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의 철학, 카프카의 경우 ②

카프카는 유대인이었고, 결혼을 기피한 독신자였으며, 채식주의자였습니다. 오늘날 소수자 범주에 속하는 이런 객관성뿐만 아니라 주관성에 있어서, 즉 자신을 언제 어디서나 주류에 끼지 못하는 존재로 여겼다는 점에서 그는 영원한 소수자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Hermann Kafka, 1852~1931)는 주류의 삶을 꿈꾸며 시골의 유대공동체(게토)를 떠나 대도시 프라하로 이주했습니다. 거기서 장남 프란츠 카프카를 낳았지요. 프라하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보헤미아(오늘날의 체코)의 수도로 체코 민족이 다수였지만, 13세기 후반부터 이주해 온 독일인들이 학문적·문화적 생활을 주도했습니다. 주류의 삶을 꿈꾼 아버지 덕분에 카프카는 독일계 중등학교(김나지움)를 다녔고 독일계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카프카는 체코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독일어로 글을 썼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언어가 ‘주류’에 속한 건 아닙니다. 카프카가 쓴 독일어는 정통 독일어와는 사뭇 다른 특성을 가진 프라하 독일어입니다. 미국, 호주, 그 외의 식민지에서 쓰는 영어가 잉글랜드 본토에서 사용하는 영어와 다른 것처럼, 프라하 독일어는 발음이나 구조, 특히 어휘가 오스트리아의 정통 독일어와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프라하 독일어는 다수 체코어 사용자들 사이에서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일상어보다는 주로 문서 작성용 언어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장 구성이 딱딱하고 어휘의 절약이 두드러진 독특한 문체를 갖게 됩니다.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문인들 중에는 정통 독일어를 모방하거나 한층 더 풍부하고 감성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작가들도 있었지만, 카프카는 오히려 프라하 독일어의 방언적 특성을 소설에서 그대로 살렸습니다. 프라하 독일어가 지닌 메마르고 사무적인 문어체는 관료적인 세계의 내면을 유머러스할 정도로 황량하게 그려내는 카프카의 소설에 잘 어울렸지요.

- 소수자의 언어, 방언

그런 점에서 카프카의 언어는 소수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소수언어’라고 하면 소수민족이 쓰는 언어를 가리키긴 하지만, 중심(주류)의 언어에서 벗어난 언어를 의미하는 ‘방언’이 소수언어에 더 걸맞은 개념입니다. 카프카가 쓰는 독일어는 독일어의 중심에서 벗어난 체코 지방의 독일 방언에 속합니다. ‘방언(方言)’은 ‘변방의 언어’를 뜻하는데, 지리적인 위치뿐만 아니라 중심(주류) 언어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특수 집단만의 언어를 뜻하기도 합니다. 수도에서 먼 지방에서 쓰는 사투리만이 아니라, 소수 종교(기독교의 방언), 세대(10대), 계층(범죄 집단), 매체(인터넷)에서만 쓰는 사투리도 방언입니다. 카프카가 쓰는 독일어는 문서 작성에서만 쓰는 특수어의 문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방언입니다.

장애인의 언어는 어떨까요? 비장애중심주의(ableism) 사회는 농인들이 쓰는 수어를 언어로 보지 않고 언어 이전의 몸짓, 혹은 원시 언어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장애학자들 사이에서는 농인의 수어를 소수언어의 일종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수어를 소수언어로 본다면 무용처럼 공연용으로 배울 게 아니라 몽골어나 베트남어처럼 외국어로 배워야겠죠. 시각장애인의 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소수언어(문자)의 하나라는 생각이 더 일상화되어서, 그들을 고립시키는 사회의 장벽이 점점 제거되는(barrier free) 변화가 필요합니다. 발달장애인의 언어는 어떨까요? 얼마 전 발달장애인들이 선거 기간에 그림투표 용지, 발달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는 선거공보물 등의 편의를 제공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차별구제 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 소송은 발달장애인들이 쓰는 언어를 소수언어의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비장애중심주의의 관점에서 발달장애인의 언어를 미발달된 언어나 모자란 언어로 보는 게 아니라, 경직된 주류 언어에 균열과 불안을 일으키며 발달장애인의 특이한 감성과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소수언어로 보면 어떨까요?

