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의 철학, 카프카의 경우 ③

『변신』의 초안이라 부를 수 있는 산문이 있습니다. 카프카의 산문집 『관찰』(1915)에 실린 「갑작스러운 산책」은 가족 관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의 일상성을 보여줍니다. “실내복을 입고 저녁 식사 후 책상에 불을 켜고 앉아 습관처럼 이런 일이나 저런 놀이”를 시작하는 어느 날입니다. “날씨는 음울해서 집에 머물러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되고”, “어제는 꽤 오랫동안 책상에 머물러 있어서 외출한다는 것이 당연히 놀라움을 불러일으키고”, “층계도 어두워지고 대문도 잠겨 있는”, 여러모로 바깥에 나가기 힘든 분위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불쾌감” 속에서 벌떡 일어나 상의를 갈아입은 후 외출해야겠다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짧은 인사 후 후다닥 거실 문을 닫을 때 등 뒤에 가족들의 “다소간의 불쾌감”이 따갑게 느껴지지만, 무시한 채 골목길로 접어든다면? 무엇보다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쉽게 일으키고 그것을 견디어 내고 싶어 하는 욕구보다는 오히려 그럴 수 있는 힘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평상시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인식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그 산책으로 말미암아 자신은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고 가족은 흔들리며 비실체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고 카프카는 말합니다.

- 변신의 욕망과 힘

밤에 산책하러 나가는 것만으로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고 가족의 실체가 송두리째 흔들려버린다는 게 좀 황당하죠? 아! 시설에서 외출할 때 눈치 많이 봤다고요? 가족들과 같이 살 때 밤에 외출하는 건 꿈도 못 꾸었다는 분도 계시네요. 하지만 카프카가 장애인이 된 것도 아니고 실직한 것도 아니고 크게 다툰 것도 아닌데, 그저 가족들이 생각한 평소 모습과 조금 다른 행동에 가족들이 불쾌감을 느끼고, 가족들 간의 암묵적인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는 것으로 가족의 실체가 흔들린다는 카프카의 생각이 이해가 되나요?

장애인도 아닌 성인 남자가 밤 산책을 통제받을 이유는 거의 없을 거 같은데, 그럼에도 이런 산문을 쓴 걸 보면 카프카가 가족 관계에서 얼마나 압박감을 느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압박감은 폭군 같은 아버지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 억압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안팎으로 긴장된 가족 관계는 아주 작은 변화, 특히 내면의 억압을 뚫은 욕망의 미세한 분출만으로도 ‘띵’하고 끊어질 수 있습니다. 평상시 모습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던 갑작스러운 밤 산책도 그런 욕망의 분출에 해당합니다. 많은 장애인들이 이런 외출을 계기로 시설에서 탈출했죠. 시설의 압박과 가족의 눈치를 뚫고 외출을 감행하게 한 욕망과 정신력이 탈시설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은 자기 내면의 동물적 욕망이 분출하면서 일어난 변신과 그로 인한 가족관계의 파탄을 그린 소설입니다. 『변신』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욕구는 분명히 느껴집니다. 악마가 가져가 버렸으면 하고 생각할 정도죠. 하지만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쉽게 일으키고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은 어떤가요?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에게 어떤 ‘힘’이 느껴지나요? 대충 거시적으로(‘현대인의 인간 소외가 어쩌고…’라는 방식으로) 읽으면 안 보이지만, 작게 세밀히 읽으면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를 견딜 수 있는 힘이 보입니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는 그 변신을 견뎌낼 수 있는 적응력을 갖게 됩니다. 처음에는 몸을 뒤척이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머리를 쳐들고 몸을 비틀어 움직이는 방법, 짧은 다리를 움직여 기는 방법, 소파 밑에 숨는 방법을 익히게 되고, 상한 음식에 끌리는 입맛을 갖게 되며, 인간적 사물의 질서 대신 대신 텅 빈 공간에 대한 취향을 갖게 되는데요. 여기서 변화를 견뎌내는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동물적 힘은 ‘치켜든 머리’에서 분명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자기 방문에 붙어서 자신을 공격하려는 아버지를 향해 “그레고르는 문에서 머리를 떼어 아버지 쪽으로 쳐들었”습니다. 변신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아버지를 향해 머리를 쳐들 때, 그레고르 잠자의 동물적 힘은 가장 선명하고 능동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치켜든 머리’와 반대로 ‘수그린 머리’는 동물적 힘이 가장 약하고 수동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변신한 모습이 처음 가족들에게 드러났을 때, 그레고르는 문짝에 기대고서 “옆으로 수그린 머리”로 다른 사람들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주눅이 들어 눈치를 보는 모습이죠. 가족들의 방치 속에 굶어 죽어갈 때에도 그레고르의 머리는 “자신도 모르게 푹 수그러졌”습니다.

