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싸우는 인간의 탄생 _ 박경석⑤

2001년 2월 6일, 장애인들이 서울역 지하철 선로를 점거했다. 이 선로 점거를 시작으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2001년 2월 6일, 장애인들이 서울역 지하철 선로를 점거했다. 이 선로 점거를 시작으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 지하철 철로 점거

2001년도 1월 22일 지하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이 리프를 타다 떨어져 사망해요. 그보다 1년 전 노들야학 학생 이규식이 혜화역에서 리프트를 타다 떨어져서 크게 다친 사고가 있었어요. 우리가 손해배상소송을 했고 결국 이겨서 혜화역엔 엘리베이터가 설치됐어요. 규식이처럼 용감한 장애인들이나 돌아다녔지 휠체어를 탄 사람은 지하철을 아예 이용할 엄두도 못 내던 시절이었어요. 중증장애인들은 모두 집 안에서만 지내고 있었죠. 야학은 그런 사람들을 봉고로 등하교시켰는데 하루 4시간 수업하는데 등하교 운전에만 8시간이 걸렸어요. 그렇게 노력해도 이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7~8명밖에 안 됐고요. 노들야학은 이 문제에 대해 머리로만 알았던 게 아니라 불타는 욕구와 필요를 갖고 있었어요.

지금이야 어떤 사건을 만나면 각이 나오지만 그땐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철도공사를 만나 협상을 해야 하는데 협상의 주체도 없었어요. 여러 단체를 모아 오이도사건대책위를 만들었어요. 각자 성격이 다른 단체들이 갑자기 만났으니 무엇 하나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지지부진한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딱 하나 관철시켰어요. 지하철 철로 점거였어요. 저는 이 죽음을 싸움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2001년 중증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이 왜 그렇게 불붙을 수 있었을까? 나는 그 철로점거가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소위 대박이 난 거죠.

1980년대 미국의 이동권 투쟁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버스를 점거하고 그 밑으로 기어들어가 버티는 장애인들의 모습이었죠. 와, 우리도 이런 거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우리는 버스가 아니라 지하철을 멈춰야 하는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도현이와 서울역으로 답사를 갔어요. 5분도 채 안 되어서 다음 차가 들어왔어요. 만약 장애인이 선로에 내려갔는데 다음 차가 그걸 모르고 들어와 버린다면 너무나 위험할 것 같았어요. 플랫폼에 앉아 지하철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있는데 묘안이 떠올랐어요. 모든 지하철은 정해진 위치에 정차하니까 그보다 더 뒤에 서 있으면 되겠더라고요.

2001년 10월 31일, 버스타기 투쟁 중 박경석 대표가 사다리를 목에 걸고 경찰의 진압에 항의하고 있다.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2001년 10월 31일, 버스타기 투쟁 중 박경석 대표가 사다리를 목에 걸고 경찰의 진압에 항의하고 있다.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사고가 있은 지 보름이 되었을 때 서울역에서 집회를 했어요. 끝나고선 사람들에게 장애인이 떨어져 죽은 그 지하철에 항의하러 가자고 했어요.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 하나둘씩 플랫폼으로 모였어요. 선로에 내려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몰랐어요. 그걸 아는 사람은 나를 내려줄 야학 교사 몇 명뿐이었죠. 지하철 한 대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가자마자 제가 선로 아래로 내려갔어요. 참여했던 사람들도 깜짝 놀랐죠. 도현이는 역무실로 가서 그 사실을 다음 기관사에게 알려달라고 했어요.

곧이어 다음 전동차가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어요. 얼마 후 빵 하고 전동차가 경적을 울리면서 들어왔어요. 우리가 점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서히 들어와 플랫폼 절반 정도에서 완전히 멈춰 섰어요. 내가 막은 자리와 전동차 사이에 공간이 만들어졌죠. 그러자 플랫폼 위에 있던 장애인들이 선로 아래로 용감하게 내려오기 시작했어요. 그건 전혀 약속된 일이 아니었어요. 최옥란 열사 같은 사람들이었죠. 청계천에서 노점하면서 전장협과 함께 생존권을 외치며 거리에서 투쟁하던 동지들이었어요.

