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싸우는 인간의 탄생 _ 박경석④

- 태수와 흥수

1988년 3월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직업훈련 전산과(컴퓨터)에 입학했어요. 입학식 하던 날 내 삶에 있어 너무나도 낯선 사람들을 만났어요.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전혀 다른 존재들, 바로 장애인이었어요. 대체 이렇게 많은 장애인들이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어요. 전산과 동기는 8명이어서 우리는 ‘8비트’라고 불렸는데 모두 뇌성마비나 소아마비 장애인이었고 나만 척수장애인이었어요.

거기서 정태수를 만났어요. 태수는 나보다 일곱 살 어렸는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서 머리가 짧고 양쪽에 목발을 짚고 다녔어요. 나는 복지관의 규칙이나 교육을 충실히 따르던 착한 장애인이었고 태수는 반항적인 나쁜 장애인이었어요. 방송국에서 촬영하러 오면 복지관에선 항상 나를 추천했고 장애여성 한 명을 짝지어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재활 의지를 불태우는 장면을 연출했어요. 그런 날이면 태수는 날랜 제비처럼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어요.

1996년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에 참석한 정태수 열사(왼쪽)와 박흥수 열사(오른쪽). 박흥수 열사가 자신의 삼륜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다.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1996년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에 참석한 정태수 열사(왼쪽)와 박흥수 열사(오른쪽). 박흥수 열사가 자신의 삼륜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다.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어느 날 박흥수라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목공예과를 졸업한 선배였는데 나보다 두 살 위였어요. 흥수 형이 술을 사주니까 졸졸 따라다니는 무리들이 생겼어요. 흥수 형은 88장애자올림픽을 거부한다면서 올림픽조직위원회를 점거했다가 경찰에 잡혀갔다 왔다는 그런 이야기를 훈장처럼 떠벌렸어요. 술 얻어먹는 게 좋아서 쫓아다니면서도 속으로는 ‘정부가 돈을 들여 해주겠다는 걸 왜 반대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이 사람에게 잘못 걸리면 인생이 빨갛게 되겠구나 싶어서 무지 경계했죠. 그런데 태수는 달랐어요. 태수는 흥수 형의 이야기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였어요. 술만 먹으면 시도 때도 없이 ‘의연한 산하’라는 노래를 막 불렀어요. (노래 부름) ‘가슴이 빠개지도록 사무치는 이 강산에 /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거부한다던 / 복종을 달게 받지 않겠다던 / 굳게 서 있으라 의연한 산하’ 그런 가사인데, 이제 갓 고등학교 졸업한 놈이 무슨 가슴이 얼마나 빠개졌기에 그런 걸 부르는지 좀 기가 찼죠.

복지관에서는 점심시간마다 훈련생들에게 국민체조를 시켰는데, 어느 날 술자리에서 흥수 형과 태수가 국민체조 거부 투쟁을 모의했어요. 복지관 선생들은 점심 먹고 마음대로 쉬면서 훈련생인 장애인들에게만 강제로 체조를 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거예요. 나는 좀 이해가 안 됐어요. 그건 우리들의 심신단련을 위한 건데 자기들이 데모가 하고 싶으니까 괜한 꼬투리를 잡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우리 선생님이 내 또래의 화상장애인이었는데 서글서글하고 열심히 가르쳤어요. 그런 선생님의 뒤통수를 치다니! 나는 데모가 나쁘다고 생각했어요. 착한 장애인들을 꾀어서 나쁜 길로 인도하려 하다니! 죽어라 노력해도 취업이 될까 말까 하는데 그런 정신으로 어떻게 비장애인과 경쟁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선생님한테 꼰질렀죠. 결국 모의는 실패했어요.

그리고 동기들은 나를 빼고 술을 먹으러 가기 시작했어요. 나는 금세 외로워졌어요. 다친 후에 나는 친구도 없었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리라곤 거기밖에 없었어요. 그들의 질퍽한 정이 좋았고 소곤대는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했어요. 자존심을 접고 “흥수 형~ 미안해~ 다 잊어버려~ 태수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하면서 열심히 그들의 술자리를 따라다녔어요. 흥수 형과 태수는 장애인의 문제가 개인의 탓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탓이라면서 현실을 바꾸려면 사회를 ‘개량’하는 수준이 아니라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과격하긴 해도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조금씩 물들어갔죠.

