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서한영교의 시,의적절
-다시: 세계를 다시 발음해 볼 시간

'젠장'이라는 글자 위에 덧쓴 곡선이 겹쳐있다. 사진 서한영교
'젠장'이라는 글자 위에 덧쓴 곡선이 겹쳐있다. 사진 서한영교

서울시의회에서 ‘탈시설지원조례’가 폐지된 날. 야학 저녁 수업이 있었다. 나는 격양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탈시설을 준비하고 있던 학생들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미치지 않고서 이럴 수 있는 건가요. 제정신이 아닌가 봐요.’ 고슴도치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교실에 앉아있던 학생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한 사람을 향했다. 정신장애를 가진 학생 A였다.

- 식은땀 흘리는 말

학생들은 눈빛으로 내가 말을 저질러 버렸다, 는 것을 일러주었다. 평생 ‘미친-’ 소리를 들어온 학생 A 앞에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을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직감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아, 제가 실수했네요. 방금 ‘미친’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학생 A는 그저 빙긋 웃었다. 그게 더 미안했다.

그날 이후로도 수업 도중에 학생 A에게 몇 번씩 사과를 반복했다. ‘미친-’이라는 말이 언어습관에 얼마나 깊이 박혀있는지 식은땀을 닦으며 깨달아갔다. 그쯤부터, ‘미친’이라는 낱말이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 상식을 벗어난 말이나 행동을 접했을 때, ‘미친 거 아냐?’ 강한 부정이 필요할 때, ‘내가 미쳤어?’ 상대방을 비난하고자 할 때, ‘미친 새끼!’ 압도하는 미적 체험을 겪을 때, ‘와, 미쳤네~’ 마음이 꼬일 대로 꼬였을 때, ‘미치겠다...’. ‘미친’의 용법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몇 달간, ‘미친-’을 이끄는 말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일상어의 용법을 정리하고, 다듬었다. 일상에서 숨을 고르듯 말을 고르며 관용어로 쓰이던 ‘미친-’을 걸러내며, 대체어를 길러냈다. 언어는 금세 풍성해졌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 일이 터졌다.

- 윤석열 이후

12월 3일 계엄 사태 이후, ‘미친’, ‘정신 나간’, ‘또라이’, ‘정신병자’, ‘염병’, ‘제정신이 아닌’, ‘돌았다’, 따위의 말들이 쏟아졌다. 정치인, 주변 지인들, 동료들, SNS에서 ‘미친-’과 이어져 있던 말의 지형도가 드러났다. 엑스(X, 옛 트위터)의 실시간 검색어로 #미친새끼, #정신병자, #정신병원, #망상장애 등이 실시간 검색어를 싹쓸이했다. ‘미친-’이라는 낱말은 터질 듯 했다.

윤석열의 대국민 담화들이 이어지면서, ‘미친-’은 ‘정신병자’로 이어졌고, ‘정신병동’으로까지 향했다. “과대망상, 편집증 환자”이자, “미치광이”이고, “광기에 빠진 망상 장애환자”라고 불렸다. “민주주의가 한순간에 한 정신병자에 의해 파괴”되고 있으며, “정신병자 한마디에 온통 나라가 들썩”인다고 했다. “다시는 정신병자가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게 하지 않도록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려 달라”고 호소했다.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 정신과의사, 교수 할 것 없이 “윤석열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신병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정신병자 윤석열을 빨리 체포해야” 한다고 했다. 윤석열을 엄호하는 “국힘은 정신병동”이고, “미치광이를 끼고 도는 집단도 미치광이”로 불렸다. “치료 불가능한 정신병자로 정신병원에 넣어야 한다”라는 말로 이어지는 정신장애혐오 발언은 어디서나 손쉽게 들을 수 있었다.

- 의도 없이 발음되는 말

그리고, 나는 학생 A를 생각했다. 정신장애를 겪고 있는 학생 A가 이 말을 오롯이 듣고 있다고 상상하니 오싹했다. 비장애인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을 모욕적으로 암시하기 위해 장애는 너무 오랫동안 동원되었다. 병신, 지랄, 미친과 같이 관용어로서 일상 속에 스며있는 낱말부터, 눈먼 돈, 꿀 먹은 벙어리, 절름발이 정책과 같은 은유로 흔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득차있다. 장애로 범주화된 특성들은 오랫동안 가치 절하된 열등함으로 언어의 살과 피에 스며있다. ‘장애’는 비하와 혐오의 용법으로 수도 없이 반복되며 언어의 무의식을 형성한다. 그러다보니, 장애 혐오표현을 완벽하게 피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나쁜 의도 없이, 차별할 의도 없이, 혐오할 의도 없이도 ‘장애’는 충분히 모욕으로 발음된다.

하지만,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올바로 판단하지 못한다’라는 멸칭으로 ‘미친’, ‘정신병자’와 같은 표현은 의도와는 무관하게 혐오와 부정적 편견을 강화한다. 누군가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비난할 목적으로 장애를 동원하는 것은 장애인을 우리사회에서 의식·무의식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는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혐오를 지속시키며 장애라는 말 자체를 욕으로 만들어 버린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레이 랭턴은 혐오 표현 속 권력관계에 주목했다. 랭턴에 따르면, 혐오표현은 “1)소수자들이 열등하다고 서열을 매기고 ranking, 2)그들을 향한 차별을 정당화하며legitimating, 3)그들에게서 부당하게 권력을 박탈하는depriving 것”1)으로 혐오대상을 열등한 지위로 종속시킨다고 한다. 상대를 나와 다른 부류로 분류하여 서열화하고,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결국 자신과 관계 맺을 사람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동성애는 정신병이다’ 혹은 ‘페미니스트는 정신병자다’ 같은 혐오 표현들 역시 정상-보편 권력의 폭력이다.

