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싸우는 인간의 탄생 _ 박경석②

《 싸우는 인간의 탄생 》

①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② 마음만은 클래시컬

왼쪽 맨 윗줄부터 시계방향으로 박경석 대표의 아버지, 이모부, 외할머니, 어머니. 사진 제공 박경석 

아버지는 교회 장로, 어머니는 권사인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에요. 특히 아버지는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부터 3대째 기독교인 집안이었어요. 아버지는 북한에서 내려온 분이었어요. 젊었을 때 장사를 했대요. 만주 지방을 오가면서 보부상 같은 걸 하셨는데 아오지 탄광 쪽에서 나무를 하다가 떨어져서 발꿈치 쪽에 푹 패인 상처가 있었어요. 분단될 때 월남해서 서울로 왔어요. 북한은 종교를 탄압했으니까 교회 장로인 아버지를 가만 놔두지 않았겠죠. 6·25 때 대구까지 밀려 내려갔다가 거기서 정착하셨어요.

1960년에 대구에서 쌍둥이로 태어났어요. 총 7남매 중 다섯째예요. 우리 집안은 소위 말하는 티케이(TK), 정치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에요. 아버지는 전형적인 장사꾼. 장사꾼이라 하면 좀 비하되는 것 같으니까 상업가라고 할게요. 실 장사를 하셨어요. 대구의 주된 산업이 섬유였는데, 아버지는 염색공장을 운영하시면서 거기서 만든 실을 파는 점포를 서문시장에 세 개 갖고 있었어요. 공장 직원이 한 20명~30명 있었고 점포에도 점원들이 있었어요. 나중에 커서 사회과학도 좀 배우고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을 쁘띠 부르주아라고 하더라고요.

아버지는 용돈을 잘 주지 않았어요. 뭘 주는가 하면 물건으로 줘요. 실을 주면서 팔아서 쓰라고 했어요. 실을 어디서 파냐. 교복 집 쫓아다니면서 팔아요. 염료 다 쓰고 남은 빈 깡통도 자전거에 실어서 팔면 돈이 됐어요. 중학교 때는 껌 장사를 했어요. 껌은 누가 제일 잘 사주느냐면 여고생 누나들. 극장 앞에 가서 영화 보고 나온 여고생들한테 누나, 누나, 하면서 5미터 10미터만 쫓아가면 반드시 사줘요. 귀찮으니까. 그런 방식으로 용돈을 벌어서 썼어요.

1979년에 대학 들어가자마자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서 쫄딱 망해버렸어요. 군대 갈 때는 아버지가 도망을 다니던 상태여서 여관에서 만나 인사하고 입대했어요. 군대 일찍 간 이유 중에 하나가 등록금을 아끼려고. 빚쟁이들이 집에 쳐들어와서 점거하고 아버지 어디 있냐고 소리를 지르고 돈 되는 물건은 다 가져갔어요. 어머니가 집에 남아서 그 욕을 다 들으셨고 나는 그거 보기 싫어서 집에 안 들어갔어요. 엄마는 전형적인 현모양처, 신앙심이 아주 깊으신 분이었죠. 집안에 분란들이 많았어요. 서문시장에 불이 몇 차례 나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그 화를 아내와 자식들한테 푸셨죠. 엄마는 그 모든 걸 신앙의 힘으로 견디셨어요. 기도하면서 수용하셨죠. 성경에서 지아비 말을 잘 들어야 된다고 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꿈이 마도로스였어요. 내 책상에 쪼끄만 인형이 하나 있었어요. 애꾸눈 후크 선장이었어요. 선장도 스마트한 선장 말고 주로 해적 류의 선장을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때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는데 필기시험에 덜컥 합격해버렸어요. 어쩌면 해군 장교가 될 뻔했죠. 면접 보러 진해에 갔다가 진해 벚꽃 구경하면서 왕창 술 마시고 놀다가 면접시험에 못 가버렸어요. 그래서 영남대학교에 79학번으로 들어갔어요.

