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관으로 호흡하고 발로 글 쓰는 이정민
“올해에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 가겠다”
‘시설우수이용인상’ 받고 탈시설한 박초현
노원구가 준 상장 찢고 “시설 폐쇄하라”
이어 추모제 개최… 죽음과 삶을 잇는 열사들
제5회 탈시설장애인상 수상자로 장애여성 이정민과 박초현이 선정됐다.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은 26일 오후 7시, 서울시 중구 서울시청 인근에서 ‘탈시설장애인상 시상식’을 열고 두 사람에게 상금과 상장을 수여했다.
- 이정민 “독립, 때론 피곤… 하지만 매일 투쟁할 것”
이정민은 2019년에 탈시설한 후 현재 성동구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다. 정민은 목관과 호흡기로 숨을 쉬고 침대형 휠체어를 사용하는 와상장애인이다. 태블릿, 마우스 등을 가지고 발로 글을 써서 사람들과 소통한다.
정민은 지난해 많은 도전을 겪었다고 한다. 그는 “숨을 쉬기 위해 사용하던 목관이 갑자기 단종됐다.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숨]과 함께 식약처,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투쟁하면서 내 몸에 맞는 새로운 목관을 찾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들여 내게 적합한 보조기기를 찾아 새 휠체어를 맞췄다”고 말했다.
탈시설했지만 외출이 쉽지만은 않다. 목관이 흔들리는 것도 문제지만 정민의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차량이 없는 것도 큰 문제다. 정민은 “현재 구급차로만 이동이 가능하고, 이동 비용이 지원되지 않아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동권과 활동지원서비스 관련 투쟁을 할 것이라 전했다. 정민은 “올해에는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들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만나러 콘서트와 사인회에 갈 것”이라며 “독립이 때론 좀 많이 피곤하지만 지금처럼 매일 투쟁하겠다”고 다짐했다.
- 탈시설장애인 박초현은 시설사회를 찢어
박초현은 7살 때부터 20년간 장애인거주시설에 있었다. 지난해 6월,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주택에 입주했다. 올해 1월부터는 완전히 탈시설한 후 자신의 집에서 살고 있다. 초현의 탈시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시설에서 나온 지 1년도 안 됐으니 초현은 시설 밖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탈시설운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국회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탈시설을 외쳤다. 현재는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서울지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이런 초현이 지난해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인 4월 20일에 노원구로부터 ‘시설우수이용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초현은 “시설에서 착한 일 한다고, 모범적이라고 이 상을 주더라. 그 자리에서 부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오늘(26일) 들고나왔다”고 말했다.
초현은 “찢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외친 뒤 노원구가 준 상장을 북북 찢었다. 착해 보이지 않았고 모범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해맑게 웃으며 상장을 찢는 초현에게 장애인들은 박수와 함성을 보냈다. 적당히 찢어도 멋진데, 초현은 더는 찢을 수 없을 때까지 조각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시설우수이용인상은 없어진 걸로 하고요. 없앤 걸로 끝내지 않고 오세훈과 윤석열에게 맞서 열심히 싸우는 제가 되겠습니다!”
- 어제의 죽음과 오늘의 삶을 잇는 장애해방열사들
탈시설장애인상 시상식 이후에는 장애해방열사들에 대한 추모제가 진행됐다.
윤재선 강릉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최근 별세한 김용섭 원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을 향한 추모편지를 띄웠다. 윤 활동가는 “아직 장애해방이 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 몰랐다. 무뚝뚝한 말투지만 정 많고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하겠다”고 전했다.
이경희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최옥란 열사의 뜻을 받들어 얼마 전부터 기초생활수급 당사자 모임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활동가는 “이 모임을 통해 최옥란 열사처럼 당사자가 빈곤정책에 목소리를 내는 ‘수급자 당사자 운동’의 초석을 세우고자 한다”며 “가난해도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고 가난이 두렵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림은 지난해 별세한 김진수의 뒤를 이어 김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김동림 소장은 “석암베데스다요양원 투쟁을 하며 진수를 알게 됐다. 진수와 함께 ‘마로니에 8인’ 투쟁을 했다. 진수가 늘 입에 달고 산 말은 ‘까짓거, 하면 되지’였다. 이 말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됐다. 진수 덕분에 마로니에공원에서의 노숙투쟁이 행복했다”고 술회했다.
장종인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무국장은 이덕인 열사의 일인칭 시점에서 동지들에게 전하는 가상의 편지를 낭독했다. 장 사무국장이 쓴 편지 속 이덕인 열사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죽은 지 30년이 지났습니다. 장애인과 노점상은 제가 꿈꿨던 인간다운 삶을 이뤘습니까? 제 죽음은 단순히 이덕인 개인의 죽음이 아닙니다. 빈곤과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사회 구조 속에서, 성장과 개발을 위해 장애인과 노점상을 배제하고 탄압한 폭력이 만들어낸 죽음입니다. 투쟁해 주십시오. 장애인도 시민으로 존중받는 민주주의를 동지들이 반드시 쟁취해 주십시오.”
오영철 이현준열사추모사업회 회장은 이현준 열사의 생애와 죽음을 상세히 들려줬다. 근육장애인인 이현준 열사는 1965년 태어나 어머니 등에 업혀서 학교에 다녔다.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잘했던 그는 소설, 수필 등으로 각종 장애인문학상 등을 휩쓸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여러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며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법과 제도에도 관심이 많아 장애인연금 정책 수립,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등 활동에 힘을 쏟았다. 시민을 상대로 장애인권 관련 강의를 하기도 했다.
딱 20년 전인 2005년, 이현준 열사는 오 회장에게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오 회장은 “그가 내게 ‘이제 장애인자립생활 운동을 해야 한다. 장애인 당사자가 주체가 돼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함께하자’고 말했다. 이 말은 현재의 우리를 살리는 말”이라고 말했다.
시상식 및 추모제 참가자는 서울시청에서 광화문광장까지 행진한 후 광장에서 1박 노숙농성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