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비장애인 활동가 생애기록 - 두 번째 사람들

2014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시외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며 김도현 활동가가 버스 위에 올랐다. 당시 장애등급제로 인해 사망한 송국현 활동가에 대한 장례투쟁도 함께 진행되어 손에는 “장애등급제가 송국현을 죽였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사과하라!”고 적힌 피켓이 들려 있다. 사진 최인기
2014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시외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며 김도현 활동가가 버스 위에 올랐다. 당시 장애등급제로 인해 사망한 송국현 활동가에 대한 장례투쟁도 함께 진행되어 손에는 “장애등급제가 송국현을 죽였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사과하라!”고 적힌 피켓이 들려 있다. 사진 최인기

- 장애인도 버스 타고 고향에 가고 싶다

2014년 1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집행부로 돌아왔을 때 전장연 차원에서 고민했던 의제는 장애인 시외이동권 투쟁이었어요. 조직실장으로서 이 투쟁을 조직할 과제를 부여받았죠.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아래 교통약자법)이 생기면서 시내버스에 저상버스가 일정 부분 도입되었지만 한 행정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가는, 예컨대 서울에서 다른 도시로 가는 고속버스나 시외버스에는 저상버스가 한 대도 없었어요. 교통약자법 입법 이후 장애계에서도 고속버스나 시외버스에는 저상버스 도입 의무가 없는 것으로 법률을 이해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시외이동권 의제를 고민하면서 교통약자법을 다시 한번 찬찬히 들여다봤는데, 꼭 그렇게 해석될 이유가 없어 보였어요. 주변의 전문가들에게 제 해석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니, 처음에는 ‘어, 아닐 텐데’라고 얘기하셨던 분들도 다 동의를 해주시더라고요. 우리는 이러한 법률 해석에 기초해서 정부에 시외·고속버스에 저상버스 또는 휠체어 탑승 설비를 갖춘 버스의 도입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죠. 그렇게 이 운동이 시작되었어요. 우리는 캐치프레이즈를 이렇게 만들었죠. ‘장애인도 버스 타고 고향에 가고 싶다!’

그해 설날을 앞두고 서울의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거의 모든 노선의 버스티켓을 몇 장씩 구매했어요. 상당한 액수의 돈이 들었지만, 어차피 못 타면 다 환불받을 수 있다는 심산이었죠. 그리고 당일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탑승하러 터미널로 향했어요. 당연히 버스에서는 탑승이 불가능하다고 하고, 실제로 탈 방법도 없죠. 장애인들은 버스에 타겠다고 주장하고요. 사실상 고속버스를 점거하는 투쟁이 전개된 거예요. 2014년부터 설날과 추석이면 이 투쟁을 정기적으로 벌였어요. 시외이동권에 관한 토론회도 여러 차례 열렸고 소송도 제기했죠. 2019년 마침내 정부가 휠체어 탑승 설비를 갖춘 고속버스 10대를 도입해 시범운영을 시작했어요. 물론 그 이후 정부 차원의 별도 지원이 없어서 오히려 줄어들었고, 지금은 서울과 당진을 오가는 노선에만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고속버스가 달랑 2대 운행하고 있죠.

2014년 1월 27일, 고속버스터미널. 설 명절을 앞두고 장애인들이 “장애인도 버스 타고 고향에 가고 싶다”라며 장애인 시외이동권 보장을 요구했다. 사진 강혜민
2014년 1월 27일, 고속버스터미널. 설 명절을 앞두고 장애인들이 “장애인도 버스 타고 고향에 가고 싶다”라며 장애인 시외이동권 보장을 요구했다. 사진 강혜민

나는 2014년 말 노들야학으로 적을 옮기면서 전장연 집행부를 떠났고 그래서 이 투쟁의 첫해를 제외하고는 전장연 실무자로서 계속 결합하지는 못했어요. 2014년은 개인적으로 힘든 해였어요. 그 무렵 부모님에게 경제적인 문제가 생기면서 빚을 많이 지게 됐죠. 사실 나는 함께 사는 사람이 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고 아이가 없으니까, 나를 중심으로만 생각하면 경제적으로는 많은 돈이 필요한 조건이 아니죠. 과거에는 최저임금 수준이 안 되는 활동비를 받았고 지금도 활동가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와 식대 정도를 받는데, 그래도 충분히 살 수 있었어요. 하지만 부모님이 빚을 지게 되면서 이를 모른 척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20대 시절에 나는 부모님에게서 독립을 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했죠. 특수교육과가 아니라 세무대학에 입학하라고 아버지가 강권할 때, 우리는 정말 피가 날 정도로 싸웠어요. 그 사이에서 어머니가 많이 괴로워하셨죠.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해서 부모님의 영향에서 벗어난 이후부터는, 다시 연락은 하며 지냈지만 내가 그들을 부양하지는 않았어요. 내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기로 결심했던 건, 누군가를 경제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해요.

