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싸우는 인간의 탄생 _ 박경석⑥

《 싸우는 인간의 탄생 》

①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② 마음만은 클래시컬

③ 무감각이라는 고통

④ 싸우는 인간의 탄생

⑤ 차별에 저항하라

⑥ 진지를 구축하다

2007년도에 활동지원서비스가 제도화되었다는 건 최초로 개인에게 직접 주는 서비스가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그전까진 모두 대중교통 무료, 창경궁 무료 같은 정책들, 국가가 돈을 쓰지 않는 방식이었죠. 활동지원서비스는 혁명적인 정책이어서 청와대에서도 이게 돈이 얼마나 들지 예측을 못 할 정도였죠. 그래서 정부가 꼼수를 부려요. 장애 1급에만 주겠다, 1급도 다 주는 게 아니라 조사를 해서 합격하는 사람에게만 주겠다고 해요. 그렇게 해도 몇 년 운영해보니 돈이 많이 들거든요. 게다가 2010년부터 장애인연금제가 시행돼요. 장애 1, 2, 중복 3급까지 몇십 만 원 받아요. 그래서 또 꼼수를 부려요. 너희 장애 등급을 믿을 수가 없으니 등급을 전면 재심사하라고 했어요. 정부에서 통지서 와서 재심사받으라고 하니까 아무 의심 없이 받았다가 등급이 떨어진 사람들이 생겨요. 그럼 활동지원서비스도 못 받고 연금도 못 받게 되는 거죠.

등급 재심사하지 마라, 활동지원서비스를 2급, 3급까지 확대하라, 이렇게 계속 싸우다가 2012년에 아예 장애등급제 폐지를 가지고 광화문역에서 농성에 들어갔어요. 등급제를 폐지하라는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서비스를 지원하라는 뜻이고, 그것은 바로 예산을 확대하라는 투쟁이에요. 8월 아주 더운 여름날에 10시간 넘게 경찰들과 전쟁을 치르며 농성장을 차리게 되었어요. 그해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이 문제를 농성을 통해 부각시키자고 했어요. 농성이라는 건 어떤 긴박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즉자적으로 물리력을 쓰는 것이죠. 하지만 이 사안은 장애인복지 정책의 근간이 되는 제도를 바꾸는 투쟁이고 그만큼 큰 싸움이라 끝을 기약할 수가 없는데 그걸 농성 방식으로 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사람들을 설득했죠. 이 문제를 부각시키려면 6개월은 해야 한다, 대선을 보면서 하자고요. 당시는 문재인이 될 거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길어봤자 6개월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웬걸. 박근혜가 당선됐어요. 농성은 시작하는 것보다 접는 시기를 결정하는 게 더 어려워요. 성과도 보여줘야 되고 교섭 자리도 만들어야 하죠. 박근혜 정권과 근본적으로 투쟁하겠다고 선포할 수 있지만 과격하게 투쟁했다가는 정권 초반에 피해가 많을 것 같아 그것도 갈등이 됐죠. 가장 좋은 방식은 광화문에 진지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진지란 힘을 모으는 공간을 뜻해요. 박근혜 정권은 장애인 복지에 대해 매우 탄압적인 방식으로 우리와 아예 상대를 안 해줬으니까 남아있을 수 있는 명분이 됐고 철수할 기회도 없었어요. 그렇게 5년을 견디기 시작했죠.

2017년 8월 25일, 광화문역에서 5년간 진행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에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찾아온 날. 기자들에 둘러싸인 박경석 대표. 사진 정택용
2017년 8월 25일, 광화문역에서 5년간 진행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에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찾아온 날. 기자들에 둘러싸인 박경석 대표. 사진 정택용

전국의 활동가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그 농성장을 돌아가면서 지켰어요. 그곳을 근거로 계속 투쟁했고요. 지하이긴 하지만 청와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농성한 게 우리였어요. 그러다 촛불을 만났고 청와대 쪽으로 진격이 가능해졌죠. 문재인 정부 수립 후에 장애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위한 민관협의체를 만들었고 탈시설에 관한 협상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2019년에 드디어 장애등급제가 폐지되었죠. 장애인 복지계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난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그걸 ‘가짜 폐지’라고 불러요. 등급제의 대안으로 나온 게 장애인 종합조사표예요. 이 조사에서 가장 점수를 잘 받은 사람은 활동지원서비스를 하루 24시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국가는 16시간밖에 지원 안 해요. 그런 사람이 전국에 열 명도 안 돼요. 그렇게 열심히 싸웠는데 정말 뼈아픈 부분이죠.

