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싸우는 인간의 탄생 _ 박경석①

8월 20일, 박경석 대표가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 중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이가연
8월 20일, 박경석 대표가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 중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이가연

나는 13년간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사였고 야학을 그만둔 후엔 장애인과 장애인운동에 관한 글을 신문에 썼다. 그 글을 묶은 책이 나오자 시민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자리가 많이 생겼다. 장애인과 함께 살아본 경험이 없는 평범하고 선량한 비장애인들은 늘 이렇게 묻는다.

그런 일의 기쁨이 무엇인가요?

자주 받는 질문임에도 이것은 마치 100미터 달리기의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처럼 나를 긴장시킨다. 정말 잘 말하고 싶어서 아주 애를 쓴다.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든 함께 사는 일의 고단함을 피해 이 세계의 오롯한 기쁨을 증명해야 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무너졌다거나 세상에 대한 이해가 바뀌었다거나 다르게 관계 맺고 서로를 돕는 공동체적 삶의 기쁨에 대해 온갖 아름답고 추상적인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분명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왜 내 입에서 줄줄 나오는 말들은 모두 차별과 슬픔, 분노와 싸움에 관한 것인지. 나는 신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왜 사람들은 한껏 엄숙한 표정으로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자꾸 필기를 하는 것인지.

‘아, 오늘도 틀렸군.’

노들에선 모두 아는 것이어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들을 바깥에선 몹시 애를 써서 설명하는데도 언제나 실패한다. 장애가 있는 사람을 TV 모금 프로그램이나 꽃동네 봉사 프로그램으로만 접해본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 그날도 나는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이해시켜 보려다가 문득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기분에 휩싸였고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음... 그러니까... 사랑에 빠졌다고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웃음이 났어요. 세상이 다르게 보였어요. 다시 태어난 것처럼.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사는 게 하나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어요.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었냐고요? 전부 다요.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 사랑, 해보셨을 거잖아요?”

그 순간 마스크 위의 까만 눈들이 일순간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알죠, 그런 마음! 하는 눈빛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TV에서 본 장애인이 사라지고 자신이 사랑했던 누군가를 떠올린 그런 얼굴들이었다. 매번 헛스윙만 열심히 하다가 처음으로 홈런을 날린 기분이랄까. 아, 이렇게 말하면 되는구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때 누군가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그럼 왜 야학을 그만두셨어요?”

호기심 가득한 눈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대답했다.

“사랑이, 끝나서요.”

그러자 사람들은 이번에도 ‘아! 알죠!’ 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구도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 다 이해했다는 듯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무언가 정확히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그날 처음 받았다. 그게 올해 2월의 일이다. 야학을 그만둔 일에 대해 그렇게 말하기까지 7년이 걸렸다.

그즈음 노들야학에선 박경석 교장의 퇴임식이 있었다. 박경석은 1994년 노들야학 교사가 되었고 3년 뒤 교장이 되었다. 2001년엔 장애인이동권연대를, 2006년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를 조직해 대표가 되었고, 현장과 운동을 쇠사슬로 연결하듯 노들야학과 전장연 사이를 자기 몸으로 단단하게 연결해 서로를 끌어당겼다. 덕분에 노들야학은 교육만큼 운동에 진심인 학교가 되었고 삶과 배움, 투쟁이 분리될 수 없이 얽히고설킨 정체불명의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그는 2021년 무려 24년간의 교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무사히 평교사가 되었다. 그것이 자기 인생의 가장 큰 자부심이라고 경석이 말했다.

지난 2월 25일 진행된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의 퇴임식. 박경석 대표가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고 있다. 사진 정택용 
지난 2월 25일 진행된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의 퇴임식. 박경석 대표가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고 있다. 사진 정택용 

4월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경석이 대학로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가로막고 혼자 시위를 하는 영상을 보았다. 저상버스가 아닌 ‘일반버스’가 정차하면 그 앞으로 휠체어를 밀고 가서는 버스의 얼굴 중 볼이나 코 정도에다가 A4 한 장 크기의 스티커를 부적처럼 덕지덕지 붙이는 것이었다. 부적에는 ‘비장애인만 타는 차별 버스 아웃!’ ‘대·폐차시 저상버스 도입 의무화’라고 적혀 있었다. 기사님이 나와서 왜 여기서 이러느냐, 따지려면 서울시에 가라,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경석이 나도 세금 내는데 나는 왜 버스를 못 타느냐면서 계속 부적을 붙여대자 기사님이 신경질적으로 부적을 떼어서 구겨버렸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나도 장애인인데, 하며 껴들어서는 비장애인들의 편을 들었다. 왜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식 집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보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나는 20년 전에도 이런 비슷한 걸 보면서 가슴이 쿵쾅댔던 적이 있다. 근사한 은발을 뒤로 묶은 눈빛이 형형한 중년의 남자가 수갑과 쇠사슬로 자신의 몸과 버스의 운전대를 묶은 채 버티고 있었고 바깥에선 수십 명이 버스를 에워싼 채 구호를 외치고 있는 시위였다. 나에게 장애인운동이라는 새롭고 충격적인 세계는 버스를 점거한 장애인, 그러니까 박경석과 함께 왔다.

20년이 흐른 그 거리에서 경석이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경석은 20년 전과 달리 수갑도 쇠사슬도 없이 달랑 종이 몇 장을 들고 있을 뿐이었고 주변엔 구호를 외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야말로 전면전처럼 느껴졌다. 그즈음 경석은 매일 그런 일을 했다. 점잖아지거나 둥글어지기는커녕 더욱 맹렬해진 경석의 나 홀로 시위에서 내가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너무 늙어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천천히 늙어 62세가 된 박경석의 파뿌리 같은 백발은 이 운동의 끈질긴 역사와 변하지 않는 현실, 경석의 고집스러움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때 생각했다.

