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국가 상소취하 및 포기 결정 발표
“신속한 권리구제 통해 피해자의 고통 감소시킬 것”
피해생존자들 “긍정적… 그러나 실질적 배상 선행 필요”
정부가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피해생존자들이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에 국가가 제기했던 상소(하급 법원의 판결에 따르지 않고 상급 법원에 재심을 요구하는 일)를 취하하기로 했다. 두 사건은 국가폭력이 동원된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례로 꼽힌다. (법무부 보도자료: 형제복지원·선감학원 국가배상소송 사건 국가 상소취하 및 포기 결정)
법무부는 5일 “형제복지원·선감학원에 강제 수용되었던 피해자들의 신속한 권리구제를 위해 원칙적으로 국가가 제기한 상소를 일괄 취하하고, 향후 선고되는 1심 재판에 대해서도 추가적 사실관계 확정이 필요한 사건 등 예외적인 경우 외에는 상소를 포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형제복지원·선감학원 피해생존자들은 정부의 이번 발표를 “긍정적”, “희망적”으로 본다면서도 이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배상 등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피해생존자들 “피해사실 제대로 반영한 배상 필요”
한종선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모임 대표는 5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정부가 무리한 상소로 시간을 끌며 피해 배상을 지연시킨 것을 앞으로는 하지 않겠다고 밝힌 점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면서도 “피해사실을 제대로 반영한 배상과 국가적 사과가 신속하게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종선 대표는 “현재 피해 배상 기준이 수용기간 1년에 8천만 원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 안에서는 감금뿐만 아니라 노동력 착취·강제노역·구타 및 폭력행위·성폭력 등이 발생했다. 많은 피해자들은 아직까지도 트라우마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고, 의무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사회로 나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등 사회적 차별을 겪어야 했다”며 “그럼에도 배상 기준은 수용기간만을 기준으로 삼아 다양한 피해사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대표는 “‘상고 포기’가 형식적인 조치에 그치지 않으려면, 피해당사자가 실제로 입은 피해를 배상 기준에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일영 선감학원아동인권유린진실규명추진회 회장은 같은 날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새 정부가 들어서고 이제라도 상소를 포기한다는 것은 잘된 일이고 희망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그 역시 배상의 시급함을 강조했다. 한 회장은 “현재 피해생존자 대부분이 연로하다. 남아있는 피해생존자들의 소원은 하루라도 빨리 제대로 된 배상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감학원 사건에 대해 재판부는 수용기간 1년에 5천만 원에서 8천만 원 사이로 배상액을 산정했다. 피해자들이 겪은 인권침해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배상 금액 자체도 문제지만, 많은 피해자들이 퇴소 날짜가 확인되지 않는다”며 “국가가 누락한 기간인데, 왜 피해자가 그 시간과 피해를 입증해야 배상을 받을 수 있는가”라고 비판했다. 또한, 한 회장은 “정부 차원의 대통령 사과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형제복지원·선감학원 사건, 명백한 ‘국가폭력’임에도 책임 회피해 온 정부
형제복지원은 부산시의 위탁을 받아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운영된 대표적인 ‘부랑인’ 수용시설이다. 그곳에 강제 수용되어 사망한 것으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가 확인한 인원만 총 657명에 이르며, 형제복지원을 거쳐 간 입소자는 3만 8000여 명에 달한다.
국가폭력을 당한 피해생존자들은 시설이 폐쇄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신체적·정신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현재 형제복지원 피해자 652명이 제기한 국가배상소송 111건(1심 71건, 항소심 27건, 상고심 13건)이 법원에서 재판 중이다.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인 1942년 경기도 안산시 선감동에 있던 외딴섬인 선감도에 만들어진 ‘부랑아’ 수용소다. 해방 이후엔 경기도가 운영권을 이어받아 직접 운영했다. 수용된 아동 대부분은 17세 이하의 남성으로, 1982년 폐쇄될 때까지 4천 700여 명의 소년이 선감학원으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피해자들은 불법 감금, 강제 노역, 가혹행위 등 심각한 인권유린을 당했다. 탈출을 시도하다 파도에 휩쓸리거나 영양실조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례도 있었다. 지금까지 진화위에 의해 확인된 사망자만 29명이고 일부는 선감도에 암매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퇴소 사유 중 ‘탈출’이 834명(17.8%)에 달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실제 사망자 규모는 29명보다 훨씬 더 클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는 현재 선감학원 피해자 377명이 제기한 국가배상소송 42건(1심 21건, 항소심 18건, 상고심 3건)이 법원에서 재판 중이라고 밝혔다.
형제복지원·선감학원 피해생존자들은 각각 2022년 8월, 10월 진화위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후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해 잇따라 승소해 왔다. 그러나 국가는 이에 불복해 상소를 이어가 ‘무분별한 상소’라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실종자·유가족)모임에 따르면 지난달 11일, 국가가 상고 기한을 불과 2시간 남기고 상고를 제기했다. 이에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홍영식 씨는 다량의 약물을 복용한 채 거리로 나섰다가 머리를 심하게 다쳐 숨졌다.
법무부는 이번 결정과 함께 “형제복지원이나 선감학원 사건 외에도 국가 불법행위의 피해자가 제기한 국가배상소송 사건에 대해 신속한 권리구제를 통하여 피해자의 고통을 실질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는 노력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법무부의 상소취하 결정이 발표된 5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대한민국 법무행정을 책임지는 법무부 장관으로서, 과거 국가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은 형제복지원·선감학원 피해자와 유가족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