카프카의 드로잉. 이미지 출처: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홈페이지
카프카의 드로잉. 이미지 출처: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홈페이지

- 소수자 유대인의 운명

1911년 카프카는 유대인의 방언을 알게 됐습니다. 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이 만든 연극을 관람한 후 그는 ‘이디시어’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이디시어는 히브리 문자를 쓰긴 하지만, 중부 고지 독일어 방언의 문법과 어휘적 특성이 합쳐져 전통 히브리어와는 다른 혼성적 특성을 갖게 된 유대어입니다. 카프카는 새로 사귄 이삭 뢰비를 통해서 동유럽 유대인들에게 잘 보존되어 있는 유대 종교, 문학, 카발라를 공부했습니다. 카발라는 율법이 아니라 명상과 신비 체험을 통해 직접 신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유대 신비주의입니다. 꿈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카프카 소설의 환상성은 카발라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1912년 카프카는 이삭 뢰비와 함께 프라하에서 개최한 강연회에서 ‘소수민족 문학론’을 설파했습니다.

당시 다수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소수민족으로 떠도는 ‘디아스포라’(쫓겨나 흩어져 떠도는 삶)를 끝내고 가나안 땅(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에 몰두했습니다. 카프카의 절친 막스 브로트 역시 시오니즘 추종자였습니다. 1923년 카프카는 폐결핵으로 인해 병상 생활을 하면서도 시오니즘에 열의를 보이며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그해 4월 학창 시절 친구 후고 베르크만의 방문을 받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요.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카프카는 결국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지 못하고, 1924년 6월 3일 오스트리아의 빈 북쪽에 있는 요양소에서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카프카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좌절된 것은 폐결핵으로 인한 병상 생활 때문이기도 하지만 카프카 스스로 원한 측면도 있습니다. 카프카는 남의 거주지를 차지하려는 유대 민족주의를 싫어했습니다.

정착지를 향한 유대인들의 동경은 미친 듯이 남의 거주지를 차지하려는―근본적으로 자신과 세계 어디에도 고향은 없죠―공격적인 민족주의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러한 민족주의는―다시 근본에서 보면―세계를 황폐화 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 내가 염두에 둔 것은 세계를 황폐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세력범위를 확장하지 않고, 인간성을 제한하는, 약탈에 굶주린 인간집단이에요. 이에 비해 시온주의는 인간 고유의 법칙을 어렵게 되찾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1)

그는 민족국가 건설이 아니라, 소수자로서 다수자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유대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계를 변화시키는 유대인을 “세계를 황폐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세력범위를 확장하지 않고, 인간성을 제한하는, 약탈에 굶주린 인간집단”으로 표현한 게 놀랍지 않나요? 카프카에게 소수자의 사명은 “세력범위를 확장”해서 자기들만의 정착지를 건설하는 게 아니라, 다수자의 세계 안에서 “세계를 황폐화”하는 방식으로, 즉 다수자의 법칙(척도)이 작동하지 않도록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다수자의 척도에서 벗어나 있음으로 (즉자적으로) 정의된 소수자는, 다수자의 척도를 와해시키면서 세계를 바꾸는 운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대자적으로) 소수자-되기를 이룹니다. 카프카는 그 다수자의 법칙을 “인간 고유의 법칙”으로 칭하고, 그것을 무너뜨릴 인간집단을 “인간성을 제한하는, 약탈에 굶주린” 동물처럼 표현합니다. 소수자는 “인간성을 제한하는” 동물적 운동을 통해, 즉 동물-되기를 통해 “인간 고유의 법칙”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세계를 변화시킵니다.

