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 만남
김영배·손석주 씨, 아홉 살부터 겹쳐진 시설 경험
여러 직업 전전하다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 맡아
험난한 여정 예견… 진실을 위한 싸움 이어가겠다
2023년 4월 27일, 두 시설 수용 피해생존자가 만났다. 언론에 잘 알려진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 김영배 씨(68)를 만나러 부산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 손석주 씨(60)가 경기도 수원을 찾았다. 이제 막 첫 삽을 뜬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로서 여러 조언과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손 씨는 궁금한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 햇수로 6년 넘게 대표직을 맡고 있는 김 씨의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의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가고 싶었다. 지난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에서 선감학원 진실규명 결정이 나온 이후 피해자 지원사업이 진행 중인 경기도의 선례를 부산에도 가져오고 싶었다. 90분 남짓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수용시설에 갇혀 매 맞고 굶었던 기억만큼은 선명했다. 손석주 씨와 김영배 씨는 각각 아동 수용시설 영화숙·재생원과 선감학원의 피해생존자다. 두 사람은 각 피해생존자협의회에서 대표를 맡고 있다. 수십 년 전 기억을 생각하기 싫고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전국의 시설 수용 피해생존자들을 위해, 그리고 서로를 위해 이날 대화에 응했다. 입소 당시 아홉 살 소년이었던 두 사람이 환갑 나이를 넘어 4월 27일 경기도청 구청사에 있는 선감학원사건피해자지원센터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이야기는 1971년 여름, 부산의 한 거리에서 신문을 팔던 손 씨의 기억에서 출발했다.
- 1971년과 1963년, 겹쳐진 우리의 아홉 살
“처음 재생원에 잡혀갔을 적에 제 이름, 아버지 이름, 집이랑 학교 주소까지 다 이야기했어요. 그래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어요. 시설에 입소시키려고 집과 학교에 제 정보를 알리지 않은 거죠.” 손 씨는 아홉 살 때 부산에서 신문팔이를 하다가 한 남성에 의해 재생원에 끌려갔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영화숙으로 옮겨간 지 이틀 만에 도망쳐 나왔지만, 2년 뒤 재생원에 다시 잡혀들어갔다. 두 번째 입소 땐 본명을 숨기고 ‘손기석’으로 생활했다. 도망쳤다는 사실을 들키면 더 큰 폭력을 당할 것이 뻔했다. 1973년 3월부터 12월까지, 손 씨는 아홉 달을 영화숙·재생원에 갇혀 지내다 세상 밖으로 나왔다.
영화숙·재생원에는 굶주림과 폭력이 만연했다. 손 씨는 말간 쌀뜨물 같은 강냉이죽을 손으로 퍼먹은 기억, 전날까지 같이 이야기한 친구가 다음 날 아침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기억을 떠올렸다. “시설장이나 간부가 지나가면서 화가 나면 분풀이 대상, 심심하면 괴롭힘 대상이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친구가 죽어 있었어요. 구타로 생긴 병 때문인지, 굶어서 생긴 영양실조 때문인지… 어린 나이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화숙·재생원은 부산시로부터 업무위탁을 받아 운영된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부랑아 수용시설이다.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어린아이부터 60대 노인에 이르는 50명이 넘는 인원이 5~10평 남짓한 한 방에서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원생 1,000여 명이 수용된 영화숙·재생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국가폭력이 자행된 형제복지원의 전신으로 불린다.
손 씨는 영화숙·재생원에서 한 번 더 도망쳐 나왔지만, 그사이 출석 일수를 채우지 못해 국민학교에서 쫓겨났다. 방랑과 방황의 유년기를 보냈다. 전국을 떠돌며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대전아동보호소, 대구희망원 같은 시설을 무수히 드나들었다. 영화숙·재생원은 1975년 무렵 문을 닫았다. 정확한 폐쇄 시기는 파악되지 않았고, 산자락에 자리 잡은 시설 터도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영화숙·재생원 사건을 듣던 김영배가 같은 아홉 살의 선감학원 이야기를 꺼냈다. 김 씨를 잡아끄는 고통의 기억 위로 영화숙·재생원과 선감학원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선감도(선감학원) 생활, 힘든 얘기는 진짜 안 하고 싶지만…” 아홉 살의 김영배는 1963년 5월 1일,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에 있는 선감학원에 보내졌다. 단지 경기도에 산다는 이유로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잡혀들어가 5년 3개월을 갇혀 지냈다. 그곳에서 말 그대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배고픔이 가장 컸고, 구타의 고통이 두 번째였다. 단체 기합과 학대를 못 참고 도망치다 뭍에 다다르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은 근처 야산에 암매장됐다. 50년도 더 된 기억이지만, 김 씨는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트라우마가 몸과 마음을 훅 덮쳐온다고 했다.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인 1942년 설립돼 해방 이후 경기도에서 직접 운영한 부랑아 수용소다. 교화라는 명분하에 빈민들을 교외로 추방하고 격리하기 위해 만들어져 ‘소년 삼청교육대’라고 불린다. 수용 대상은 대부분 17세 이하의 남성이다. 1982년 폐쇄될 때까지 5,000여 명의 아동이 선감학원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1968년 김 씨는 선감도를 빠져나와 경기도 안양에 있는 고아원을 거쳐 고향 경기도 파주를 찾아갔다. 그의 유년기는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선감학원에서 뚝 끊긴 대인관계는 회복이 어려웠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다. 그의 말마디에는 안타까움과 고통이, 때로는 억울함과 분노가 묻어났다. “사회생활을 했더라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끔 되돌아봅니다. 50년 넘게 지났지만, 이 고통은 오로지 피해생존자들이 다 안고 가야 해요.”