장애인이 지하철 타다 떨어져 죽어도 뉴스 한 꼭지 나오고 끝인데 우리가 지하철 철로에 내려가 30분을 막았더니 서울시도 놀라고 언론도 놀라고 운동사회도 깜짝 놀랐어요.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많은 운동이 제도화되고 투항하는 분위기에서 갑자기 중증장애인들이 그렇게 막 싸우는 게 좀 신기했던 것 같아요. 이 기운을 이어나가고 싶었어요. 처참한 죽음도 싸우지 않으면 개인적 죽음이 되고 사소해 보이는 죽음도 싸우는 주체가 있으면 사회적으로 의미 있게 복원돼요. 오이도역 참사를 해결하려고 모였지만 이건 오이도역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죠. 오이도역에 엘리베이터가 생기면 문제가 해결되나? 그럼 야학을 거기로 옮겨야 하나요? 이 문제의 본질은 아주 두껍고 거대해요. 선로 점거 한 번 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어요. 상설적으로 투쟁할 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해서 2001년도 4월 20일 장애인이동권연대가 출범했어요. 야학이 간사단체를 맡고 제가 대표가 되었죠.

2001년 여름,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서울역 앞에 설치된 천막 농성장.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2001년 여름,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서울역 앞에 설치된 천막 농성장.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이동권연대의 첫 작품으로 시청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어요. 2월에 ‘오이도 참사 해결하라’로 출발한 문제가 7월엔 ‘전체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것, 저상버스를 도입할 것, 특별교통수단(장애인콜택시)을 도입할 것’으로 확장되었어요. 그리고 광화문에서 버스를 대대적으로 점거했고 수십 명이 체포됐죠. 그 후 한 달에 한 번 버스타기 투쟁을 했어요. 정말 열심히 싸웠어요. 지하철 연착 투쟁도 하고 이순신 동상에 올라가 이동권을 보장하라고 플래카드도 내렸어요. 집안에 갇혀있던 중증장애인들이 하나둘씩 나왔고 그들이 매주 동대문운동장역에서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면서 시민들을 만났어요. 운동사회나 청년들의 연대도 활발했고 시민들의 호응도 아주 뜨거웠어요. 이동권 뱃지를 천 원에 팔았는데 어떤 날은 백만 원도 더 벌었죠. 돈 한 푼 없이 시작한 이동권연대가 그걸로 천막도 사고 밥도 먹었어요. 내 앞에 저상버스는 없어도 무언가 변하는 모습이 쭉쭉 보였어요.

- 희망의 물리적 근거

1년 내내 투쟁했어요. 처음엔 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워서 신이 났는데 아무리 싸워도 서울시가 답이 없었어요. 그러다 2002년에 5호선 발산역에서 장애인이 또 떨어져 죽었어요. 무력감에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도현이한테 물어봤어요. 우리 할 수 있는 거 다 해봤는데 이제 남은 게 뭐냐? 그랬더니 단식과 삭발이래요. 단식을 얼마나 하면 될까 물으니 장애인들이 단식을 한다는데 설마 2~3일이면 반응이 오겠죠, 했어요.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여러 명의 장애인들이 단식에 들어갔어요.

2002년 7월 1일, 발산역 리프트 장애인 추락참사에 대한 공개사과를 요구하며 광화문 천막농성 선포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2002년 7월 1일, 발산역 리프트 장애인 추락참사에 대한 공개사과를 요구하며 광화문 천막농성 선포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농성 들어가기 며칠 전에 인권운동가 서준식 선생님의 책을 읽었어요. 선생님이 감방에서 쓴 책이었는데, 광야에서 목소리를 외치는 것, 거리를 점거하는 것이 물리적 투쟁이고 그게 희망의 근거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걸 읽으니까 태수와 흥수 형이 했던 많은 말들이 바로 연결되는 것 같았어요. 활동가들이 대중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로서 조직된 사람들이 거리에 나가서 외쳐야 한다고, 그게 운동의 사명이고 본질적 힘이라고요. ‘희망의 물리적 근거’라는 말이 너무 좋아서 선생님과 통화를 하고 싶었어요. 전화해서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했어요. 그리고 물었어요. 우리가 국가인권위 점거농성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선생님이 웃으면서 그걸 왜 자기한테 묻느냐고 했어요. 인정받고 싶었던 거죠. 어떤 가치를 위해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확인받고 싶었어요. 힘없는 장애인 몇 명이 단식하고 점거하는 이런 것도 희망의 물리적 근거입니까? 선생님이 매우 의미 있는 투쟁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내가 주장하는 점거나 농성 방식에 대해 과격하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선생님 말이 큰 힘이 되었어요. 나는 나이 들어서 운동을 시작했고 운동 경험이 짧은 데다 선배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어요. 그런 걸 물어볼 동료나 선배가 없었어요.

