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서한영교의 시,의적절
당연시: 넌 장애인이고, 난 비장애인이니까. 우리 삶이 달라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냐?
“장애가 이렇게 심한 분이 시설에서 나와서 어떻게 자립할 수 있다는 거죠?” 나는 물었던 적 있다. 내 질문 앞에 선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X,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 화들짝
노들야학에 교사로 온 첫날. 그, 가 내게 걸어왔다. 지적장애-보행장애-언어장애-지체장애가 있는 ’최중증 발달장애인‘으로 명명되는 그, 가 휘청대며 걸어왔다. 삐걱거리며 걸어왔다. 비스듬히 걸어왔다. 절룩이며 걸어왔다. 그가 걸어오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형용사와 부사를 몇 번씩 바꾸어보아도 그, 의 걸음걸이에 걸맞지 않았다. 기이하다, 기괴하다, 기묘하다를 떠올렸지만 무엇 하나 꼭 맞지 않았다. 나의 사전은 도무지 쓸모가 없었다.
그, 가 마침내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았다. 뭔가 말하려는 듯 끝없이 턱을 벌렸다 닫았다 하는 사이 침이 턱을 타고 흘렀다. 귀를 기울였지만 모음과 자음이 결합된 말이 아니었다. 그, 의 침이 내 손목 위로 떨어졌다. 나는 화들짝, 했지만 그, 는 활짝 웃었다.
화들짝, 한 상태로 노들야학 복도에서 어쩌지 못하고 서 있을 때, 노들야학 교사 X가 휴지로 내 손목을 닦으며 그, 에게 “이제 시설에서 나와야죠. 준비하고 있죠?” 안부 인사하듯 말을 건넸다. 한 번 더 화들짝, 했다. 시설에서 나올 준비를 한다고? 이렇게 장애가 심한데?
- 거룩한 따뜻함
내가 아는 장애인 거주시설은 따뜻한 곳이었다. 가톨릭 사제가 되고자 예비신학생 모임에 다니던 때, 나는 거주시설에 꽤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다녔다. 그곳은 치유와 사랑, 보호와 희망이 깃든 거룩한 따뜻함이 증명되는 곳이었다. “가장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라고 기도하며 봉사를 시작했고, “가여운 그들에게 재활의 희망과 기쁨이 깃들기를 바라나이다”라는 기도로 봉사를 마무리했다. 귀갓길에 가여운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시설 종사자들을 떠올리며 존경을 품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용돈을 아껴 시설에 보낼 후원금을 저금통에 모았다.
그러니까, 내가 떠올리는 장애인 거주시설은 좋은 일하는 따뜻한 곳이었다. 그런 거주시설에서 왜 나와? 그 좋은 곳에서? 장애가 이렇게 심한데 어쩌려고? 시설 안에 있는 게 좋지 않나? 가족들 삶은 어쩌고? 뒤따르는 질문에 쫓기듯 노들야학 교사 X에게 겁도 없이 물었다. “장애가 이렇게 심한 분이 시설에서 나와서 어떻게 자립할 수 있다는 거죠?”
- 벼락에 두들겨 맞았다
교사 X는 질문을 찢듯 말했다. “이 세상에 자립할 수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장애인은 시설에 갇혀서 살아야 한다고 당연시하는 사회가 있을 뿐이죠. 한평생을 시설에서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세상이 있는 겁니다.”
시설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그 눈빛에 장애인은 시설에서 보호받아야 한다, 라고 당연시했던 통념이 우르르했다. 지역사회에서 자립하여 함께 살 수 없는 존재로 당연시했던 편견이 우르르쾅했다. 장애인들끼리 모여 살아야 안전하다고 당연시했던 고정관념이 우르르쾅쾅했다. 벼락에 두들겨 맞은 듯했다. ‘시설’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에서부터 생각이 출발하자 기존의 익숙한 감각과 인식 아래에서 당연시했던 것들을 향해 느낌표가 내리꽂혔다. 그, 의 복지카드에 쓰인 ‘중증 지적장애인’이라는 납작한 이름이 가둬둔 ‘당연함’의 벽돌로 세워진 견고한 시설사회가 번쩍 드러났다.