1년 후 수료했지만 우리 중 변변한 직장에 취업을 한 사람은 없었어요. 저는 태수, 흥수와 함께 졸업생들의 동문회인 ‘싹틈’에서 활동하면서 동문들의 취업 실태를 조사했어요. 동문들을 만나면 다들 한다는 소리가 ‘아이고, 취업했다고 다 취업한 게 아니다!’였어요. 수공예과는 도제식인데 실상은 종 부리듯 한다는 거예요. 집에 데려다 놓고 하루 종일 일을 시키는데 6개월 부려먹고 5만 원도 안 주더라, 돈 달라고 했더니 쫓아내더라, 복지관에 상담 왔더니 네가 장애인인데 참아야지 하더라. 그런 이야기들을 모아서 소식지에 실었어요. 복지관 측에선 90%가 취업한다고 홍보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반대였어요. 90%가 실업 상태였죠. 그런데 그 소식지를 복지관 측에서 훔쳐 가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우리는 복지관의 사과와 대책 마련을 요구하면서 로비 점거 농성을 하기로 했어요.

사실 나는 그렇게 세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웃음) 1년 동안 한솥밥 먹으면서 우리 가르치던 선생들한테 “야, 나와!” 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농성 첫날 태수가 자기 인생 최초의 점거 투쟁이라면서 머리를 빡빡 삭발하고 나타났어요. 나는 그때까지 태수가 아직 사춘기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어요. 태수는 아주 진지하게 이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좀 충격이었어요.

1989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이 동문회 ‘싹틈’ 소식지 내용을 문제 삼아 소식지를 압수해가자 사람들이 복지관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맨 뒤에 하얀 머리띠를 하고 휠체어 탄 사람이 박경석, 보라색 남방 입은 사람이 박흥수 열사, 맨 앞에 머리를 빡빡 밀고 안경 쓴 사람이 정태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1989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이 동문회 ‘싹틈’ 소식지 내용을 문제 삼아 소식지를 압수해가자 사람들이 복지관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맨 뒤에 하얀 머리띠를 하고 휠체어 탄 사람이 박경석, 보라색 남방 입은 사람이 박흥수 열사, 맨 앞에 머리를 빡빡 밀고 안경 쓴 사람이 정태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나는 장애인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었죠. 그랬던 내가, 해병대 특수수색대 출신인 내가, 마도로스가 꿈이었던 내가… 그들 속에 떨어져 불쌍한 장애인이 되어버렸으니 인생이 얼마나 비참했겠어요.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겨우 휠체어를 밀고 집 밖으로 나왔던 그 시기에 목발 짚은 태수가 왔어요. 태수는 내가 처음 만난 장애인이었는데 그 장애인이 사람으로 보였어요. 불쌍한 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사람. 아, 이것도 삶이구나, 아, 사람이구나, 사람의 감정을 갖고 있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 장애인이 데모까지 하는 사람이었죠. 태수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걸 충격적으로 알게 해준 사람이었어요.

하루는 태수와 세 시간을 싸운 적이 있어요. 태수는 성격이 좋아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는데 나한테만은 지지 않고 자기 생각을 말했어요. 태수는 의사가 돈을 너무 많이 버는 건 잘못됐다고 했어요. 우리 형이 의사였는데 코피 흘려가면서 공부했거든요. 이 파렴치한 놈아, 너처럼 고등학교 겨우 나와서 술 먹고 노는 놈이 어떻게 의사하고 같은 월급을 받으려고 하느냐, 내가 그랬어요. 우리 집이 쫄딱 망해서 형이 돈을 많이 벌어야 우리 집을 먹여 살릴 수 있었어요. 그날은 내가 이겼어요. 굉장히 통쾌한 기분이었던 게 아직도 생각나요.