이동권투쟁은 뜨거웠고 동지들도 많아졌어요. 찾는 곳도 많아지고 언론사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흥수 형은 2001년 7월에, 태수는 2002년 3월에 죽었어요. 언젠가 셋이서 우리 아파트 앞 정자에 앉아 술을 마신 적이 있어요. 셋 다 돈이 없으니 소주에 마른안주 하나 놓고서였죠. 흥수 형이 아주 외로워하던 시절이었어요. 장애인운동의 여러 족보를 설명하면서 운동은 무엇보다 시위가 중요하다고 했어요. 동정에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힘을 통해 쟁취해야 하고, 그 투쟁을 해나갈 활동가와 조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죠. 변변한 족보도 없는 변방의 복지관 출신인 우리 세 사람은 서로를 배신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함께 투쟁하자고 맹세했어요. 장애인 세 명의 정자결의였죠.

흥수 형과 태수는 90년대를 아주 치열하게 살았어요. 흥수 형은 청계천에서 장애인 노점상들을 조직해서 생존권 투쟁을 했고 노점상이었던 이덕인, 최정환 열사가 돌아가셨을 때 그 투쟁을 이끌었어요. 태수는 장애인 노동권을 요구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조직해 걷기대회를 만들었고 수배생활과 감옥살이도 했어요. 나는 야학 교장을 했죠. 고생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현장을 지키고 싶었어요. 흥수 형과 태수로부터 배운 거죠. 흥수 형은 가난한 장애인과 함께하면서 자신도 사는 내내 가난했고 운동 과정에서 생긴 상처 때문에 술을 많이 마셔서 결국 죽었어요. 태수는 DPI에 들어가 청년들을 조직하는 사업을 하던 중 과로로 쓰러져 죽었어요. 그들은 내 곁을 모두 떠났지만 운동을 하면 할수록 두 사람의 말이 옳았다는 걸 가슴 저리게 깨달았어요.

2001년, 서울역 앞에서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문화제를 열고 있는 사람들.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2001년, 서울역 앞에서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문화제를 열고 있는 사람들.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 39일의 단식

단식을 하면 하루 이틀은 진짜 배고파요. 조금 지나면 배는 안 고픈데 공허해요. 사람이 뭔가 먹고 마시면서 보내는 시간이 만만치가 않아요. 그걸 다 못하니까 할 게 없어요. 시간이 그렇게 안 가더라고요. 15일 정도 되니까 위기가 와요. 배가 아프도록 고프고 혈압과 혈당이 점점 떨어져요. 그러다 갑자기 훅 떨어질 수 있는데 그걸 조심해야 된대요. 30일이 넘어가니까 배고픈 건 없어지고 견디려면 견딜 순 있겠더라고요. 근데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니까, 예측이 되지 않는 거죠.

10일이 지나고 20일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어요. 어머니가 울면서 40일은 안 된대요. 예수님이 40일을 단식했는데 니가 예수도 아닌데 왜 40일을 하느냐고 말렸어요. 나는 40일까지 갈 생각은 없었는데 며칠이면 답이 오겠지 했던 예상과 달리 서울시가 철옹성처럼 꼼짝을 안 했어요. 집회하면서 버스 모형을 만들어 불태워도 보고 이명박 시장이 시의회에서 연설할 때 기습시위도 하고 별 수를 다 써 봐도 안 됐어요. 최재호 활동가가 26일 차에 쓰러지고 마지막엔 나 혼자 남았어요.

시간이 지나면서는 아, 이대로 계속 가면 죽겠구나,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명박이 대꾸도 안 하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죽음도 걸 수 있겠다, 그래, 죽겠다는 마음으로 가겠다는 결의도 생겼어요. 돌이켜보면 그렇게 죽는 것도 행복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갑자기 장애인이 되어서 그 지옥 같은 시간도 보냈는데 이렇게 치열하게 투쟁하다 여기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다고요.

활동가들은 그때 내가 잘못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대요. 30일째 되던 날 이동권연대는 이명박이 있는 서울시청 바로 아래 지하철 시청역 철로를 아주 대단하게 점거했어요. 첫 번째 선로점거했을 때처럼 오합지졸로 내려간 게 아니라 결의된 많은 장애인들이 쇠사슬 걸고 한 시간 이상 버티며 지하철을 막았어요. 76명이 경찰에 연행됐어요. 그게 압박이 되었던 모양이에요. 37일쯤 되니 서울시에서 연락이 왔어요. 2004년까지 모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 저상버스 버스 도입하겠다, 특별교통수단 도입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39일 되던 날 단식을 멈췄죠.