‘나에겐 사랑이었는데 박경석에겐 삶이었구나. 내 사랑은 끝났는데 누군가의 삶은 계속되고 있구나. 나에게 그것은 사랑이어서 끝났다고 말하고 떠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삶인 사람에게 저 현장은 자기 자신과 분리할 수 없구나.’

가슴이 좀 시리고 아팠다. 한동안 그것이 떠날 수 없는 사람을 그 자리에 남겨두고 먼저 떠난 사람의 죄책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저 현장에 없다는 것, 내가 그저 관객이 되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던 것이었다. 저 현장의 긴장과 불안을 온전히 겪은 뒤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교장선생님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오묘한 기쁨이 마음속에 차올라서 “잘했어, 교장샘” 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리지 못한다는 게 가슴 시렸던 것이었다. 푸석푸석한 백발을 휘날리며 거리에서 늙은 경석의 삶이 너무 멋있어서, 그와 함께 살고 싸우던 시절이 그리워서 가슴이 먹먹했던 것이었다.

2012년이었던가. 야학에서 활동하던 시절, 막 신입교사가 된 승천은 오래된 활동가들의 독특한 행동패턴이 있다며 알려주었는데 이런 것이었다. 수업을 마친 뒤 늦은 밤 술자리에 둘러앉은 활동가들은 시답잖은 하소연을 늘어놓다가 어느샌가 박경석 교장의 뒷담화를 하기 시작한다. 진짜 욕하고 싶은 사람은 각자의 가슴속에 꽁꽁 숨겨두고 만만한 경석을 걸고넘어지는 것이다. 교장샘은 너무 욕심이 많아. 맞아. 너무 쓸데없는 데서 고집을 부린다니까. 맞아! 노들은 지구를 지킬 수 없다고. 맞아!!!

어느덧 새벽이 되면 짜증과 원망을 한껏 토로한 사람들은 좀 너그러워져 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교장샘 귀엽잖아. 그렇지. 갑자기 분위기 전환된다. 그래도 교장샘만큼 사심이 없는 사람도 없어. 그렇지. 박경석만큼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도 없어. 그렇지. 노들은 지구를 지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그렇게 속죄하듯 경석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표현하다가 ‘그만한 사람 없다’로 마무리한 뒤 헤어진다. 그리고 다음 날. 어김없이 술자리가 만들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교장선생님의 뒷담화를 하다가 거짓말처럼 회개하고 또 사랑과 존경으로 마무리. 다음날도, 다음날도, 다음날도.

어느 날 나는 그 반복이 지겨워져 야학을 떠났다. 경석은 그 자리에서 나처럼 떠나는 사람들을 27년 동안 바라보았다. 나도 13년간 해보았기 때문에 그 일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가 곧 노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박경석은 절대 노들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우리는 그를 충만히 믿었고 사랑했고 존경했고 충성했고 마음껏 미워했고 원망했고 함부로 대했다. 활동가들이 준비한 경석의 교장 퇴임식 제목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우리의 분열하는 마음을 절묘하게 연결한 뜨겁고 애틋한 헌사였다.

8월 20일, 홍은전 작가와 박경석 대표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이가연
8월 20일, 홍은전 작가와 박경석 대표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이가연

두 번째 인터뷰를 할 때 경석에게 물었다.

- 살면서 잘한 선택 세 가지가 뭐예요?

- 첫 번째는 노들야학. 노들이 아니면 내 인생이 해석이 안 되지 뭐.

그의 대답은 짧았고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고, 그것에 대해 말한다는 게 너무 간지럽고 오글거렸기 때문이다. 가족일수록 대화가 어렵듯이 말이 필요 없는 사이일수록 인터뷰하기 더 어렵다. 예상했던 일인데 막상 닥치니 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낭패감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경석이 눈치 없이 말했다.

- 너도 그렇지 않아?

나는 회피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경석에게 질 수 없다는 마음이 발동했다.

- 저는 아닌데요. 저는 야학을 선택하지 않았어요.

성의 없고 삐딱한 답이었지만 경석은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놀리듯이 말한다.

- 그럼, 운명이었어?

나는 그냥 웃는다. 경석도 웃는다.

경석의 예상과 달리 내가 살면서 했던 선택 중 가장 잘한 것은 야학을 한 게 아니라 야학을 떠난 것이다. 노들을 떠났기 때문에 노들에 관해 쓰게 되었다. 노들에선 말할 필요가 없이 당연했던 것들을 바깥에선 끊임없이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글을 쓴 것도 잘한 선택이다. 글쓰기가 죄책감을 책임감으로 바꿔주었다. 덕분에 이렇게 멋진 인터뷰도 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노들 바깥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진지하고 무거운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것은 제가 열렬히 사랑에 빠진 이야기입니다. 저는 작고 약한 존재를 만나 차별에 저항해야 한다는 정의감이나 책임감으로 이 일을 선택한 게 아닙니다. 아주 강력하고 매력적인 존재들을 만나서 멱살 잡혀 끌려간 것입니다. 그들이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고 그것이 나를 살렸습니다. 저에게 글쓰기란 제가 사랑했던 존재들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우리가 만든 변화를 불멸의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입니다. 제 인생을 망쳐놓은 저의 구원자들의 이야기. 그 긴 이야기를 이제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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