하지만 이 투쟁의 성과는 활동지원서비스를 몇 시간 더 늘렸나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에요. 손가락이 2개 잘렸는지, 3개 잘렸는지, 한쪽 다리를 못 쓰는지, 양쪽 다리를 다 못 쓰는지, 이런 의학적 손상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 것이 장애등급제라면 그 이후엔 무슨 기준으로 판단할 거냐의 문제가 생기죠. 종합조사표는 많은 것을 평가해요. 누가 얼마나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을 것인가, 누가 장애인연금을 받을 것인가, 누가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누가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인가, 누구를 최저임금 대상에서 제외시킬 것인가. 이제 종합조사표 하나에 다 몰려 있어요. 이제 이 한 놈만 제대로 박살 내면 돼요.

2022년 결정적 국면이 올 거예요. 정부가 2022년에 노동과 소득에 관한 조사표를 만든다고 했거든요. 복지 쪽에선 노동능력을 광범위하게 평가해요. 노숙인 자활 분야에선 조금이라도 노동능력이 있으면 ‘일(자활)해서 먹고살아’ 하고는 소득을 보장해주지 않아요. 중증장애인의 경우는 ‘최저임금 적용 제외’ 대상이 돼요. 하루 종일 일 시키고 최저임금을 안 줘도 돼요. 소득에 있어 지금까지 장애인연금은 1, 2, 중복 3급에게만 주었는데 전체 장애인의 40%에 불과해요. 2022년에 새로운 기준을 만들겠다는 거예요. 소득과 노동의 기준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사람에 대해 갖는 태도예요.

이 기준을 만드는 건 전쟁일 것이고 전쟁으로 만들어야 돼요. 전선화 시켜야 돼요. 자본주의 생산 관계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폭로해내면서 싸워야 돼요. 나는 2022년에 우리가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를 향한 극한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의도에 농성장을 다시 만들었죠. 컨테이너를 2층으로 쌓았고 경사로도 튼튼하게 만들었어요. 노동능력 기준을 어떻게 박살 내는가가 아주 큰 전선이에요. 이 전선의 이름은 ‘이것도 노동이다’ 예요.

- 전선1. 이것도 노동이다

정부에서 생계비 지원을 받는 수급권자들은 노동을 할 수가 없어요. 소득이 생기는 순간 수급권이 탈락되기 때문이에요. 수급권이 탈락되면 의료비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게 큰 문제예요. 병원에 갈 일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아주 중요한 문제죠. 우리가 요구해서 시작된 공공일자리 사업이 있어요. 이름이 무지 긴데 정식 이름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예요. 하루 4시간(월 80시간) 노동을 하면 90만 원 정도 받는 일자리인데 이 정도로 소득을 맞춘 이유는 수급권 때문이에요. 생계비는 깎이지만 대략 40만 원 정도 추가 소득이 발생하고 의료 급여는 그대로 유지돼요. 특히 발달장애인들에게 좋은데, 이들은 활동지원서비스를 매우 부족하게 받아요. 그런데 이 사업에 참여하면 근로지원 서비스를 4시간 받을 수 있어서 하루 4시간 개인별 서비스가 늘어나는 효과가 있어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사업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중증장애인이 사회적으로 참여할 공간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장애인들이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당당한 주체로서 노동하며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거예요. 더 나아가 노동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변화시킬 주체들이죠. 장애인들은 그동안 보호작업장에서 일했어요. 하루 8시간 빵을 만들었는데 평균 30만 원밖에 안 줘요. 최저임금 적용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최저임금법 제7조 덕분이지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하루 4시간 일하고 최저임금 90만 원을 받아요. 최중증장애인들도 참여할 수 있어요. 이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냐고요? 그건 내가 고안해냈는데 자랑을 좀 할게요. (아이패드 꺼내서 프리젠테이션 시작한다.)

노동절인 지난 5월 1일, 여의도 이룸센터 앞 장애인권리보장법·탈시설지원법을 촉구하는 농성장에서 장애인 노동권 결의대회가 열렸다. 박경석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절인 지난 5월 1일, 여의도 이룸센터 앞 장애인권리보장법·탈시설지원법을 촉구하는 농성장에서 장애인 노동권 결의대회가 열렸다. 박경석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이란 게 있어요. 장애인 역시 천부적 인권을 갖고 태어났으며 차별받지 않아야 함을 명시한 인권 협약이에요.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에 이 협약을 비준한 나라예요. 그걸 지켜야 할 의무가 있죠. 하지만 한국이 낸 국가보고서를 보고 유엔이 이렇게 권고해요. ‘대한민국은 구조적이고 지속적으로 국회, 언론, 일반 대중을 상대로 장애인권리협약의 내용과 목적을 공론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인권의 담지자로서 장애인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는 인식 제고 캠페인을 벌이라.’ 내가 이걸 들고 서울시에서 농성을 했지요. 서울시가 이걸 해야 되는데 당신들 바빠서 못하니까 우리가 할게, 대신 우리한테 일자리와 월급을 줘. 그렇게 해서 2020년 서울형 권리 중심 일자리가 시작됐어요.