2002년 발산역 리프트 장애인 추락참사에 대해 박경석 대표가 서울시의 공개사과를 촉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는 모습. 단식 30일째, 많이 홀쭉한 모습이다. 사진 제공 노들야학 
2002년 발산역 리프트 장애인 추락참사에 대해 박경석 대표가 서울시의 공개사과를 촉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는 모습. 단식 30일째, 많이 홀쭉한 모습이다. 사진 제공 노들야학 

그런데 우리와 협의하는 건 죽어도 그 모양새가 싫었는지 일방적으로 통보하고는 서울시 홈페이지에 발표를 했어요. 우리 농성과 상관없는 시장님의 생각이라는 듯이. 이명박은 우리를 협상의 상대로도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공문으로 주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그 발표가 이 운동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죠. 그전까진 한국 실정에 맞지 않다면서 저상버스 도입 못한다, 예산 없어서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못한다고 버티던 서울시의 기세가 꺾였으니까요. 물론 그 약속이 지켜지진 않았지만 그 흐름이 이어져 2004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저상버스가 들어왔고 2005년엔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이 만들어졌어요.

이 투쟁으로 우리는 중증장애인이 이 사회와 연결되는 첫 번째 끈을 만들었어요. 이동권은 한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핏줄 같은 것이죠. 이 연결선을 왜 지금까지 못 만들었냐면 돈 때문이에요. 이 사회는 중증장애인들에게 투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돈이 아깝다는 거죠. 돈이 생기면 하겠지, 언젠가는 하겠지, 하면서 안 해요. 장애인의 생존을 ‘기본적으로 보장해야 할 권리’가 아니라 ‘돈이 있으면 하는 복지’라고 여기는 생각, 이것은 명백한 대중교통의 문제인데 건설교통부가 아니라 자꾸만 보건복지부로 떠넘기려는 태도와 마지막까지 싸웠어요. 이 법엔 이동권이 권리로 명시되어 있고 소관 부처가 건설교통부예요. 일반의 부처는 장애인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편견을 깨부수고 장애인을 시민으로 인정하는 물리적 환경을 만든 거예요.

이동권 투쟁을 통해서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인 고병권 선생님이 책 《묵묵》에서 표현한 글을 내 마음에 새기게 되었어요.

사회 전체를 이동시키지 않고서는 학교조차 갈 수 없다는 것,

사회 전체를 새롭게 배우게 하지 않고서는

야학에서의 작은 배움도 불가능하다는 것

사회 전체를 이동시키면서 사회 전체를 새롭게 배우게 하는 투쟁을 알게 되었죠.

2001년 버스타기 투쟁의 시작점인 혜화동로터리. 박경석 대표가 마이크를 쥐고 발언하고 있다. 참가자 대부분은 노들야학 사람들이다. 사진 제공 노들야학
2001년 버스타기 투쟁의 시작점인 혜화동로터리. 박경석 대표가 마이크를 쥐고 발언하고 있다. 참가자 대부분은 노들야학 사람들이다. 사진 제공 노들야학

- 살면서 제일 잘한 선택, 세 번째

그 운동의 가장 큰 의미는 중증장애인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거고요. 개인적 의미를 묻는다면 제가 출세를 했어요. 2004년 민주노동당에선 비례대표 후보를 당원들이 직접 홈페이지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꼭 인기투표처럼 했어요. 당시로선 아주 새롭고 획기적인 방식이었죠. 어떤 분이 거기에 나를 추천했고 지지하는 글들이 막 올라오면서 조회 수가 최고로 올라갔어요. 얼마 안 되어서 정당의 고위 간부들이 날 찾아와서 출마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나는 정치가 매우 중요하고 운동세력이 정치인이 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나에게도 정치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나 기획이 있었죠. 하지만 못한다고 했어요.

그때 도현이가 구속되어 있었어요. 2003년에 지하철 송내역에서 시각장애인이 떨어져 사망했어요. 그때 노들야학 학생 이광섭이 광화문역 선로를 점거하고 20분간 시위를 했어요. 그때 광섭이를 선로에 내려준 게 도현이었죠. 당시 도현이는 이동권연대 상근자도 아니었는데 내가 부탁한 거였어요. 이동권투쟁으로 누군가 구속된 건 도현이가 처음이었어요. 나도 전혀 예상 못했었죠. 대표는 나인데 몇 년간 이동권연대가 한 일에 대한 괘씸죄를 모두 비장애인인 도현이에게 뒤집어씌운 거예요. 그런 놈을 두고 내가 정치하고 싶다고 어떻게 가요? 내가 정치를 한다면 누군가 이 현장을 지켜줘야 하는데 그럴 사람이 없었어요. 자의인지 타의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 열악한 투쟁의 현장을 벗어날 수 없었죠. 그 이후 전장연이 만들어졌으니 돌이켜보면 잘한 선택이었어요. 그게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세 번째 선택입니다.