박경석 대표 일러스트. 백발의 머리와 수염 뒤로 수많은 담들이 그려져 있다. “담치기가 가장 중요한 생존기술”이라고 했던 박경석 대표는 어린 시절 수많은 담을 넘고, 장애인운동을 한 후에도 많은 사회적 장벽들을 넘어왔다. 그림 훗한나

- 장발을 사수하라

79년이면 한국에서 10.26, 12.12 같은 큰 사건이 있었던 해죠. 중고등학교 때부터 학교 수업에 교련 과목이 있었어요. 군사 훈련을 하는 거죠. 대학에선 일주일 동안 문무대라는 군사학교에 들어가 병영훈련을 받아야 했어요. 이걸 ‘문무대 끌려간다’고 했어요. 운동권 대학생들은 문무대 거부 투쟁을 했어요.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이었죠. 나도 문무대를 거부했는데 이유는 좀 달라요. 문무대에 가는 게 가을 정도였는데 그때 내 머리가 장발이었어요. 고3 겨울방학부터 길렀으니까 꽤 길었죠. 그런데 문무대 들어갈 땐 머리를 빡빡 밀고 가야 됐어요. 얼마나 아까워요? 하루라도 더 버텨보려고 안 깎고 갔어요.

대학 친구들도 다 깎기 싫다고 하더니 가보니까 치사하게 다 빡빡 깎고 온 거예요. 나 혼자만 머리가 길었어요. 교관이 나오래요. 왜 안 깎았어? 변명할 게 별로 없는데 그래도 좀 그럴듯한 변명을 해야 될 것 같아서 우리 동네 이발소가 놀던데요, 그랬어요. 그러니까 교관이 내 정강이를 군홧발로 들입다 차버리잖아요. 나를 막 패요. 정식으로 군대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맞고 있으려니까 얼마나 억울해요. 에이씨, 때려 쳐! 하면서 날라버렸죠. 그게 병역 거부가 된 거예요. 당시 병역을 거부하면 곧바로 징집이 돼서 잡혀갔어요. 에잇, 잡혀가느니 지원해서 가겠다고 해서 해병대를 지원해서 합격했어요. 80년에 입대할 때까지 몇 개월 동안 머리를 더 기를 수 있었어요. 얼마나 위대한 저항 정신이에요? (웃음)

나는 좀 저항 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주로 학교 안 가기. 중학교 시절엔 그냥저냥 다녔는데 고등학교 들어가선 뭔가에 한 번 빠지면 학교를 거의 만날 지각하고 안 나가고 그랬던 것 같아요. 수업하다가 도망쳐 나와서 딴 학교 다니는 친구들 찾아가서 놀자고 불러내고 담배 피우고. 어떤 해엔 학교 가는 날이 300일이라면 거의 200일을 지각했어요. 클래식 기타가 되게 좋아졌어요.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고등학교 3년 내내 학교 밖에서 대구 클래식 기타 합주단 활동을 했어요. 또 문학 소년이어서 도스토예프스키 책들, 죄와 벌 이런 거 다 읽었어요. 이런 게 다 지각으로 연결돼요. 책 읽고 클래식 기타를 치면 영혼의 안식이 와요. 그러면 늦게 자요. 아침이면 일어나기 싫거든요. 그렇게 지각하는 거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나 진짜 많이 맞았어요.

1976년 12월, 17살 무렵 클래식 기타를 치던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박경석 
1976년 12월, 17살 무렵 클래식 기타를 치던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박경석 

어느 날 학교에 지각했는데 네다섯 명이 같이 걸렸어요. 선생님이 맨 앞의 놈한테 너 왜 늦었어? 물었어요. 차가 막혀서 늦었습니다. 그다음 놈한테 너 왜 늦었어? 하니까 엄마가 아파서 약국 갔다 오느라 늦었습니다, 했어요. 나도 둘러댈 핑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생이 나한테는 이렇게 묻는 거예요. “넌 차가 막혔니? 엄마가 아파서 약국에 갔다 왔니?” 내가 만날 지각하니까 완전히 찍혔던 거죠. 거기서 뭐라 그래요. 겨울이었는데, 방바닥이 땃땃해서 엉덩이를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어요. 한마디로 개긴 거죠.

