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 이동을 넘어 활동으로
이동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던 2000년대 초중반까지, 비장애인 활동가들에게 장애인 활동지원은 당연하고 기본적인 일이었어요. 노들야학은 초기에 봉고차로 서울 전역을 돌면서 장애인분들의 이동을 지원하고 그랬잖아요. 운전하는 사람 한 명하고 이동지원 할 사람 한 명 이렇게 타서 여러 지역을 돌며 장애인 학생분들을 태우는 거예요. 한 명 한 명 안고 업어서, 편의시설도 장착되지 않은 승합차에 타는 게 꽤나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죠. 물론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지만요. 쉽지 않은 그 일이 당시는 자연스럽고 당연했던 것 같아요.
활동지원은 그처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항상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어요. 집회 현장에 가면 장애인 참가자들이 나에게 화장실을 같이 가자고 많이 요청했어요. 한 분이랑 다녀오면 다음 분이 요청하고, 또 다른 분이 요청하고. 어떤 날은 집회에서 화장실 활동지원만 해요. 당연히 하는 일이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가끔은 다들 나에게만 이야기하니까 ‘아니 왜 계속 나만…’(웃음) 그런 마음이 든 적도 있어요. 장애인분들 입장에서 신변처리 지원을 아무에게나 요청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익숙하고 편하니까 그러는 걸 모르지 않지만요.
2000년대 초중반 전동휠체어가 보급되면서 이용자가 점점 늘어났어요. 중증장애인이 전동휠체어를 타면 너무나 자유롭고 좋죠. 단, 노들의 봉고차를 탈 수가 없어요. 저상버스도 없고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니, 결국 지하철을 타야 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위험한 일인데, 전동휠체어를 탄 야학 학생분과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려고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어요. 야학 남자 교사들이 학생분 집으로 가서 그와 함께 지하철역 앞까지 온 다음에, 지나가는 시민 몇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같이 들고 내려오는 거죠. 전동휠체어는 구조상 손으로 잡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전동휠체어를 들기 위해 최대한 협력할 수 있는 인원은 6명이에요. 6명이 같이 계단을 오르내린 거예요.
2주 정도 그렇게 활동지원을 했는데 정말 이러다 무릎이 나갈 수도 있겠다 싶었죠. 장애 당사자에게도 지나가는 시민들에게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고요. 무모하지만 그때는 그런 시도를 했어요. 어떤 시스템이나 장비도 없었으니까요. 반면 전동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오려는 장애인들의 의지는 엄청났고, 지원하는 야학 교사나 활동가들 역시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타고 야학으로 오는 그 일을 같이해내고 싶었던 거죠.
휠체어를 타고 집을 나와서 지하철과 버스를 타기 위해 싸웠던 이 시기에 장애인 자립생활운동이 장애계에 확산되었어요. 자립생활운동은 중증장애인이 시설이나 가족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지역사회에서 자립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서비스를 구축하기 위한 이념이자 운동이죠. 이를 위해 장애인의 일상을 지원하는 활동지원서비스 제도를 비롯한 사회정책을 만들고, 당사자 간 지지와 권익옹호 활동을 조직하려 애쓰죠.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시작한 자립생활운동은 일본을 거쳐 1990년대 말 한국에 들어왔어요. 집에만 있던 장애인들, 누군가의 활동지원이 없다면 혼자서 이동이나 생활이 어려운 중증장애인들이 힘들게 거리로 나와 이동권 투쟁에 참여하던 그 시기 자립생활운동의 이념과도 만난 거예요. 대중교통이나 건물로의 접근을 요구하던 이동권 운동의 주체들이 일상생활 전반을 가족이나 자원봉사에 의지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활동지원에 대한 권리에 관심을 보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 들판에서 함께 배우고 가르치고 싸우는 사람들
자립생활운동은 운동의 물리적 거점이자 활동지원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으로서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설립하는 쪽으로 나아갔어요. 한국도 2003년을 전후로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많이 설립돼요. 옆에서 같이 이동권 투쟁하던 동지들이 갑자기 센터 소장이 되는 시기였죠. 센터 후원을 위한 CMS 요청이 많았어요. 나중에 보니 후원하는 센터만 열 몇 개더라고요(웃음).