“저에게 보내주는 동지들의 지지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선택이 동지들의 생각에 잘못일지는 몰라도 장애인운동의 열악함으로 보아주십시오. 그리고 언제까지나 열악함으로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장애인이 받아왔던 차별의 무게만큼 더 질기게 혁명적으로 싸워서 장애인을 소외시키고 자본과 비장애인 중심으로 계획되고 운영되는 세상을 바꾸어 갈 것입니다. 거리투쟁의 현장에서 진보적 장애인운동조직을 건설할 것입니다. 그대 동지들이 투쟁하며 만들어 왔던 민주노동당의 희망을 제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장애인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_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를 고사하며(2004년 3월 1일)

2006년 4월 27일, 장애인들이 활동지원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대교를 기어가고 있다. 사진 김유미
2006년 4월 27일, 장애인들이 활동지원제도화를 요구하며 한강대교를 기어가고 있다. 사진 김유미

- 얼마면 되겠습니까

장애인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세 장면을 말하라면 첫 번째는 2001년 지하철 철로 점거로 대표되는 이동권 투쟁이고 두 번째는 중증장애인들이 한강대교를 기었던 2006년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세 번째는 여덟 명의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노숙농성을 벌였던 2009년 탈시설 투쟁을 들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의 중요한 국면들이기도 해요. 은전이는 좀 지루해하고 있지만 여러분은 재미있게 들어주시길 바라요.

나는 이동권연대를 만들 때 전장협 같은 상설적 투쟁 조직을 꿈꾸었어요. 이동권 말고도 싸워야 할 문제는 많으니까요. 2002년부터 저는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연대체 건설을 제안했지만 이동권연대 안의 단체들은 생각과 지향이 다양해서 논의는 지지부진했어요. 그러다 결정적으로 2006년에 전장연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깃발을 들었는데 그 이유는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을 하기 위해서였어요.

2005년 겨울에 함안에서 혼자 사는 중증장애인이 얼어 죽는 사건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죽음이 있다 해서 반드시 투쟁으로 연결되진 않죠. 나는 그 죽음 때문에 투쟁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당시 전장연은 활동가가 얼마 없어서 싸울 여력이 안 됐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또 다른 사건이 터졌어요. 장애계의 지속적인 요구에 따라서 2005년 하반기에 정부가 15억을 들여서 중증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를 시범적으로 운영했어요. 그런데 요놈들이 장난을 쳐서 2006년에도 그 예산을 15억 그대로 통과시켜버려요. 반년 동안 쓴 예산이 그다음에 1년 예산이 되었으니 사실상 반 토막이 난 거죠. 서울시에 찾아가 나머지 예산을 내라고 요구했어요. 많은 제도들이 지방정부와 중앙정부가 예산을 나눠서 내거든요. 그런데 서울시가 돈 없다, 배 째라, 한 거예요. 당사자들의 분노가 아주 컸어요.

지금처럼 서비스 시간이 많지도 않았고 서비스를 받던 사람도 정말 몇 명 안 됐어요. 하지만 하루 2시간 받던 활동지원서비스가 1시간으로 줄어드는 건 당사자에겐 엄청난 후퇴이고 너무나 직접적인 피해예요. 이건 버스를 탈 수 없는 문제와는 차원이 달랐죠. 이 중증장애인들의 분노를 조직한 사람이 남병준이라는 활동가였어요. 그때 전장연은 이 투쟁을 이끌기가 힘들었어요. 남병준은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공동투쟁단이라는 조직을 자체적으로 꾸려서 전장연을 치고 들어왔어요. 이런 사건이 있음에도 투쟁을 기획하고 대중들에게 싸우자고 제안하지 못한다면 조직이 왜 필요하냐고 했어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죠. 그래서 2006년 3월, 노숙을 하기엔 너무 추웠던 이른 봄에 서울시청 앞에서 수십 명의 중증장애인들이 노숙농성에 들어가요. 외곽에서 투쟁을 조직해서 전장연을 압박해 따라오게 만든 거예요.