우리의 직무가 뭐냐면 권리 옹호 활동,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집회와 시위에요. 그리고 문화예술 활동, 바로 춤추고 노래하는 거예요.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른다.) 노래 가사에 장애인의 권리를 넣으면 돼요. 시립합창단도 출근해서 하는 일이 노래연습이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일자리의 이름이 뭐냐면 바로 ‘이것도 노동이다’예요. 이들의 생산품은 뭐냐? 권리예요. 보호작업장이나 시장에서 만드는 건 뭐냐? 제품이에요. 빵이고 비누죠. 비누 만드는 데 흥미 없는 사람이 하루 종일 비누 만들고 최저임금도 못 받아요. 하지만 우리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돼요. 좋아하는 게 노래라면 노래를 부르면 돼요. (또 노래 부른다.) 그것이 권리의 노래가 될 수 있도록 생산품을 만들어서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거예요.

우리 사회는 언제나 장애인에게 ‘재활’하라고 해요. 결국 비장애인 중심적 기준으로 능력을 키워라, 생산성을 갖춰라, 하는 거예요. 이윤, 실적, 효율이 안 나오면 모든 국민의 권리인 최저임금 대상에서 제외돼요. 우리는 그것에 저항해요. 장애인에게 맞춰 기준을 만들어야 해요. 아무리 무능력해(보여)도 그 사람이 참여가능한 일자리를 만들어야 해요. 노래 못하는 사람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해요. 이것이 노래고 이것이 권리라고 옆에 있는 지원자가 말해주면 돼요.

대단히 급진적인가요? 이건 노들야학 사람들은 몸으로 다 체득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아주 가치 있는 걸 생산해요. 바로 지역사회의 변화죠.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사회, 단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는 사회요. 그건 바로 ‘최중증장애인’을 배제시켜선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의 두 번째 전선 ‘누구도 남겨두지 마라(Leave No One Behind)’예요. SDGs(유엔 개발정상회의가 채택한 2030년까지 전 인류가 달성해야 할 공동의 목표)의 슬로건이죠.

박경석 대표 일러스트. 도로 위에서 몸에 쇠사슬을 두르고 투쟁이라고 외치듯 주먹 쥔 왼손을 들고 있다. 얼굴은 옆에 있는 동지를 향해 있다. 그림 훗한나 
박경석 대표 일러스트. 도로 위에서 몸에 쇠사슬을 두르고 투쟁이라고 외치듯 주먹 쥔 왼손을 들고 있다. 얼굴은 옆에 있는 동지를 향해 있다. 그림 훗한나 

- 전선2. 누구도 남겨두지 마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지원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하루 24시간 개인별 서비스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거죠. 이 활동지원서비스를 돈으로 환산하면 1인당 연간 대략 1억 5천만 원이에요. 이것은 그만큼의 공공일자리를 창출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죠. 비장애 청년들도 집 없어 난리인데 이 쓸모없어 보이는 최중중장애인들에게 집을 주고 일자리를 주고 하루 24시간의 활동지원서비스를 준다고? 이 진실을 알게 될 때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시설도 하나의 대안이라고 하면서 거기 장애인을 집어넣고 ‘비용 절감’은 뒤로 숨긴 채 그것도 사랑이네, 이것도 집이네, 하면서 시설법인들이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도구로 이용하겠죠.

지난 8월에 국가에서 탈시설 로드맵을 발표했어요. 시설 안의 모든 장애인을 탈시설 시키겠다는 게 아니라 일부만 탈시설 시키고, 일부 시설은 소규모로 쪼개 최중증장애인은 시설에 그대로 남겨두겠다는 거예요. 이들은 자립이 불가능하니까 시설은 필요하다는 논리예요. 정부는 이 계획을 앞으로 20년 후 2041년까지 마치겠다고 발표했어요. 탈시설에 관해 국가적 차원에서 발표한 첫 정책이에요. 2009년 탈시설 투쟁으로 처음 생긴 그 씨앗들이 이제 땅속에서 나올랑 말랑하고 있어요. 그런데 땅속에 있을 때는 아무도 공격하지 않았는데 이 씨앗들이 땅을 뚫고 나오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공격이 시작되었어요.