농성이 끝난 후에 앞으로 뭘 할까 고민했어요. 취업의 길은 여전히 꽉 막혀있으니 태수와 같이 대학을 가기로 하고 재수학원을 다녔어요. 어린 친구들 틈에서 휠체어를 타고 입시준비를 다시 한다는 게 쉽지 않았는데 태수가 있어서 힘이 되었어요. 나 때문에 고생한 어머니에게 빨리 취업 선물을 안겨드리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런데 태수는 출석체크만 하고 장애인운동 현장으로 달려갔어요. 태수에게 딱 1년만 참고 공부하자고, 대학 들어가서 빡세게 투쟁하면 되지 않냐고 했는데 태수는 그러지 않았어요. 1991년에 태수는 장애인운동 활동가가 되고 나는 91학번 사회복지학과 대학생이 되었어요.

1992년경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에서 기획한 장애인 편의시설 사진전 ‘천국에는 계단이 없다 ’의 사진 속 모델이 된 박경석 대표. 높은 계단 끝에 휠체어 탄 박경석 대표가 보인다. 사진 장애해방열사_단
1992년경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에서 기획한 장애인 편의시설 사진전 ‘천국에는 계단이 없다 ’의 사진 속 모델이 된 박경석 대표. 높은 계단 끝에 휠체어 탄 박경석 대표가 보인다. 사진 장애해방열사_단

- 폼나고 우아하게

대학생이 되니까 주가가 올라갔어요. 어머니가 형제들을 뜯어서 차를 사주셨고 열두 살 어린 비장애인 친구들도 많이 생겼어요. 대학에 편의시설이라곤 없어서 동기들 다섯 명이 계단 아래서 대기하다 나를 상감마마처럼 들고 날랐어요. 그럼 내가 맛있는 것도 사주고 차도 태워줬죠. 장애인들하고 늘 똑같은 술집밖에 못 가던 시절에 비하면 날개를 달았죠.

1993년에 태수가 있던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라는 단체에서 장애인야학을 만드니까 나보고 와서 교사를 하라고 했어요. 나는 취업 준비해야 하니까 바빠서 못하겠고 대신 안신연이라는 운동권 친구를 꼬드겼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야학에 완전 꽂힌 거예요. 신연이는 노들야학 개교 초기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어요. 교사가 부족하니까 다음해엔 아예 휴학까지 하면서 열심히 하더라고요. 나는 신연이 기사 노릇도 하고 야학에서 필요할 땐 운전도 해줬어요.

어느 날 신연이가 술에 취해서는 야학 일이 너무 힘들다고 나 때문에 인생 조졌다면서 울고불고했어요. 애처롭기도 하고 내 책임도 있으니까 알았다, 나도 교사할게, 이렇게 됐죠. 그때가 4학년 2학기였어요. 공부한다고 계속 도망 다니다가 그때 딱 덜미가 잡힌 거예요. 그래도 나는 어차피 성적이 좋으니까 금방 취업될 줄 알았어요. 그때까지만 하지 뭐, 그 정도 자선은 베풀 수 있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완전 착각이었죠.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 취업하고 싶어서 1년 동안 공단에서 실습을 했었어요. 내가 비록 나이는 많지만 재활의지가 강한 장애인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정말 노력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원서를 접수하는데 받아주지를 않는 거예요. 공공기관 입사 기준에 나이 제한이 있었던 거예요. 나는 그게 장애인에게도 적용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중도에 다쳐서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나이가 많을 수밖에 없잖아요. 시험이라도 쳐보고 떨어지면 그나마 괜찮을 텐데 원서조차 받아주질 않으니까 얼마나 억울해요? 나 공부 진짜 열심히 했는데! 나보다 어린 공단 직원들한테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퇴근할 때 차도 태워주고 온갖 알랑방구를 다 꼈는데. 면접시험 보는 날 이사장실 앞에 가서 막 통곡을 하면서 항의했어요. 그런데 소용이 없더라고요. 너무 절망스러웠어요.