2007년 1월, 장애인들이 활동지원제도화를 요구하며 인권위를 점거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인권위 외벽에 “유시민 장관은 활동보조인서비스를 권리로 보장하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 김유미
2007년 1월, 장애인들이 활동지원제도화를 요구하며 인권위를 점거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인권위 외벽에 “유시민 장관은 활동보조인서비스를 권리로 보장하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 김유미

장애인들이 노숙을 하고 있어도 서울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어요. 그런데 서울시가 한강의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를 짓겠다는 발표를 해요. 그런데 그 예산이 수천억이래요. 우리한테는 15억이 없다고 해놓고선. 그래서 중증장애인 49명이 시청 앞에서 삭발투쟁을 하고 한강대교를 기어서 노들섬까지 가는 투쟁을 했어요. 하루 종일 한강대교를 막고 시위했는데 그게 또 반향이 아주 컸어요. 며칠 뒤 서울시가 활동지원서비스를 제도화하겠다고 선언해요. 농성 53일 만이었죠. 서울 투쟁의 성과를 갖고 대구와 인천에 가서 싸움을 제안했어요. 토론회 같은 방식 말고 정확하게 농성 투쟁을 하자고요. 서울이 승리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서울의 승리가 대구의 승리를 낳고 대구의 승리가 인천의 승리를 낳았어요. 투쟁하는 곳마다 쭉쭉 승리하더라고요.

지방정부가 이것을 제도화하겠다고 하니까 노무현 정부에서도 거부할 수 없게 되었어요. 어느 날 청와대 관계자가 만나자고 했어요. 그 사람 첫 질문이 이거였어요. “얼마의 예산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15억을 30억으로 안 늘려서 이 사단이 난 거니까 30억이라고 말해야 하나? 하지만 대표가 30억이라고 말하면 좀 없어 보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역으로 물어봤죠. “얼마가 들 것 같아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1조 정도를 갖고 방향을 잡아야 되지 않을까요?” 하더라고요. 으하하하하! 이야~ 나는 30억 생각했는데 얼마나 고마워요? 하지만 대표가 고맙습니다, 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말했죠. “그것밖에 안 됩니까? 설계를 어떻게 하셨기에 1조밖에 안 됩니까? 1조라는 근거는 어떻게 나온 겁니까?” 그러면서 이야기가 깊어졌어요.

서구 사회에선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활동지원서비스를 시행해왔어요. 일본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거기선 하루 24시간 지원되는 걸 봤어요. 하지만 당시 한국의 시범사업으로는 하루 1~2시간이 고작이었어요. 지금처럼 하루 24시간 보장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래도 했어요. 하루 24시간까지 가야 합니다. 그 뒤부터 말을 안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그해 연말에 1천억의 예산이 국회를 통과했어요. 15억이 1천억으로 뛴 거죠. 그런데 그 설계를 보니 최대로 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월 80시간(하루 2~3시간)이고 기초생활수급권자가 아니면 100% 자기 돈을 내고 쓰라는 악질적인 설계를 해놓았더라고요. 사실상 수급권자에게만 서비스를 주겠다는 뜻이었죠.

2007년 1월에 우리는 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또다시 단식투쟁과 삭발투쟁을 했어요. 그 농성을 통해 월 180시간으로 서비스 양을 늘리고 비수급권자의 100% 자부담 조건을 깨버렸어요. 활동지원서비스 비용이란 게 대부분 활동지원사의 급여예요. 만약 수급권자가 아닌 사람이 이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지금 단가로 따지면 한 달에 157만 원(최저시급×180시간)을 내야 하도록 설계되었던 거죠. 대한민국 장애인복지 서비스를 받으려면 두 가지 기준을 통과해야 돼요. 하나는 나이, 또 하나는 경제적 기준. 그 견고했던 하나의 줄을 끊은, 대상자의 경제적 조건을 보지 않는 최초의 제도가 바로 활동지원서비스예요. 안타깝게도 자부담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고 대신 상한선을 두어 제한했죠. 그리고 서비스 양을 계속 늘리는 투쟁을 통해 2021년 이 예산은 1조 5천억이 되었어요.

