잘 알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했죠. 아직 집행부가 없던 시기여서 경석이 형과 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런 말이 나왔어요. ‘선로를 한번 점거해 버릴까?’

실행할 수 있을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답사를 갔어요. 지하철이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쭉 관찰했죠. 보다 보니까, 지하철은 항상 사람들이 타는 곳에 맞춰서 일정한 위치에 서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저 앞쪽에서 선로를 점거하면 위험하지 않겠다 싶었죠. 사고가 나면 안 되니까요. 준비를 거쳐서 2001년 2월 6일 서울역 광장에서 본격적인 이동권 투쟁의 첫 번째 대중 집회를 열었어요. 그리고 서울역 지하로 내려갔어요. 장애인들은 대부분 최옥란 열사를 비롯해 노들야학 학생들이었죠. 비장애인들은 주로 노들야학 교사들, 그리고 에바다대학생연대가 활동할 때라 그곳의 대학생들 몇 명, 이렇게 플랫폼에 모였어요. 수가 아주 많지는 않았죠.

2001년 2월, 서울역 지하철 선로를 점거한 사람들. 김도현 활동가는 오른쪽 위 승강장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위험’이라는 글자 아래 그의 얼굴 반쪽이 보인다. 사진 제공 김도현
2001년 2월 6일, 1호선 서울역 지하철 선로를 점거한 사람들. 김도현 활동가는 오른쪽 위 승강장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위험’이라는 글자 아래 그의 얼굴 반쪽이 보인다. 사진 제공 김도현

거기서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의 지원을 받아 선로 아래로 내려갔어요. 사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그날의 선로 점거를 미리 알았던 건 아니에요. 현장에서 “선로 내려갈 건데 갈래요?” 이렇게 물어서 내려간다고 한 사람도 있었고, 내려가지 않고 승강장에서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죠. 우리 모두 그날의 행동은 처음이라 정신이 없었어요. 얼떨결에 따라 내려간 사람도 있었을 거예요. 경찰도 처음이고 승객들도 그런 일이 처음이라, 그날은 욕을 하는 시민들도 거의 없었어요. 경찰과 소방관들이 우리가 내려가고서 20분 정도가 지나서 왔는데 그들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그냥 난리가 난 상황이었죠. 나는 선로 점거를 하는 동안 역무실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다음 전동차가 들어오지 않게 조치를 취하고, 점거 시위의 분위기를 잡고 유지하기 위해 구호를 외쳤죠.

우리는 그날 엄청난 결의를 하고 선로 점거를 실행한 게 아니었어요. 노들야학의 장애인들은 현장투쟁의 경험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모두 어수선하고 처음인 상태에서 그 일을 그냥 했던 것이죠. 30분간 지하철을 멈추고서, 점거를 마치고 나서는 그냥 잘 끝났구나(웃음). 큰 사고 없이 잘 마쳤구나, 첫 투쟁을 성공적으로 해냈구나 이런 희열 같은 걸 느꼈죠. 경찰도 어찌할 바를 몰랐으니 첫 번째 선로 점거 투쟁에서는 연행도 안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승강장으로 올라와 정리 집회를 하고 각자 집에 갔죠.

2001년 10월 31일, 종로2가를 점거하고 버스 타기를 시도했다. 가운데 위에 김도현 활동가가 주먹을 불끈 쥐고 서 있다. 사진 제공 김도현
2001년 10월 31일, 종로2가를 점거하고 버스 타기를 시도했다. 가운데 위에 김도현 활동가가 주먹을 불끈 쥐고 서 있다. 사진 제공 김도현

첫 번째 지하철 선로 점거가 끝나고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점점 격렬하게 진행됐어요. 오이도역대책위에 더 많은 단체가 참여하면서 4월 20일 장애인이동권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아래 장애인이동권연대)가 되었죠. 2022년인 지금도 하고 있는, 여러 명의 장애인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시위를 3월 9일 처음 진행했고 그 이후에도 부정기적으로 했어요. 지하철이 연착되자 시민들의 비난이 거셌는데 그때 경석이 형이 말했죠.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30분 늦어지는 것을 이유로 우리를 비난한다면 감수하겠다. 그러나 30분이 아닌 30년을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장애인의 현실에 대해 우리 사회는 함께 책임져야 한다.”