하지만 2014년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무리 운동이라도 이제는 잠시 손에서 놓고 부모님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직장을 다녀야 하나 고민을 했어요. 물론 사회운동만 했던 사람이라 어디 마땅히 취업할 곳이 있지는 않았죠. 내가 활동가로서 오랜 시간 한 일들, 그러니까 현장투쟁을 기획하고 조직하는 일, 그와 관련해서 수행한 각종 정책에 대한 분석, 장애담론에 대한 연구, 이 모든 건 노동시장에서 인정받는 노동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마침 장애 관련 책을 전문으로 출간하던 한 출판사에서 영입 제의를 받았어요. 흔들렸죠. 돈을 좀 벌어서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돌아올까, 어떻게 해야 할까. 한동안 방황을 하며 활동을 쉬었고, 결국 여러 고민 끝에 노들야학으로 복귀하는 선택을 했어요. 전장연 중앙 활동을 하면서는 어렵지만, 야학 활동을 하면서는 얼마간 시간을 내서 다른 아르바이트 같을 걸 해 볼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장애인운동을 하면서 이 시기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힘들었던 거 같아요.

11월 14일, 마로니에공원에서 김도현 활동가. 사진 현다혜
11월 14일, 마로니에공원에서 김도현 활동가. 사진 현다혜

- 왜 우리가 하는 일은 노동이 아닌가

노들로 복귀한 2014년 말 이후, 예전처럼 현장투쟁을 기획하고 조직하는 실무자로는 참여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래도 연구 활동을 하며 장애인운동 안에 이렇게 남아있는 것이 좋아요. 장애학 또는 장애담론을 공부하면서 현장의 투쟁을 더 단단하게 하고, 그것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고 나름대로 뿌듯하게 느끼는 한 가지를 말한다면 바로 노동권 투쟁에 대해 ‘공공시민노동’ 개념을 제시하면서 뒷받침한 부분 같아요.

나는 장애인운동이 많은 걸 이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맞서지 못한 과제가 노동권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장애인의 노동문제는 장애인운동의 역사에서 언제나 중요한 의제였어요. 1990년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되고, 1991년부터 의무고용제도가 시행된 데에는 장애계의 투쟁이 있었죠. 1세대 장애인운동의 가장 큰 성과였어요. 하지만 그 이후에 노동 관련 투쟁은, 사실 의무고용제도의 개악을 막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어요. 의무고용제도를 없애라는 경제계의 요구에 맞서거나, 실질적으로 의무고용을 무력화하는 여러 정책에 반대하는 싸움이었죠. 이런 투쟁들은 모두 의미가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방어적 투쟁이었어요.

지난 10월 12일, 김도현 활동가가 김원영 작가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지난 10월 12일, 김도현 활동가가 김원영 작가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현다혜

2014년 전장연에 복귀한 이후 4월에 있었던 한 토론회에서 ‘중증장애인 공공고용제’라는 이름으로 장애인노동권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제도를 제안했어요. 이때가 공공시민노동 개념을 처음 제기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죠. 다만 당시에는 전장연이 2012년부터 집중해 왔던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이 진행되고 있어서 노동권이 주요 의제가 되기는 어려웠어요. 나는 그동안 이 논의를 더 공부해서 발전시켰고, 2015년 장애인인권에 관한 한 논문 공모전에 「만인을 위한 노동사회의 유니버셜 디자인」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어요. 이 논문이 2019년 『장애학의 도전』 마지막 9장 ‘노동시장을 넘어 공공시민노동 체제로’의 초고가 되었죠.

공공시민노동은 복잡한 개념이 아니에요. 그 말을 뒤에서부터 해석하면 돼요. ‘노동’은 ‘시민’의 권리이므로 ‘공공’ 영역에서 보장해야 한다는 뜻이죠.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일자리는 기본적으로 노동시장이 제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고, 장애인 고용도 민간 시장에 인센티브를 제공해서 늘리려고 하죠.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언제나 노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생겨요. 이 관점에서 노동은 모두에게 보장된 권리가 아니니까, 시장이 못 받아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생각해 보면 이건 과거에 장애인교육과 관련해서 장애인도 모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절대로 교육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하는 시대의 전제와 닮아있어요. 예전에는 특수교육에서도 발달장애인을 소위 ‘교육가능급’과 ‘교육불가능급’으로 나누었어요. 지금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교육이라는 권리를 시민에게 보장할 때 능력을 기준으로 보장 여부를 나누지 않죠. 반면 노동은 능력을 기준으로 이런 판단을 하죠. 하지만 노동을 권리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장애인에게는 교육과 마찬가지로 노동의 기회가 보장되어야 하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전태일 열사 51주기인 11월 13일, 여의도 이룸센터 앞 농성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성 중심 노동’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했다. 사진 강혜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전태일 열사 51주기인 11월 13일, 여의도 이룸센터 앞 농성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성 중심 노동’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했다. 사진 강혜민