- 재활용 쓰레기장 옆 거주시설
그 견고한 세계로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일 년간 그, 의 등·하교 이동을 지원하며 오갔다. 그, 가 40년 넘게 거주하고 있는 서울시 도봉구의 거주시설 근처로 진입하면, 고철, 파지, 창고 임대, 서울 양봉장과 같은 낯선 간판들이 나왔다. 재떨이로 사용되고 있는 야쿠르트 병들이 줄지어 선 담벼락을 따라 지나는 사람 하나 없는 좁은 골목에 들어서면, 내비게이션 지도상 한끗 차이로 경기도가 되고 서울이 되는 완벽한 경계였다. 재활용 폐품들이 분류되고 처분되고 있는 재활용 쓰레기장 옆, 하나의 정문 안에 거주시설, 보호작업장, 주간보호센터, 특수학교 등이 몰려있고, 그 둘레로 공기 좋고 물 좋은 인왕산이 자리했다.
그곳을 드나들면서, 나는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투로 인사해야 하는지 늘 난감했다. 삭막과 적막 사이, 쓰레기장과 인왕산 사이, 보호와 감금 사이에서 보낸 그, 의 40년이라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같은 하늘 아래, 인왕산 아래, 비장애중심 문명 아래, 정상성의 위계 아래, 시설사회 아래, 그곳에서 그, 가 살고 있었다.
- 코를 후빈다는 이유
그 거주시설은 2014년 장애인 학대와 비리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곳이었다. 제2의 도가니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다. 장애인 거주시설 내 세탁공장 노동자의 임금 1억 5,000만 원을 횡령했고, 장애수당을 직원들의 해외여행 경비로 쓰기도 했으며, 정부 보조금 12억을 부당하게 받은 게 밝혀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30㎝ 쇠자가 미끄러지지 않게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시설 거주자들의 손바닥을 수십 회 때리고, 상습적으로 머리채를 잡거나 뺨과 머리를 여러 차례 폭행하고, 산으로 데려가 몽둥이로 때리고, 허벅지를 여러 차례 밟아 골절이 일어났다. 폭력을 행사한 이유는 밥을 먹지 않거나, 직원의 안경을 건드리거나, 코를 후빈다는 것이었다.
코, 를 후빈다.
코를, 후빈다.
코를 후, 빈다.
코를 후빈, 다.
그, 는 코를 자주 후빈다.
나도 코를 자주 후빈다.
- 따뜻한 동행의 예산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는 ‘탈시설·전원 조치’를 권고했고, 이에 서울시는 시설 폐쇄를 결정했다. 원장과 생활재활교사에게는 실형이 내려졌다. 예정대로라면 2023년에 시설 거주인들은 모두 탈시설하고 시설이 폐쇄되어야 했지만, 서울시에 의해 계속 늦춰지고 있다. 결국, 예산이다.
“탈시설에 천문학적 예산이 든다”, “진심으로 도와드리고 싶고, 진심으로 예산 배정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저희들의 처지도 역지사지해달라”는 서울시장 말(오세훈)은 시설을 지키는 견고한 문장이었다. 예산 문제는 언제나 ‘어쩔 수 없는’ 문제이고, 도와주고자 하는 ‘따뜻한 동행’의 예산편성표에 ‘뜨거운 권리’ 예산은 포함되지 못한다. 경제적 효율성과 합리성에 따라 ‘권리’를 보장하기보다 기존의 시설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힘은 예산편성에서부터 티가 난다. 2024년 정부 예산에 따르면 탈시설 예산은 약 59억 원인 반면 거주시설 예산은 6,695억으로 112배 차이가 난다. 지방정부 예산까지 합치면 시설에 쓰는 예산은 1조 원이 넘지만, 탈시설 관련 사업 예산은 80억 원 정도로 약 125배 차이 난다. 이러한 예산 차이는 ‘권력’과 ‘권리’가 배치된 지형도를 보여준다.
시설을 유지하고자 하는 권력은 또한 탈시설한 장애인의 자립 역량을 1년에 한 번씩 재심사해서 시설에 재입소 시키겠다고 협박한다. 서울시 탈시설지원조례를 2년 만에 폐지했고, 거주시설 연계사업도 폐지했다. 탈시설한 장애인들의 일자리인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도 사라졌다. 활동지원 수급자 일제 조사를 벌여 활동지원 시간을 중단시키거나 삭감했다. 심사, 폐지, 삭감, 중단, 감시라는 지배 권력의 무기들을 동원하여 ‘탈시설’을 쫓아내려 혈안이다.