- 수그린 머리와 치켜든 머리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의 치켜든 머리에서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지하철 바닥을 기는 장면입니다. 물론 박경석 대표가 이날만 긴 것도 아니고, 지하철에서만 긴 것도 아니며, 박경석 대표만 긴 것도 아닙니다. 2006년 한강대교에서부터 박경석과 전장연 소속 장애인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삶의 권리를 요구하며 지상의 아스팔트 위에서, 혹은 지하철 안에서 기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그 무수한 장애인들의 기는 투쟁이 지닌 힘과 의미를 대표할 뿐입니다.

지난 2022년 6월 5일 진행된 지하철 행동에서 바닥을 기고 있는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사진 비마이너 DB.
지난 2022년 6월 5일 진행된 지하철 행동에서 바닥을 기고 있는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사진 비마이너 DB.

박경석 전장연 대표는 마도로스가 꿈인 해병대 출신의 신체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1983년 행글라이더 추락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변신』의 주인공처럼 집안의 대들보였던 청년이 하루아침에 하반신이 마비되는 변신을 겪은 겁니다. 6개월 입원 후 그는 5년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고통스럽다는 느낌도 없이 무감각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고통이라도 느끼고 싶어서 칼로 허벅지를 긁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그는 “동물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에 갇힌 동물 같은 느낌이었어요. 정말로 방에만 있었거든요. 말동무도 없이 어머니하고 24시간 같이 있었어요. 시간이 진짜로 안 갔어요. 자도 자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죠. 새벽까지 멍하니 텔레비전 보다가 애국가 나오고 지지직하면 또 잠을 자기 위한 투쟁을 했어요.1)

5년의 무감각을 깨고 그는 서울장애인복지관을 통해 사회로 나와 투쟁하는 장애인을 만났고, 노들장애인야학에 들어와 중증장애인들과 놀고 마시고 공부했습니다. 어렵게 취직한 성남장애인복지관에서 총무과장으로 일하며 돈도 꽤 벌었습니다. 파산한 아버지 대신 가족을 부양한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했고, 무엇보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 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일하다가 저녁 6시 땡 치자마자 허겁지겁 짐 챙겨서 노들야학으로 달려갔습니다.

밤 시간이 미친 듯이 좋았어요. 밤새도록 힘껏 놀고 파김치가 돼서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는 생활이었죠. 관장이 처음에는 좋은 일 한다고 독려하더니 나중엔 야학에 쏟는 애정을 직장에 집중해달라면서 은근히 압박을 했어요.2)

회사와 야학의 이중생활은 카프카의 이중생활과 닮았습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카프카는 처음에는 민간 보험회사에 다녔는데, 근무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만두었습니다. 새로 들어간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 재해보험 공사’는 오후 2시면 퇴근할 수 있었습니다. 카프카는 2시에 퇴근해서 낮잠을 한숨 잔 다음 저녁 식사 후에는 새벽까지 자기 방에서 글을 썼습니다. 카프카에게 밤중의 글쓰기는 회사 생활과 가족 부양의 인간 세계로부터 벗어나 동물처럼 세계의 내면을 파헤치는 의미를 띱니다. 폐결핵으로 인한 병상 생활로 직장을 그만두기까지 14년 동안 카프카는 직장 생활과 글쓰기의 이중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박경석과 마찬가지로 카프카도 어머니의 애정이 이런 이중생활을 지속하게 한 요인입니다. 카프카에게 항상 다정하고 합리적으로 대했던 어머니가 없었다면 카프카는 진작에 폭군 같은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집을 뛰쳐나갔을 겁니다. 아버지의 세계 안에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마냥 잘 대해주고, 아들을 위해 간청해 주고, 이치에 맞는 말을 해 줌으로써 아버지의 세계 안에 머물러 있게 만든 겁니다.