이동권을 보장하십시오, 교육권을 보장하십시오, 할 때 누구도 안 됩니다, 반대합니다, 라고 하진 않아요. 그런데 탈시설을 보장하십시오, 하면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이 탈시설은 죽음이라고 외치면서 반대해요. 저는 탈시설 운동은 내전 상태라고 평가해요. 탈시설의 가장 큰 쟁점 대상은 최중증 발달장애인(지적·자폐성 장애인을 통칭하는 용어)이에요. 제도가 어느 정도 만들어지면 나올 수 있는 장애인들은 다 나오려고 할 거예요. 문제는 최중증 발달장애인이죠. 이들이 배제되지 않는 탈시설이 이루어지려면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변화시켜야 해요. 그것이 바로 ‘누구도 남겨두지 마라’ 전선이에요. 그런데 이 전쟁은 내 안에도 있어요. 장애계 안에서도 내전이고 박경석 개인에게도 내전이에요.

전태일 열사 51주기인 11월 13일, 장애인 노동권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가 국회 앞에서 열렸다. 2층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컨테이너 농성장 옥상에는 “이것도 노동이다”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고, 사람들이 일제히 연막탄을 터뜨리고 있다. 장애인 최저임금 적용 제외, 자본주의적 생산성·이윤중심·효율성, 직업재활보호라고 적힌 커다란 종이에는 하나씩 불이 붙고 있다. 왼쪽에서 박경석 대표가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전태일 열사 51주기인 11월 13일, 장애인 노동권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가 국회 앞에서 열렸다. 2층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컨테이너 농성장 옥상에는 “이것도 노동이다”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고, 사람들이 일제히 연막탄을 터뜨리고 있다. 장애인 최저임금 적용 제외, 자본주의적 생산성·이윤중심·효율성, 직업재활보호라고 적힌 커다란 종이에는 하나씩 불이 붙고 있다. 왼쪽에서 박경석 대표가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이 골치 아픈 존재들이 내 옆에 있다고 생각해 봐요. 얼마나 괴로울까. 이 사람들이 지역사회에 살 때 갈등이나 사건 사고들이 안 일어날 수 있을까. 인권을 보장해야 된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 만들어야 한다, 하고 외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이 내 옆에 있을 때 나는 자신 있는가 물으면 나도 자신 없어요. 그들을 지원하는 사람들도 괴롭고 힘들 거라는 게 충분히 예상이 돼요. 갑자기 사람을 때리는 도전적 행동이나 돌발 행동에 따른 문제들이 반드시 있을 거예요. 보건복지부는 그들이 시설 안의 18%라고 했어요. 그들은 탈시설 대상으로 안 내놓겠대요.

사실 고마워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내전인 거예요. 현재의 자원으로 가능할까. 왜 지금의 부족한 자원을 그들부터 먼저 줘야 되나. 이런 것들은 세밀하게 따지면 어마어마한 가치 갈등이 생겨요. 내 마음속에서 아이고, 포기해버리지 뭐, 이 정도면 적당하지 않아?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거예요. 말로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 외칠 수 있죠. 그건 내 죽고 난 뒤의 문제예요. 20년 후엔 나 죽고 없을 텐데 내 개인적으로는 적당히 해도 되겠다, 그렇다고 욕먹지는 않겠다, 그렇게 스며들어오는 유혹이 많아요.

2021년 3월 16일에 여의도에서 농성을 시작해서 오늘로 243일째(11월 13일 기준) 돼요. 우리 내에서도 사람들이 힘들어하죠. 대선을 겨냥해서 시작한 이 투쟁은 잘못 걸리면 5년 더 해야 될 수도 있으니까요. 구호는 명확하죠. 누구도 남겨두지 마라. 그런데 이 구호가 나의 삶에, 운동에 안 다가와요. 저의 요즘 가장 큰 고민이에요. 탈시설의 이 내전적 상태에서 어떻게 선명한 목표를 찾을 수 있을까.

8월 20일,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 중인 박경석 대표의 모습. 사진 이가연 
8월 20일, 홍은전 작가와 인터뷰 중인 박경석 대표의 모습. 사진 이가연 

- 마지막 부족민

다치기 전의 삶은 장애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느끼지도 못했던 삶이었죠. 다치고 난 후에 장애인운동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경쟁력 있는 장애인으로 살았을 거예요. 근데 어쩌다 흥수 형과 태수를 만나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네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돌아보면 아주 선명하게 길이 갈라졌던 것 같아요. 흥수 형을 만난 것이 30년 후의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결정하는 것이었고 내가 했던 작은 결정과 선택들이 지나고 보니 핵심적인 결단이었어요. 스스로 원한 게 아니라 우연한 만남들이었죠.

