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연과의 면담서 탈시설 권리 전면 부정한 서울시
유엔장애인권리협약, 탈시설 가이드라인마저 왜곡
탈시설장애인들 분노… “오세훈이나 시설서 살아라”
서울시 향한 강경 투쟁 선포
탈시설한 중증장애인 당사자들이 모여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상한 서울시 복지정책실장을 강력 규탄했다. 오 시장과 김 실장은 지난 2일 열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와의 면담에서 탈시설 권리를 부정하며 장애인들의 공분을 산 바 있다.
이에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서울장차연) 등 장애인운동단체 활동가 100여 명은 10일 오후 2시, 서울시 중구 시청 본관 동편에 모여 고발대회를 열고 “탈시설 권리를 부정하고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을 왜곡한 오 시장과 김 실장은 파면돼야 한다”라고 성토했다.
- 장애인거주시설이 선택? “나라 망신, 너무 부끄럽다”
지난 2일, 많은 시민과 언론이 주목한 면담이 드디어 열렸다. 전장연과 서울시 양측 모두 고대하던 면담이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오 시장과 김 실장이 협약을 잘못 해석하며 장애인거주시설을 두둔했기 때문이다.
김 실장은 당시 면담에서 “협약 일반논평 5호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시설에 거주하든 지역사회에 거주하든 자립생활 여건이 보장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며, 탈시설 반대 세력의 논리를 그대로 펼쳤다. 지역사회든, 장애인거주시설이든 ‘선택권’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최한별 한국장애포럼 사무국장은 “김 실장이 일반논평 5호의 맥락을 왜곡하는 걸 듣는 순간 식은땀이 났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가 김 실장의 발언을 들었다면, 이건 심각한 나라 망신”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최 사무국장은 “일반논평 5호에서는 ‘백 명 이상이 거주하는 대규모 시설도, 5~8명이 사는 작은 그룹홈도, 심지어는 혼자 사는 집도 시설 또는 시설화의 요소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면 자립적 주거 형태로 볼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는 시설은 절대 선택지가 될 수 없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최 사무국장은 또 “김 실장처럼 왜곡해서 해석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위원회는 탈시설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2021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장애인 당사자와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해 제작된 것”이라며 가이드라인 내용을 소개했다. 가이드라인 29조에는 “당사국(한국처럼 협약에 비준한 국가)은 시설 유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장애인이 시설에서 살기로 ‘선택’했다거나 이와 유사한 주장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
최 사무국장은 “탈시설은 단지 시설에서 나와서 사는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설에서 차별과 억압을 당하던 삶으로부터 존엄성을 회복하는 삶을 일컫는다. 위원회는 존엄성을 회복할 의무와 책임이 당사국에 있다고 설명한다. 당사국은 한국 정부, 서울시”라며 “탈시설 정책을 책임 있게 이행해야 하는 오 시장과 김 실장이 차별과 혐오를 행하다니, 너무 부끄럽다. 서울시는 전 세계에서 부끄러운 도시로 남게 될 것”이라고 강하게 성토했다.
- “오세훈이나 시설에 가서 살아라”
서기현 서울장차연 공동대표는 “선택권, 단어 자체는 너무 좋다. 그러나 그 선택권을 시설에 사는 장애인에게 준 적 있나? 장애인에게 시설 가서 살고 싶냐고 물어보고 시설에 입소시킨 적 있나?”라고 따져 물었다.
서 대표는 “오 시장은 전장연과의 면담 전날(1일), 보란 듯이 서울의 한 시설에 방문했다. 그 시설에 사는 장애인 당사자는 자립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데 오 시장은 ‘선택권’ 운운하더라. 탈시설에 반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말 같다. 얼마나 간사한가?”라고 규탄했다.
실제로 오 시장은 면담을 앞두고 우성원, 한아름 등 장애인거주시설 세 곳에 방문했다. 한 장애인 당사자가 “곧 자립생활을 시작한다. 자립하고 싶었다”며 탈시설 계획을 밝히자 오 시장은 “시설이 좋으시다면서 왜 나가시냐”라고 묻더니 “다양한 선택권이 있으면 좋다”면서 시설을 두둔하는 발언을 해 장애인들의 빈축을 샀다.