한편 현재도 공공영역에서 제공하는 일자리가 있긴 있어요. 공공근로나 사회적 일자리 같은 게 이에 해당하죠. 하지만 공공시민노동이 그와 다른 점은, 사람이 일자리에 맞추는 게 아니라 일을 사람에게, 장애인에게 맞춘다는 거예요. 내가 평소에 해왔고 또 잘 할 수 있는 어떤 일, 그건 권리옹호 활동일 수도 있고, 노래일 수도 있고, 그림일 수도 있고, 연극 활동일 수도 있죠. 또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고요. 사람마다 다르겠죠. 어떤 장애인이 지닌 현재의 조건과 능력에 맞춰서 공공이 일자리를 제공하고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대가를 제공하자는 게 공공시민노동 제도예요.

전장연은 2017년 9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5년간의 광화문 농성을 마무리한 후, 그해 11월 말에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1만 개 보장’이라는 요구를 내걸고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서울지사를 점거하는 농성에 들어갔어요. 다음 해 2월 중순까지 85일간 진행되었죠. 물론 우리는 늘 농성을 해왔어요. 그렇지만 이 농성은 그간 공세적으로 해 보지 못했던 노동권 투쟁의 현장이었고, 새로운 역사를 쓰는 순간이라 감회가 새로웠어요. 그 농성을 통해 고용노동부랑 협상을 했지만 우리가 주장했던 방식의 제도가 바로 도입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2018년부터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가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주요 의제가 되었고, 2020년 하반기 서울시가 처음으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라는 이름으로 260개의 일자리를 만들었어요. 이 일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기존 시스템에서는 일할 기회를 보장받기 어려운 중증장애인들이죠. 이게 조금씩 확장되어서 2022년 서울 300개, 경기 200개, 전남 80개, 전북, 경남, 춘천까지 확산되고 있어요.

김도현 활동가가 11월 29일,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촉구하는 138차 삭발결의자로 삭발 투쟁을 했다.  삭발을 마친 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있다. 사진 하민지
김도현 활동가가 11월 29일,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촉구하는 139차 삭발결의자로 삭발 투쟁을 했다.  삭발을 마친 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있다. 사진 하민지

이 아이디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 가고 너무 급진적으로 생각되겠죠. 하지만 발달장애인들과 같이 활동하는 분들에게는 직관적으로 와 닿는 거 같아요.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듯 보이는 중증발달장애인도, 그들이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충분히 있는데 이들의 활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았잖아요. 강의를 가서 공공시민노동 개념을 소개하면 발달장애인들과 함께하는 활동가분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이세요. 어느 곳에서는 “자신들이 평소 지니고 있던 생각에 날개를 달아준 강연”이었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어요.

나는 현장에서 연구하는 연구활동가의 역할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미 장애인 당사자들과 활동가들이 몸으로 겪었던 것, 마음속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그들이 현장에서 쌓아 올린 입장과 고민들, 그런 것을 함께 발전시키면서 투쟁을 뒷받침하는 것이죠.

- 김도현의 욕망

장애인운동을 안 했어도 아마 다른 운동을 했을 것 같기는 해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잘 버틸 수 있었을까 자문해보면, 쉽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장애인운동은 열악한 조건에서 진행됐지만 한편으론 내가 참여했던 그 시기 이후 역동적으로 성장했어요. 장애인운동에 비해 다른 운동들은 어느 정도 체계화되고, 활동을 위한 조건이 갖춰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2000년 이후 성장을 경험한 운동은 드물었어요. 그런데 장애인운동은 그때부터 20년의 시간 동안 의미 있는 발전과 변화를 만들어 냈죠. 그 기쁨에 함께하면서 스스로를 잘 지켜낼 수 있었던 거 같아요.

11월 14일, 마로니에공원에서 김도현 활동가. 사진 현다혜
11월 14일, 마로니에공원에서 김도현 활동가. 사진 현다혜

다른 한편 나한테 장애인운동은 좋은 사람들과 관계 속에 나를 묶어둔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해요. 이때 ‘좋은 사람’이란, 어떤 면에서 사회화가 덜 된 사람을 뜻해요(웃음).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지배적 가치관인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고, 따라서 그런 가치관에 따라 사회화되어 가죠. 어찌 보면 불가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측면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내게는 참 대단한 사람이고, 닮고 싶은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에요. 예컨대 비마이너의 이번 2022년 기획연재 ‘두 번째 사람들’에 등장하는 조민제, 박옥순, 문상민, 이진희, 김정하, 임소연, 송효정이 그런 사람들이고, 노들야학에 올라와 청춘을 바치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그렇고,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최저임금밖에 못 받는 걸 알면서도 비마이너에 기자를 하겠다고 오는 사람들이 또 그렇죠. 장판(장애인운동판)은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도 해요.