담임이 완전히 꼭지가 돌아서 1교시 내내 나를 두들겨 팼어요. 다른 학생들은 나 맞는 걸 지켜보고 있었고요. 끝나고 버스를 타는데 버스 계단을 걸어 올라가지 못해서 차장을 붙잡고 올라갔어요. 허벅지 살이 터져서 피떡이 되었어요. 교복이 살에 엉겨 붙은 걸 보고 어머니가 막 통곡을 했어요. 담임선생이 어머니를 불러서 아들이 사생아냐고, 주워 와서 키웠습니까, 하고 물었대요. 어머니가 그 말에 또 상처받아서 나를 붙잡고 통곡을 하셨어요. 내가 너희 쌍둥이 낳을 때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시면서.

1965년 5월 12일. 6살 무렵 부모님, 쌍둥이 형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이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박경석 
1965년 5월 12일. 6살 무렵 부모님, 쌍둥이 형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이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박경석 

고등학교 1학년 때 잘 보이고 싶은 짝꿍이 있었어요. 그 노래 알아요? (노래 부름)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그 친구 집 앞에서 만날 그 노래를 부르고 앉아 있었어요. 그런 사랑을 해 봤나 모르겠네요. 버스 한 정거장 거리에 살았는데 그 친구는 등교를 빨리했어요. 우연히 버스에서 마주친 것처럼 하려고 일찍 갔어요. 걔는 대구여고에 내리고 두 코스 더 가면 우리 학교였어요. 그 길로 학교에 갔으면 일찍 등교했을 텐데 왜인지 버스에서 내리기가 싫더라고요. 그냥 계속 타고 대구 시내를 몇 번 더 돌다가 2시간 정도 지나서 학교에 갔어요. 어차피 늦었으니까 쉬는 시간에 맞춰서 들어가려고 담 넘어서 학교에 들어갔어요. 내가 그랬어요. 많이 개기고 많이 맞았어요.

- 벙크유와 맹장

해병대 신병 훈련 때 교관한테 개기다가 두드려 맞아서 턱뼈가 부러졌어요. 병원에 입원했다가 두 기수 아래 애들하고 같이 김포 2사단으로 배치되어서 지냈어요. 지내다 보니 그냥 보병생활이 지루했어요. 이왕 해병대 왔는데 좀 더 빡센 경험을 하고 싶은 욕망에 수색대를 지원했어요. 수색대에 가면 일반병보다 훈련비를 좀 더 받을 수 있어서 그 돈으로 휴가 나가서 잘 놀고 싶기도 했고요. 수색대에서 훈련받다가 또 고참한테 보트 페달로 맞아서 턱뼈가 부서졌어요. 아우, 내가 군대에서 턱뼈 두 번 부서졌어요.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때가 제대를 2~3개월 남겨놨을 때였어요. 한 번 다른 지역도 순례를 해보자 해서 포항을 지원했어요. 나는 군대생활을 김포에서 두 군데, 포항까지 세 군데나 돌아다녔어요. 군대생활을 이렇게 화려하게 한 사람 없어요.

포항에 갔을 때 바닷가에서 술 먹다가 영창에 갔어요. 나는 영창도 두 번 들어갔어요. 해병대는 1년 군대 생활하면 일병이 돼요. 그런데 하사관은 6개월 훈련받고 오는데 계급이 더 높아요. 6개월짜리 하사관이 상병이나 병장한테 말을 까고 두들겨 패고 그러면 상병 애들이 눈이 돌아가거든요. 내가 일병일 때 하사관을 밤에 몰래 불러서 팼어요. 내가 패고 싶어서 팬 게 아니라 병장이 나보고 패라고 시킨 건데 그걸 대대장이 본 거예요. 상관 폭행으로 영창 10일을 갔다 왔어요. 얼마나 억울했던지.

신병훈련소 시절에 연애편지를 몰래 보내다가 걸려서 된통 당한 적이 있어요. 그땐 병사들이 편지를 쓰는 시간이 따로 있었고 교관들의 검열을 받은 후에 일괄적으로 부쳤어요. 저는 그게 싫어서 몰래 써서 보냈어요. 일주일마다 선배들이 수료를 했는데, 수료하고 나가는 선배한테 편지를 전달해 주면, 그 사람이 자기 면회 오는 사람한테 나가서 부쳐달라고 전해줬어요. 어느 날 여자 친구한테 장문의 편지를 썼어요. 봉투를 봉해야 하는데 풀이 없으니까 식당에서 밥풀로 붙이고 있는데 아이씨, 훈련받는 날 점심시간에 그게 딱 걸려버린 거예요. 교관이 밥 먹고 훈련 나가야 되는 내 후배들 앞에서 그걸 크게 읽으라고 했어요. 나랑 훈련했던 애들은 지금도 만나면 그 일을 기억하더라고요. 내 편지가 너무너무 좋았대요. (웃음)