집회 현장에서 이 같은 상황이 담긴 영상이 상영되자 장애인들은 “오세훈이나 시설에 가서 살아라”, “우우우”라며 오 시장을 향해 야유를 보냈다. (관련 영상: [돌발영상] 1분과 22년 (오세훈 시장과 전장연 대표의 만남… 누가 '굉장한 강자'일까?))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정말 시설에 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김 실장 말대로라면 우리도 언젠가는 나이 들어 지금보다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면 시설에 갈 수밖에 없다. 너무나 참담하다. 오 시장과 김 실장은 파면돼야 한다”며 “우리의 자립생활을 왜곡하지 말라. 우리는 시설에 가고 싶지 않다. 활동지원서비스를 왜곡하지 말라. 우리는 지역사회에서 지원받고 싶다. 서울시가 협약과 가이드라인을 준수할 수 있도록 끝까지 투쟁하자. 우리의 투쟁은 정당하다”라고 외쳤다.
- 자립생활 비용 많이 든다고? “사람은 원래 함께 사는 존재”
고발대회에서는 김 실장 망언에 대한 팩트체크가 이어졌다. 당시 김 실장은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를 받는 사람은 자립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24시간 돌봄을 받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이 발언에 대해선 박경인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준비위원장이 비판했다. 박 위원장은 태어난 직후부터 시설에 20년 넘게 살다가 스물세 살이 돼서야 탈시설한 발달장애인이다.
박 위원장은 “나도 처음엔 혼자서 스스로 뭐든지 할 수 있어야 자립생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며 “우리는 누구나 도움을 받거나 주면서 살아간다. 젊고 건강한 비장애인도 누구나 살아가면서 돌봄을 받아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존재다. 자립은 혼자서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사는 거란 걸 자립하고 나서 더 잘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김 실장은 장애인활동지원 예산을 탈시설 예산이라고 말하며, 전장연이 요구하는 장애인권리예산안의 70~80%가 탈시설 예산이라고 설명했다. 장애인이 탈시설하면 비용이 많이 든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박 위원장은 “시설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지원할 수 있으니 비용이 덜 들어 합리적이라는 것인가. 이 말은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라며 “한 장애인이 인권적인 삶을 보장받을 때 우리 사회가 얻게 되는 가치는 액수로 표시할 수가 없다. 장애인이란 이유로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회는 중요한 뭔가를 잃어버린 사회”라고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박 위원장은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게 정부와 서울시장이 할 일 아닌가? 오 시장은 탈시설 당사자인 우리 목소리를 들어라. 시설에만 가지 말고 우리를 만나라”라고 요구했다.
- “한 명이라도 함께 투쟁하면 탈시설 권리 쟁취할 수 있다”
박경석 대표는 이날 고발대회에 오 시장의 얼굴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등장했다. 박 대표는 오 시장 행세를 하며 “‘사회적 강자(오 시장이 전장연을 향해 한 말)’인 장애인 여러분, 우리 서울시는 여러분같이 불쌍한 장애인을 위해 약자와의 동행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꾸 이런 불법 시위하지 마시고, 살다가 힘들면 다들 시설에 들어가시길 바란다. 시설은 너무 좋은 곳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박 대표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탈시설 가이드라인’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뜯어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박 대표가 뜯어낸 자리엔 1939년 독일 나치의 장애인 학살정책인 티포(T4) 프로그램 스티커가 드러났다. 비용과 효율을 이유로 장애인을 시설에 가두기 위해 협약을 부정하는 정책을 은유한 것이다.
이후 가면을 벗은 박 대표는 서울시를 향한 강경 투쟁을 선포했다. “이제 우리는 서울시 투쟁을 시작하겠다. 함께 분노하자. 분노하는 분들은 길바닥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협약과 가이드라인을 다시 붙여 달라. 탈시설한 분들이 나와서 함께 붙여 달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경인 위원장을 포함해 시설에 수십 년을 살다가 자립생활 중인 발달·중증장애인들이 나와 티포 스티커 위에 협약과 가이드라인 현수막을 붙였다.
박 대표는 “붙이는 그 마음을 꼭 기억해 달라. 그 마음으로 함께 투쟁하자. 한 명이라도 지하철 투쟁을 끝까지 함께할 수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탈시설 권리를 쟁취해 낼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장차연 등 장애인운동단체는 고발대회를 마친 후 서울시청 건물 외곽 한 바퀴를 행진했다. 이어 오 시장을 향해 ‘지하철 리프트 추락 참사, 엘리베이터 100% 설치 약속 미이행 사과’와 함께 △기획재정부에 장애인권리예산 반영 촉구 △탈시설 가이드라인 권고에 대해 위원회 위원과 초청간담회 이행 △2024년 서울시 장애인권리예산 답변 등을 3월 23일까지 요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