그리고 지원한 곳이 노들야학이 더부살이하고 있던 정립회관(장애인복지관)이었어요. 떨어졌어요. 면접 때 질문이 아직도 기억나요. 열두 살 어린 사람들과 화합해서 직장생활 잘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시라고, 나 진짜 어린 사람들하고 잘 지낸다고, 애들이 다 나 좋아한다고, 나 잘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는데 떨어뜨리더라고요. 마지막으로 지원한 곳은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이었어요. 떨어졌어요. 나를 훈련시킨 그곳마저도. 진짜 열 받더라고요. 비장애인일 때는 내 성적이 0점이었는데 장애인 되고 나선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성적도 아주 좋았는데 안 써주더라고요.

태수와 흥수 형을 만나 장애인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건 외롭고 힘들 것 같았어요. 그 맛을 살짝만 보고 도망치듯 대학에 갔고 사회복지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에 매달렸어요. 좀 더 우아하고 폼나는 전문가 선생님이 되기 위해 여러 곳들을 서성일 때 그들은 나를 발길로 걷어찼어요. 슬프고 화났어요. 길이 안 보여서 대학원에 갔는데 절망해서 공부는 안 됐어요. 덕분에 야학을 아주 열심히 했죠. 나쁜 장애인들이 나를 약물(술)로 유혹했어요. 그 유혹에 걸려 블랙홀에 빠지듯 노들야학에 빠져들었어요. 그 만남이 운명이 될 줄 몰랐죠.

2019년 6월, 노들야학 1층 주차장에서 열린 '평등한 밥상' 행사에서 신나게 춤추는 박경석 대표. 사진 강혜민 
2019년 6월, 노들야학 1층 주차장에서 열린 '평등한 밥상' 행사에서 신나게 춤추는 박경석 대표. 사진 강혜민 

- 고갯길 위의 선택

신입 교사였을 때 선배 교사 심귀황은 장애인의 현실에 관한 문건을 하나 던져주고는 오타를 찾아오라는 식으로 나를 훈련 시켰어요. 귀황은 나보다 어린 비장애인이었는데 툭하면 중증장애인인 나에게 청소를 시키고는 잘 못한다면서 구박하고 약을 올렸어요. 학생들은 거의 다 정립전자의 장애인 노동자들이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말 그대로 주경야독 생활을 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라 수업이 끝나면 또 술을 마셨어요. 아침이면 학생들은 일하러 가고 교사들은 또 해장술을 마시고요. 야학에서 어슬렁거리다 저녁이 되면 수업하고 수업 마치면 또 술을 마셨어요. 야학이라기보다는 주학이었죠. 야학 술자리는 사람 냄새가 아주 진했어요. 그들과 만나고 일하고 한 잔 마시는 일이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었어요.

그러다 취업할 기회가 한 번 왔어요.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시절 선생님이 이제 막 새로 생긴 성남장애인복지관을 소개시켜주셨어요. 거기 총무과장으로 1년 정도 일했어요. 내가 했던 일 중에 이런 게 있었어요. 삼성에서 ‘작은 나눔 큰사랑’이란 기부 프로그램을 했어요. 삼성대리점에서 누군가 세탁기를 사면 몇 개의 쿠폰이 나오는데 그걸 단체에 기부할 수 있어요. 손님들은 특별히 관심이 없으니 쿠폰을 매장에 그냥 넘기고 가요. 그럼 내가 대리점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성남장애인복지관에서 왔습니다~ 하면서 그 쿠폰을 달라고 영업을 하는 거예요. 그럼 한 움큼씩 줘요. 귀찮기도 하고 장애인이 오니까 불쌍해 보이잖아요. 내 차로 전국의 삼성 대리점을 돌아다니면서 6개월 동안 1억 원어치를 모았어요. 장사꾼 집안인데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건 도가 텄죠.

내가 일을 잘하니까 관장이 나한테 기대를 많이 했어요. 나는 6시 땡 치자마자 허겁지겁 짐 챙겨서 야학으로 달리는 사람이었어요. 밤 시간이 미친 듯이 좋았어요. 밤새도록 힘껏 놀고 파김치가 돼서 아침 9시에 출근하는 생활을 했어요. 관장이 처음에는 좋은 일 한다고 독려하더니 나중엔 야학에 쏟는 애정을 직장에 집중해달라고 요구했어요.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심각하게 고민했죠. 월급 받아서 가족을 부양한 최초의 경험이니까 그걸 놓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당시 부모님과 나는 살 집이 없어서 매형 집에 얹혀 지내고 있었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나 직장 다니는 걸 무척 기뻐하셨어요. 아침마다 내 신변처리를 다 도와주시고 문밖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주면서 잘 다녀오라고 말하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슬픔이 솟구쳐 올랐어요. 대단한 효도는 못해도 그 정도의 기쁨은 드리고 싶었죠.