내가 교관들을 자근자근 씹어놨거든요. 이 새끼, 저 새끼, 배워 처먹지도 못한 놈들, 하면서 하여튼 내 모든 상상력을 발휘해서 교관들을 거의 악인으로 만들었어요. 자식을 낳는다면 해병대 있는 방향으로 오줌도 못 누게 할 거라면서. 그게 들켰으니 아주 혼이 났겠죠. 어떻게 혼났냐면, 훈련장까지 기어서 갔어요. 1~2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뒤로 굴러, 앞으로 굴러’도 했다가 조교들 두세 명이 내 등에 올라탄 채로 기기도했어요. 동기들은 내가 기어가는 걸 뒤에서 지켜보면서 천천히 걸어갔어요. 내 덕분에 훈련도 안 받았고 푹 쉬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렇게 기어서 바닷가 앞에 도착했어요. 교관이 나를 꿇어 앉혀놓고 저 앞에 무인도가 있으니까 탈영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며칠 전에도 너희 선배가 탈영하다가 빠져 죽었다고 말했어요. 진짜 막 사지로 몰리는 기분이었어요. 수영해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빠져 죽었다니까 또 못 가겠고. 악몽 같은 시간들을 보냈죠. 그런 걸 군대에선 고문관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바로 고문관이었어요.

1976년 1월, 17살에 쌍둥이 형과 함께. 오른쪽이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박경석
1976년 1월, 17살에 쌍둥이 형과 함께. 오른쪽이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박경석

졸병일 때 밤에 경계 근무를 서러 나갔던 날이었어요. 내가 졸았어요. 갑자기 머리통에 딱 불이 나면서 별이 보이더라고요. 순번 도는 장교한테 걸린 거예요. 내 위에 병장도 같이 있었는데 장교가 그 병장을 죽자고 때렸어요. 그런 다음 부대로 돌아왔어요. 맞고 돌아온 병장이 화가 나서 자고 있던 부대원들을 다 소집했어요. 부대원들을 엎드려뻗쳐 시킨 다음에 두들겨 패기 시작하는 거예요. 한 바퀴 돌아서 끝나면 이제 한 기수 밑엣놈이 일어나서 자기 아래 기수들을 패기 시작해요. 그걸 기수 빠따라고 해요. 자다가 갑자기 맞으니까 열 받잖아요. 화가 나서 막 패요, 또 패, 또 패, 또 패. 졸병이어서 나는 안 맞고 내 위까지만 맞아요. 그러면 맞는 게 좋을까요, 안 맞는 게 좋을까요? 맞는 게 더 나아요. 잘못은 내가 했는데 선배들이 새벽에 잠도 못 자고 두들겨 맞는 걸 지켜봐야 하는 공포감이 어마어마해요.

다음날 눈을 떴는데 너무 무서운 거예요. 나 때문에 이 갈고 있는 놈들이 수두룩하니까요. 자살해야겠다 싶어서 벙크유(석유)를 한 바가지 둘러 마셨어요. 나는 그걸 먹으면 창자가 녹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죽지는 않고 속이 메스껍고 오바이트만 하고 죽겠더라고요. 아무것도 못 먹고 있으니까 상관이 왜 그러냐고 했어요. 배가 좀 아픕니다, 했더니 맹장 터진 거 아니냐고 했어요. 맹장 맞는 거 같습니다, 했어요. 그랬더니 대대에 연락해서 나를 병원으로 보내버리더라고요. 병원 가자마자 돌팔이 군의관들이 맹장이 맞다면서 마취하더니 배를 째버렸어요. 자기들끼리 어, 왜 기름 냄새가 나지? 숙덕거리면서. 맹장 터진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았을 텐데. 그래서 나 맹장 없어요. 그때 멀쩡한 맹장을 떼버려서. 그래도 고참들한테 맞는 건 피했으니 다행이죠.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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