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싸우는 인간의 탄생 _ 박경석③

《 싸우는 인간의 탄생 》

①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② 마음만은 클래시컬

③ 무감각이라는 고통

1979년 대학 1학년 때.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박경석. 
1979년 대학 1학년 때.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박경석. 

- 하늘을 날다

1983년 봄에 대학에 복학했어요. 2학년이면 학과를 선택하게 되는데 입대 전 성적이 거의 0점이어서 가장 경쟁률이 낮은 문화인류학과에 들어갔어요. 그 과의 특성은 엠티, 그러니까 문화유적 답사를 많이 간다는 거예요. 만날 놀러 가서 여자애들하고 노니까 재밌더라고요. 나는 해양전수대학이라는 학교에 다시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에 학과 공부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시간이 많으니까 취미로 학교 안에 있던 행글라이딩 동아리에 들었어요. 해병대에서 낙하산을 탔던 적이 있는데 아주 재밌더라고요. 행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은 욕구가 강했어요.

대학 동아리에 기구가 있어서 그걸 갖고 일주일에 한 번 동네 앞산에 가서 훈련을 받았어요. 그러다 8월 7일 일요일엔 토함산으로 향했죠. 그해에 최초로 전국 대학생 행글라이딩 대회가 열렸거든요. 그날 선배와 둘이서 토함산 정상까지 행글라이더를 지고 올라갔어요. 차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고 거기서부턴 끌고 올라가는 거예요. 8월이니까 얼마나 더웠겠어요? 고생고생해서 올라갔는데 그 선배가 이륙도 제대로 못하고 확 거꾸러져서 나무에 처박히고 말았어요. 다행히 행글라이더는 크게 부서지지 않아서 대충 고쳐서 타면 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선배는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더 이상 타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행글라이딩을 해서 내려가지 않으면 뙤약볕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그 무거운 걸 지고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었죠. 너무 끔찍했어요. 대충 수리를 했으니 괜찮을 것 같아서 선배 대신 내가 그걸 타고 내려가기로 했어요.

1983년 8월 7일, 토함산 정산에서. 이날 행글라이딩 사고 후 척수장애를 입었다.
1983년 8월 7일, 토함산 정산에서. 이날 행글라이딩 사고 후 척수장애를 입었다.

토함산 정상에서 멋지게 이륙했어요. 행글라이더는 힘차게 날아올랐고 이륙은 아주 성공적이었죠. 발아래 펼쳐진 장관을 즐기면서 환호성을 질렀어요.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죠. 엄청난 소리와 함께 굉장한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정신을 잃었죠. 1983년 8월 7일 일요일이었어요. 아침에 엄마가 내 손을 잡으면서 교회에 가자고 하는 걸 살짝 뿌리치고 온 거였어요. 그날 중국 전투기 조종사가 미그 21기를 몰고 우리나라 휴전선을 넘었어요. 민방위 본부가 공습경보를 발령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실제 상황! 실제 상황!”을 외쳤던 날, 저는 장애인이 되었죠.

깨어났을 때는 경주의 어느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후 대구 영남대병원으로 이송되어 가던 차 안이었어요. 그때 내 하반신이 내 의지를 전혀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1983년이면 엄혹한 시절이었는데 내 주변엔 운동하는 사람들은 없고 낭만주의자들, 스포츠 좋아하는 사람들만 있었어요. 기타 치고 행글라이딩 하고 연애하고. 내 신조가 서른 살까지 살고 죽는다, 짧고 굵게 즐기다 죽는다, 였어요. 담치기가 가장 중요한 생존 기술이었어요. 아침에 지각하면 정문이 닫히니까 담 넘어 들어가고 수업 듣기 싫어지면 다시 담 넘어 도망치고 통금이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어디선가 놀다가도 12시 땡 치면 친구 집 담 넘어 들어갔어요. 특별한 욕심도 없었고 그저 친구들하고 놀기 좋아했던 평범한 사람이었죠. 평범했나? 잘 모르겠네요.

2020년 8월, 27번째 노들야학 개교기념식 행사에서 감사 인사를 전하는 박경석 대표. 머리에 화관을 쓰고 있다. 사진 정택용
2020년 8월, 27번째 노들야학 개교기념식 행사에서 감사 인사를 전하는 박경석 대표. 머리에 화관을 쓰고 있다. 사진 정택용

- 시간이라는 지옥

딱 6개월 입원하고 돈 때문에 퇴원을 해야 했어요. 그땐 보험이 6개월만 됐거든요. 그리고 5년 동안 집에만 있었어요.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물어요. 이렇게 운동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왔냐고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5년 때문인 것 같아요. 굉장히 힘들 때도 그 시간을 생각하면 위로가 되더라고요. 그때만큼 밑바닥을 헤맨 적이 없으니까. 살다 보면 슬프고 힘들 때 있지요. 하지만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느낀다는 건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고통스러운 것도 힘든 것도 없었어요. 삶이 무감각해요. 시체의 경험을 했던 것 같아요. 몸도 마음도 아프지를 않으니까 고통이라도 느끼고 싶어서 혼자 있을 땐 칼로 허벅지를 막 긁었어요. 지금은 흔적이 거의 없어졌는데 담배로 팔뚝을 지져서 항상 퉁퉁 부어있었어요. 고통을 느끼기 위한 몸부림이었죠.