노들야학도 2003년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만들어요. 노들이 야학이라는 공간을 기반으로 자립생활센터를 설립했다면, 자립생활센터 가운데는 더 많은 장애인들과 만나기 위해 센터를 기반으로 야학을 만들기도 했어요. 장애인야학이 증가하면서 2000년대 중반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아래 전장야협)가 결성되었죠.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뜻깊은 기억이 있어요. 전장야협이 만들어진 후 2008년 개최된 한 토론회에서 나는 ‘밤에 공부하는 학교’라는 의미에서의 야(夜)학이 아니라, 풀뿌리 민중이 서 있는 ‘들판에 존재하는 학교’라는 의미에서의 야(野)학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삼자고 제안했어요. 우리는 거리에서, 들판에서 싸우고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니까요.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전장야협은 야간학교의 준말로서의 야학이 아닌 ‘야(野)학’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게 돼요.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의 정식 명칭도 같은 맥락에서 노들장애인야(野)학으로 바뀌었죠.
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장애인야학이 전국에 설립됨과 동시에, 장애인교육권 투쟁을 계기로 장애인 부모운동 역시 힘을 받으며 조직화 되고 있었어요. 1994년 ‘특수교육진흥법’이 전면 개정된 후에도 학교에서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건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이러한 현실에 맞서기 위해 경남장애인부모회, 장애인참교육부모회 등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운동 단체들이 활발히 활동을 전개했죠. 2003년 부모운동 단체들은 노들야학과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현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등 장애인단체, 교사단체, 특수교육 관련 학생단체들과 함께 장애인교육권연대를 만들고 장애인교육지원법을 제정하기 위한 싸움에 돌입했어요.
이 모든 과정이 2000년대 초 시작되어 2000년대 중반 무렵까지 전개되었어요. 이제 우리는 박경석이 국회의원이 되면 현장에서 싸울 사람이 없는 장애인운동, 내가 구속되기 전날 나의 구속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열악한 장애인운동을 벗어나고 있었어요. 현장에서 배우고 싸우는 힘을 가진 진보적 장애인운동 조직의 토대를 어느새 갖춰갔던 거예요.
- 한강대교를 건너 전장연으로
장애인이동권 투쟁을 거치며 조직화된 장애인단체들을 중심으로 진보적 장애인운동 단체를 만들기 위한 논의가 2004년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리고 2005년 10월 드디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준비위원회를 발족했어요. 당시 나는 장애인이동권연대의 상근자로서 전장연의 강령과 규약 초안을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그 강령과 규약이 논의 과정을 거쳐 통과되고 전장연 준비위가 탄생한 순간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요. 사실 노들야학을 통해 소위 진보적 사회운동으로 진출할 때 나의 마음가짐은 ‘내가 지치지 않고 10~20년 꾸준히 활동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건강하고 단단한 장애인운동 조직 하나쯤은 만들 수 있겠지’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빨리 그런 조직이 탄생한 거였죠.
그리고서 얼마 뒤인 2005년 12월 경남 함안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터졌어요. 작은 단칸방에서 혼자 생활하시던 중증장애인이 겨울밤 잠을 자던 중 보일러와 연결된 관이 동파되어 추위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거예요. 터진 보일러 관에서 물이 흘러나왔고 그 물이 이불을 적셨는데,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서 동사하신 거죠. 활동지원서비스에 대한 논의는 이미 2000년대 들어 시작되었고,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설립되면서 기층에서부터 활동지원제도에 대한 요구가 축적되고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중증장애인이 누군가의 지원을 받지 못해 혼자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2006년의 시작과 함께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에 본격적인 불이 붙었죠. 전장연 준비위와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가 이 투쟁을 조직적으로 이끌게 되었고요.
우리는 일단 지방자치단체인 서울시를 상대로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는 투쟁을 시작했어요. 2006년 3월 20일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43일 동안 농성을 벌이죠. 39명이 삭발하는 투쟁도 했어요. 그때 경석이 형도 긴 머리를 다 잘랐죠. 요구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동권 투쟁에서 우리는 선로를 점거하면서 운동의 요구를 알렸고, 점차 투쟁의 수위를 높이는 계기가 됐잖아요.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를 위해서는 무엇이 가능할까. 그러다가 한강대교를 점거하고 장애인들이 맨몸으로 기어서 건너가자는 투쟁 계획이 만들어져요. 한강의 많은 다리 중에 왜 한강대교였냐면,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한강대교 가운데 노들섬에 수천억 예산을 들여 오페라하우스를 건설한다는 공약을 추진하고 있었거든요. 활동지원서비스 요구에 대해 예산을 이유로 응하지 않던 서울시와 싸우기에 상징적인 장소였죠.