정자결의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여서 그렇지 그냥 셋이서 술 마신 거죠. 우리 평생 동지 하자, 그런 얘기하는 자리는 얼마든지 많잖아요. 그런데 두 사람이 떠나버림으로써 그게 떠난 사람들과의 약속이 되어버렸어요. 그 약속을 지키려고 아등바등했던 것 같아요. 내가 의리파다, 내가 투사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겪게 되더라고요. 사소한 결정들부터 시작해서 전선을 꾸리는 것까지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런 우연한 만남과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것이었어요.

태수는 죽어갈 때까지 ‘조직하라’고 했고 흥수 형은 현장으로 가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라고 했어요. 그 사람들 말이 맞고 동의한다 해서 내가 꼭 그렇게 살아야 될 이유는 없는데, 두 사람이 죽어버렸다는 것, 그게 가장 큰 것 같아요. 장애인운동 안에도 주류들이 있는데 우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변방의 장애인복지관 직업훈련소 출신이었죠. 부족민이 딱 세 명인 소수부족이었는데 그중 두 명이 죽어서 내가 마지막 부족민이 되었어요. 태수와 흥수 형은 장애해방이니 뭐니 하는 그런 운동적 관계로 만난 게 아니라 술이 먹고 싶어서 따라다니다가 맺어진 관계였죠. 사람을 못 만나던 시절에,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했을 때, 내가 가장 절실하고 사람이 그리웠을 때 그들이 내 옆에 있었죠.

2009년 3월, 노들야학의 임은영 학생 졸업식에서 신나게 손을 흔들며 기념사진을 찍은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노들야학 
2009년 3월, 노들야학의 임은영 학생 졸업식에서 신나게 손을 흔들며 기념사진을 찍은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노들야학 

흥수형은 나한테 항상 말했어요. 너는 비장애인이었고 대학도 나왔고 아버지도 부자였으니 떠날 거라고, 지금은 우리랑 같이 있지만 더 좋은 조건이 생기면 우리를 배신할 거라고요. 우씨. 대학도 갔으니 운동을 더 잘해보자,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을 꼭 자존심 상하게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했죠. 흥수 형은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술 한 잔 얻어먹은 운명 때문에 그들과 함께하긴 했지만 그 세월 속에서 수없이 피하고 싶었고 기회만 되면 누구보다 빨리 도망치려 했던 저의 마음을요. 아마도 도망쳤어야 할 시간에 머뭇거리다 지금까지 끌려왔고 남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시간과 그 공간이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흥수형과 태수를 만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한 걸 운동의 시작으로 친다면 88년도부터 지금까지 33년이 지났어요. 2년이 더 지나면 조선이 일제 식민치하에서 보낸 시간이네요. 2년 후면 해방을 맞이하는 해방감을 맛보면 좋겠네요. 식민지에 다름 아닌 이런 종속적 체계, 시혜와 동정으로 치장되고 있는 이 차별의 한 시대가 흘러가고 33년간 싸워온 그 씨앗들이 2년 후엔 그 본질이 꽃처럼 피었으면 좋겠네요.

그 본질을 갖고 전선을 만들고 싶어요. 그 본질은 뭐냐.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넘어선 새로운 관계예요. 그 씨앗이, 그 토질이 어디 있느냐. 바로 장애인에게 있어요. 최중증장애인에게 있어요. 이들이 전사예요. 존재 자체가 전사이고 존재 자체가 혁명적이죠. 그 혁명의 씨앗을 발견해내고 그 씨앗을 심고 그것이 싹틀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활동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농부죠. 30년의 세월은 그런 세월이었다고 생각을 해요.

장애인권리보장법, 탈시설지원법을 요구하면서 싸우는 여의도 농성장은 앞으로 무엇이 될까, 그 씨앗은 무엇이 될까, 나는 그것이 매우 궁금해요. 그 자리에서 전선을 구축하고 전쟁을 할 거예요. 탈시설, 권리 중심의 노동, 장애등급제 진짜 폐지, 종합조사표. 이런 것들을 탄도미사일처럼 하나씩 하나씩 내년도 대선을 향해, 국회를 향해 쏘아 보낼 거예요. 이후에 진보적 장애인운동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전선을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희망의 물리적 근거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고병권 선생님의 책 《묵묵》에 있는 글을 함께 활동하는 동지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요.

세상에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다만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 뿐이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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