2007년 1월, 장애인들이 활동지원제도화를 요구하며 인권위를 점거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그전에 있었던 삭발투쟁으로 그의 상징인 ‘꽁지머리’가 사라지고 짧은 커트머리가 된 박경석 대표. 사진 김유미
2007년 1월, 장애인들이 활동지원 생활시간 보장과 자부담 철폐를 요구하며 인권위를 점거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그전에 있었던 삭발투쟁으로 그의 상징인 ‘꽁지머리’가 사라지고 짧은 커트머리가 된 박경석 대표. 사진 김유미

- 폭탄 혹은 혁명

내가 장애인운동을 시작해서 본격적인 현장 투쟁을 경험했던 것이 에바다투쟁이에요. 전장협이 DPI로 통합된 후에도 나 혼자 에바다 투쟁을 계속했어요.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게 현장 투쟁 아니냐 하면서. 하지만 그 질문, '너는 총을 어디다 쏘고 있냐?'는 질문은 남았어요. 결국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과정은 좀 아팠지만 반시설의 논리에 당연히 동의해요. 에바다투쟁이 끝나고 시설투쟁을 적극적으로 할 생각이 없었어요. 개인적으로도 조직적으로도 여력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시설 비리 문제에 대응해왔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의 김정하 활동가가 2006년 성람재단, 2007년 석암재단의 비리 문제를 갖고 나를 찾아왔죠. 기자회견 하고 성명서 몇 차례 내는 것이 아닌 구체적으로 목표를 타격하는 투쟁, 관리·감독 권한을 가진 지자체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싸움을 제안해 왔어요. 성람재단 투쟁은 종로구청 앞에서 153일간 농성했고 석암재단 투쟁은 양천구청과 서울시를 향해 2008년 1년 내내 농성하고 투쟁했어요. 그리고 이 석암재단 투쟁이 2009년 탈시설 운동으로 전환된 것이죠.

투쟁에는 주체가 중요해요. 그동안 시설 비리 투쟁에서 시설에 사는 장애인 당사자가 주체였던 적이 없어요. 그만큼 억압적이고 종속적인 삶을 사니까요. 에바다투쟁은 재단이 운영하던 특수학교 교사가 싸운 것이고 성람재단 투쟁은 노동조합이 싸웠어요. 모두 시설의 직원이면서 비장애인이었죠. 노동조합은 일정 수준까지는 함께 싸우지만 일자리와 생계의 문제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탈시설에 대해서는 적대적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는 관계예요. 그런데 석암투쟁에는 장애인 당사자 주체들이 있었고 같이 회의를 했어요. 미약하더라도 그들이 주체였죠. 그들을 조직해야 했어요. 회의 한 번조차 목적의식적으로 했어요. 그들과 함께 싸우면서 생각했죠. 이 시설 비리 싸움이 끝났을 때 당사자들이 짐을 싸서 시설을 박차고 나오는 그림이 만들어진다면 장애인운동사에서 얼마나 획기적일까!

2009년 6월 4일, 마로니에공원에서 농성을 시작하는 마로니에 8인의 모습. 앞에는 “탈시설-자립생활 권리 쟁취! 오세훈 시장은 약속을 지키십시오”라는 현수막이, 뒤에는 “더이상 장애인을 시설 속에 가두지 마십시오. 이곳에서 당신들과 함께 살겠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 김유미
2009년 6월 4일, 마로니에공원에서 농성을 시작하는 마로니에 8인의 모습. 앞에는 “탈시설-자립생활 권리 쟁취! 오세훈 시장은 약속을 지키십시오”라는 현수막이, 뒤에는 “더이상 장애인을 시설 속에 가두지 마십시오. 이곳에서 당신들과 함께 살겠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 김유미

석암재단 비리 투쟁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났을 때 시설의 이사장이 처벌받고 운영진이 교체되는 과정으로 들어갔어요. 그때 함께 싸웠던 노동조합이 ‘시설 유지’ 쪽으로 돌아서면서 당사자들에게 이제 그만 싸우고 평화롭게 살자고 회유하는 분위기였어요. 우리가 당사자들을 꼬시기 시작했죠. 시설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머물러선 안 된다고, 시설을 나가서 시설 바깥을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으로 이어나가지 않는 한 더 이상 전장연이 이 투쟁을 할 이유는 없다고 담판을 지으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함께 나가자고요.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선 얼마나 두렵겠어요. 집도 절도 없고 가족도 없는 데다 활동지원서비스도 받을 수 없었어요. 엄밀히 말하면 노숙인이 되는 거죠. 그래서 전략을 세웠어요. 이 사람들이 짐을 싸 들고 시설을 탈출해 나오면 서울에서 노숙농성을 해야 하는데 장소는 마로니에 공원으로 하자고 했어요. 노들야학이 거기에 있거든요. 그리고 근처에 사회복지법인 평원재단이 운영하는 자립주택이 있었어요.