2001년 7월에는 시청역에서 농성을 시도했어요. 그 이후부터 우리가 무수히 많은 농성을 하고 있는데 그때가 사실상 첫 농성이었어요. 경찰이 농성을 위해 친 천막을 빼앗으려 하니 노들야학 장애인분들도 와서 같이 지켰죠. 그러다 결국 농성장을 침탈당했어요. 여러 명의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이 그 자리에 같이 남았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어디 가서 자야 하잖아요. 그때 노들야학 사무국이 혜화동 로터리에 있었어요. 자원활동가들이랑 버스도 타고 걷고 어떻게 사무실까지 이동해서 밤에 그 좁은 사무실에 다 들어가서 잤어요. 기억하기로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열 몇 분이 잔 거 같아요. 엄청 힘들게 와서 쓰러져 잠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비장애인은 나 혼자고 주변에는 누군가가 휠체어 위에 앉도록 돕지 않으면 안 되는 중증장애인이 열 명 넘게 다 누워서 나만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도현아. 나 이거 좀….” (웃음) 와 빨리 챙겨서 다시 나가야 하는데, 일어나는 거 전부 도와드리고, 정말 대충 씻을 수 있게 하고, 컵라면 같이 먹고, 7시에 일어나 드디어 나갈 때는 점심때가 거의 다 되었어요.

2001년 여름, 서울역 천막 농성장 안에서 김도현 활동가가 선전물을 접고 있다. 사진 제공 김도현
2001년 여름, 서울역 천막 농성장 안에서 김도현 활동가가 선전물을 접고 있다. 사진 제공 김도현

우리는 힘들게 서울역 광장에 장소를 다시 확보해서 그곳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어요. 아직은 연대하는 조직이 적었으니 사람이 부족했죠. 한여름 농성장을 지킬 실무자가 없어서 30일 정도 농성하는 동안 25일은 내가 나와 실무를 챙기고 잠을 잤어요. 낮 시간 서울역 앞에 사람들이 많이 오가니까 농성장 천막 앞에는 서명을 받는 명부를 놓고, 모금함을 놨어요. 전체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 설치, 저상버스 도입 등을 요구하고 시민들의 지지 서명을 받았죠. 모금도 잘 됐어요. 하루를 보내고 모금함을 털어 오늘 하루 얼마나 모금이 되었나 정산해 보는 게 즐거움이었죠(웃음). 힘들었지만 이 농성을 통해서 많은 사회단체들과 이동권 투쟁이 만났어요. 지지 방문이 이어졌고 여러 단체가 장애인이동권연대에 가입했죠.

2002년 5월 19일 지하철 5호선 발산역에서 장애인이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또 벌어졌어요. 이제 우리는 정말 할 수 있는 걸 다 해봐야 했죠. 8월 12일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를 점거하고 중증장애인들이 무기한 단식을 결의했어요. 서울시에 사과를 요구하고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어요. 며칠 정도 지나면 서울시에서 답이 올 거 같았지만 답변이 없었어요. 단식이 위험한 몸을 가진 중증장애인 농성자들은 오래 버틸 수가 없었어요. 대다수가 일주일에서 열흘 사이에 단식을 그칠 수밖에 없었죠. 경석이 형과 장애인문화공간의 최재호 대표 두 사람이 남아 20일경까지 버텼는데, 최재호 대표도 곧 단식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죠. 경석이 형 혼자 남았어요. 당시까지는 장애 여부를 떠나 한 달 이상 단식을 이어간 사례가 사회운동 전반에서도 매우 드물었어요. 박경석은 체력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단식 1개월이 다가오자 곁에서 그를 지원하는 입장에서 정말로 위험해 보였어요. 이러다 열사가 나오는 게 아닌가, 더 이상은 안 된다. 1개월 기점으로 정리하자고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는 계속했죠. 농성을 지속하고 현장 투쟁이 계속되느라 정신이 없었던 시기이지만 그때 가장 큰 걱정은 박경석의 신변이었어요.