보통 사람들은 세계가 황폐화되고, 인간성이 제약되는 것에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런 것을 원하고 능동적으로 일으킬 수 있다고는 좀처럼 생각하지 못하죠. 카프카는 다릅니다. 그의 독특한 소수적(minor) 감성은 ‘하는 것’과 ‘되는 것’,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의 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되는’ 것에서 ‘하는’ 것을, 수동적인 태도에서 능동적인 작용을 끄집어냅니다. 이것이 ‘약자와의 동행’ 대신 소수자의 ‘약함’에 대해 카프카에게 배울 점입니다.

- 소수자 카프카의 약함

소수자는 ‘약함’으로 정의되지는 않지만 주류와의 권력관계에서 ‘약자’에 속합니다. 특히 ‘할 수 없음’(dis-able)으로 정의되는 장애인(disabled people)은 ‘약함’의 속성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카프카 역시 자신의 ‘약함’에서 소수성을 발견했습니다. 1919년에 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 그 내용이 잘 담겨 있습니다. 소책자 형태의 긴 편지에서 카프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얼마나 거대하고 두려운 존재였는지, 아버지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적고 있습니다.

세계 지도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아버지가 사지를 쫙 뻗고 누워 계신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러면 마치 저한테는 아버지가 가리고 계시지 않거나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않는 지역만이 저의 생활공간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져요. 그런데 아버지의 우월한 체구를 떠올려 보면 그런 지역은 결코 많을 수 없으며 또한 별로 위안을 줄 만한 곳이 못 되지요.2)

카프카는 아버지의 성격이 대대로 ‘강함’을 추구하는 카프카 집안의 혈통에서 비롯된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카프카 자신은 부계 혈통의 특성인 강인한 생활력, 왕성한 사업욕, 끊임없는 정복 의지보다 어머니가 속한 뢰비 가문의 예민한 감수성에 이끌린다고 합니다.

일단 아버지는 우람한 체격만으로 어린 카프카를 기가 질리게 만듭니다. 아버지와 같이 수영장을 갔을 때 깡마르고 허약하고 홀쭉한 카프카는 탈의실에서부터 아버지의 강하고 어깨가 떡 벌어진 체격에 위축되었습니다. 아버지 앞에서만이 아니라 온 세상 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세상 모든 사물의 척도였기 때문이죠. 아버지의 건장한 몸 앞에서 느낀 위축감은 결혼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이 불거졌을 때 건강염려증을 일으켜, 소화불량, 탈모, 척주만곡에 대한 극심한 불안을 야기했습니다.

아버지의 강함은 식욕으로도 나타났습니다. 아버지 카프카는 육식동물의 식욕을 갖고 있었습니다. 정육점을 했던 할아버지 카프카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겠죠. 아버지는 모든 음식을 걸신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었기 때문에 식탁에서 아이들도 함께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식탁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고, 그 정적은 아버지가 간간이 던지는 경고와 재촉의 말들, ‘먼저, 먹기나 하고 이야기는 나중에 해’, ‘자, 빨리빨리. 더 빨리’ 혹은 ‘자 봐라. 난 벌써 다 먹었다’ 같은 말들로 깨지곤 했습니다.