어머니는 저를 마냥 잘 대해주시고, 이치에 맞는 말씀을 하시고(어머니의 말씀은 제 어린 시절의 혼돈 속에서 이성의 원형이었지요) 저를 위해 간청을 해주심으로 해서 오히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아버지의 울타리 안으로 되몰려 들어오게 되었지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도 그 울타리를 뛰쳐나갔을 것이고 그 결과는 아버지한테도 좋고, 저한테도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3)

『변신』에서 어머니는 아들의 변신을 마음 아파하며 아들이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의 방에 있는 가구를 치우자는 여동생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변신한 오빠의 변한 취향을 알아챈 여동생 그레테는 그레고르가 좀 더 넓게 기어다닐 수 있도록 방해가 되는 가구들을 치우려고 합니다. 그에 대해 어머니는 가구를 치워 버린다는 건 그레고르가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올 희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서 반대한 겁니다. 그레고르는 두 달 동안 동물의 습속에 적응하면서 “상속받은 가구로 안락하게 꾸며진 따듯한 방을 방해도 없이 사방으로 기어다닐 수 있고 인간으로서의 과거를 빨리 온통 잊게 되는 그런 동굴로 바꿔놓을 생각”을 했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는 마음이 바뀌어 방 안의 물건을 치우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그레고르가 여동생에게 맞서 집착한 물건은 벽에 걸린 “모피 제품만을 걸친 여자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오스트리아 작가 자흐 마조흐가 1870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모피 입은 비너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어머니의 권능에 매혹된 유아기 경험 때문에 여성과의 노예계약에서 쾌락을 느끼는 남자들의 성욕을 ‘마조히즘’으로 지칭했습니다. 카프카도 그 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모피 입은 여자’의 사진에 집착하는 그레고르의 모습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머니의 애정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과거”에 매달린 그레고르와 여동생의 관계는 급속히 나빠지고, 어머니는 그레고르의 등에 사과를 던진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 “아버지와 완전 한 몸이 되도록 아버지를 포옹하더니 양손으로 아버지의 목덜미를 잡고 그레고르의 목숨을 살려주라고 애걸”합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어머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담은 그레고르의 눈은 시력을 잃습니다. “인간으로서의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그레고르의 머리는 수그러들고, 동물적 삶에 대한 능동적 탐색은 중단됩니다.

박경석은 달랐습니다. ‘회사 생활이냐 장애인야학이냐’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는 야학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출근할 때마다 신변 처리를 도와주고 문밖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주면서 잘 다녀오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애정을 배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장애문제를 잘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복지관이나 야학이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의미와 가치는 분명히 달랐어요. 좋아하는 사람들과 원 없이 놀고 운동하며 살다가 빨리 죽는 게 낫겠더라고요. 어머니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미련 없이 때려치웠어요. 그땐 몰랐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인 것 같아요.4)

그 후 박경석은 노들야학 교장이 되어 이동권 투쟁을 이끌었고, 전장연을 만들어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탈시설 투쟁, 중증장애인 노동권 투쟁 등을 이끌었습니다. 그가 이끈 투쟁은 몇 문장의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치열하고 신기하고 끈질긴 것이었습니다. 지하철 선로로 내려가 열차를 막아 세우고, 한강대교를 기어가며 교통의 흐름을 막고, 국가인권위원회,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시청, 지하철 역사, 마로니에공원 등 온갖 곳을 점거하고 농성장을 만들었습니다. 정치인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기도 하고,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뀔 때마다 횡단보도를 점거하기도 하고, 고가다리에 밧줄을 걸어 매달리기도 했습니다.

2006년 4월 27일, 장애인 활동가들이 활동지원제도화를 촉구하며 한강대교 기어가기 투쟁을 하고 있다. 사진 n_m
2006년 4월 27일, 장애인 활동가들이 활동지원제도화를 촉구하며 한강대교 기어가기 투쟁을 하고 있다. 사진 n_m

- 기는 투쟁의 치켜든 머리

장애인의 존재와 권리를 알리기 위해서라면 안 해본 짓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요. 수많은 투쟁 중에서 박경석 대표가 가장 힘들어 한 운동 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기는’ 투쟁입니다. 하반신 마비로 인해 두 팔로만 몸을 진전시킬 때 소모되는 에너지와 육체적 고통도 엄청나고, 자신의 손상된 몸과 운동의 취약성을 남들 앞에 고스란히 드러낼 때 밀려드는 수치심도 크기 때문입니다. 박경석뿐만 아니라 대다수 신체장애인들이 기는 투쟁을 할 때 몸과 마음에 유난히 큰 고통을 느낍니다.