- 역사적 격변기에 가려진 시설의 얼굴들
시설을 나와서는 궂은 일을 많이 했다. 다방 주방장(바리스타), 음식점 뽀이(웨이터), 패스포트(지갑) 장사 등 안 해본 게 없다. 1978년 중장비 자격증을 따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있는 학원을 찾았다. 1년 만에 자격증을 땄지만 ‘선감도 출신’ 김 씨에게 세상은 비정하고 잔혹했다. 학연·지연·혈연 같은 사회 연결망이 없으면 취업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1979년 10월 26일)이 있던 해에는 강원도 탄광에서 광부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중장비 개인 사업을 했다. 선감도 출신 아우들이 서로의 존재를 찾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목 모임처럼 만나던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11명이 한데 모였다. “선감학원에서 입은 피해를 경기도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릴 적 고통과 생활고 같은 것들을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경기도에) 전화하니 ‘부지가 있는 안산시에 문의해라’, 안산시에 문의하니 ‘선감학원이 있던 시절에 안산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책임을 돌리더라고요.” 김 씨는 피해생존자들과 ‘선감학원생존자협의회’를 꾸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생활고를 해결해달라고, 홀로 사는 피해생존자를 위해 선감학원 부지를 임대해 안정적인 주거를 보장해달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경기도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7년 7월, 김 씨는 협의회의 두 번째 회장이 됐다. 단체명도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로 바꿨다. 억울한 아이들 수백 명의 원혼을 대변한다는 마음으로, 과거사를 있는 그대로 세상에 알렸다. 경기도에 책임 규명을 촉구했고, 용기를 낸 피해생존자들을 조직해 선감학원 유해 발굴 현장을 찾았다. 지난해 10월 20일, 진실화해위는 선감학원 사건이 ‘중대한 아동 인권침해’라고 판단했다. 올해 1월에는 경기도가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지원사업과 희생자 추모사업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11명에서 시작한 피해생존자는 현재 230여 명까지 늘어났다.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을 한 사람을 기준으로 한 수치다.
“처음 협의회를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어릴 적 밥 먹여줬으면 됐지 이제 와서 쓸데없는 행동하지 말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꾸밈없이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두렵지 않았어요. 그저 우리의 과거를 진실되게 알리고 싶었어요.”
김영배가 말을 마치자 이번엔 손석주가 입을 열었다. 그가 시곗바늘을 1979년으로 되돌렸다.
김 씨처럼 손 씨도 굵직한 현대사를 온몸으로 거쳐 갔다. 손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될 무렵 서울의 한 방직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영화숙·재생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닐까 봐 이력서에는 국민학교 중퇴가 아니라 ‘고퇴(고등학교 중퇴)’라고 약간의 거짓말을 섞었다. 그래도 직장이 생긴 덕분에 “삼청교육대 입소를 피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가 있던 서초구 서초동에서 구두방을 하나 얻었다. 4년 전부터는 고향인 경남 양산에 내려와 중국집 배달부로 일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24일, 손 씨는 배달을 하러 양산시청 프레스룸을 갔다가 만난 기자 한 명을 붙들고 호소했다. 영화숙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손 씨의 기억 속에서 영화숙·재생원이 감쪽같이 되살아났다. 10월 29일, 이태원 골목 일대에서 사람들이 와르르 넘어지며 159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아무도 죽음을 책임지지 않았고, 국가는 희생자와 유가족을 외면했다. “이태원에서 참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는데, 가만 보니 어릴 적 영화숙·재생원에 있을 때 사라진 아이들 역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죄 없는 생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말이에요. 이 사건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고 이틀 뒤 부산 지역 일간지 국제신문이 손 씨의 증언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보름 사이 기사를 읽고 피해생존자 5명이 모여들었다. 물론 영화숙이 세상에 알려진 건 처음이 아니다. 1983년 장병문 씨는 책 ‘잃어버린 자식들’을 펴내 영화숙의 실태를 기록했고, 1998년 김백수 목사는 KBS ‘아침마당’에 출연해 영화숙 입소 경험을 털어놓았다. 2010년 택시 기사 조영수 씨는 부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며 영화숙 피해 경험을 증언했다. 손 씨의 기사는 수십 년에 걸쳐 단발성으로 보도된 영화숙·재생원 공론화에 불을 댕겼다.