성남에서 야학으로 넘어오던 길에 고개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 차를 세워놓고 한참 생각했어요. 65세까지 일하면 얼마나 모을 수 있을까. 잘해야 1~2억이겠더라고요. 그 돈 모으려고 이대로 사는 게 좋을까? 아니면 가시밭길이긴 하지만 재밌고 즐거운 야학을 하는 게 좋을까? 장애문제를 잘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복지관이나 야학이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의미와 가치는 분명히 달랐어요. 내 인생에서 진짜 남는 게 무엇일까 생각했어요. 좋아하는 사람들과 놀고 술 먹고 운동하다 빨리 죽는 게 낫겠더라고요. 어머니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미련 없이 때려치웠어요. 그땐 몰랐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인 것 같아요. 노들야학이 아니었다면 내 삶은 해석이 안 되니까요.

1996년 노들야학 총학생회에 참석한 박경석 대표. 갈색 가죽 자켓을 입고 있다. 사진 제공 노들야학 
1996년 노들야학 총학생회에 참석한 박경석 대표. 갈색 가죽 자켓을 입고 있다. 사진 제공 노들야학 

96년 백수가 된 후에 야학 교사대표가 되었어요. 그랬더니 다른 교사들이 안녕, 잘 있어, 하면서 우르르 퇴임해 버려서 교사가 달랑 다섯 명 남았어요. 울면서 몇 명 붙들어 힘겹게 야학을 했죠. 그 시절 야학 교사들은 청춘을 불사르다 1~2년 후 모두 떠났어요. 노들을 만나고 학생들과 부딪히면서 생활하는 것은 천둥처럼 쿵쾅쿵쾅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지만 떠날 때는 벼락처럼 단칼에 끊어지는 허무함이기도 했어요. 노들은 모두가 사랑하는 공간이었지만 가난하고 외로운 공간이기도 했어요. 97년에 노들야학의 교장이 되었어요.

그리고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전장협)의 조직국장이 되었어요. 전장협은 노들야학의 상부 조직이었어요. 전장협이 장애인들을 조직하기 위해 만든 현장이 바로 노들야학이었죠. 전장협은 장애인운동 진영에서도 가장 왼쪽에서 대중들의 투쟁을 이끌었던 조직이었어요. 전장협의 조직국장이었던 태수가 생계를 위해 잠시 활동을 중단하면서 나한테 그 일을 부탁한 거였어요.

- 현장을 끊어내다

1998년에 전장협은 한국DPI(한국장애인연맹)와 통합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어요. DPI는 변호사, 교수 같은 엘리트 장애인들이 이끄는 국제조직이었어요. 통합을 주장하는 이유는 시대가 변했으니 그 흐름에 발맞추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전장협의 투쟁 방식으로는 정치적 힘도 얻지 못하고 경제적 어려움도 면할 수 없다면서요. 통합을 주도하던 사람은 OO씨였어요. 80년대 좌파 운동의 이론가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서울대 출신의 중증장애인이었는데 외국에서 활동하다 그 시기 한국으로 돌아온 거였어요.

전장협은 그동안 대중들을 만나 운동을 조직할 수 있는 공간들을 만들어왔어요. 노들야학이 대표적인 현장이었죠. OO씨는 이런 현장 조직들을 하나둘씩 끊어냈어요. 가장 크게 박살 난 것이 노점분과였어요. 1995년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가 구청의 단속에 저항해서 분신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전장협은 청계천 노점상들을 조직해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라는 기구를 구성해서 활동했어요. 흥수 형이 아주 열심히 조직했던 공간이었죠. OO씨는 장애인운동과 빈민운동은 다르다면서 이 기구를 없애버려요.