흔히 ‘오체투지(五體投地)’라고 부르긴 하지만, 신체장애인은 두 팔과 두 다리를 리듬에 맞게 순서대로 움직여 신체의 다섯 부위(두 손바닥과 두 발등, 그리고 이마)가 땅에 닿게 온몸을 던져 절을 한 다음, 잽싸게 일어나 합장까지 한 후 다시 크게 두 걸음을 걷는 오체투지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전장연의 기는 투쟁은 오체투지에서 기원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간절한 염원을 담아 온몸을 땅에 던지는 구도자의 겸손한 운동(move)에서 기원한 게 아니라, 자신의 취약한 몸을 대중에게 드러내어 동정을 구걸하는 장애인의 기는 몸짓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체투지를 모방한 게 아니라 구걸의 몸짓을 투쟁의 운동으로 변환(metamorphosis)한 것입니다.

외형이 바뀐 건 없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받으며 대중들의 다리 밑 바닥을 기어가는 모습, 심지어 앞세운 깡통까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운동이 자아내는 힘과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차이는 ‘수그린 머리’와 ‘치켜든 머리’의 차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구걸하는 장애인의 수그린 머리는 동정과 시혜를 바라는, 오세훈이 생각하는 ‘약자’의 모습입니다. 반면 박경석이 지하철 열차 바닥을 길 때 너무 힘들어 고개를 떨굴 때조차 그의 머리는 치켜든 것 같은 힘과 의지를 뿜어냅니다.

똑같이 기는 운동의 반복에서 어떻게 완전히 상반된 힘과 의미가 생기는 걸까요? 기는 투쟁을 할 때 어떤 마음이 드는지 물었더니 박경석 대표는 “하기 전에는 망설여지고, 할 때는 고통스러운데, 하고 나서는 통쾌하다”고 답했습니다. 통쾌함의 이유를 묻자, 그는 “구걸하는 장애인의 모습을 저항하는 장애인의 모습으로 역전시킨” 데서 오는 통쾌함이라고 답했습니다.

카프카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카프카는 절친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친구들에게 『변신』의 결말을 읽어준 후, 자기 소설 중 광기 어린 부분이라며 친구들과 함께 큰소리로 웃었다고 합니다. 그 웃음은 도덕적 외양 속에 감춰진 가부장제 가족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한 통쾌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변신』에서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가 머리를 치켜든 건 아버지를 향해서였습니다. 머리를 치켜들고 본 아버지의 모습은 전과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파산 후 힘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늙은이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이 꼿꼿하게 서 있으면서 은행 급사처럼 금 단추가 달린 푸른 제복을 입고, 상의의 높고 빳빳한 칼라 위에는 억센 이중 턱이 나와 있고, 숱이 많은 눈썹 아래에는 검은 눈이 생생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5)

가족을 부양하던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하자 아버지는 다시 직장을 구해 가족을 부양하고, 아버지가 가부장의 권위를 회복하자 어머니는 다시 아버지의 품에 파고들고, 여동생은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을 구합니다.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시름시름 앓다가 가족들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 굶어 죽습니다. 소설은 파출부가 그레고르의 시체를 청소해 버리고, 남은 가족이 홀가분한 기분과 희망에 들떠 나들이 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박경석 대표가 기는 퍼포먼스를 통해 구걸하는 장애인에 대한 대중의 혐오 어린 시선을 주도적으로 폭로한 데서 통쾌함을 느낀 것처럼, 카프카는 자신이 회사를 그만두고 방에 틀어박혀 글 쓰는 동물(벌레)이 된다면 아버지와 가족들은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함으로써 행복해질 것이라는 진실을 폭로한 데서 통쾌한 웃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 독충의 싸움과 소수자 되기

자신을 벌레로 만든 건 아버지와 가족이라고 폭로하고는 낄낄 웃는 카프카의 모습이 부도덕하고 섬뜩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 느낌을 주면서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쳐든 벌레는 ‘독충’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 같아요. 벌레도 꿈틀대며 기어가는 애벌레, 징그러운 바퀴벌레, 무섭고 섬뜩한 거미 등 여러 다른 유형이 있는데,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 웃는 벌레는 확실히 독충 같습니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 그 독충이 나옵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은 “생활력이 없는” 벌레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내용의 편지 후반부에서, 카프카는 만약 아버지가 이 편지를 읽는다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거라고 씁니다.