- 세계를 다시 발음할 언어

누가 폭력을 먼저 예감하는가? 도래할 폭력에 몸을 움츠리는 자들은 누구인가? 타자가 겪는 폭력에 응답하려는 자들은 누구인가? 존엄함을 착취당하는 작고 취약한 존재들, 손쉽게 버려지고 무시당하는 타자들, 자신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참혹함을 견뎌내야 하는 소수자들, 장애인-여성-성소수자-빈민-이주민-청소년-... 우리, 폭력을 먼저 예감하는 자들의 민주주의에는 평등은 도달해야할 목적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모든 참여자는 여성·성소수자·장애인·청소년·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대상화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라거나 “특정 대상에 대한 욕설이나 차별, 혐오, 외모 평가 발언 없이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같은 <평등한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이 풍경으로 있는 세계는 이렇게 예시되기도 한다.

예1) “5.18을 겪은 시민분의 평일 집회 발언을 듣고 지난 14일(토요일) 집회 무대에서도 발언해주셨으면 해 부탁드렸어요. 그런데 평일 집회 발언 때 ‘정신병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섭외 요청을 드리면서 ‘다양한 사람이 함께하고 있으니 그런 표현은 지양해 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러자 그분께서 14일 발언에서는 ‘다양한 시민이 함께하고 있다’라는 메시지까지 담아주셨어요.”2)

->광장이 열리자, 정치적 언어감각도 활짝 열렸다.

예2) “중증 정신장애를 가졌다고 밝힌 발언자는 “지난 7일 윤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에 참여했다가 환청 때문에 병원에서 집회 참여를 금지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도 농민이다. (경찰이 전봉준 투쟁단 진입을 가로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약을 먹어도 잠이 안 오더라. 그 길로 나왔다”고 했다.”3)

->광장이 열리자, 폭력의 예감도 활짝 열렸다. 서로가 서로의 광장이 되고, 서로가 서로의 민주주의가 되는 이 곳에서 우리는 세계를 다시 발음할 언어를 뒤지고 있다.

- 다시 만난 세계에서

대통령으로서 통치권을 수행한 것일 뿐이라는 말을 옹호하는 파시스트들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미쳤네, 미쳤어’라는 말이 절로 머릿속을 맴돈다. 그리고 다시 ‘아차차’ 한다. 의료적 맥락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으나, 나는 이 ‘미친’이라는 말 앞에서 긴장하고자 한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역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조지 오웰)는 것을 기억하고자 한다. 학생들의 눈빛이 일제히 학생 A에게 쏠렸던 그 순간, ‘미친’이 불러일으키는 그 긴장을 기억하고자 한다.

나도 모르게 정상/비정상을 구분하기 위해 쓰지는 않는지, 수용/배제의 맥락에서 쓰고 있지는 않는지, 정신장애 당사자에게 이 흔한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서 사유하고, 느끼려 한다. 광장 안, 저마다의 모양과 색깔과 반짝이는 존재자들 중에 평생 미친, 지랄, 병신, 또라이, 정신병자 소리를 들으며 지냈을 어떤 사람이 ‘있음’을 느끼며, 생각한다.

좋은 단어와 나쁜 단어를 명확하게 가를 수 있는 기준이 있을 리 없다. 맥락과 배치에 따라서 언어의 의미는 변주된다. 언어의 의미는 경합하고, 갈등하고, 불타오르고, 화해하고, 뭉개지며 언어의 계보를 만들어 갈 뿐이다. 언어는 우리의 의식/무의식의 풍경을 만들고, 우리는 언어의 풍경 속 세계를 조망한다. 그러다 어떤 언어가 지배 권력을 행사하려 들 때, 우리는 그 언어를 버리고 권력이 우리의 언어를 지배할 수 없는 문법을 발명해야 한다. 장애를 둘러싼 언어 속에 배치되어 있는 혐오와 폭력성으로부터 떠날 준비와 연습을 해야 한다.

그 연습을 하기에 지금 열린 광장이 딱, 이다. 언어를 고쳐 쓰는 것, 조금 느리고, 더디고, 덜컹거리지만 그것이 필요한 시간임을, 정치적 언어의 감각을 다듬어 나갈 수 있는 시의적절한 때가 왔다. 바로, 지금 세계를 다시 발음해 볼 시간이다.

노들야학 학생이 쓴 글자, '장애인'. 사진 서한영교
노들야학 학생이 쓴 글자, '장애인'. 사진 서한영교

 

1) 유민석 (2019),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 서해문집, 46쪽

2) “반짝이는 응원봉 보며 자신감 있게 ‘다만세’ 틀었죠”, 프레시안, 2024년 12월 19일 기사

3) 경찰 트랙터 막은 남태령 집회현장 되다 “경찰 차빼, 尹 방빼”, 미디어오늘, 2024년 12월 22일 기사

 

* 필자 소개

서한영교 작가. 노들장애인야학교사. 시를 읽고, 번역하고, 가르치고, 쓴다. 시, 를 살아내고 있는 수상한 자들을 쫓다 보니 노들야학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만났다. 이곳에서 시, 는 종이 위 단어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일으키는 사건으로 펼쳐진다는 것을 혹독하게 배우고 있다. poetrypunx@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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