96년에 평택 에바다복지회라는 청각장애인 시설에서 비리 문제가 터졌고 그 싸움이 한창이었는데 에바다투쟁에 대한 연대도 중단됐어요. OO씨는 시설은 그 존재 자체로 반인권적이기 때문에 운동을 하려면 ‘반시설’ 운동을 해야지, ‘시설 민주화’ 운동은 그 방향이 틀렸다는 거였어요. 또 시설 하나하나의 비리와 싸우는 건 끝이 없는 싸움이기 때문에 그런 투쟁에 우리의 부족한 역량을 쏟을 수 없다고 했어요.

에바다투쟁은 내가 활동가가 되어 제대로 싸워본 첫 현장투쟁이었어요. 조직에서 열심히 투쟁하라 그래서 열심히 총 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대장이 바뀌더니 나한테 묻는 거예요. 너는 지금 왜 총을 쏘고 있느냐고, 어디다 총을 쏘고 있느냐고, 혹시 이겨서 에바다 법인을 운영하고 싶은 거냐고요. 나는 논리도 이론도 잘 몰랐지만 얼마나 열 받아요?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 있죠. 문제는 그것들이 전장협의 활동가들이 대중들을 만나고 조직하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치열하게 일구어놓은 현장이었다는 거예요. 운동과 대중을 이어주는 끈이었죠. 내가 같이 어울려서 술 마시고 고민을 나누던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있었어요. 통합은 전장협의 역사를 무시한 채 흘러가고 있었어요. 현장의 분노와 대중적 저항을 조직하는 게 아니라 소수의 엘리트 중심, 정책 중심의 회원 조직으로 개편하는 거였어요. 이런 통합엔 찬성할 수 없었어요.

통합에 찬성하는 동료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통합해야 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는 우리는 너무 가난하지 않느냐고, 너무 힘들다고 했어요. 나는 돈이 문제라면 내가 정말 열심히 해서 벌어보겠으니 통합하지 말자고 말했어요. 전장협 전국 지부들을 돌아다니며 통합에 반대하는 표를 조직했지만 결국 1998년 10월 대의원 총회에서 통합이 결정되었어요.

1997년 야학연합체육대회에 참가한 박경석 대표(맨 왼쪽). 그해 박경석 대표는 노들야학의 3대 교장이 되었다. 사진 제공 노들야학
1997년 야학연합체육대회에 참가한 박경석 대표(맨 왼쪽). 그해 박경석 대표는 노들야학의 3대 교장이 되었다. 사진 제공 노들야학

- 쌍둥이 봉고의 운명

통합 이후에 큰 바람 안 가졌어요. 96년부터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 태수가 조직했던 투쟁 사업이 있었어요.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였어요. 1년에 한 번 이 투쟁만큼은 진심으로 조직해보자고 생각했어요. 장애인단체조차 시혜와 동정에 기대 앵벌이를 하고 재활을 외치면서 장애인의 몸을 고쳐야 한다고 말하던 시대에 태수는 데모라는 방식으로 장애인들을 꼬셔서 거리에 나오게 했어요. 전국을 돌면서 차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한 일이었어요. 그게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전장협 지부들은 친목 모임 성격이 커서 그저 사람 좋고 술 좋아서 모인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사람들 이야기 밤새 들어주면서 술 마셔도 겨우 몇 명 꼬실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일을 제주에서부터 쭉쭉하면서 올라와서 마지막 서울에서 한 방 때리는 거죠. 몇백 명이 넘게 모였어요. 그날 하루 도로를 점거하고 경찰하고 싸우면서 우리의 분노를 표현하고 우리의 힘을 보여주는 거죠. 태수가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요. 나도 해보니까 데모하는 게 점점 재미있어지더라고요. 야학 학생들 몇 명 꼬드겨서 장애인의 날이나 노동절 집회에 데리고 나가는 것이 내 1년 농사의 성과였어요. 데모하고 도로 점거하고 경찰들하고 싸우면서 자기 목소리로 외치는 것, 그것이 운동의 즐거움이고 행복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현장 투쟁의 역사는 단절되었죠. 통합 후에 그 걷기대회를 안 하겠다고 했을 때 정말 분노했어요. 태수가 뼈 빠지게 했던 일인데, 활동가들이 1년 동안 씨 뿌리고 땅 일궈서 그날 걷어 올리는 건데, 그게 대중의 힘을 보여주는 건데, 안 하겠대요. 그런데 방송국에서 촬영하러 온다니까 갑자기 또 한 대요. 정부청사 앞에서 행진을 하는데 갑자기 돌아가래요. 방송국에서 다시 찍어야 된다는 거예요. 아우.