이런 육식동물의 식욕에 질린 카프카는 채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육식 중심의 유럽 사회에서 채식주의자가 되는 건 엄청 고달픈 일이었습니다. 막스 브로트의 메모에 의하면 “카프카는 채식주의자들을 불결한 장소에 있는, 어디서나 박해를 당하고 조롱을 당하는 초기 기독교인들과 비교했습니다”.3) 베를린의 수족관에 갔을 때 카프카는 수족관 안의 물살이들에게 “지금 드디어 나는 너희들을 침착하게 바라볼 수 있다. 나는 너희들을 먹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카프카와 친했던 막내 여동생 오틀라는 카프카의 채식주의에 공감하여 스스로 채식주의자가 되었고, 시골로 가서 농장을 개척했습니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강함’은 곧 ‘남자다움’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카프카를 드물게 칭찬하는 경우는 제법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이고 씩씩한 걸음걸이를 보일 때였습니다. 그러나 카프카는 군인이 될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계집애처럼’ 문학에나 몰두하고 연극하는 뢰비처럼 ‘벌레 같은 친구’나 사귀는 청년이 되었죠. 또 제법 왕성하게 식사를 하거나 곁들여 맥주까지 마실 때, 혹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아버지가 즐겨 쓰는 상투적인 말을 흉내 낼 때도 아버지는 아들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칭찬하는 그 어느 것도 카프카의 미래와는 무관한 것들이었습니다. 결혼을 통해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자식을 낳아 아버지가 되는 그런 삶을 카프카는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카프카는 펠리체라는 여성과 두 번 약혼했고 두 번 파혼했습니다. 카프카는 체질적으로 아버지의 세계에 속한 남성의 역할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겁니다. 그는 독신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고착된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날 어린 카프카가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달라고 칭얼댄 적이 있습니다. 몇 차례 호된 위협을 퍼부어도 소용이 없자 아버지는 아들을 침대에서 들어내 발코니로 끌고 나가 속옷 바람으로 혼자 세워 두고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떼쓰는 자식을 베란다, 화장실, 혹은 작은 방에 잠시 가둬 놓는 건 예전에 흔히 있던 일이죠. 그런데 섬약한 기질을 가진 카프카에게 그 일은 ‘트라우마(외상)’가 됩니다. 몇 년이 지나고서도 카프카는 문득문득 거인의 모습을 한 아버지가 느닷없이 최후의 심판관이 되어 나타나, 자신을 침대에서 들어내 발코니로 끌고 나가는 망상에 시달리곤 했습니다. 아버지의 집, 아버지의 권력이 지배하는 세계로부터 추방되어 문밖에 서 있는 이 모습은 카프카 소설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장면의 원형이 됩니다.

앞서 카프카는 아버지처럼 되기 싫어했다고, 아버지가 지배하는 세계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했다고 했죠? 아버지에 의해 아버지의 집에서 추방되는 이 장면을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과 겹쳐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조금 전 말한 것처럼, 카프카의 소수적 감성에서는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추방 ‘되는’ 것이 그로부터 탈출 ‘하는’ 것과 동시적인 사태로 겹쳐지게 됩니다. 『변신』을 통해 추방되는 것의 안쪽 면에 겹쳐진 탈출하려는 욕망을 살펴보겠습니다.

- 소수자의 추방, 혹은 변신

『변신』은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해충’으로 번역한 독일어 ‘Ungeziefer’는 주로 작고 혐오스러운 벌레를 의미합니다. “갑옷처럼 딱딱한 등”에 “반원으로 된 갈색의 배가 활 모양의 단단한 마디들로 나누어져” 있고 여러 개의 “가느다란 다리”를 버둥거리는 모습이 바퀴벌레를 연상시킵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 초판본 표지
카프카의 소설 『변신』 초판본 표지

꿈일까요? 꿈에서 깬 ‘잠자(Samsa)’가 벌레로 변신한 자신을 발견했다는 첫 문장은 카프카도 즐겨 읽은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즉 장자가 나비로 변신한 꿈에서 깨어나 어느 게 진짜인지 헷갈려 했다는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꿈은 아닙니다. 서술자는 “어찌 된 일일까? 그는 생각했다. 결코 꿈은 아니었다”고 못 박습니다. 그럼 환상 소설에 흔히 나오는 악마의 마법 같은 걸까요? 잠자가 끔찍한 회사 생활을 기억하며 “이 모든 걸 악마가 가져갔으면” 하고 바랐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그건 생각일 뿐 악마 같은 초월적 존재는 이 소설에 없습니다.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신한 것은 꿈도 아니고 초자연적 현상도 아닌 현실입니다.