나는 어린 나이에 자본주의적 욕망에 강하게 끌렸고 그렇게 빨리 사회화되었죠. 다행히 그것을 깨는 시기가 있었지만, 그 이후 다른 방식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던 것 같아요. 마르크스가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라는 말을 했는데요. 물론 다소 다른 맥락이겠지만, 내가 누구인지는 결국 내가 속한 조직(사회), 나와 중요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많은 부분이 결정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런 관계와 환경 속에 나를 잘 엮어 두면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러니까 나는 잘 살기 위해서 나를 좋은 사람들이 있는 환경에 던져놓았던 거 같기도 해요. 누구나 잘 살고 싶잖아요. 나는 욕망을 절제하고 살았던 게 아니라, 그 잘 살고 싶은 욕망에 충실하게 따라왔고, 그 욕망을 가장 잘 실현해 줄 삶의 공간으로 장애인운동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어요.

11월 14일, 마로니에공원에서 김도현 활동가. 사진 현다혜
11월 14일, 마로니에공원에서 김도현 활동가. 사진 현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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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김도현의 언어와 대결했다. 그는 장애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조건에 주목하면서 “장애인의 몸이 문제인가,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가 문제인가?”를 묻고는 했는데, 내 안에서 간혹 이런 질문이 떠오른 것이다. “정말로 언제나 내 몸은 문제가 아닌가? 김도현은 이 ‘몸’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아닌가?” 나에게 그는 정확하고 중요한 말들을 손에 쥐고 어떤 시점에 장애인의 세계로 들어와 불을 밝힌, ‘장애가 없는 몸’을 가진 남성의 이미지로 존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김도현은 장애인운동에 불을 들고 찾아온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2000년대를 맞아 격렬하게 흘러가던 장애인운동이라는 배에 올라타 몸을 묶고 자신을 지킨 인간이었다. 나는 그가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 가운데서 방황하고, 라꾸라꾸가 사라졌을 때 서운함을 느꼈다고 털어놓을 때 가장 집중했다. 10년이 넘는 ‘홈리스 생활’ 이야기는 아무리 집중해서 직접 들어도 믿기 어려웠다. 확실히 나는 김도현을 글로 배웠을 뿐이었다.

노들야학의 좁은 복도 한쪽에 마련된 노들장애학궁리소는 작고 깔끔한 공간이다. 김도현의 책상은 특히 질서정연하다. 책꽂이의 책들은 열을 맞춰 어긋남 없이 꽂혀 있고, 책상 위 물건들 역시 잘 정돈되어 있다. 김도현과 함께 과거 노들야학 상근자로 활동한 홍은전에 의하면 김도현이 늘 사무실에서 생활하던 때에도 언제나 말끔한 모습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을 맞이했기에, 그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한다는 사실을 평소 의식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주변을 철저히 정리하고 통제하는 성향의 이 사람이 어떻게 정돈된 질서와 통제의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몸들로 가득한 장애인운동의 영역에서, 그것도 장애인운동을 하는 장애인 활동가들이 가득한 사무실을 아예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삼았던 걸까? 그곳에는 휠체어 바퀴에 묻어온 수많은 흙과 먼지, 휠체어에 밀리고 치여서 위치가 뒤틀린 의자와 엇나간 책상 줄이 가득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억압된 욕망과 분노가 뒤섞인 언어들은 무질서하게 분출되었을 것이다.

2001년에서 2005년경까지 어느 때보다 큰 폭풍이 한국사회를 휘감았고, 그 힘은 지하철역 10%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것을 당연히 여기던 질서를 순식간에 전복했다. 김도현은 그 폭풍의 한 가운데서 이 질서를 전복하는 힘의 일부였다가, 밤이 되면 이 무질서한 힘의 의미를 해설하기 위해 자신만의 질서정연한 작은 책상 위에서 언어를 벼렸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이제는 지하철역 90%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도 충분하지 않다고 믿는 새로운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한낮의 야(野)학 수업시간 연극을 하고 춤을 추고 자신만의 노동을 수행하는 발달장애인 학생/시민들의 떠들썩한 폭풍의 한가운데서, 김도현은 여전히 작은 라꾸라꾸 위를 정돈하듯 새로운 언어를 궁리한다.

나는 언젠가 한국의 장애학이 『김도현의 도전』이라는 책을 펴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이 책의 한 챕터를 맡게 된다면 기쁠 것이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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