그리고 12월 22일, 피해생존자들은 부산시 인권센터에 모여 ‘부산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를 결성했다.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기자회견을 조직하고, 영화숙·재생원 사건을 증언하며, 숨어 있는 피해생존자들을 찾아다녔다. 올해 4월 13일 부산시가 영화숙·재생원 피해 신고 접수를 받기 시작하면서 피해생존자 30여 명이 접수 신청을 냈다. 나이 들고 병든 ‘형님들’을 대신해 손 씨가 대표직을 맡았다. 자리에 부여되는 책임만큼 의심의 눈초리도 따라붙었다. “대표라는 게 힘든 자리입니다. ‘돈 보고 하는 거냐’는 의심도 많이 받았어요.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피해자들을 위해서 우리 진실을 먼저 밝힙시다. 나중에 10원을 주든 100원을 주든 피해보상을 해주면 감사히 받읍시다. 대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아무 생각 말고 같이 갑시다.’” 손 씨는 외부에서 돈을 받는 순간 조직이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들은 지금도 후원 없이 사비를 털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시설 수용 피해생존자 선후배의 다짐
그리고 마침내 수십 년 세월을 버텨온 두 피해생존자 선후배가 얼굴을 마주했다. 국가 차원의 진실규명 결정을 받아내기까지 지난한 시간을 지나온 선배, 이제 막 피해생존자 단체를 조직해 진실을 향한 싸움을 시작한 후배. 손 씨는 김 씨에게 묻고 싶은 것도, 부탁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진실화해위 진실규명에 이어 경기도에서는 선감학원 피해생존자들을 어루만져주는데, 부산시는 왜 못한다고 하는 건지… 경기도가 피해생존자의 아픔을 듣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손 씨는 오는 가을에 영화숙·재생원 희생자 위령제를 준비하고 있다. 부산에서는 매년 음력 9월 9일이 되면 무연고 사망자를 추모하는 합동 위령제를 지낸다. 그때 영화숙·재생원 사건을 함께 추모하고자 한다. “소주 한 잔이라도 따라드려서 먼저 간 형님들을 기리면 좋으니까… 선감학원 위령제는 경기도 지원을 받아서 지낸다고 하니, 부산시에도 요구해보려 합니다.”
대표직을 맡고 있는 피해생존자 동지이자 선배로서 김 씨는 여러 염려와 함께 조언을 건넸다. “끝이 안 보여서 답답하고,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럴 텐데, 기대도 실망도 많이 하지 말아야 해요. (협의회를) 일찍 시작한 나로서는 많이 참고 기다려요. 대표라는 자리가 많은 생각이 필요하고, 길이 보이지 않아도 주어진 여건에서 틈새를 찾아야 하니까. 그걸 손 대표가 앞으로 잘 헤쳐 나가야 해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많다. 손 씨의 증언에 따르면 영화숙·재생원이 문을 닫으면서 그곳에 있던 원생들이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 일부는 선감학원으로 보내졌고, 손 씨는 선감학원과 영화숙·재생원을 모두 겪은 피해생존자를 찾아다니고 있다. “우리 김 회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지금 가장 어려운 건 우리가 가는 이 길이 맞는지 아닌지 판단이 안 선다는 거예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냥 앞만 보고 가는 거죠. 영화숙·재생원의 실태는 이미 많이 알려졌어요. 이제는 피해생존자가 얼마나 모였는지, 진상조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주는 언론 보도가 절실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앞으로 조직이 어려움을 겪으면 어떡하냐는 막연한 불안도, 진실규명에 대한 막연한 기대도 아니었다. 피해생존자들이 겪은 고통스러운 진실을 바탕으로 예고된 시련을 헤쳐 나가겠다는 꼿꼿한 다짐이었다. 김 씨는 선감학원사건피해자지원센터를 나오면서 손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덕분에 마음을 많이 나눴어요. 틀림없이 또 어려움이 찾아올 텐데, 협의회가 만들어졌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니까요. 같이 잘 이겨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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