잠자는 낯익은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익숙한 방과 외무사원이 챙겨야 할 옥감 견본을 보고 자기가 현실에 직면해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좀 더 잠을 청해 이런 어리석은 일을 잊도록 하자”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벌레로 변신한 것을 “어리석은 일” 정도로 여기는 게 좀 어이없고 우습지 않나요? 마치 사람이 벌레로 변신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이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카프카는 일기나 편지에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이빨과 턱을 가진, 고개를 쳐들거나 깊이 숙이는, 물거나 기어다니는 동물처럼 묘사하곤 합니다. 카프카에게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선이 다른 사람들만큼 분명하지 않습니다.

잠자가 벌레로 변신한 현실에 직면한 후 소설은 어떻게 그런 초자연적인 일이 발생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내버려두고, 그렇게 변신한 후 잠자와 주변에 일어난 변화를 서술합니다. ‘그런 어리석은 일은 잊도록 하자’ 생각하며 잠을 자려 했지만 잠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오른쪽으로 누워 자는 습관이 있는데 몸이 변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너무 옆으로 퍼져 있고 팔이나 손 대신 가늘고 짧은 다리만 허우적거려야 했기 때문에 몸을 뒤집는 게 힘들었습니다. 침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잠자는 온몸을 버둥거려야 했습니다. 작은 다리를 움직여 바닥을 길 수는 있지만 허약한 다리로 직립하려니 아랫배에 통증이 몰려왔습니다. 문을 열려면 손으로 손잡이를 돌려야 하는데 팔과 손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사방팔방 자유롭게 움직이는 팔과 예민하게 느끼고 집을 수 있는 손은 촉수 같은 기관입니다. 팔과 손이 없는 동물은 그럼 뭐로 사물을 감촉하고 붙잡죠? 네. 턱과 입으로 합니다.

그는 입으로 열쇠 구멍에 꽂힌 열쇠를 돌리려고 했다. 불행히도 그는 제대로 된 이가 없는 것 같았는데―무엇으로 열쇠를 잡지?―그 대신 단단한 턱이 있었다. 실제로 그는 턱으로 열쇠를 움직일 수 있었다. […] 그는 온 힘을 다하여 미친 듯이 열쇠를 물었다. 열쇠를 계속 돌리면서 그는 열쇠 구멍 주위를 돌았다.4)

변신으로 인해 손과 발의 기능이 사라져 이족보행 대신 온몸으로 기고, 손으로 잡는 대신 입으로 무는 방식으로 변하는 이 장면. 뇌병변장애인이나 사고로 척수가 손상된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비슷하지 않나요? 변신한 잠자를 대하는 가족의 태도를 보면 훨씬 더 그렇게 느낄 겁니다. 변신 후 잠자는 회사에서 해고됩니다. 그리고 가족들한테 구박받는 피부양자 신체로 전락합니다. 외출은커녕 하숙생 눈에 띌까 봐 전전긍긍하는 가족들의 압박에 잠자는 자기 방 어두운 구석에 유폐됩니다. 음식도 죽지 않을 정도만 주고, 점점 그의 방은 온갖 잡동사니를 갖다 두는 창고 취급을 받습니다. “다른 친척이나 친지들 중에는 아무도 당하지 않은 그런 불상사를 자기네가 당하고 있다는” 불행감과 자기 연민이 깊어질수록 가족들은 잠자를 혐오하게 되고, 급기야 잠자가 사라짐으로써만 가족이 평온과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때요? 여러분의 가족 중 누군가가 하루아침에 바퀴벌레처럼 변신한다면 어떻게 대할 건가요? ○○ 씨는 어때요? 아버지가 벌레로 변신한다면? 아, 아버지가 없다고요? 그럼, 어머니가 변신한다면? 어머니도 없다고요? 형제… 형제도 없다고요? 그럼, 친구라도… 친구도 없으세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된 후 가족들과 관계가 단절되고 다른 인간관계도 모두 끊어졌다고요? 아, 그렇군요. 얼마 전 제 딸이 만약 자기가 바퀴벌레로 변신하면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본 적 있습니다. 요즘 10대 사이에 그런 질문이 유행인가 봐요. 카프카의 『변신』이 유명해진 건지, 아니면 실직 등으로 가족들한테 벌레 취급당하는 사람들이 많아선지, 아무튼 사랑하는 사람이 바퀴벌레로 변신한다면 어떻게 대할 건지에 궁금해하는 젊은이가 많나 봐요. 그런데 우리 노들야학에 다니는 중증장애인들에게는 그런 질문이 신박하지도 않고 굳이 가정법의 세계에 속한 일도 아닌 거 같아요. 손상으로 인해 벌레처럼 변신하거나 가족들한테 벌레 취급받는 건 이미 겪어온 냉혹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2003년 미신고시설 조사 때 찾아간 기도원의 장애인. 사진 제공: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2003년 미신고시설 조사 때 찾아간 기도원의 장애인. 사진 제공: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카프카는 어떨까요? 카프카는 허약하고 섬약했지만 그래도 장애인은 아닙니다. 나중에 폐결핵으로 요양소를 전전하다 죽었지만 『변신』을 쓸 1912년 당시에는 법학을 전공한 경력으로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 다니는 직장인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내가 만약 벌레로 변신한다면?’이라는 가정법에 따라 쓴 것입니다. 카프카가 가정한 변신의 요인은 신체 손상이나 우울증, 조현병 등의 정신질환도 아닙니다. 그럼 어떤 요인일까요?