얼마 후 서울DPI(서울장애인연맹)의 회장으로 OO씨를 추대하는 총회가 있었어요. 저는 통합을 그런 식으로 이끈 그가 회장이 되는 것을 반대했어요. 그런데 투표를 따로 하지 않고 그냥 박수치고 축하 행사를 치를 거라고 했어요. 그의 인맥이 정말 화려해서 내로라하는 유명 정치인들이 초대되었죠. 나도 노들야학 사람들과 함께 참석했어요. 그 자리에서 회장 선출은 민주적으로 해야 한다고 투표를 제안했어요. 기분 좋게 박수치고 넘어가려고 했던 총회가 나 때문에 2~3시간을 끌었고 결국 투표가 진행되었어요. 결과는 몰라요. 주최 측이 투표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그냥 당선되었다고 선언했어요. 우리가 항의했지만 공개하지 않더라고요. 그날 이후 노들야학은 전장협과 DPI로부터 탈퇴했어요. 민주적 절차를 지키지 않았던 걸 빌미 삼았지만 더 중요한 건 사회 변혁적 관점과 현장 투쟁이라는 노선을 버린 조직과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그게 99년 4월의 일이에요.

결정적으로 OO씨와 부딪친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그는 다른 현장 조직들은 다 정리하면서도 노들야학은 적극적으로 가져가겠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야학은 돈이 되거든요. 그러면서도 우리의 자치성이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 태도가 몹시 기분 나빴어요. 포항제철이 노들야학에 봉고 두 대를 기증하겠다고 해서 열심히 사업계획서를 써서 받았어요. 그런데 OO은 자신의 인맥으로 받은 거라면서 봉고 두 대를 DPI가 다 가져가겠다고 했어요. 학생들 수업하고 데모하려면 이동시켜야 되는데 무슨 소리냐 했더니 야학이 무슨 대단한 운동을 하냐는 식이었어요. 그냥 공부만 하라고요. 차 필요하면 허락받고 쓰라고 했어요.

통합되는 건 싫었어도 참았어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봉고 사건 때문에 꼭지가 돌아버렸어요. 전장협이 노들야학을 만들었지만 돈 한 푼 안 줬거든요. 전장협도 돈이 없었으니까요. 전부 야학 교사들이 일일호프 하고 후원금 모아서 운영한 거예요. 대학생 교사들이 휴학까지 해가면서 자기들 청춘을 바쳐서 운영해왔어요. 그래놓고 봉고가 생기니 자기들이 상부조직이라면서 가져가겠다니까 너무 화가 나서 가져갈 테면 가져가 봐라! 안 참는다! 그랬더니 자기가 야학을 하나 더 만들겠대요. 자긴 이런 야학 몇 개도 더 만들 수 있다고 아주 오만한 소리를 하더라고요. 그래? 알겠다, 우리 너희랑 같이 안 간다! 봉고 한 대는 DPI 주고 한 대만 갖고 노들야학은 탈퇴해버렸죠.

