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서한영교의 시,의적절
눈부시-: 내려갈수록 솟아오르는 자긍심에 눈이 부시다
1칸: 그녀, 가 휠체어에서 내려와 혜화역 2번 출구 계단에 앉았다.
2칸: 쿵.
3칸: 두 손바닥으로 계단을 밀며 한 칸.
4칸: 쿵.
5칸: 엉덩이를 찧어가며 한 칸.
6칸: 쿵.
7칸: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8칸: 쿵.
9칸: 그녀, 의 몸이 휘청거린다.
10칸: 쿵.
11칸: 저러다, 곧 몸이 내려앉을 것만 같다.
12칸: 쿵.
13칸: 엉덩이에 피멍이 들 것이 분명하다.
14칸: 쿵.
15칸: 엘리베이터만 탈 수 있다면 간단한 일이었다. 2024년 4월 19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저녁 8시 11분. 혜화역 2번 출구에 있던 엘리베이터는 고장 나지 않았다. ‘정상’ 작동되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방패를 든 서울교통공사 문지기들은 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철 승강장으로 가려는 그녀, 를 가로막았다. 문지기들은 반복해서 말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왜냐고 물어보면 “시위할 것 같아서”라고 했다. 출입구를 막아야 할 그 어떤 근거도 없었다. 호소하고, 분노하고, 부탁하고, 애원하고, 신경질 부리고, 다시 분노하며 “제발 집에 좀 갑시다”라고 얘기했지만 문지기들은 비켜서지 않았다.
16칸: 쿵.
17칸: 「법 앞에서」라는 카프카의 단편 소설 속 문지기와 닮았다. 시골 사람이 와서 문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문지기는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소”라고 말한다. 시골 사람은 문지기에서 묻는다.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겠소?” 그러자 문지기는 “가능한 일이지”라고 말하며 계속해서 “그러나 지금은 안 돼”라고 협박한다. 시골 사람은 입장을 허락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다 문 앞에서 끝내 임종을 맞는다는 짧은 이야기다.
18칸: 쿵.
19칸: 하지만 그녀, 는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소”라고 말하는 문지기들이 지키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입장을 “허락받을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언젠가 열릴 ‘나중에’를 희망하지도 않았다. 그녀, 는 지하철 계단을 향했다.
20칸: 쿵.
21칸; “왜 못 가게 합니까? 집에 가려고, 지하철을 타려고 하는 것일 뿐”인데 “정말로 이게 말이 됩니까”라고 외치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22칸: 쿵.
23칸: 그녀, 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24칸: 쿵.
25칸: 마음이 쿵쿵한다.
26칸: 그녀, 의 미간이 찌그러진다.
27칸: 쿵.
28칸: 시간이 한 없이 더디게 흘러간다. 낯설다.
29칸: 쿵.
30칸: 몇 천 번씩 다니던 혜화역 2번 출구 계단인데, 이 계단이 이렇게 길고 긴 계단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계단이 이렇게까지 가파른지 몰랐다.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했던 이곳 혜화역 2번 출구 계단길이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험난할 것이라는 것을 떠올려본 적 없다는 것에 놀란다.
31칸: 쿵.
32칸: 그녀, 가 한 칸씩 내려올 때마다 세계가 쿵. 쿵. 쿵 울리는 것 같다. 자신의 체중을 실어 문턱으로 가득한 문명 세계를 쿵. 쿵. 쿵 두드리고 있는 것 같다. 문명의 내부로 기어 내려가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능성을 쿵. 쿵. 쿵 묻고 있는 것 같다. 유독, 권리를 외치며 저항하는 장애인에게는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고 있다.
33칸: 쿵.
34칸: “저 사람들 뭐하는 거야? 이게 무슨 민폐야.” 계단을 올라가던 사람이 말했다.
35칸: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36칸: 심장이 빠르게 뛴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 괜찮을 때도 되었는데, 쉽지 않다.
37칸: 쿵.
38칸: 10년 전, 시각장애인 반려자와 혼인하려는 나를 두고 어머니께서 “니 평생 봉사활동 할라고 그라나? 우찌 데리고 살낀데? 가는 생각이 있나 없나. 이게 무슨 민폐고.” 어머니는 장애가 있는 나의 반려자를 민폐라고 여겼다. 그 때,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39칸: 쿵.
40칸: 민폐, 폐를 끼치는 자들. 사회적 부담이자, 가족의 부담이고, 공동체의 부담이 되고 마는 민폐를 끼치는 자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신 없이도 잘 할 수 있고, 당신이 없으면 더 잘 할 수 있다”1)는 말을 반복해서 듣는 자들. 존재 자체로 민폐가 되어버리는 자들. 당신들은 우리를 그렇게 여겼다. 장애를 둘러싼 물리적 문턱, 감각적 문턱, 인식론적 문턱… 이 수많은 문턱들에 숨이 턱턱 막힐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41칸: 쿵.
42칸: “모든 삶 중 그 어떤 삶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환대하기 위해 열리는 존재일까?”2)
43칸: 쿵.
44칸: 장애를 둘러싼 수치스러운 각인과 낙인의 언어로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함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내리고 있는 그녀, 의 뒷모습을 본다. 그녀, 가 자신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는지가 아니라 자신을 얼마나 낮출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뒷모습을 본다. 모욕감과 분노마저 수반하는 저 낮아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삶의 기술을 본다. 낮아지는 것을 자청하며 낮은 자리를 향하는 그녀, 의 자긍심이 눈부시다.
45칸: 쿵.
46칸: 화폐, 학력, 부동산으로 ‘쌓아올린’ 자긍심이 아니라 수치심, 모욕, 배제, 침묵을 뚫어내고 ‘솟아오르는’ 자긍심. 쿵쿵거리느라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자긍심. 굳은살이 단단히 배긴 자긍심. 얼룩덜룩한 자긍심. 나는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눈앞에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세계는 경이로워진다.
47칸: 쿵.
48칸: 이족보행자라면 15초면 내려올 수 있는 그 계단을 벌써 15분도 훌쩍 넘게 그녀, 가 내려오고 있다. 끈질기게. 악랄하게. “여러분도 장애인이 된다면 저처럼 계단을 기어 내려오시겠습니까?” 외치며 내려오고 있다.
49칸: 쿵.
50칸: 마지막 한 칸 남았다.
51칸: 쿵.
그녀, 가 마침내 계단을 다 내려와 활동가들이 들고 온 전동휠체어에 앉았다. 마침내 승강장에 도착해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려고 했으나 “특정 단체의 불법 시위로 인해 무정차 통과”했다. 서울교통공사는 9시 4분부터 총 8번의 무정차 통과를 진행했다. 누군가, 저녁 9시 53분 밀양행 기차 티켓을 흔들어 보았지만, 서울역으로 가는 지하철은 그냥 지나가버렸다. 집에 가려고 계단을 기어서 내려왔더니, 지하철은 무정차 통과로 지나가 버렸다. 심장이 전속력으로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뛴다.
1)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정일준 옮김, 새물결, 2008, 32쪽.
2)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외(릴케전집 2)』, 김재혁 옮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2009, 526쪽.
* 필자 소개
서한영교 작가. 노들장애인야학교사. 시를 읽고, 번역하고, 가르치고, 쓴다. 시, 를 살아내고 있는 수상한 자들을 쫓다 보니 노들야학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만났다. 이곳에서 시, 는 종이 위 단어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일으키는 사건으로 펼쳐진다는 것을 혹독하게 배우고 있다. poetrypunx@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