2002년 7월 1일, 광화문역에 천막 농성을 시도하던 중 경찰과 충돌해서 김도현 활동가가 피를 흘리고 있다. 사진 제공 김도현
2002년 7월 1일, 광화문역에 천막 농성을 시도하던 중 경찰과 충돌해서 김도현 활동가가 피를 흘리고 있다. 사진 제공 김도현

결국 39일까지 그의 단식이 이어졌고, 단식농성이 진행되는 동안 시청역 선로를 점거하는 투쟁을 다시 했어요. 2001년 2월의 서울역 점거 이후 두 번째 선로점거 투쟁이었죠. 서울시의회를 점거하기도 했어요. 결국 서울시는 2004년까지 모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저상버스 도입을 추진하는 협의회를 구성한다고 약속했어요. 또 장애인콜택시 100대를 도입해 운영하기로 했죠. 서울시의 답변을 받아내고서 마침내 단식농성을 정리했어요. 박경석이 투쟁을 이끄는 추진력이야 익히 알았지만, 단식농성장에서는 그의 엄청난 의지를 보았죠. 나는 투쟁의 실무자였으니 이렇게 성과를 내고 투쟁이 마무리된 것이 기뻤지만 그보다 더 큰 건, 안도감이었어요.

2002년 9월 29일, 장애인이동권연대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서울시에 발산역 리프트 장애인 추락 참사에 대한 공개 사과를 촉구하며 무기한 단식을 했다. 서울시가 이동권 보장 대책을 발표하면서 박경석 대표는 단식 39일 만에 중단했다. 왼쪽에서 네 번째 뒷줄에 앉아 한쪽 다리를 의자 위에 올리고 있는 사람이 김도현 활동가. 사진 제공 김도현
2002년 9월 29일, 장애인이동권연대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서울시에 발산역 리프트 장애인 추락 참사에 대한 공개 사과를 촉구하며 무기한 단식을 했다. 서울시가 이동권 보장 대책을 발표하면서 박경석 대표는 단식 39일 만에 중단했다. 왼쪽에서 네 번째 뒷줄에 앉아 한쪽 다리를 의자 위에 올리고 있는 사람이 김도현 활동가. 사진 제공 김도현

- ‘김도현 활동가의 구속을 규탄한다!’라고, 김도현이 썼다

인권운동사랑방(아래 사랑방)에서 2001년부터 인권운동연구소(현 인권연구소 ‘창’)라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연차가 긴 사랑방 활동가 두 명에 더해 외부에서 객원연구원 두 명을 선발하고, 2년 과정으로 빡빡하게 공부를 시켜서 객원연구원이 자신의 사회운동에 관한 논문을 제출한 후 원래 단체로 복귀하는 시스템이었죠. 2001년부터 시작된 이동권 투쟁으로 90년대 후반 사라져가던 현장투쟁이 되살아나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상황에서, 나는 다른 사회운동에 비해 장애인운동을 설명하는 언어나 이론적인 논의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던 차에 인권운동연구소가 2기 객원연구원을 뽑는다고 하니 참여하고 싶었죠. 고민 끝에 경석이 형과 이야기를 나눴고 2년 후 복귀를 전제로 야학을 휴직하고 인권운동연구소에 들어갔어요.

당시 이동권 투쟁의 상황은 계속 급박히 돌아갔어요. 2003년 5월 국철 구간 송내역에서 한 시각장애인이 철로로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났어요. 장애인이동권연대는 이에 항의하면서 광화문역 선로를 점거하고자 했어요. 이것이 2001년 서울역 이후 세 번째 선로 점거였죠. 현장에 선로 점거 투쟁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무래도 필요해서, 경석이 형이 인권운동연구소에 있던 내게 현장 지휘를 부탁했어요. 노들야학 학생 한 분을 선로에 내려주고, 플래카드를 설치하고, 구호를 외치다가 빠지면 된다고 했죠. 당일 우리는 30여 분간 광화문역 선로를 점거하고 항의시위를 했어요. 당일에는 현장을 벗어나 무사히 돌아왔는데, 한참 지나 내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어요. 지하철 CCTV에 기록 영상이 남아있었고, 2001년 에바다 투쟁 과정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아직 집행유예 기간이었던 터라, 일종의 괘씸죄가 적용된 거죠.

지난 10월 12일, 김도현 활동가가 김원영 작가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지난 10월 12일, 김도현 활동가가 김원영 작가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구속을 앞두고서 아르바이트 등 주변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어요. 그때 경석이 형에게 다시 전화가 왔어요. 내가 구속되면 이런 검찰의 행위를 규탄해야 하는데, 성명서를 쓸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의 구속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쓰는 일을 마지막으로 하고서 구속됐죠.

김도현 동지는 (…) 장애인운동의 현장에서 항상 우리 곁에 있었던 너무나 소중한 동지였다. (…) 즉각 석방하라! 만일 그렇지 않을 시에 이동권연대는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더욱 치열하고 강고한 투쟁을 벌여나갈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

_ 2003년 8월 20일, 장애인이동권연대 성명 ‘김도현 동지에 대한 편파 수사와 부당 구속을 중단하고 장애인이동권 보장하라!’ 중에서

경석이 형이 조금 너무했다 싶을 수 있지만, 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장애인운동의 열악한 사정을 잘 알았기 때문이죠.