평원재단은 오랫동안 야학을 후원해왔는데 그즈음 장애인의 자립을 지원하는 주택을 지었고 개소를 앞두고 있었어요. 농성 기간 동안 그 집을 이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이 농성은 장애인들의 활동지원에서부터 먹고 자고 씻는 모든 걸 지원해야 했기 때문에 그 체계가 아주 단단해야 했어요. 그런데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내게는 이걸 지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노들야학과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에 대한 믿음, 평원재단이라는 뒷배. 그렇게 탈시설 투쟁이 시작되었죠.

당시 오세훈 시장이 가는 곳이라면 대학 강연, 사회복지사 대회, 무슨 무슨 행사, 가리지 않고 쫓아다니면서 기습시위를 벌였어요. 탈시설 권리 보장하라고 외치고 끌려 나오고 아주 빡세게 싸웠죠. 이명박과는 이동권으로 계속 싸웠다면 오세훈과는 탈시설로 부딪쳤죠. 한 번은 크리스마스였는데 동천의 집이라는 장애인시설에 산타 복장을 한 오세훈이 짠, 하고 나타나 장애아동들한테 선물을 주려고 했어요. 우리가 그 앞에서 진을 치고 있어서 결국 그 행사를 못했어요. 그때 우리를 피해 도망가던 오세훈을 활동가들이 붙잡는 과정에서 누군가 오세훈 멱살을 잡고 누구는 관용차에 드러눕고 아주 난리가 났어요.

크리스마스에 따뜻한 시장으로 보이고 싶었는데 장애인을 시설에 가두고 억압하는 시장이 되어버려서 그날 오세훈이 아주 화가 많이 났어요. 이번에 다시 서울시장이 된 오세훈이 아직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더라고요. 지난번 장애인단체와의 간담회 자리에서 나를 보고는 여전히 열심히 하시네요, 하지만 불법적 행동엔 대응 안 합니다, 차근차근 합리적으로 하시자고요, 그러더라고요. 쳇. 우리가 차근차근 이야기를 안 한 게 아니라 자기들이 다 무시해놓고선.

두 달을 농성해서 성과를 얻었어요. 시설에서 나온 장애인이 살 수 있는 주택을 몇 채 도입하기로 한 것이죠. 탈시설의 첫 성과물은 오세훈 시장으로부터 나왔어요. 중요한 건 주택이 몇 채인지 그 숫자가 아니에요. 한 채든 열 채든 그 수혜자는 극소수였고 제도화시킨 것도 아니었어요. 하나의 씨앗이었다고 생각해요. 땅에 묻으면 그냥 썩어버리는 씨앗이 아니라 발아력을 가질 수 있는 씨앗.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보호라는 방식으로 격리해요. 인권과 민주주의가 중요한 시대에 히틀러처럼 장애인들을 가스실로 보내자고 주장할 수는 없잖아요. 보호 방식의 격리와 소외, 배제가 구축된 정책적 꽃이 바로 장애인거주시설이죠.

2009년 6월 마로니에공원으로 석암베데스다요양원 거주인 8명이 짐을 싸들고 나온 날, 대책회의하는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노들야학 
2009년 6월 마로니에공원으로 석암베데스다요양원 거주인 8명이 짐을 싸들고 나온 날, 대책회의하는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김유미 

그 투쟁을 통해 얻은 성과가 탈시설에 대한 정책적인 씨앗이었다면 탈시설을 통해 지역사회에 나온 장애인들 한 명 한 명의 인격이 또 아주 소중한 씨앗들이라고 생각해요. 이들이 완전히 통합되었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죠. 그것은 이 사회 전체의 관계가 바뀌어야지만 가능한 거예요. 이들 한 명 한 명이 바로 이 관계를 변화시킬 씨앗이에요. 이들이 피워낼 꽃이 뭘까요. 나는 거주시설에 이들을 가두고 저질러졌던 문제보다 이들이 밖에 나와서 앞으로 저질러질 문제가 더 심각할 거라고 생각해요. 사회가 발달장애인, 정신장애인들을 노동 능력이 없고 돈이 많은 드는 쓸모없는 존재로 대했던 이 관계, 우리 사회의 기준과 속도가 변하지 않는 한 이들은 하나하나가 다 폭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시설에 가둔 거죠. 사회가 그대로 있는 한 이들의 탈시설은 요망해요. 관계를 변화시키고 지역사회 환경을 바꿔야 하죠. 탈시설은 바로 관계의 혁명이 될 거예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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