너는 철저히 나를 뜯어먹으며 살아가기로 작정한 것이겠지. 우리가 서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싸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옛날 기사들처럼 독자적인 적수끼리 누가 더 힘이 센지를 겨루는 기사식 싸움이 그 한 가지인데, 이 경우에 각자는 계속 독자적으로 머물면서 한쪽이 이기면 다른 쪽은 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독충들의 싸움인데, 이 경우엔 상대방을 찔러 죽일 뿐만 아니라 곧바로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해 상대방의 피도 빨아먹는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직업적인 싸움꾼의 경우라 할 수 있고, 네가 곧 그 경우에 해당된다.6)

아버지와의 대결에서 카프카는 기사처럼 규칙을 정하고 승패를 가늠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찌르고서 피를 빨아 먹는 독충처럼 싸운다고 합니다. 상상 속 아버지의 입을 빌렸지만 결국 이 말은 카프카가 쓴 겁니다. 그 비유에 따르면, 아버지와 카프카의 대결은 공동의 규칙(법이나 도덕)하에서 누가 잘못한 건지(선과 악, 유죄와 무죄) 판정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관 및 서로 다른 본성과 기질에서 비롯된 싸움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카프카는 아버지가 자신을 “생활력 없는” 벌레로 만든 게 아버지 잘못이 아니라고 짐짓 용서하듯 말합니다. 아버지는 게토 출신 유대인이 처한 삶의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세상과 싸워왔고, 가족을 지키려고 전력을 다한 전형적인 가부장이었습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아버지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 안 하고, 진심 어린 선물은커녕 눈치만 보며 슬슬 피해 다니는 “차갑고 낯설고 배은망덕한” 아들이 문제겠죠. 게다가 카프카는 돈벌이와는 거리가 먼 ‘문학’을 한답시고 “벌레 같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집안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회의 바람난 여자나 시골의 가난한 수공업자 딸과 결혼한답시고 떠들다 자기 마음대로 파혼해서 아버지를 망신 주기까지 했죠.

하지만 그런 ‘부도덕함(비정상성)’은 아버지의 기질과 화해할 수 없는 카프카 자신의 본성적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역시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는 게 카프카의 “영악한” 논변입니다. 영악할 뿐만 아니라 그런 ‘벌레’ 같은 행태의 원인을 아버지의 본성적 기질 탓으로 돌리는 모습이 독충 같죠. 상상 속 아버지의 비난이지만 그 역시 카프카 자신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통해서 자신의 벌레 같은 삶은 아버지가 생각하는 인간다운 삶, 다수 사람들이 꿈꾸는 정상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한없이 낯설고 두렵게만 느끼는 카프카 자신의 소수적 기질에서 발생했다고 말합니다. 카프카의 소수적 삶은 아버지의 주류적 삶으로부터 추방되면서, 혹은 그로부터 도망치면서 생성된다는 점에서 적대자의 생명에 이빨을 꽂아 자기 생명을 지속하는 독충의 싸움을 닮았습니다. 요컨대 소수자는 독충이 적대자의 피를 빨아 그 생명을 고갈시키는 것처럼, 다수자의 세계 안에서 다수자의 법칙을 황폐화시키면서 생성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1) 홍은전, 『전사들의 노래』, 오월의 봄, 2023, 281쪽.

2) 홍은전, 『전사들의 노래』, 오월의 봄, 2023, 272쪽.

3) 프란츠 카프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이재황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9, 60쪽.

4) 홍은전, 『전사들의 노래』, 오월의 봄, 2023, 272쪽.

5) 프란츠 카프카, 『변신(단편전집)』, 이주동 옮김, 솔, 1997, 147쪽.

6) 프란츠 카프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이재황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9, 158쪽.

필자 소개

박정수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이자 노들장애인야학 철학 교사. 2020년에 『‘장판’에서 푸코 읽기』를 썼고, 2024년 1월 『오이디푸스, 장애인 되다: 장애학자가 들려주는 그리스 비극 이야기』를 출간했다. 노들야학 영화반에서 학생들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다가 1년 만에 철학 수업으로 돌아왔다. liz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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