장애인운동의 열악함에 대해 경석이 형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구치소에 있을 당시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으로서 대중적인 지지를 확장하며 국회의원 총선을 준비했어요. 그들이 경석이 형에게 비례대표를 제안했죠. 나는 우리 운동이 성공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보적 정치운동 안에서 우리 목소리를 잘 대변할 수 있는 사람, 장애인운동 현장과 조직적으로 연결된 정치활동가도 필요하죠.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같은 조직이 없었고 현장에서 장애인운동을 만들고 이끌어갈 사람이 없었죠. 그래서 당시 장애인운동의 조건에서는 경석이 형이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국회의원 비례대표 제안을 거절했죠. 구치소 안에서 나는 경석이 형과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어요. 우리는 서로의 상황을 걱정하고, 장애인운동 현장의 문제를 고민했죠.

김도현 활동가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을 당시, 박경석·배복주 활동가와 주고받은 편지. 사진 복건우
김도현 활동가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을 당시, 박경석·배복주 활동가와 주고받은 편지. 사진 복건우

10월 중순경 보내왔던 경석이 형의 서신, “이제 내게도 별반 많은 힘이 남지 않은 것 같아 외롭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다”는 내용을 읽고 한동안 무척 심란했더랬습니다. 제가 구속된 후 종로서 유치장에서 말했던 ‘우리 운동의 열악함’, 저는 그것을 우리 활동가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가장 절실히 느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같은 요구를 내걸고, 같은 것을 쟁취하기 위해 싸운다는 의미를 넘어선, 그러한 동지적 관계가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부재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한국사회에서 장애운동이 하나의 변혁운동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힘든 일을 많이 겪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서로의 존재로 인해 힘을 얻고 또 만들어내면서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힘들더라도 외롭지는 않게.

_ 2003년 11월 1일, 김도현이 서울구치소에서 박경석과 배복주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2003년 8월 구속돼서 8개월만인 2004년 4월 23일 나왔어요. 구치소에서 담배도 술도 안 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니까 입소하고 한 달 만에 살이 13킬로그램이나 쪘어요. 구속되던 여름 입고 간 반팔 옷이 나올 때는 쫄티처럼 몸에 꽉 붙었어요. 사람들이 그걸 보고 엄청 놀렸죠. 환영 파티를 열어주었고, 한 선배가 새 티셔츠와 바지를 사서 갖다주었어요. 첫날부터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다시 원래 생활로 금방 돌아갔죠(웃음). 한 달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장애인이동권연대로 복귀했어요.

출소환영식에서 김도현 활동가. 구치소 내 규칙적 생활로 살이 13킬로가 쪘다. 사진 제공 김도현
출소환영식에서 김도현 활동가. 구치소 내 규칙적 생활로 살이 13킬로가 쪘다. 사진 제공 김도현

장애인이동권연대는 대중교통에 장애인편의시설 설치를 의무로 규정하는 ‘장애인 등의 이동보장법률안’을 발의했어요. 그러자 정부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안’이라는 법률안을 내놓았죠. 정부안에서 저상버스 도입은 의무가 아니라 권고 수준이고, 지하철 같은 다른 대중교통에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별다른 제제 규정이 없는 법안이었어요. 우리는 다시 농성에 들어갔어요. 2004년 10월 25일부터 국회 앞에서 68일간 천막 농성을 하고, 1인 시위를 하고 릴레이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죠. 당시 거대 양당의 당사를 점거하고 시민들의 서명을 받아 전달했고, 마포대교를 점거하기도 했어요. 결국 최종 법안은 정부안의 명칭대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으로 결정되었지만, 저상버스 도입이 의무화되었고 ‘이동권’이라는 표현이 법안에 공식적으로 명시될 수 있었죠. 2004년 12월 29일, 이렇게 조율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했어요. 오이도역 참사 이후 중증장애인들이 중심이 되어 지하철 선로, 도로, 버스, 인권위 등을 점거하며 만들어낸 성과였죠. 그 이후에도 이동권 투쟁은 계속되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2001년 시작된 이 운동은 법률 제정이라는 성과와 함께 적어도 하나의 국면이 마무리되었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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