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작년 12월 ‘형제복지원’ 국가배상 책임 첫 인정
부족한 생계비로 붕어빵 장사 나선 피해생존자 한종선
구청의 지속적 단속에 ‘자해 시도’
- 한종선의 붕어빵
허여멀건한 반죽을 붕어빵 틀에 흘려 넣는다. 붉은 팥소가 퉁퉁 썰리듯 반죽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 위를 반죽으로 다시 덮고 뚜껑을 닫는다. 한 번 휙 돌려 반대편도 노릇하게 굽는다. 시뻘건 화기가 덜그덕거리는 붕어빵 틀을 달군다. 목장갑을 낀 남자의 손은 이제 막 바빠질 참이었다.
“광주 북구청에서 나왔습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구청 직원 둘은 자신이 구청 식품위생과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를 찾아오는 구청 직원의 얼굴은 매번 달랐지만 남자에겐 동일한 악성민원인의 모습이었다. 작년 10월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한 이래 그를 계속해서 신고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통행로 방해’라고 해서 자리를 옮겼더니, 이제는 구청에서 과를 바꿔서 단속을 나왔다. 벌써 네 번째 단속이다.
남자는 억울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그 민원에 대해서도 확인해 봐야 하는 것 아니냐. 나도 우리 누나랑 먹고살려고 하는 건데 이런 단속은 생계를 포기하게 만드는 거다”라며 항변했다. 구청 직원들은 법대로 할 뿐이고 자신은 전달했다며 등을 돌려 가려 했다.
그놈의 법법법. 남자는 분개했다. 내 인생을 이렇게 망친 게 바로 그 망할 법이다. 붕어빵 반죽 포장을 자르던 가위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찔렀다. 가위는 뼈까지 닿았다. 붉은 피가 철철 났다. 경찰이 출동했다. 경찰은 구청 직원을 협박한 혐의로 남자를 체포하겠다고 했다. 생존권을 위협당하며 협박당한 것은 자신인데 자신이 갑자기 협박범이 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극렬히 저항했다. 붕어빵 마차를 빼앗겨 굶어 죽으나 손목이 끊어져 죽으나 그에겐 마찬가지였다. 붕어빵 긁는 ‘야스리(쇠붙이를 갈 때 쓰는 줄칼)’를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남자를 궁지로 몰아세운 구청 직원들과 경찰은 그제야 그에게 진정하라며 달래는 시늉을 했다. 모든 상황이 부조리했다. 구청 담당 팀장이 현장에 나와 상황을 수습하고서야 그날의 소동은 1시간 30분 만에 마무리됐다. 1월 3일 오후의 일이었다. 그날 저녁 정신장애가 있는 누나는 두툼하게 반깁스를 한 동생의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물었다. “니 다쳤나?”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의 이야기다.
- 법원, 작년 12월 ‘형제복지원’ 국가배상 책임 첫 인정
지난해 12월 21일,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첫 판결이 나왔다. 형제복지원은 부산시의 위탁을 받아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운영된 대표적인 부랑아 수용시설이다. 그 기간 3만 8,000여 명이 강제입소 됐으며 657명이 사망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9부(판사 한정석)는 대한민국 정부가 피해자 26명에게 총 145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수용기간 1년 당 8천만 원으로 계산했다. 이 판결로 7살에 형제복지원에 끌려 들어가 14년을 갇혀 살았던 한 피해생존자는 11억 2,000만 원을 국가로부터 받게 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에 해당되어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한 소멸 시효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법원의 판단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과거 부랑아 수용시설의 존재를 국가폭력이라고 인정하며 진실규명에 나선 배경이 있다.
한종선은 아홉 살이던 1984년에 형제복지원에 끌려 들어갔다. 당시 ‘내무부 훈령 410호’에 근거해 부랑인으로 분류된 사람은 어떠한 형사 절차도 없이 수용시설에 보내졌다. 그는 1987년에 형제복지원에서 퇴소했지만 곧 다른 시설(서울 소년의 집)에 수용됐다. 이후 일한 구두공장에서는 사장이 돈을 떼먹었다. 배운 것 없고 가난한 그의 곁을 동네 불량배들이 채웠다. 그들과 어울리며 다른 사람 물건을 훔치며 살다가 감옥을 들락거렸다.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아 보려고 닥치는 대로 일도 해봤지만 초등학교 졸업장 하나 없는 그가 ‘이력서를 필요로 하는’ 그럴듯한 곳에 취직할 수는 없었다. 배달, 전단 뿌리기, 막노동 따위의 일로 생계를 이어 나가다가 공사판에서 허리를 다치면서는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됐다. 수급 신청을 하면서 이미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아버지와 누나를 우연히 찾았다. 한종선과 함께 형제복지원에 있었던 그들은 부산시내를 떠돌다가 1989년부터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 ‘나와 내 가족이 왜 이렇게 된 걸까.’ 그 질문이 2012년, 한종선을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투쟁으로 떠밀었다.
그로부터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첫 판결이 나오기까지 11년이 걸렸다. 그러나 법원은 감금된 시간에 한해서만 산술적으로 계산할 뿐, 감금 외에 피해생존자의 삶에서 일어난 여러 고통에 대해선 판단하지 않는다. 형제복지원에 끌려와 6개월 만에 맞아 죽은 사람의 고통이 10년을 감금당한 사람의 고통보다 덜하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한종선의 누나와 아버지처럼 자신의 피해에 대해 그 스스로 증언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기간은 올해 5월 26일까지다. 1년 연장 신청을 해두었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국가폭력 피해생존자로 인정받더라도 국가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개별적으로 따로 해야 한다. 그러나 “돈 몇 푼 준다고” 한평생에 걸쳐 꺾인 어떠한 생에 대한 피해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받은’ 사건에 대해서만 조사한다. 신청 기간을 놓쳐버린 사람은 자신의 피해를 구제받을 수 없다. 그러니 국가는 시설수용 피해생존자를 직접 찾아 나서며 국가폭력으로 훼손된 삶에 대한 다양한 회복적 지원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국가 배상금 지급은 시작일 뿐이다. 참고할 수 있는 모범적 사례로 뉴질랜드 등 해외사례를 연구한 보고서가 이미 2022년에 발간됐으며, 관련한 토론회가 작년 10월 국회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회 참여자들은 진실화해위원회 이후에도 집단수용시설 문제를 다루는 별도 상설 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한종선의 손목을 겨눈 가위
부산시는 올해부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에게 위로금 500만 원과 생활안정지원금으로 월 20만 원을 지원한다고 했지만 부산시민이 아닌 한종선은 이마저도 받지 못한다. 그는 끔찍한 기억뿐인 부산에선 도무지 살고 싶지가 않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해 싸운 10여 년의 세월은 “짐승에서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통과하며 한종선이 꿈꿨던 현실은 아버지, 누나와 함께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코로나 시기, 병원에서 사망하고, 누나와는 3년 전부터 함께 살게 됐으니 그는 꿈의 절반만 이룰 수 있었다.
정신장애가 있는 누나는 음식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더는 수급비로 감당이 안 되어 작년 10월부터 붕어빵 장사에 나선 것이었는데, 구청과 경찰이 이마저 가로막으니 그는 미칠 지경이었다. 이 장사라도 해야 누나랑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는데. 누나랑 굶어 죽으나 내가 이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다.
그날, 그 모든 시간이 송두리째 가위가 되어 그의 왼쪽 손목을 겨누었다. 그날, 한종선은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 ‘선택의 가능성’은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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