갇혀 있다는 느낌… 우리 집에 갇힌 동물 같은 느낌이었어요. 정말로 집에만 방에만 있었거든요. 말동무도 없이 어머니하고 24시간 같이 있었어요. 시간이 진짜로 안 갔어요. 자도 자도 끝이 없었어요. 새벽까지 멍하니 TV 보다가 애국가 나오고 지지직하면 또 잠을 자기 위한 투쟁을 했어요. 책도 잘 안 읽혀요. 무슨 희망이라도 있어야 책도 읽을 수 있는 거예요. 감옥이라면 나올 희망이 있으니 열심히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할 텐데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요. 그렇게 시간과의 싸움을 하는 동안 밖에서는 84, 85, 86년이 흘러 87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대적 저항이 터져 나오는 걸 뉴스에서 봤어요. 어느 날은 동네에서 경적 운동을 했던 것 같아요. 자동차들이 빵빵 경적을 울리는 소리가 났는데 난 그저 무감각하게 들었죠.

지금의 박경석이 그때의 박경석을 생각하면 진짜 아팠겠구나, 슬펐겠구나, 애처롭고 가엽게 느껴지지만 그때의 나는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았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여자 친구에게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떠나보냈는데도 아프지가 않아요. 모든 것이 포기되었을 때는 사람이 무감각해지더라고요. 내 앞에서 누가 죽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 거예요. 가장 큰 절망의 상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 같아요. 그러니까 삶이 참 공허하고 허무하다는 느낌… 유서 쓰는 연습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친구야, 우리 고등학교 때 좋았지, 나를 잊지 말아줘, 이런 거. 그런데 몇 자 쓰다 보면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요. 그런 시간의 반복이었죠.

죽는 방식을 골똘하게 생각했어요. 집에서 죽으면 어머니가 너무 슬퍼할 테니까 나가야 하는데 혼자서는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 당시엔 혼자서 휠체어에 올라타는 것도 엄두를 못 냈어요. 어머니가 도와줘서 간신히 탔죠.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구체적인 실천에 들어갔어요. 교회를 가기 시작한 거예요. 나가는 방식을 알아야 되니까. 쌍둥이 형이 아주 바빴는데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와서 나를 휠체어에 올려주고 계단을 내려줘서 교회에 데려갔어요. 나중에 이동권 투쟁할 때 “장애인의 70퍼센트가 한 달에 다섯 번도 외출을 못 합니다” 하고 수도 없이 외쳤는데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때의 내가 딱 그랬더라고요.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네 번 혹은 다섯 번의 외출. 바로 교회에 가는 횟수죠.

2001년 8월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버스를 점거한 장애인 활동가들. 버스 위에는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고 적힌 현수막이 펼쳐져 있고, 버스 창문에도 “장애인도 버스 타고 싶다”는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다. 사진 장애인이동권연대 
2001년 8월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버스를 점거한 장애인 활동가들. 버스 위에는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고 적힌 현수막이 펼쳐져 있고, 버스 창문에도 “장애인도 버스 타고 싶다”는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다. 사진 장애인이동권연대 

당시엔 장애인 콜택시도 없었고 저상버스도 없었고 지하철을 탈 엄두도 못 냈죠. 그나마 탈 수 있는 건 택시뿐이었어요. 형이 택시를 불러서 휠체어를 싣고 나를 안아서 택시에 태웠어요. 서울 고덕동에서 살았는데 교회는 혜화동에 있었어요. 택시로 한 시간 정도 걸렸어요. 어느 비가 오는 날에 택시를 탔더니만 기사가 왜 장애인이 돌아다니냐는 둥 하필 왜 자기 차에 탔냐는 둥 재수가 없다는 둥 궁시렁거렸어요. 그때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말 한마디가 너무 힘들었을 때라 형의 옷소매를 잡고 “형… 내리자…” 했어요. 중간에 내려서 둘이 비 맞으면서 30~40분 동안 휠체어를 밀어서 교회에 갔던 게 기억이 나요. 비참했죠. 그래도 그걸 하려고 마음을 먹은 건 순전히 자살을 하려고 그런 거예요. 나가야 하니까. 택시 타는 법을 알고 익히려고. 혼자서 할 수 있어야 하니까. 핸드폰도 없으니 집에서 전화를 걸어서 택시를 불러야 하는데 진짜 그런 것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아니면 휠체어를 타고 나가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야 하는데 그걸 할 용기조차 없었어요. 그렇게 나가는 여정을 연습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갔어요.