- 죽어도 괜찮겠다

내로라하는 장애운동가들이 다 DPI로 딸려갔을 때 거기 줄 안 서고 노들야학과 함께 따로 떨어져 나온 게 살면서 내가 한 선택 중 두 번째로 잘한 선택이에요. 그 선택이 없었으면 이후에 장애인이동권연대도 없었을 거고 전장연으로 이어지지도 않았겠죠. 그때 나에게 이후에 펼쳐질 운동들을 만들어낼 생각이 있었냐 하면, 당연히 없었죠. 생각도 못 했죠. 노들야학은 어떤 전망도 가질 수 없는 아주 작은 단체였어요. 그저 하루하루 생존하기 바빴죠. 교사는 항상 부족하고 돈도 없었어요. 봉고차로 학생들 등하교 시키려면 운전자 급여를 줘야 하는데 그 돈 만들기도 벅찼죠. 기껏 노들야학 사람들 봉고에 몇 명 태워서 에바다투쟁을 계속했던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투쟁이었어요. 거기 갔다가 어떤 교사는 경찰한테 짓밟혀서 갈비뼈 부러져서 입원하고, 엠프도 없어서 민주노총 집회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엠프 빌려서 도로 일차선 점거하는 게 가장 빡센 투쟁이었죠.

2000년 11월 대학로에서 열린 노동자대회. '장애인 노동권 쟁취 - 노들장애인야학'이라고 적힌 빨간색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무리와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노들야학
2000년 11월 대학로에서 열린 노동자대회. '장애인 노동권 쟁취 - 노들장애인야학'이라고 적힌 빨간색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무리와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노들야학

에바다 투쟁이 1000일이 되었을 때도 해결될 기미가 없어서 대학로에서 집회를 크게 했어요. 전장협이 해소된 후여서 그 투쟁을 내가 조직했어요. 인권단체, 노동조합 조직해서 거리행진을 했는데 당시는 도로 1차선 나가기가 굉장히 힘들었던 시대였어요. 나는 성공의 기준이 ‘1차선 나갔냐, 2차선 먹었냐’여서 이걸 성공하면 엄청난 쾌감을 느꼈고 못 나가면 억울해 죽었어요. 그런데 그날 종로 한 차선을 다 점거했어요. 사람도 굉장히 많았어요. 100명쯤. 그땐 100명이면 아주 많이 모인 거였어요.

도로점거를 할 땐 언제 도로에서 물러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게 제일 중요하고 어려워요. 경찰들이 협박을 하면 나는 조금 더 있고 싶은데 참가자들은 ‘이러다 잡혀가는 거 아니야?’ 걱정을 하고 집행부들은 조마조마해 하죠. 그날의 도로점거는 그 긴장 속에서도 밤늦게까지 이어졌어요. 사람들은 불안해하기도 하고 어차피 망했네 하면서 앉아있기도 하고 내 말만 기다리기도 하고, 나는 여러분, 좀 더 견뎌봅시다, 독려하면서. 그날 해산하고 사람들 다 돌아간 뒤에 종묘 뒤에 주차해놓았던 내 차에 드러누워서 생각했어요. 아, 이제 죽어도 괜찮겠구나… 긴장감이 풀리기도 했고 승리했다는 통쾌함도 있었지만 뭔가… 이제 할 만큼 다했다는 느낌… 여기서 더 전진하는 게 가능할까 싶으면서 어차피 역사는 영원할 건데 내가 가진 역량으로 이 정도까지만 하고 죽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동에 대한 전망이 있었냐 하면 없었던 것 같아요. 전망을 이야기할 수는 있었겠지만 구체적이지 않았죠. 구체적인 목표는 그냥 살아남는 거, 현장 투쟁의 근거로 살아남는 거였어요. 에바다투쟁에서 만났던 대학생 김도현에게 활동비 50만 원 줄 테니까 야학에서 상근활동을 하자고 꼬드겼어요. 그 전엔 교사들이 휴학하면서 꼬라박는 구조였는데 처음으로 상근자가 생겼죠. 우리는 현장에서 이 운동을 겪어온 거예요. 그 과정에서 경험이 쌓이니까 이동권연대가 만들어지고 이후의 교육권, 활동지원서비스, 탈시설 투쟁이 기획될 수 있었어요. 장애인운동의 본질은 만나고 겪는 거였어요. 만나고 겪으면서 관계를 변화시켜야지만 기획이 생기고 발전해가는 것이지 현장이라는 토대 없이 뭔가 갑자기 기획되고 연결되지는 않더라고요. 살아남은 현장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이도역의 죽음’을 만날 수 있었어요. 우리가 있었기에 그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 되었죠.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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