- 따뜻함 vs 뜨거움
탈시설한 야학 학생분들을 쫓아 탈시설이라는 전선을 오가며 ‘따뜻한 사랑’이 아니라 권리로 ‘무장된 사랑’을 배웠다. “그 순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라는 노래가 아니라 “개 같은 세상의 시계를 멈춰라”라는 무장된 노래를 배웠다. 존엄을 지닌 사람으로서 우리 모습 그대로 지역사회 속에 존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뜨겁게 싸우며 말했다. “그렇게 싸우다 보면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힘, 나아가서 이 사회에서 당연한 걸로 여겨지던 걸 바꿔낼 수 있는 힘”을 익혀나갔다.1)
‘당연시’되어 잘 보이지 않던 차별의 구조, 시장바닥에서 배를 밀어 구걸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빈곤의 구조, 가족들이 온종일 돌봄을 감당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착취의 구조, 시설에 수용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정상/비정상을 나누는 규범적 폭력의 구조,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 팔자다.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불운과 불행이 아니라 “시설에 갇혀서 살아야 한다고 당연시하는 사회가 있을 뿐”이고 “한평생을 시설에서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세상이 있는 겁니다”라고 말했던 노들야학 교사 X의 말을 뜨겁게 실감했다. “사회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은요, 이렇게 패러다임 자체를 전환시켜서 싸우지 않으면 바뀌질 않아요. 그래서 이 세상의 상식을 변화시키려면, 언제나 누군가들이 용기를 내어서 먼저 어떤 전선을 그어야만 하는 거야.”(박경석)2)
- 탈시설이라는 동사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해왔다는 동정론에 기대며 보호와 안전이라는 미명하에 장애인의 사회적 격리를 당연시해온 사회에서 ‘탈시설’이라는 낱말은 명사가 아니라 불붙어있는 동사라는 걸 배웠다. ‘탈시설’이라는 뜨거운 동사가 움직일 때마다 소란을 일으키고 사건을 만들어 냈다. 고정되고 독립된 명사가 아니라 ‘당연시’되는 통념-고정관념-습속-편견과 부딪혀나가는 동사로서 탈시설은 운동의 과정을 끊임없이 지속시키는 말이자, 주변 상황과 경합을 펼치며 구성되어가는 동사였다.
‘당연시’해왔던 것들을 ‘뜨겁게’ 분해하고, ‘뜨겁게’ 저항을 활성화하며, ‘뜨겁게’ 당신과 내가 만날 수 있게 했다. ‘따뜻한’ 동행과 ‘따뜻한’ 봉사와 ‘따뜻한’ 사랑으로는 일으킬 수 없는 사건을 만들어 냈다. 능력에 따른 선택적 평등이 아닌 ‘그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라는 보편적 평등주의를, 최대다수의 행복을 중심으로 한 문명이 아니라 다수자의 척도로 환원 불가능한 소수자의 고유한 존엄을 선언하는 ‘탈시설’이라는 동사는 언젠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냥 걸어왔다
그, 가 40년간의 시설 생활을 끝내고 탈시설하여 지역사회 속 자기 주소를 가진 사람으로 등재되어 야학에 온 날. 그, 가 내게 걸어왔다. 걸음걸이를 수식할 특별한 형용사와 부사도 없이 동사처럼 걸어왔다. 그저 다양한 보행법 중 하나로 그만의 고유한 걸음걸이로 걸어왔다. 그, 가 탈시설 축하 꽃다발을 들고 있는 내 손목을 잡았다. 뭔가 말하려는 듯 끝없이 턱을 벌렸다 닫았다 하는 사이 침이 턱을 타고 흘렀다. 그, 의 침이 선물처럼 내 손목 위로 떨어졌다. 나는 그, 와 함께 그냥, 웃었다.
1) 박경석·정창조, 『출근길 지하철』, 위즈덤하우스, 2024, 141쪽.
2) 같은 책. 119~120쪽.
* 필자 소개
서한영교 작가. 노들장애인야학교사. 시를 읽고, 번역하고, 가르치고, 쓴다. 시, 를 살아내고 있는 수상한 자들을 쫓다 보니 노들야학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만났다. 이곳에서 시, 는 종이 위 단어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일으키는 사건으로 펼쳐진다는 것을 혹독하게 배우고 있다. poetrypunx@gmail.com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