어느 날 매형이 성경을 백번 읽으면 돈을 준다고 했어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요. 죽으려면 돈이 필요했어요. 집에만 누워있는 나에게 아무도 돈을 주지 않으니까 택시비조차 없었어요. 돈을 모아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어요. 신약과 구약을 진짜로 백번 읽었어요. 사람들은 내가 성경을 백번 읽었다고 하면 거짓말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꼬박꼬박 성실하게 진심으로 읽었어요. 죽음을 앞둔 사람이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처음에는 오래 걸렸는데 열 번 스무 번 하니까 나중엔 빨리 읽게 됐어요. 그걸 읽으면 돈이 생겼으니까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이 생긴 거예요. 목표가 생긴 거죠. 물론 그 목표가 죽음을 향한 것이었지만. 목표가 생기니 무감각했던 삶이 조금씩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더라고요.

- 살아야겠다

그러다 2박 3일 일정의 교회 수련회를 따라갔어요. 그것도 밖에 나가서 자는 연습을 하기 위해서 간 거였는데 거기서 갑자기 핑 도는 영감이 왔어요. 교회에선 그런 걸 회개라고 하죠. 프로그램 중에 인생 고백이라는 게 있었어요. 너의 삶에 대해 써보라고 했어요. 어차피 죽을 거니까 유언장 쓰는 연습이라고 생각하면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내 인생이 참 보잘것없더라고요. 남길 만한 게 없었어요. 담배 피워서 좋았다, 술 마셔서 좋았다, 이런 것들을 남길 수는 없잖아. 뭔가 머리를 띵 울렸어요. 그때부터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는 글을 썼어요.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 말씀 안 듣고 학교 도망친 거 잘못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여고 앞에 가서 오줌 누고 달아난 거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말씀 안 들은 거 회개합니다, 그런 걸 썼어요. 죄 사함을 받아야 되니까 성경에서 잘못이라고 하는 것들을 쭉 썼어요. 예전엔 죄인지도 몰랐던 것들이 그날 다 후회되더라고요. 그걸 또 발표하래요. 한참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내 슬픔과 고통에 대해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함께 있었던 교인들이 내게 많은 위로를 해주었어요. 그날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어요. 그리고 앞으로 죄 사함을 받으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국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목자가 되어서 사람들을 양으로 삼고 하나님 말씀을 먹이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어요.

며칠 뒤에 우리 집에 소포가 왔는데 열어보니 영어책이 한 가득이었어요. 서울대학교 영문대학원에 다니던 여성분이 그날 내 인생고백을 듣고 보내주신 거였어요. 그 안에 편지가 있었어요. 나에게 일주일에 한 번 영어를 가르쳐줘도 되겠냐고 물었어요. 나야 완전 감사한 일이었죠. 그때부터 그분이 1년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한 번도 빠짐 없이 집으로 와서 영어를 가르쳐 주었어요. 나의 영어 선생님은 가끔 나를 레스토랑에 데려가 멋진 저녁과 와인을 사주기도 했어요. 만날 사람이 있으니까 점점 재밌어지더라고요. 다시 살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분은 나중에 우리 형수가 되었어요. 그런 만남들이 5년을 견디는 하나의 축이었죠.

2020년 9월 29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집 앞에서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 후, 활동가들이 박경석 대표의 환갑을 축하하며 깜짝 파티를 열었다.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활동가들과 함께. 사진 강혜민 
2020년 9월 29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집 앞에서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 후, 활동가들이 박경석 대표의 환갑을 축하하며 깜짝 파티를 열었다.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활동가들과 함께. 사진 강혜민 

그러다 87년에 방광염이 생겨서 병원에 입원했어요. 옆 침대에 환자가 있었는데 그의 언어 치료를 해주는 특수교사가 있었어요. 나하고 인사하고 한두 마디 나누다가 이야기가 길어졌어요. 내 이야기를 막 해줬는데 그분이 잘 들어줬어요. 내 말을 그렇게 시간 내서 귀 기울여 들어주는 여자를 다친 후에 처음 만난 거예요. 다음 날 원래 오는 날이 아닌데 그분이 또 왔어요. 퇴원할 때까지 매일 찾아와서 같이 놀았어요. 퇴원한 뒤에도 우리 집까지 자주 놀러 왔어요. 그 친구가 집으로 돌아갈 때면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고 나 혼자 돌아오고 싶은 욕구가 강했어요. 하루의 모든 신경이 거기에 다 집중되어 있었어요. 혼자 돌아오다 보면 꼬마 아이들이 한마디씩 하면서 따라 와요. 그게 짜증스러워서 또 절망했다가 다시 집 밖으로 안 나가기도 하는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죠.

그 친구가 하루는 근처에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이란 곳이 있는데 직업 교육을 한다면서 한 번 다녀보면 어떠냐고 했어요. 그런 게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집 밖으로 나간다는 게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는데 그 친구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어요. 면접 보기 전에 익숙해지라고 나를 복지관에 데려가 거기서 시간을 보내게 해줬어요. 자기 인맥을 이용해서 그곳 선생님도 인사시켜줬고요. 사고 후 5년 동안 나는 내가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런 내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어서 갇혀 사는 것을 택했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그걸 정당화했죠. 교회에 다니면서 어차피 살기로는 마음먹었지만 바깥으로 나가는 방법은 몰랐어요. 그 친구가 가장 결정적인 방법을 찾아줬어요. 다시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마침내 세상에 나가기로 했어요. 그게 1988년이었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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