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와의 동행’ 표방한 오세훈 서울시장
창신동 쪽방촌 찾아 노숙인·쪽방 주민 지원방안 발표
식권 제공, 에어컨 설치 등 핵심 벗어난 대책
“‘약자와의 대화’ 통해 근본적 주거 대책 마련하라”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이 발표한 ‘노숙인·쪽방 주민을 위한 3대 지원방안(아래 지원방안)’에 대해 쪽방 주민을 비롯한 홈리스 당사자들이 분노하고 있다. 홈리스 당사자들은 근본적인 주거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속해서 요구해왔으나, 오 시장의 지원방안은 현장의 목소리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번 지원방안 발표는 “약자와 동행하겠다”고 밝힌 오 시장의 취임 이후 첫 행보다. 그러나 홈리스 당사자들은 “‘약자와의 대화’ 없는 ‘약자와의 동행’은 허구”라며 오 시장의 일방적인 정책 결정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에 홈리스행동 등으로 이뤄진 2022홈리스주거팀은 12일 오전 10시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당사자에게 모욕적인 오 시장의 전시용 행정을 규탄하고, 오 시장이 현장의 활동가들과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 쪽방에 대한 이해 없이 급조한 대책… 홍보에만 열 올려
이번 지원방안은 오 시장표 ‘약자와의 동행’의 일환이다. ‘약자와의 동행’을 서울시정의 최우선 가치로 두겠다고 밝힌 오 시장은 지난달 29일 돈의동 쪽방촌을 방문한 데 이어, 지난 1일에는 취임 이후 첫 행보로 창신동 쪽방촌을 찾았다. 오 시장은 “취임 후 첫 일정으로 창신동 쪽방촌을 찾은 것은 ‘약자 동행 특별시’를 만들겠다고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와 각오를 보여드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 시장은 창신동 쪽방촌을 배경으로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지원방안은 △쪽방촌 주변 ‘동행식당’ 지정·운영 △에어컨 설치 등 폭염 대비 쪽방 주민 생활환경 개선 △노숙인 시설 공공급식 횟수 확대 및 급식단가 인상이다.
동행식당은 쪽방 주민들이 하루에 한 끼 식권을 내고 이용할 수 있는 민간식당을 말한다. 오 시장은 쪽방촌 5곳에 동행식당을 10개소씩 지정해 8월 1일부터 운영하겠다는 방침이다.
더불어 오 시장은 쪽방 주민의 폭염 피해를 대비하기 위해 민간후원을 활용해 에어컨 150대를 설치하고 그에 따른 추가 전기요금을 가구당 5만 원 한도로 지원하며, 여름철 침구 세트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홈리스 당사자들은 하루에 한 끼 동행식당 식권을 나눠주는 것만으로는 쪽방 주민의 먹는 문제가 나아지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기준, 서울의 쪽방 건물 284개 동 중에서 공동 부엌조차 없는 곳이 190개 동으로 전체의 67%에 달한다. 즉, 주거환경의 개선 없이는 대다수 주민들이 동행식당에서의 한 끼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비좁은 쪽방에서 휴대용 버너로 음식을 조리하거나, 식비를 아끼기 위해 우유나 라면 같은 음식으로 끼니를 때워야 한다.
또한 오 시장이 쪽방촌 폭염 대책이라고 내놓은 ‘에어컨 150대 설치’는 서울의 전체 쪽방 건물의 절반 정도밖에 포괄하지 못하는 데다, 각 방이 아닌 층이나 동별로 에어컨을 들이게 돼 냉방 효과를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 건물의 노후화에 따른 구조 안전 문제와 건물주들의 저항, 내부 공급 전력의 문제 등도 존재한다.
오 시장이 방문한 창신동 쪽방촌의 주민들을 반년 넘게 만나온 민푸름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8천 원짜리 식권으로 갈 수 있는 식당 50곳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식권이 (항상 퇴거 위험에 노출돼 있는) 홈리스들의 짐을 대신 싸주지는 않는다. 에어컨 150대가 8월 말에 나가라고 하다가 8월 10일에 나가라는 건물주에 대항해서 대신 싸워주지는 않는다”면서 “겨우 열흘만의 고민으로 내놨다는 오 시장의 지원방안은 궁여지책의 임기응변일 뿐, 진정한 동행의 첫걸음이 될 수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오 시장은 거리 홈리스와 관련해, 8월 1일부터 노숙인 시설 급식을 1일 1식에서 1일 2식으로 확대하고 급식단가도 4000원으로 500원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일 오 시장은 이 같은 대책을 발표한 뒤, ‘노숙인 급식시설 따스한채움터’에서 노숙인들과 점심을 먹었다고 본인의 SNS에 올렸다.
이에 대해 이동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따스한채움터가 노숙인 급식시설이라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따스한채움터는 ‘실내급식장’이라는 법에도 없는 이상한 이름을 달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숙인복지법에 따르면, 노숙인 급식시설은 식품위생법이 정한 집단급식소 설치·운영 기준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따스한채움터는 외부 봉사단체가 만들어 온 음식을 단순 배식하는 장소에 불과해 집단급식소로 볼 수 없다.
이 활동가는 오 시장이 ‘보여주기’에만 열을 올리며 정작 시급한 합법적 급식지원은 외면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 핵심은 에어컨 몇 대가 아닌, ‘집 그 자체’
이날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오 시장의 지원방안 대신, 홈리스 당사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근본적인 주거 대책을 제시했다.
지난해 2월 5일 국토교통부는 서울역 동자동 쪽방촌에 대한 공공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국토부는 지난해 말까지였던 ‘지구 지정 고시(개발구역을 정해 공표하는 일)’를 아직도 미루며 공공개발 추진 의지를 의심받고 있다.
김영국 동자동공공주택사업추진주민모임 위원장은 “차라리 말이나 말 것이지,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는 건 사기다”면서 “동자동 주민들은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방에서 바퀴벌레, 쥐와 함께 한여름을 나고 있다. 오 시장은 동자동 쪽방촌의 공공주택사업 추진을 하루빨리 국토부에 건의해달라”고 힘줘 말했다.
서울의 또 다른 쪽방촌인 양동 재개발 구역 11, 12지구는 민간개발업자에 의해 임대주택이 건립될 예정이다. 박종만 양동쪽방주민회 부위원장은 “양동의 민간개발업자들은 한 집당 14㎡(약 4평)로 공사를 밀어붙이고 있다. 14㎡는 11년 전 정해진 1인 가구의 최소 주거면적이다”면서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적정 주거면적 보장을 촉구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우리는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오 시장의 정책 기조에 동의한다. 그러나 ‘동행’, 즉 ‘같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같이 갈 길을 정하기 위한 대화와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면서 “쪽방촌에서 발표하는 대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쪽방 주민과 토론하고 궁리해서 함께 만드는 대책이 필요하다. 우리의 빈곤은 상징이 아니라, 날마다 극심하고도 구체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다. 우리는 필요할 때 배경 삼는 병풍이 아니다”면서 오 시장과의 면담요청서를 비서실에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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