그건 자기 안에 있는 동물의 목소리였습니다. 침대 위의 벌레로 변신한 직후 문밖의 어머니가 출근 안 하냐고 묻자 잠자는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 대답 소리는 틀림없이 자기 목소리였는데, 거기엔 저음 같기도 한 어떤 억제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찍찍하는 소리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지배인이 와서 출근을 재촉하자 그레고르는 “제발 여기 계시지 말아주세요. 곧 제 자신이 회사에 나가겠습니다”라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언어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너 방금 그레고르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니?”라는 어머니의 외침에 지배인은 “그건 동물의 목소리였습니다”라고 낮은 소리로 말합니다.

그레고르 잠자를 변신케 한 것은 그 내면에 있는 동물의 목소리였습니다. “기차 시간을 걱정해야 하며 식사는 불규칙적이면서 나쁘고, 대하는 사람들은 항상 바뀌고, 따라서 그들과의 인간관계는 절대로 지속적일 수도 없으며 또한 진실한 것일 수도 없”는 회사 생활에 대한 푸념에 이어 “이 모든 걸 악마가 가져갔으면! 그는 배 위가 약간 가려운 것을 느꼈다”고 쓸 때, 카프카는 잠자의 변신이 끔찍한 회사 생활을 악마가 가져가기를 바라는 잠자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욕망이 몸을 간지럽혀 일으킨 변화라고 말한 것입니다. 벌레로 변신한 것에 대하여 “어찌 된 일일까?”라며 발생 원인을 서술할 타이밍에 출근 걱정과 고된 회사 생활의 푸념이 서술된 것도, 잠자의 변신이 외부 요인에 의한 게 아니라 잠자 내면에서 일어난 욕망의 결과임을 시사합니다. 그 욕망은 회사 생활과 아버지의 집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입니다.


1) 구스타프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 편영수 옮김, 문학과지성, 2007, 237~248쪽.

2) 프란츠 카프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이재황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9, 148쪽.

3) 막스 브로트, 『나의 카프카: 카프카와 브로트의 위대한 우정』, 편영수 옮김, 솔, 2018, 107쪽.

4) 카프카, 「변신」, 『카프카 단편전집』, 이주동 옮김, 솔, 1997. 121쪽.

필자 소개

박정수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이자 노들장애인야학 철학 교사. 2020년에 『‘장판’에서 푸코 읽기』를 썼고, 2024년 1월 『오이디푸스, 장애인 되다: 장애학자가 들려주는 그리스 비극 이야기』를 출간했다. 노들야학 영화반에서 학생들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다가 1년 만에 철학 수업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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