이 계획을 두고 논의가 많았어요. 혼자서 움직이기 어려운 장애인들이 많이 계신 데 바닥을 기어간다는 건 정말 스스로 어려운 결심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누가 이걸 선뜻 하겠다고 할까. 설령 한다고 결정을 하더라도 이분들에게 그게 어떤 의미일까, 이런 우려가 있었죠. 나는 당사자가 아니니 더욱 그랬어요. 사실 우리가 이동권 투쟁을 할 때도 버스를 타려면 휠체어를 번쩍 들어 올려서 같이 타고 그랬거든요. 그럼 왜 짐짝처럼 이렇게 들려서 타야 하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었죠. 한편으로 우리는 이렇게도 생각했어요.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은 경험이지만, 일상에서 그런 식으로 들려서 버스를 타고 내리고 있다고요. 일상에서 늘 있는 일을 투쟁으로 전환한 거라고.
하지만 한강대교를 기어가는 건 그와는 또 다른,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었죠. 나의 비장애인이라는 신체성이 이런 상황에서 미묘하게 작동해요. 내가 결의할 수 없는 투쟁 계획을 세우고 그걸 제안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투쟁을 결의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부담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 내가 광화문역 선로를 점거하고 구속되었을 때, 이 구속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도 당시 상황을 ‘선로에 내려가는 사람을 도우려 했을 뿐인데, 도운 사람을 구속했다’라는 식으로 표현했어요. 그런데 사실 내가 그냥 도우러 간 사람은 아니거든요. 같이 투쟁을 기획하고 함께 싸우는 사람이죠. 그렇다고 여기서 ‘나는 도우러 간 사람이 아니라 같이 싸웠고…’ 이렇게 굳이 말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나는 선로에 내려가고 한강대교를 기어서 건너는 투쟁을 직접 결의할 수는 없는 사람이면서, 그것을 결의한 장애인들을 그저 돕는 사람도 아니죠. 이건 참 오묘한 입장이에요.
물론 한강대교 투쟁을 앞두고 우리가 엄청나게 심각하게 고민한 건 아니에요. 걱정하고 우려를 했지만 결국 바닥을 기어서라도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를 위해 싸우겠다는 장애인들이 있었으니까요. 2006년 4월 27일 많은 중증장애인들이 한강대교를 점거했어요. 그리고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내려와서, 무려 6시간 동안 기어서 다리를 건너갔어요. 어떤 분들은 정말 구르다시피 하며 그 길을 끝까지 갔어요. 큰 충돌은 없었어요. 그날의 투쟁 역시 경찰에게도 우리에게도 처음 겪는 일이었어요.
한강대교를 점거하고 중증장애인이 바닥을 기어서 건너는 시위가 있은 후 결국 서울시와 전장연 준비위는 활동지원제도를 위한 조례를 제정하고, 관련된 실태조사를 하기로 합의했어요. 그리고 5월에는 대구지역 장애인단체들이 대구시청 앞에서 활동지원제도를 요구하는 농성에 들어갔고, 6월에는 인천, 9월에는 경기도로 활동지원제도 도입 투쟁이 확산했어요. 또 8월 말부터는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36일간 농성을 벌이기도 했고요.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2007년 전국 단위의 활동지원서비스 도입을 정부가 약속하게 되었죠.
2007년은 활동지원서비스의 전국적 시행뿐 아니라,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해이기도 해요. 또 장애인교육권연대가 중심이 되어서 열심히 싸운 끝에 결국 2007년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제정이라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죠. 이동권, 교육권, 장애인차별금지법, 활동지원서비스까지 서구의 장애인운동 역사에서 통상 20년에서 30년이 걸려 이뤄낸 성과들이 한국에서는 2001년부터 7년 만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 한 챕터가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2007년은 특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2007년 9월에, 지역의 단체들이 더 조직되면서 전장연이 마침내 ‘준비위원회’ 꼬리표를 떼어내고 공식 출범했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